728x90
[박용규 - 한국교회사 1] 서론 : 한국교회사 이해와 연구 방법론
[한국기독교회사 1] - 박용규 (생명의말씀사)
서론 : 한국교회사 이해와 연구 방법론
- 오랫동안 한국교회사 해석으로 자리잡아 왔던 백낙준 박사의 선교사관적 접근 방법이 1970년대 이후 민경배 교수의 민족사관의 부상과 더불어 일대 도전을 받으면서 한국교회사 연구는 새로운 활력을 띠고 저변 확대되어 왔다.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 연구가 민족사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일고 있는 가운데 민경배 교수의 민족사관적 한국교회사 이해는 신선한 도전과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13-14)
- 한국적 신학을 모토로 하는 토착화 운동 역시 한국교회사 연구에 새로운 도전을 제공했다. 자연히 민경배 교수의 민족사관적 교회사 연구와 더불어 민중사관적 교회사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민중신학자들이거나 민중신학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14)
- 1980년대 후반, 이만열 교수를 비롯한 일반 국사를 전공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를 중심으로 지난 20년 동안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백낙준 박사의 선교사관, 민경배 교수의 민족사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사관과 더불어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국사학적인 실증주의적 한국교회사 연구는 하나의 한국교회사 연구 동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4)
- 1990년대 김영재 교수는 한국교회사 연구 방법론이 종교 개혁적 전통과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한계를 노정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개혁주의적 전통의 한국교회를 축으로 새로운 한국교회사 연구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교회사 연구가 간과해 오던 역사신학적 해석을 보완한 것으로 서구의 기독교 전통과 한국교회를 통시적으로 연결시켜 한국교회사를 이해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4)
- 본서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전통에 좀더 충실한 총체적인 한국교회사 해석을 시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14)
1. 한국교회사 연구 방법론 문제
1910년 이전 한국 관련 초기 문헌
- 헨드릭 하멜의 ‘하멜 표류기(1668)’, 바실 홀의 ‘조선항해기’(1818), 존 맥레오드의 ‘조선 항해기’(1818), 칼 귀츨라프의 ‘서해안 항해기’(1884)... 자의든 타의든 서구의 근대화 이후 해상 무역이나 해도 작성의 목적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자신들의 경험을 작품으로 남긴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한국이 언제부터 어떻게 서양종교와 접촉했으며, 또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여기에 반응했는가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교회사 선(先) 이해를 위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15-16)
- 윌리엄 그리피스가 1882년 조선에 대한 책 ‘조선 : 은둔의 나라’를 저술... 1879년에 출간된 존 로스의 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는 비록 조선의 역사, 예절, 관습을 주로 다룬 것이지만 조선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종교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한국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한글 성경번역과 선교의 방향 설정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하나님’이라는 명칭 사용... (16)
- 1874년 출간된 달레(1829~1878)의 Histoire de L'Eglise de Coree는 비록 호교론적으로 기술되기는 했지만 1593년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의 입국부터 1871년 병인교단까지 조선천주교의 역사를 매우 상세하기 기술하고 있다. 조선이 언제부터 천주교와 접촉을 하게 되었는지를 충실한 자료에 근거해 기술한 최초의 조선천주교 통사라는 점에서 달레의 작품은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불어라는 제약이 있지만 이 책은 1882년에 그리피스에 의해 저술된 ‘조선 : 은둔의 나라’와 더불어 조선에 대한 입문서로 가장 권위있게 받아들여졌다. (17)
-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던 그 해, 근대 복음주의 운동과 어울린 동양선교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이룩한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리피스에 의해 저술된 ‘조선 : 은둔의 나라’는 상당한 자료에 근거하여 조선의 역사, 지리, 국민, 내외관계, 그리고 종교에 이르는 방대한 주제들을 설득력 있게 다루었다. 동양의 역사에 이미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던 그였기 때문에 이 저술에는 조선이 처음 서구에 알려진 때부터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미션 마인드를 가지고 추적하고 있다. 책이 출판된 이후 한국은 “은둔의 나라”로 통칭될 만큼 이 책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 책은 한국교회사 이전의 한국교회사라고 할 수 있다. (17-18)
