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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 한국교회사 1] 제I부. 제1장. 초기 서양문화ㆍ종교와의 접촉
[한국교회사 1] - 박용규 (생명의말씀사)
제I부. 한국 개신교 전래 이전 서양종교와의 접촉
제1장. 초기 서양문화ㆍ종교와의 접촉
- 고대 한국의 서방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1) 중국의 당과 원나라를 통한 경교와의 접촉 가능성, 2) 통일신라시대 아랍세계와의 접촉 가능성, 3)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가능성... 한국이 서방 세계에 소개된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앞서며, 적어도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74)
1.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 문제
-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 바돌로매는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 초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도 그의 교회사 3권에서, 전승에 따르면 주님의 제자 도마가 지금의 이란과 인도에 해당하는 팔티아(Partia, 安息國)를 선교 지역으로 할당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13세기 교회사가 바르 헤브라엥스도 “우리 주 승천 2년 후, 사도 도마가 동방에 복음을 선포하고 또한 인도에 이 복음을 가지고 왔다”고 했으며, 중국 경교 연구가 트리골트(Trigault) 역시 성 도마로 인하여 중국에서도 천국복음이 전해져 많은 교회가 설립된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주후 46년경 도마는 인도로 가던 중 유프라테스 강 동쪽에 위치한 에뎃사(Edessa)에 들려 에뎃사 교회를 설립하였고, 여기를 거점으로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인도와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도마의 인도 및 중국전도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교회사 학계에서 역사적 사료의 뒷받침에 의한 객관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74-75)
-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중국이 서방 기독교와 최초로 접촉한 교파는 경교였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선교의 방향을 동방으로 돌렸다. 안디옥 학파를 대변하는 네스토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변하는 시릴이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라고 주창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마리아를 크스토토코스(Christotokos)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잉태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신성까지 잉태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기계적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하여 신성으로서의 예수와 인성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했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두 스리스도를 주창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아폴리나리우스는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영혼의 위치에 자리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똑같은 신성을 갖고 있지만, 인간과 같은 영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평가절하하고 말았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면에서는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은 무시되어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 양성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연합되었다고 이해하지 않고 결합되었다고 이해했다.마리아를 테오토코스(聖母)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양성의 관계를 연합이 아닌 결합으로 이해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양성간의 속성의 교류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더구나 그가 행함으로 구원을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와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기독론은 더욱더 의심을 받았다. 431년 에베소 회의는 결국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승리로 끝나고 안디옥 학파를 주도했던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네스토리우스는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안디옥 근처 수도원에 유배되었다가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에 있는 오아시스로 추방되어 451년에 세상을 떠났다. (75-76)
- 비록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기는 했지만 그를 지지했던 상당수가 안디옥교회와 동방교회 안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들은 에베소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정치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교리적인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동로마 황제는 435년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 17명을 추방하고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 17명을 추방하고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더구나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다시 이단으로 정죄를 받자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박해를 피해 동쪽으로 자신들의 선교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극동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 기반을 넓혀 나가면서 이들이 정착한 곳은 페르시아 에뎃사였다. 당시 페르시아 국왕은 네스토리우스파의 학설을 좋아했고, 페르시아에 네스토리우스 일파의 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에뎃사 학파의 바르 스마스와 에뎃사의 이바스(435-457) 감독은 네스토리우스 사상에 상당히 동정적이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수리아 지방에서 더욱 컸다. 그러나 그곳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이 단성론자들과 충돌할 때 동로마 황제 제노(474-491)가 단성론자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489년 에뎃사의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의 학교를 폐쇄했다. 그러자 이들은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 터키 동남부 등 동방으로 자신들의 활동 중심을 옮기기 시작했다. (76-77)
