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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 한국교회사 1] 제I부. 제2장. 임진왜란 이후 서양문화와의 접촉
[한국교회사 1] - 박용규 (생명의말씀사)
제I부. 한국 개신교 전래 이전 서양종교와의 접촉
제2장. 임진왜란 이후 서양문화와의 접촉
- 1592년 임진왜란, 1627년과 1653년 표류로 인한 박연과 하멜의 입국, 1816년 머리 맥스웰 대령과 바실 홀 대령의 서해안 탐사... 이들 사건들은 종교사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93)
- 세스페데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위해 종군 신부로 내한하고, 일본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 상당수의 예수회 신자가 생겨나면서 지극히 세속적인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제공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연과 하멜의 입국과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 역시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문화ㆍ정교와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멜 표류기... 맥스웰과 홀이 출간한 조선 항해기... 은둔의 나라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3-94)
1. 임진왜란을 통한 접촉
- 유럽은 16세기에 이르러 신대륙이 개척 야심과 더불어 해상을 통한 무역업은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재편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95)
예수회 신부 사비에르와 일본 선교
-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와 더불어 1534년 예수회를 창설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던 사비에르(1506~1552)는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 고아(Goa)에 진출했다... 8년 만에 10만 명에게 세례를 베푸는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맺었다...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비에르... 1548년 1월 20일자 편지.. 1549년 8월 15일 토레스 신부, 페르난데스 수사, 안지로와 함께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해 일본 선교의 장을 ㅇ려었다. 1552년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2년 3개월만에 1천 5백명의 개종자를 얻음... 1570년에 약 3만명, 1587년에 20만면에 이르렀다. 최석우는 이 시대를 가리켜 “이른바 일본 길리시단(吉利支丹)의 전성기”라고 불렀다... 사비에르가 떠난 후 가고, 실바, 비렐라, 프로에스, 디아스 사제가 일본에 파송되어 일본 선교를 지원하면서 선교사를 통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일본의 상류층의 사람들이 개종하는 사례가 늘어남...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세상을 떠난 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 집권 초에 일본 예수회 신학교를 방문해 세스페데스와 대화하는 자리에서 “한 아내 이상을 가질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당신의 법의 모든 것에 만족한다”고 표명할 만큼 예수회에 대대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회 세력의 급속한 신장은 정치적 안정이 구축되지 않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인 위협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 집권 7년 만에 예수회에 대한 금교령을 발표... (95-97)
임진왜란과 세스페데스의 내한
-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름을 전하려는 욕심”이 생겨났고, “신으로 제사를 받기에 족한 공로를 세우려는” 야욕으로 불타올랐다. 임진왜란 일으킴... 상황의 반전... 1) 애국심에 불타는 조선인들이 게릴라전으로 맞섬.. 2) 명나라의 참전... 3)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 임진왜란 때 일본 군대와 더불어 예수회 신부가 조선에 입국... 일본에 잡혀간 전쟁 포로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고 순교자까지 배출됨... (97-98)
- 고니시 유끼나가...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사제 요청...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을 조선에 파송... 1594년 초 조선의 웅천성에 도착... 세스페데스의 편지에서는 1593년 12월 27일에 대마도를 떠나 조선에 도착했다고 함... 대마도에 도착한 것은 12월 9일... 일본군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적으로 위로함... 고니시의 라이벌 카토 기요마사의 참소로 병졸들을 대상으로 한 예수회 선교는 중단되고 부임 1년 만에 조선을 떠나게 된다. (98-102)
일본에서의 조선 포로들의 개종
- 레온 피콘 신부는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언급... 1784년 북경에서 이승훈이 영세를 받기 200년 전에 조선에 기독교가 존재했다고 진술... 세스페데스가 자신의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통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조선인들 가운데 적어도 몇 사람의 개종자를 얻은 것으로 진술... (102-103)
- 예수회 신부 메디나... 1) 임진왜란 때 한 일본군인이 조선의 일본군 진영 근처에 버려진 조선 어린이 2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유아교회’의 탄생... 2) 고니시 유키나가가 13세의 한 조선인 소년을 일본으로 보냈는데 이 소년이 일본에서 세례를 받아 조선의 ‘어른교회’가 되었다... 3) 조선인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되면서 조선 땅에 많은 카톨릭 교인들이 생겨나고 교회도 세워졌다... (103)
- 전쟁 포로 가운데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이들이 많았다는 사실... 마카오, 마닐라,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팔려나간 한인들이 많았다... 5만명의 전쟁 포로... 7천명의 포로 귀환... 조선에서 온 포로들 가운데 개종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1595년 나가사키에서 활동하던 프로에스 신부의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103-104)
