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 편 (325-332)
제6장. 한국기독교 개혁운동과 민족주체적인 교회 형성
제2절.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교육이념
1. 외래 선교사와 조선신학교의 관계
1939년 초에 함태영, 김대현, 채필근, 송창근 등 여러 교역자들이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경향각지의 장로회 교회지도자들의 호응을 얻어 동년 3월 27일에 ‘장로회신학교 설립기성회 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기성회는 아래와 같은 조선신학교 설립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우리 조선반도에 들어온 기독신교가 과거 50여 년 동안 급속한 발달과 장족의 진보를 보게 된 것은 세인이 경이할 만한 바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환경의 복잡한 변천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거니와 또한 외국선교사들의 다대한 공헌과 우리 선배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 장로교회의 과거를 회고하건대 먼저 미북, 미남, 호주, 캐나다 등 4교파의 선교사들을 생각하게 된다. …… 그들의 열렬한 신앙과 건전한 인격이며 원대한 계획과 정밀한 준비는 오늘날 반도교회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제반사업과 위대한 공적에 대하여 거듭거듭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그들만으로서는 고장난명(孤掌難鳴)이란 말과 같이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도 안에 위대한 창업적 교역자를 많이 일으키셨다. 이제 누구누구를 다 열거할 수 없거니와 최초에 목사의 성직을 받은 7인의 선각자만은 과연 대표적 인물이 될 것이다. ……
이 최초의 목사들은 그 대부분이 벌써 천국으로 이적하였다. 오직 한석진, 이기풍 두 분이 지금까지 생존하였을 뿐이다. 그 중의 한 분인 한목사만은 현금 경성교회에 거주한 관계상 필자가 신학교설립기성회 일을 처음 생각할 때에 먼저 그 고견에 고문하고 싶어 그 문을 두드렸다. 그는 노안에 미소를 띠고 흔연히 영접하여 유감없이 진정을 토로하여 주었다. 예리한 비판과 심절을 권면을 섞어 가지고 이렇게 말씀을 건네주었다. ‘우리 손과 우리 머리로 신학교를 설립하여 보자는 말인가. 조선에 벌써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이런 운동도 없었다는 것은 너무 늦었지. 선교사와 한국교회야 언제든지 정의(情誼) 좋게야 헤어질 줄 알았는가. 그 사람네야 이러든지 저러든지 우리가 할 일이야 우리가 해야지. 그러나 나야 이제 80 가까운 것이 출마한들 무엇을 하겠다. 또 아직까지 조선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네. 나야 물론 마음으로야 전폭적으로 찬성하지’이라는 뜻의 말씀이었다.
비록 산단한 말씀이나마 한숨과 눈물이 없이는 배청할 수가 없었고 분발과 결심 없이는 퇴출(退出)할 수가 없었다. 참말 귀중한 훈시인 동시에 적절한 격려였다고 생각한다. …… 초대에는 선교사가 추제이었고 반도의 신자가 개체었으나 시대는 점차로 전개되어 양자의 관계는 상호협조의 상태에 있어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반도의 신자인 우리가 교회사역의 주체가 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교역자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손으로 경영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몸과 마음을 바칠 이도 생기고 땅과 돈을 드릴 이도 생겨야 할 것이다. 유지 독지의 남녀신도는 개흥호래(蓋興呼來)리오. 모사는 재인(在人)이어니와 성사는 재천(在天)이니 오-성삼위의 하나님이시여 이루어 주옵소서. 아멘.
설립취지서에 나타난 조선신학교의 설립동기는 1938년 9월 평양에서 모인 장로회 총회가 일경의 간계와 위협 가운데서 신사참배를 통과시켰을 때 선교사들이 폐쇄한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단순히 대치하는 한 신학교를 설립하여 중단된 장로교 목회자 양성을 계속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종래의 신학교육과 그 방법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자 하는 개혁사상이 있었다. 조선신학교의 설립위원들은 숙원대로 선교사들로부터 한국교회 목회자양성의 교육권을 한국교회가 장악하여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학교육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자 모였던 인물들은 지금까지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신학교는 한국교회 안의 일부 반선교사사상(反宣敎師思想) 세력의 숙원의 선취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 반대운동이 조신설립(朝神設立)의 직접적 동기나 원인은 아니었다. 그 당시 선교사에 대한 비판은 한국교회 안에 무시하지 못할 만큼 있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설립자들은 일제말 전시에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떠났을 때 조선교회의 교역자 보급을 위하여 조선신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다만 조선신학교에는 선교사에 대한 비판정신이 강하였을 뿐이다.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던 이들이 견지한 미국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이유를 기장의 교회사가 이장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정치적 이유, 즉 미국과 일본은 정치적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 한국에 있는 미국의 선교사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지지하면서 조선교회의 정치적 민족주의 운동을 반대하였다. 물론 선교의 자유를 일제 식민통치 당국으로부터 얻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미국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민족적 성격의 교회로 가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2) 문화적, 사회적 이유, 선교사들은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의 본토민문화(本土民文化)를 멸시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가족제도와 조상제사의 관계를 너무 경시하였고 유교적 윤리의 가치관의 좋은 점도 봉건주의라는 딱지를 붙여서 무시하였다.