- 1885년 퍼시벨 로웰(Percival Lowell)이 저술한 Chosun :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은 견미사절단 일행이 귀국할 때 함께 한국에 입국한 그해 겨울을 조선에서 보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고종을 비롯한 당시 중요한 인물과 배경에 대한 훌륭한 사진자료들을 담고 있어 역사 사료로서의 가치를 한층 더해 준다. (18)
-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선교 1세대들에 의한 저술들이 출간되기 시작...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의 Korea From Its Capital : With A Chapter on Missions... 길모어는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하여 자신이 조선에서 선교하는 동안 경험했던 것들을 토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를 다루었고, 특히 개신교 선교에 대해 한 장을 할애, 초기 선교 활동에 대한 소중한 사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1898년에 출간된 제임스 게일의 Korean Sketches, 1909년에 출간된 Korea in Transition,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1897년 이사벨리 비숍의 Korea and Her Neighbours, 호머 헐버트의 The Passing of Korea와 History of Korea, 그리고 1904년 언더우드의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를 비롯한 1910년 이전까지 출판된 한국 관련 서양 서적들은 한국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태동 배경과 성장 과정에 대한 매우 소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18-19)
- 1909년 한국선교 25주년을 맞아 북장로교 선교회가 그 동안의 선교 활동을 정리 평가한 북장로교 선교 25주년보고서... 선교사들에 의해 영문으로 출간된 Korean Pepository, Korea Review, Korea Field, Korea Methodist, Korea Mission Field와 같은 정기간행물은 이 시 대 한국교회사를 재구성하는데 필수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19)
1920년 이후 한국교회사 문헌
- 한국교회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말부터이다... 하나는 외국 대학의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것을 영문 단행본으로 출간하거나 선교지에서 경험한 것을 학술적으로 정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의 각 교단이나 선교회에서 그동안의 선교 업적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것들... (19-20)
- 선교적인 관점... 1928년 곽안련의 Korean Church and Nevius Methods와 1929년에 출판된 백낙준의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은 대표적인 작품... 곽안련 선교사... 시카고 대학교 철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그것이 한국교회 발전에 미친 영향의 분석으로 통해 한국개신교사 전반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려고 했다. 이 작품은 선교적 관점에서 한국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한국장로교와 한국선교를 이해하는 중심 열쇠 중의 하나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교지에서 직접 선교사역에 관여했던 선교사 자신에 의 해서 기술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적 의의가 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결과... (20-21)
- 1930년대 전후 선교사(宣敎史)를 정리... 해리 로즈가 편찬한 ‘한국북장로교선교사(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와 양주삼의 남감리교 30주년 기념... (21-22)
- 역사방법론을 동원한 총체적인 한국교회사 연구는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가 처음... (22)
백낙준의 “선교사관”(宣敎史觀)
- 1929년 숭실대학에서 영문으로 출간한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는 그가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 문하에서 철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것을 영문 그대로 출판한 것이다. 한국기독교회사적 의미... “한국개신교의 기원과 발전사에 역사학적 연구방법을 응용하는 첫 시도”... 홍이섭이 이 작품을 가리켜 “우리 신교사 연구에 길이 남을 기념비”라고 평한 것이나 지도교수 라토렛이 “다시 얻기 어려운 수작이며, 앞으로 한국기독교에 과해 저술하려거나 연구할 사람들은 반드시 백 박사의 저서를 우선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한 것... 서구교회사 방법론인 선교사(History of Mission)적 관점을 가지고 한국개신교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는 사실... 선교사를 개신교 자체의 역사와 동일한 의미로 표현... (22-23)
- 전래된 복음이 “토착화하는 과정과 결과”를 서술하는 것이 개신교사라고 이해한 백낙준 박사는 종교적인 성취의 분석이나 문화와 역사에 비춰진 한국개신교 선교의 활발한 기능을 통해 한국기독교 역사를 조명하려고 시도했다.... 라토렛의 역사관을 자신의 한국개신교가 연구 방법론으로 수용... (24)
- 라토렛... 1) 어떤 기독교가 전파되었는가? 2) 왜 기독교가 전파될 수밖에 없었는가? 3) 왜 기독교가 핍박받았으며, 때때로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는가? 4) 기독교는 어떤 과정에 의해 전파되었는가? 5) 기독교는 주변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6) 주변의 환경이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7)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주변 환경에 영향력을 미친 결과는 무엇인가? (24-25)