- 포로로 잡혀간 이들 가운데 천주교로 개종한 이들이 7천여명... “1608년까지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았으며, 예수회는 그들의 고국 조선에 복음을 전하는 데 그들을 이용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1614년에 시작된 대박해로 이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전 순교함으로써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 관리들이 조선 기독교인 특별히 여인들의 신앙의 절개를 증언하고 있으며,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 가운데 복자 9명, 순교자 11명에 이른다. (105)
2. 박연(Weltevree)과 하멜(Hamel)의 입국
박연 일행의 표착과 내한
- 박연으로 알려진 벨트브레는 화란 리프 지방 사람으로 1927년 무역선 우베르케르트에 올라 일본으로 교역차 항해하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경주 앞바다에 표착... 정재륜(1648-1720)의 ‘한거만록’ 제2권에 박연 일행(디렉 헤리스베르쓰, 얀 피테르츠)이 붙잡힌 상황이 기록되어 있음... 병자호란에 참전의 공을 인정받아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하늘이 알아서 보상할 것이다”는 사상은 종교적 심성을 근저에 두고 있었음을 의미... 김양선은 그를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신교 신자로 본다... 박연을 보는 주변 인물들은 그가 하늘의 신을 믿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06-109)
하멜의 제주도 표착
- 박연은 조선에 거한 지 26년이 지난 효종 4년 58세에 1653년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았다... 하멜 일행은 1653년 동아시아와의 교역을 위해 대만을 출발, 일본 나가사키 항으로 향하였다... 제주도에 표류... 1653년 8월 21일 하멜 일행은 제주 감영에 압송되어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다. 박연이 10월 29일 제주도에 도착... 외국인이 내지에 들어오면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사실, 일본 역시 바다 선상에서만 외국인과의 교역이 허용된다는 사실, 일본에 간다고 해서 생명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훈련도감에 예속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알려줌... (109-112)
하멜 일행의 국내활동
- 12월 새로운 제주목사 부임 후 가혹한 대우... 탈출시도 후 곤장 25대... 1654년 5월 효종을 만남... “입국한 외국인을 도로 국외로 내어보내는 것은 조선의 법속이 아니니 여생을 이 땅에서 마치도록 결심할 것이며, 그러면 모든 필수품을 급여하겠다”고 약속... 효종의 관대한 대우...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이완 휘하에서 군인생활 시작... 당시로서는 서양문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또한 서양문화와 종교를 수용할 만큼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문화와 종교의 접촉 그 이상의 기대를 할 수는 없었다... 1654년 8월 청국의 사신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효종은 하멜 일행을 남한산성에 감금시켰다... 청국사신과 접촉한 하멜 일행 중 두 사람 투옥 후 사망... 1656년 30명을 전라도 작천병영으로 유배시킴... (112-117)
하멜의 유배생활과 조선 탈출
- 10년간의 작천 병영에 유배 생활... 1663년 3월에 여수 좌수영이 12인, 순천에 5인, 남원에 5인으로 분산 배치됨... 여수 좌수영에 분산된 하멜... 1666년 9월 4일 일본 이쓰시마(五島)를 향해 탈출...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에 도착(8명)... 기독교인임을 밝힌 하멜 일행... 하멜표류기...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기회... (117-125)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 영국 해군 머리 맥스웰 대령과 호의 바실 홀 대령... 1816년 9월 서해안을 항해하고 도아가 바실 홀의 ‘조선 항해기’와 맥레오드의 ‘조선항해기’를 저술하여 서양세계에 조선을 알리는데 큰 공헌... (125)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
- 영국은... 동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과의 외교적인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풍토와 역사와 지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맥스웰 대령은 영국의 불란서와 전투했을 때 지중해 경비에 큰 공을 세운 유공장군이고, 바실 홀은 학문적인 조예가 풍부한 28세의 아주 젊은 사람이었다... 외과의사 군의 맥레오드가 머리 맥스웰이 이끄는 알세스트호에 탑승... 1816년 2월 9일 영국을 떠나 7월 28일 천진에 상륙하여, 청의 가경 황제가 있는 북경으로 감... 가경 황제의 대외방침이 수구적인 입장... 서해안 탐사... 황해도 소청도... 마량진 첨사 조대복... (125-139)
최초의 성경 전래
- 1816년 맥스웰과 바실 홀이 서해안을 탐사하는 동안 마량진에서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최초로 성경이 건네졌다... 현감 이승렬은 배에 탄 서양 의사 군의관에게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진찰을 받았다... 조대복에게 양장 성경을 건네줌...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은 충청수사 이재홍의 소고로 파직당함... (139-148)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의 의의
- 하멜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전세계에 소개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함... 귀츨라프가 1831년과 1832년에 항해할 수 잇었던 것은 맥스웰과 바실 홀이 작성한 해도에 의존한 항해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홀 함장은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1817년 8월 11일 아프리카 서해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 정박, 그곳에 유배되어 있는 나폴레옹을 방문해 조선의 풍경을 담은 풍속화를 보여주었다.... 귀츨라프 선교사... 1832년 1개월간 고대도에 체류하면서 복음을 조선인에게 전함... (14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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