3) 경제적 이유, 선교사들은 선교비를 독단적으로 사용하였고 선교비에 따른 혜택을 이용하여 특권의식을 행사하였다.
4) 종교적 지배욕, 본토민교회 행정과 관리에 있어서 총회와 노회수준에서의 간섭과 월권이 많았다. 이것이 본토민교인들 사이의 분쟁과 분열을 조장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본토민교회의 모든 내분에 있어서 선교사는 엄정중립을 지키거나 아니면 밝혀주어야 할 사실이 있으면 정직하게 밝혀 주어서 분쟁을 해결시켜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한 적이 많았다. 교회 안에 남북대립감(南北對立感)이 일찍부터 있었는데 선교사들은 서북지방 출신들을 편들거나 과오를 은폐하거나 부당하게 변호한 일도 있었다.
5) 선교사들은 교파주의적 선교관념과 하나의 조선교회 수립사상의 배격, 선교사들은 자파교회의 교세확장과 선교적 성과를 목적으로 일찍부터 싹튼 하나의 자유독립된 조선교회 수립을 위한 이상과 운동을 저지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 두 교파 선교사들은 하나의 조선교회가 설립될 때 선교사의 위치와 특권의 약화를 우려하였을지도 모른다.
1907년 장로교회가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하였을 때 선교사들은 선교공의회(宣敎公議會) 시절 약속한 조선장로교회의 치리권(治理權)을 독노회에 넘기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장로회에 독노회가 조직되면 자기들이 행사하고 있는 조선교회의 치리권을 독노회에 넘기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선교사들은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그 약속을 얼른 시행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독노회에 정식 회원이 되고 모든 권리를 행사하면서도 그 독노회의 치리를 받지 않으려 하였다. 즉 그들은 선교본부의 모교회(母敎會)에 속해 있기 때문에 조선교회의 치리는 받을 수 없다는 이유를 주장하였다. 선교사들은 국가의 파송외교관 치외법권 이상의 권리를 행사하였다.
이와 같은 선교사의 태도를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권(1912~1923)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선교사 諸郡이 조선교회를 同一視하여 兄弟視하지 않고 야만시하며 奴隸視함이다. 선교사 제군이여 聖神으로 시작하여 肉으로 결국하느냐? 결국 회개할지어다. 그 밖의 개인 선교사의 不足은 거론하지 아니하노라.
이 책은 장로회총회의 사기편찬위원회의 노력으로 저술된 것인데 함태영 목사가 그 편집위원의 한 분이다. 함태영 목사는 후에 조선신학교 설립위원과 이사, 초대교수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해방 후 조선신학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가 1951년에 학교장이 되었다.
조선신학교 설립준비의 총책임을 지고 개학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리고 해방후 교장이 되었던 송창근 박사도 선교사의 선교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미국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일본유학과 미국유학을 갔을 때도 선교사 도움없이 갔었다. 유능한 청년으로 인정을 받았고 또 사교성이 있던 그가 이렇게 처신한 것은 그의 신념에 따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장으로 경영난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을 때 김태묵 목사가 조선신학교를 연대에 합치는 것을 권하였을 때 송박사는 그 권고를 일축하였는데 선교사가 주관하는 학교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남궁혁 박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박형룡 박사보다 먼저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그 신학교 교지 《신학지남》의 주간 일을 맡고 있었다. 그리하여 송창근 박사와 김재준 목사의 기고를 받아 그 잡지에 실었었다. 그는 해방 후 조선신학교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1948년 세문안교회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려 조선신학교를 제거시키려 할 때 미국 선교사를 향해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문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발언하였다.
조선신학교 설립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도록 학교 재단과 운영비를 희사하고 그리고 제1대 교장이 된 김대현 장로는 당시 영향력 있던 김익두 목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조신의 설립은 선교사들의 은덕에 대한 의리적 반역이며 심지어 신앙적 배교행위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일을 중단하라고 강권하였다. 김대현 장로는 김익두 목사에게 보낸 답장에서 전도서 3장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헐 때가 있으며 세울 때가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선교사 전권시대(全權時代)는 지나가고 이제 본토민교회 목회자 교육권을 선교사에게 맡길 때는 지나갔다는 역사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신학교의 설립자들과 교수들은 다같이 역사적 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조선교회가 선교사로부터 교육권을 이양받아서 자주적으로 또 자립적으로 신학교육을 할 때가 온 것을 인식한 것이다.
송창근 목사는 1934년 《신학지남》에 기고한 ‘조선기독교의 위기’라는 글에서 외래 선교사들의 선교정신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가하였다.