- 1960년대 들어 민족주의 운동, 민족사관, 민족교회사관이 등장하면서 백낙준 박사의 선교사관은 교회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민경배 교수... 백낙준 박사의 작품이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확장 역사”이며, “사료의 대부분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교회와 인사들에게서 수집”되어 “한국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지 못했다고 비판... (26)
민경배의 “민족교회사관”과 민중신학의 “민중사관”
- 1956년에 출간된 김양선의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는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한국교회사에 대한 신학사상적 조명을 시도한 작품이다... “우리나라 말로 충실하게 쓴 최초의 교회사”라는 평가... (27)
- 1962년에 출간된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 호교론적인 관점이 강하게 등장, 개신교를 열교(裂敎)로 폄하... (27)
- 개교단의 역사 정리... 자신이 서 있는 교단의 입장에서 서술... (27-28)
- 1970년에 나온 감리교 신학자 이호운의 ‘한국기독교회초기사’는 귀츨라프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1832년부터 1905년까지를 다룬 것으로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 영문판에 상당히 의존하기는 했지만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28)
- 오윤태의 ‘한국기독교사’, 이영헌의 ‘한국기독교사’,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 민경배는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한국기독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참으로 방대한 작업을 추진했다. (28-29)
- 민경배... “민족교회사 방법론은 교회가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에큐메니칼한 사명을 전제하고, 그 성립과 전개에서 민족의 교회로서 구형된 정신과 과정을 주체로 역사를 일괄하는 것”을 의미하며, 교회와 민족의 연결 원리를 내연과 외연이라는 체계로 풀어갔다... “교회의 민족사적 사명”을 축으로 역사를 조명... 한국교회사를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해야 할 이유는 “기독교는 한국에서 일제의 식민 세력에 대한 민족적 동일성의 보존 충동에 동맹하는 형식으로 토착화”했기 때문... 민비 시해... 한국교회가 “종교적 회심”에 이른 것은 “신앙의 영적 순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민족적 시련의 위기에 개인과 민족의 동일성 보존이라는 충동과 자극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한국교회의 전통에 민족교회적 구조”가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민족적 에너지를 집결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민경배 교수는 이 과정에서 한국기독교의 구심점 역할이 “근대적 책임 시민층의 형성”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말한다. (29-31)
- 교회가 “고백적, 주체적 신앙의 결단을 거친 사람들”을 통해 민족교회로 형성되어 갔고, 교회는 “하류층, 서민층을 서구 기독교의 금욕윤리에 의해서 교육하고 훈련해서 책임 시민으로 형성해 가며, 계층의 상향적 이동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사회 하류층과 근로층에 “강력한 자립적 주체의식”을 북돋아 주어 계층의 상향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32)
- 한국교회사의 출발을 1895년으로 잡고 있다... 한국교회를 민족적 책임을 구현하는 기독교로 평가하면서도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했던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비정치적 기구화”와 “비민족화”를 의도적으로 단행한 것이라고 평한다... 자신의 독특한 내연과 외연의 도식을 통해 한국교회 대부흥회는 “내연의 신앙”에서 뿜어내는 외연력에 의하여 “심원한 윤리적 변혁”이 수반되는 결과를 태동시켰다고 주장... 내연과 외연의 상관관계... (32-34)
- 민경배 교수가 말하는 민족이 “일반적인 민족주의”와 다르고, 나치의 메시아적 선민의식이나 통일교의 배타적인 쇼비니즘적 민족사명감과도 무관하며, 저항 중심으로 파악된 한국의 민족주의와도 차별된다고 주장... (34)
- 보편적 기독교가 한 단위의 민족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관계하는 가를 고찰하려고 함... 그가 말하는 민족교회라는 개념은 기독교 보편과의 단절이 아니라 한 민족에 복음이 수용되면서 생성되는 기독교 민족주의 혹은 기독교 민족의식을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34-35)
- 민경배 교수의 민족교회사관은 교회와 민족의 공통분모를 추론하여 민족에 대한 교회의 책임의식과 사명감을 고취시켜 주고, 백낙준 박사에 이어 서구의 역사방법론을 한국교회사 방법론으로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35)