- 에뎃사에서 추방당한 이들은 니비시스로 옮겨 신학교를 재건하고 서방교회와는 다른 신학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오랫동안 세력을 확장하던 네스토리우스파는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 아라비아에 이해 멸망당한 후에도 칼리파의 신임을 얻어 계속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762년에 본거지를 바그다드로 옮겨 계속 발전했다. 페르시아에 선교 거점을 둔 네스토리우스 일파가 동방을 무대로 자신들의 선교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부터이다.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비단길은 동K서 문화의 가교 역할분만 아니라 페르시아에 거점을 마련한 경교가 중국에까지 선교영역을 넓힐 수 있는 너무도 좋은 루트였다. (77)
-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당나라 시대였다. 중국에 경교의 전래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1625년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이후부터 중국의 경교 전래는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635년 알로펜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당에 도착했을 때 당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통해 이들을 성대하게 영접했고, 이들은 태종의 배려로 당의 수도 장안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수 있었다. 처음 네스토리우스파가 당에 전래되었을 때는 페르시아에서 왔다 하여 파사교(波斯敎), 로마에서 유래되었다 하여 대진교(大秦敎), 그리고 광명정대한 종교라는 이름 경교(景敎)가 더해져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 불렸다. 경교에 대한 태종의 배려는 처음부터 대단했다. 재상을 보내 이들을 환영한 것이나 이들이 당의 수도 장안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나 모우 예외적일 만큼 특별한 배려였다. 뿐만 아니라 태종은 638년에 경교를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로 선포하고 장안 의방령에 그들의 사원 대진사를 건축하고 21명의 승려를 두어 포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와 같은 태종의 경교에 대한 배려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태종은 거대한 세력으로 떠오르는 회교국 아라비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와의 유대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고, 경교는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좋은 방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그 배후에 있었지만, 경교는 중국에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받은 셈이었다. (77-78)
-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高宗)의 치하에서도 경교는 특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으면서 중국에서 활발하게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갈 수 있었다. 고종은 경교를 진종(眞宗)이라 부르고 전국에 경사를 건립해 주고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라는 이름을 붙여줄 만큼 특별히 후대했다. 이와 같은 태종과 고종의 지원과 협력을 받으며, 경교는 교헤를 확장해 장안, 낙양, 영무, 주질, 사주, 성도, 광주에 경사를 건립할 수 있었다. 태종과 고종 이후 현종, 숙종, 대종, 덕종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동안 경교는 회교, 요교(조로아스터교)와 더불어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놀랍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78)
- 경교 전래사의 중요한 문헌은 1625년에 발견되었다. 781년 덕종 건중 2년에 경교 신자였던 이사(伊斯)에 의해 장안 대진사 경내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로 이 비문은 325년 니케아 신조와 사도신경, 그리고 복음서에 담겨져 있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순서에 따라 진술하고 경교의 중국 전래 과정을 소상하게 담고 있다. (78)
- “이때, 우리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한 분이신(三一分身), 경교의 교주이신 메시아(彌施詞)가 참된 위엄을 감추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으니(同人出代) 천사(神天)가 기쁜 일을 외친대로 로마제국(大秦)에서 처녀가성인을 낳으신 것인데, 밝은 별빛이 머물면서 자세하기 알려 준 대로(景宿祥告) 파사인이 그 빛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와서 드린지라.” (79)
- 이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은 서방교회와 전혀 달랐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중국에 전래된 경교가 중국에 선교하면서 동방문화와의 융합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그 단적인 예가 예배 의식의 토착화이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따르면 경교는 서방교회와 달리 동양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한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79)
- 경승들이 수염을 깎지 않고 머리 정수리만 밀어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비를 금하고 재물 축적을 금지하였으며 수도원과 같은 수도제도를 갖고 있었고 안식일과 매일 일과 기도를 실천했다. 경교의 목종이나 예배 방식은 목탁이라는 불교의 사찰에서 시행하는 방식과 서방교회가 시행하는 노동과 수도원운동을 접목시킨 형태이다. (80)
- 중국문화에 조정하려는 흔적... 명칭을 경교라고 이름 한 것... 서방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학 용어들도 동양 정서에 맞도록 일대 수정을 가함... 성령을 “현풍”(玄風), 기도를 “수공덕”(修功德), 교당을 “사”(寺), 수도사를 “승”(僧), 주교를 “대덕”(大德), 사도를 “승가”(僧伽), 죄악을 “악업”(惡業), 삼위를 “삼신”(三身) 혹은 “삼위”(三威), 천부를 “천존”(天尊) 등으로 번역하여 사용했다. 또한 마리아 숭배를 거부하면서도 중국에서는 교회당(대진사) 안에 다섯 성인 사진과 중국 황제의 편액과 글씨를 걸어두어 한편으로는 당의 조정과 우호관계를 지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국인들의 전통 종교문화와 융합하려고 시도했다... 동양 전통의 효(孝)를 강조하고 조상 제사를 용납했으며 중국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일부다처제를 묵인, 기독교와 중국의 문화, 사회, 풍습을 접목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중국에 전래된 경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는 다른 “토착적 중국 종교”로 탈바꿈을 했다. (80-81)