50년 전에 기독교가 조선에 찾아들 때에 이 나라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리문제와 소위 서양문명을 가를 줄 몰랐다고 봅니다. 문명과 신앙과의 혼동이 그때 사람들의 기독교에 향한 의식이어서 문명도 신앙같고 신앙도 문명같아서 똑똑한 판단없이 …… 그저 무조건으로 기독교로 향하였던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 조선인으로서 교회지도자들뿐 아니라 선교사들까지도 많은 수가 그때 그 시절에는 조신인의 민족심리를 선교방법에 적잖이 이용하였던 것을 우리는 의아하지 않습니다. ……
그가 여기서 말한 ‘민족심리’(民族心理)란 말은 예수를 믿으면 그저 안되는 것이 없다는 심리, 문명과 신앙을 혼동해서 잘 사는 것도 예수 믿는 데 있고 민족비운을 만회하는 것도 예수 믿는 데 있다는 생각을 말한다고 설명을 붙였다. 해방 전에 조선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자세와 선교정책, 특히 네비우스선교정책을 비판한 유일한 논문은 《신학지남》에서 오직 송창근 박사의 글이었다.
해방 후 미국 북장로교선교부의 총무인 스미스(John C. Smith)는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 하나가 선교사들의 보수단일신학을 가지고 한국에서 신학교육을 했기 때문이라고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단색적 경향과 교육방침을 비판하였다.
1934년 김춘배 목사의 고린도서의 여권론의 새해석론과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저작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장로교 총회에서 문제가 되고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도 선교사들의 개입이 극심하였다. 그들은 신학적인 논쟁도 아니고 그저 교권으로 두 목사를 눌러서 주장을 취소하고 사과하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조선교회와 본토민 지도자들의 조선교회에 대한 사랑과 발전을 위한 경륜이 해방 전에 이처럼 고난을 받고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경륜과 섭리는 언젠가는 나타나게 된다.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조선민족을 고난에 빠뜨렸으나 그 자신은 패망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계획을 이 전쟁을 계기로 계시하시고 실천하신 것이다. 그것은 동남북아시아에서 서양식민주의 국가들을 물러가게 하시고 아시아를 아시아인의 손에 돌려주셨고 동시에 아시아교회를 아시아기독교인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
조선신학교의 설립위원들의 이상은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에 순응한 것만이 아니고 새시대의 징조를 바로 읽었던 것이다. 그 설립의 이상과 동기가 조선신학교의 설립기성회 취지에서 나타난 ‘우리 손과 우리 머리로 신학교를 설립하여 보자는 말인가? 조선에 벌써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이런 운동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 늦었지’라는 한석진 목사의 말 속에 나타난다. 한석진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 졸업사진 속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성경을 안고 있는 길선주 목사와 함께 조선기독교의 민족적 의미를 던져준 바 있었던 한국기독교의 자주성을 지도자였던 것이다.
조선교회 지도자들의 희망은 전시에 선교사들이 이 땅을 떠났을 때 호기를 만나서 조신설립을 통하여 실현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조신설립운동은 단순히 선교사 배척이라는 소극적 이유가 아니고 조선교회의 본토민교회형성의 이상과 사명의 통감이 근본이유였고 송창근, 함태영, 윤인구, 김재준, 김영주 및 김대현 등이 그것을 실현시킨 것이다.
이렇듯 조선신학교의 설립운동은 단순히 반선교사운동이거나 혹은 그들이 귀국한 공백기를 틈타서 갑자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앞에서 진술한 보다 고차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신의 설립과 개원과정에 있어서 일본 관원들과 서북지방 교회지도자들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지만 조신의 설립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추진하였던 것이다. 또 해방 후 선교사들의 후퇴와 서북지방의 교역자들의 다수 남하로 인한 보수세력의 격증에 힘입은 반조신 운동이 격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신의 이상은 포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산신학교(南山神學校)와 조신의 합동운동의 한 조건으로 신학의 중요과목은 선교사들에게 맡기자는 남산 측의 제의를 조신 측은 완강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교회의 교역자 양성과 교육권을 선교사들이 다시 찾아 쥐겠다는 의도를 배격한 계기가 되었다. 조신의 이러한 주장은 그 후 한국의 여러 교단에서도 현실화되어 갔다.
우리는 여기서 해방 후 장로교회의 사분오열의 비극의 원인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조선신학교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이 분열은 없었을까? 앞에서 논의한 스미스 목사의 판단대로 단일신학의 강요는 언젠가는 이설을 초래하게 마련이며 이미 미국장로교회에서 배제된 근본주의신학이 조선교회에서는 그대로 존속된 것은 해방 전의 조선의 특수한 선교상황 때문이었다. 조신설립 이전부터 이미 신학적 분열이 총회적인 문제 등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또 조선신학교 문제 이전에 이미 고려신학교의 설립으로 교단분열이 있었다. 또 조선신학교가 반선교사운동의 효시라거나 또 선교사의 교권상실의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 후 거의 모든 교단들에 있어서, 또 세계선교정책이 선교사의 계속적인 특권행사를 불허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방 전에 조선신학교 설립은 못할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선구자적으로 일찍 시작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오해와 미움과 반대를 받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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