- 민족교회사관의 한계... “교회”라는 순수 신앙의 공동체와 “민족”이라는 비신앙의 공동체와의 관계... “민족” 혹은 “민족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재구성하다 보니, 자연히 역사관념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민족”을 역사 해석의 렌즈로 삼으려는 시도는 “민족정신”에서 역사발전의 본질과 원동력을 찾으려는 역사관념주의와 유사하다. 딜타이, 콜링우드, 크로체, 트럴취로 대변되는 역사관념주의는 과거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외쳤던 역사실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발흥한 사관으로 역사의 외연보다는 내면을 역사해석의 축으로 삼는다. 실증주의자들이 사건 그 자체의 기록 또는 연결을 강조한 반면, 이들은 사건에 대한 해석, 역사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통한 총체적인 재구성 작업을 생명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를 단순히 사건의 외적인 연결로 보지 않고 역사에 흐르고 있는 역사 내면의 사상과 정신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민족교회사관 속에는 “민족”이나 “민족정신”에서 역사 발전의 본질과 원동력을 찾으려는 역사관념주의 경향이 한국교회사 방법론으로 접목되어 나타나고 있다. (36-37)
-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한국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역사관념주의자들이 범했던 역사방법론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시킬 가능성... 역사관념주의에 토대를 둔 종교사학파의거장 트럴취, 상황신학과 토착화신학자들이 범했던 한계, 즉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를 극대화시키는 현상을 초래한다면 민 교수의 민족교회사관은 김영재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토착화신학의 한 부류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다. (38)
- 역사 해석과 사료 선택의 주관성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평을 받았다...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경우 사료 선택 및 해석에 있어 주관성을 벗어나기 힘들다... 1982년 송길섭 교수... “사료의 난도질”... 민경배 교수는 반(反)선교사적 감정, 특정 교단에 편중된 시각, 정통에 반(反)하는 에큐메니칼 입장을 취한 나머지 사료의 선택과 해석에 있어서 주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39)
- 교회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한국교회의 복음의 역사, 신앙의 역사, 교회의 전통, 정통적인 신앙과 신학이 충실하게 반영되지 못했다는 사실... 20세기 초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영적각성운동이라는 순수 성령의 역사로 보기보다는 선교사들이 탈정치화를 이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작품으로해석하는 것이나 1930년대 신학적 논쟁을 평가절하시킨 것이나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 과정에서도 자신이 서 있는 에큐메니칼의 입장에서 편중되게 역사를 해석하여 그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그 단적인 사례들... (40)
- 민경배 교수는 교회가 화해의 공동체요, 에큐메니칼적이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은 정통에 선행한다’고 주장... 그러나 역사적 통일은 신앙의 통일 위에 구축되었다... 초대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앙의 통일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40)
- 복음주의 전통에서 고찰할 때 “교회는 경건이나 심지어 정통(正統)에 앞서서 그 유일하고도 단일한 하나의 공동체적 연결을 기본적인 표로 가진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통일은 정통에 선행된다는 말이다... 교회가 인간적인 집합의 사회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했을 때 벌써 정통 논쟁의 정당성은 부인되고 마는 것이다”라는 민교수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40-41)
- 민중교회사관... 종래의 “정치, 제도, 목회자 중심”의 한국교회사 연구를 거부하고 한국기독교사의 주체를 민중 중심으로 재구성... 1979년 신학연구지에 실린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본 주재용 교수의 “한국기독교백년사”는 그 대표적인 예다... 민중사관에서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며, 자연히 개인적 구원과 전체적 구원이 상호 의존적이며 유기체적 상관관계에 있다고 보고, “민중의 삶 전체에 있어서 소외 현상의 극복을 선교과제로 삼는다.” (41-42)
- 1기 1876~1896년 : 기독교가 민중에 의해 수용된 시기
2기 1896~1919년 : 기독교가 반봉건ㆍ반식민지 투쟁에서 민중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한 시기
3기 1919~1932년 : 기독교가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 멀어져 가면서 계몽에 힘쓴 시기
4기 1932~1965년 : 교회가 반민주적인 민중의 교회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 - 김영재 교수... 한국교회사를 “민중의 정치적 의식과 활동을 위한 것이며 그 의식을 발전”으로 이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다시 한국교회사를 민중사관 정립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를 상대화... 교회사 해석의 기준은 교회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얼마나 민중의 편에 서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과 교회의 본질을 전도시키고 말았다. (43)
- 민중사관에 대한 비판... 교회로 하여금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촉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복음주의 기독교가 견지해온 전통적인 신학과 교회관에서 이탈함으로써 “전통을 존중하는 신학적 입장에서는 민중신학이나 민중사관에 근거한 기독교 사관을 두고는 대화”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44)