- 경교의 쇠퇴... 1) 황실의 비호와 보호를 받으며 선교확장을 꾀하던 경교가 845년 무종(武宗)이 회창멸법(會昌滅法)이라는 금교령을 내리면서 급격히 교세를 잃고 말았다. 독실한 도교 신자였던 무종이 도교 지도자 조귀진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도교의 교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와 같은 정책을 단행... 당시 불교 승려만 26만 명에 달할 정도로 불교의 교세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845년 무종의 금교령으로 경교, 회교, 요교 삼천 명이 환속당했다. 2) 경교가 중국문화와의 동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인 색체를 잃어 갔기 때문... 선교의 토착화는 복음 본래의 토착화가 아니라 복음 전달의 토착화여야했다. 경교는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중국 전래 종교와 문화와의 접촉점을 찾으려고 한 나머지 본래의 네스토리우스 종교적 본질을 상실하고 말았다. (81)
- 원나라(1234~1367) 때에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흥했으나 한족이 일어나 원을 멸망시키고 명(明)을 세우면서 야리가온도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 (81)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
- 경교의 한국 전래를 주창하는 이들은... 신라와 당나라간의 정치, 문화, 군사 교류, 신라와 아랍국들 사이의 무역 교류 등을 통해 경교가 한국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82)
- 몽고군에 의해 송이 멸망하고 1264년 원을 세운 후 고려는 정치ㆍ경제ㆍ문화ㆍ종교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원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든 여사는 원의 야리가온이 한국에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 1910년 전후 약 4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동양의 기독교 전래를 연구하던 고든 여사는 석굴암의 무인상 십일면관음상 등 여러 장식들이 페르시아의 경교와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의 경교 전래를 처음 주장했다. 오윤태, 김양선... 오윤태는 아미타불, 미륵불, 대일여래는 예수이고, 관세음보살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 김양선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경교의 한국 전래를 확신... 통일신라시대의 능묘제도의 “십이지상이나 능묘 앞에 배치된 페르시아의 무인상이나 모두 경교적 영향의 일환에 속하는 것이며, 경주 석굴암 전실 양 벽에 부조되어 있는 팔부신장 중 두 상이 페르시아 무인상으로 되어 있는 것과 석굴 내벽에 부조되어 있는 십일면관음상, 십나한상, 범천 및 제석천상 등의 의문과 발에 신은 샌들, 손에 든 유리잔 등은 모두 경교적 영향의 소산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김양선은 금강산 장안사 내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발견된 사실과 195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겨된 석제 경교식 십자가”를 들어 경교의 한국 전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82-84)
- 고려가 절실한 경교도였던 구비라이의 부하 요용 내안에게 예속되었던 것도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리치가 경교를 기록한 한적(韓籍)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것이나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경교를 소개한 기록이 있다는 것을 들어 경교의 기록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84)
- 백낙준 박사의 반박... (84)
- 경교 연구의 대가인 좌백호랑이나 미국 미시간대학의 칼 루푸스 교수와 원한경도 석굴암의 구조와 그 내부 보조상이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일축한다. (85)
2. 아랍문명을 통한 세계와의 첫 접촉
- 한국이 최초로 유럽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루브루크가 한국을 소개한 것보다 4세기 앞선 9세기경이었다.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프스에 따르면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820-912)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이다.” 루브루크가 고려를 서방 세계에 소개하기 4세기 전 쿠르드지바가 신라(Sila)를 유럽에 소개했다. (85-87)
- 쿠르드지바가 신라를 서방 세계에 소개했다는 사실은 중국에 관한 바론 리흐트호펜의 작품에도 나타나며, 그리피스가 리흐트호펜을 인용해 이 사실을 그의 저서, ‘조선 : 은둔의 나라’에서 언급했다... 신라에 대한 소개는 10세기의 아랍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의 세계 역사서 ‘황금초원과 보석광’에도 나타난다. (87-88)
- 아랍인들은 신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영어 명칭 코리아의 어근인 코레이(Coray)를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한 사람들로 보인다. (88-90)
3. 루브루크와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가능성
- 한국의 학계에서는 1225년경에 불란서 루이 9세기 이슬람의 동진을 막기 위해 원나라 헌종(1251~1259)에 파송한 가톨릭 신부 루브루크가 자신의 여행기에서 “섬의 정부 까우레”라고 한 마디 언급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한국의 최초의 소개로 알려져 왔다. (90-91)
- 몽고가 세계 제패의 여세를 몰아 근동 중동의 회교도 국가들을 침공해 세력을 떨치면서 “서구의 기독교는 오히려 몽고와의 제협을 바라게 되었고, 또 거기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까지 찾아 타진하게 되었다.”.. 서구의 기독교는 징기스칸을 단지 한 민족의 통치자라는 차원을 넘어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황은 한편으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다른 한편으로 차제에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일환으로 성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성지 순례의 자유를 획득해준 몽고와 징기스칸에게 사절단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1246년 카르피니 신부를 파송한 후 여러 차례 사절과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루브루크가 있었다. 그는 1253년 5월 7일,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몽고의 칸바리크에 도착했다. 불란서의 성 루이나 교황 이노센트 4세는 바투의 아들 사르탁이 기독교인이라는 소식을 득고 그와 접촉하고, “동시에 중앙아시아나 몽고 안의 기독교의 형제들을 격려”하기위해서였다... 그러나 실망... 루브루크는 한국을 “섬의 정부 까우레(Caulej, 高麗)”라고 언급했는데 이 말이 Coree로 다시 영어 Corea로, 다시 Korea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사학계와 교회사학계... 루브루크가 13세기 한국을 서양에소개하기 4세기 전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신라를 서양에 소개했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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