이만열,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의 “실증주의 사관”
- 1980년대 들어 지금까지 진행된 개인차원의 연구를 넘어 “자료의 발굴, 상호 정보의 교환, 역사 해석 등”에 이르기까지 공동작업을 통해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려는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 ‘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 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폐쇄성 극복, 2)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지평 확대, 3)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한국기독교사 자료의 취급, 4) 민족의 현실 문제나 장래에 책임성있는 한국기독교사 연구... (45)
- 교회사가 특정 교단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한국사와 기독교사의 접목... ‘사관에 입각한 한국기독교사의 정리보다는 사실 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했던 과거 역사실증주의와는 달리 이만열 교수를 비롯한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는 신앙과 역사실증주의를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45-48)
- 1) 기성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사학계에 1차 자료, 사실 기록의 객관성과 공정성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2) 한국기독교회사 연구의 저변확대... 3) 일반 국사학과의 연계성을 통해 한국기독교회사 연구의 지평을 한층 넓혀 주었다. (49)
-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 사료의 객관성과 사건 기술의 공정성에 대한 촉구가 과거 역사실증주의자들의 방법론의 재판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사는 사회, 문화, 경제, 정치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지만 그 근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공동체적 역사여야 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사 서술에서 사건 기술의 객관성을 강조한 나머지 복음을 전해 받은 이들의 실존적인 고민들이 그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균형 잡힌 훌륭한 교회사라고 할 수 없다. (49-50)
- 크리스토퍼 도슨... 기독교 역사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사를 종교사적으로 접근했던 19세기 종교사학파의 전철을 밟을 여지가 있다. (50)
김영재의 <한국교회사>와 그의 교회사 이해
- 합동신학대학원의 김영재 교수... 장로교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사의 조명... 1) 한국교회사 연구를 전통적인 방향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를 했다...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간과되어 온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유산을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했다... 2) “한국기독교사와 한국기독교회사”와의 상관성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3) 한국교회사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밝혔다. 교회사는 하나님의 말슴과 교회의 전통과의 긴장관계를 충실하게 규명하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수직선과 역사상의 기독교 신자들의 증거라는 수평선간의 긴장관계”를 균형 있게 고찰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51-53)
2. 한국교회사의 복음주의적 해석
- 한국교회사를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되 한국개신교 전체를 총체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근간으로 한 “복음주의적 해석”이 필요하다... 복음주의적 해석이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한국개신교 주류의 전통을 충실히 반영하면서 교회 본연의 사명 곧 복음 전파, 복음의 대 사회적 책임, 그리고 복음의 순수성을 한국교회사 연구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54)
-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의 세 가지 사명, “복음 전파”, “복음의 대사회적 책임”과 “복음의 순수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 왔다. (56)
- 이수정과 존 로스, 그리고 그에 의해 복음을 접한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서상륜, 김청송 모두가 성경 번역에 헌신했고, 결국 이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이수정의 성경 번역, 존 로스의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선교사역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고, 그 결과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성경번역으로 시작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58)
- 존 로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의주 사람들이나 이수정의 경우처럼, 복음은 단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 것이아니라, 그들 개인의 성품과 인격과 가치관까지 바꾸어 놓았다... 복음을 통한 변화... (58-59)
-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교회, 특히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특징짓는 사경회운동을 태동시켰다. 사경회운동은 처음부터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산물이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한다는 개혁주의 원리가 사경회에서도 여실히 나타남... (59-60)
- 1890년에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사경회운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일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1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은 사경회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60)
- 평양대부흥운동은 말 그대로 영적각성운동이었고, 영적각성운동은 다시 놀라운 개인 및 사회변혁을 낳았다. (60)
-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민족 주권의 소중성을 일깨워주었고, 나라 잃은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아픔과 슬픔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촉구했다. 자연히 복음은 민족의식과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시켰다. (61)
- 복음은 한국교회 부흥운동 이후 3ㆍ1운동까지의 한국교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한국교회는 3ㆍ1운동 이후 1920년대에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와 이단에 맞서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의 문화변혁에 노력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순수성을 계승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병행햐애만 했다. 장로교의 신학지남과 감리교의 신학세계... (62-63)
- 1930년대에 일어났던 소위 자유주의 도전과 보수주의 응전은 한국교회의 복음의 순수성 유지를 위한 신학적 투쟁이었다. 1930년대 한국교회를 이해하는 열쇠 역시 복음주의... (64)
-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6년 천주교, 1937년 감리교, 1938년 장로교...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던 이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타협의 길을 걸었던 이들은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신앙의 시금석이었다는 점에서 신사참배를 푸는 열쇠 역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복음의 순수성과 신사참배는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64-65)
- 조선신학교... 김재준... 박형룡...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1952년 고려파의 분열, 김재준의 성경 유오설로 인한 1953년의 기장의 분열... 그리고 W.C.C. 문제로 인한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 역시 그 저변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깊숙이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1945년부터 1960년까지의 한국기독교회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역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기간이 복음의 순수성 회복을 위한 일련의 한국교회의 투쟁과 갈등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65-66)
3. 해석적 평가 및 제언
- 1) 1970년대 들어 일기 시작한 한국교회사 연구 방법론이 한국교회사 연구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고, 자연히 한국교회사 연구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2) 하지만 한국교회사 연구가 시대적인 흐름과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3) 한국교회사 연구는 어떤 관점에서 한국교회사를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4) 한국교회사의 “복음주의적 해석”은 앞에서 제기한 시대적 한계와 교파의 장벽과 한국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한국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라는 사실... 한국교회사의 “복음주의적 해석”의 당위성... (66-69)
728x90
반응형
'[기타 자료실] > [도서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용규 - 한국교회사 1] 제I부. 제2장. 임진왜란 이후 서양문화와의 접촉 (0) | 2021.08.26 |
---|---|
[박용규 - 한국교회사 1] 제I부. 제1장. 초기 서양문화ㆍ종교와의 접촉 (0) | 2021.08.26 |
[한국기독교회사 - 민경배]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0) | 2021.08.23 |
[한국기독교회사 - 민경배] 머리말 (0) | 2021.08.23 |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이야기”(마가복음 1장 29-31절) (0) | 2021.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