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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기독교 100년사] 일제의 식민통치와 조선신학교

by [수호천사] 202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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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 편

 

6. 한국기독교 개혁운동과 민족주체적인 교회 형성

 

2.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교육이념

 

3. 일제의 식민통치와 조선신학교 [343-347]

 

1936년 이래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말살정책이 급격하게 강행됨에 따라 신사참배문제를 필두로 온갖 분야에서 일본화 운동이 치열해졌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갑자기 시련에 들어갔다. 기독교가 존속하려면 일본사상적인 기독교로 개변되어야 한다는 것인 그들의 강요였다. 결국 선교사들은 미일전쟁을 계기로 본국으로 떠났고 한국교회는 지도자없는 교회로서 일본정부와 압제와 농락에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제의 전시체제의 전환은 이전까지의 종교정책과는 다른 종교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전에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회유라는 입장을 취했지만 이제는 전시체제가 요구하는 기독교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재편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국가 통제하에 종교단체를 묶어 두어야만 했다.

 

일제는 구체적으로 국체관념에 융합하는 종교로의 전환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일제는 신사정책과 종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신사정책은 1930년대 초에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종교정책은 1939년의 종교단체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 두 정책은 1931년부터 1945 8월 패전때까지 15년간에 걸쳐 전시체제하의 조선기독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제는 조선기독교의 민족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식 기독교화를 촉진시키고자 하였다. 1938년 일제는 조선교회가 신사참배강요에 굴복당하자 신사참배 문제는 일단락 짓고 조선교회의 일본식 기독교로의 개편을 추진시켰으며, 궁극적으로는 전시체제에의 협력과 인적, 물적자원의 동원을 요구하였다. 19377월 중국과의 전쟁이 확대일로를 걷자 총독부는 황민화정책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19382월 기독교회에 신도에 대한 지도대책을 발표하고 국체에 적합한 기독교의 신건설운동을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을 결정하였다. 일제는 국체의 근본에 어울리며 시국하 국민의 정신을 총동원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서 국가적 종교로서 재생을 희망하였다. 즉 애국심을 발휘하고 일본정신을 선양할 수 있도록 일본적 기독교로의 전향이 요구되었다.

 

1939327일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될 때 교회의 상황은 위와 같은 수난기였다. 신학교는 당국으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야 했고 또 총회의 결의를 얻어야 했다.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회원들은 1939913일에 열릴 장로교총회까지 당국에 대한 설립절차를 보류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평양신학교를 한국인 주재하에 재개시키고 조선신학교의 신설은 사립학교 격으로 가능하면 해보라는 정도의 허락밖에 주지 않았다. 설립기성회가 조직될 당시 신학교의 교단 총회 직영인정과 조선총독부 인가문제는 사전에 어느 정도 양해를 얻어놓고 있었다.

 

즉 총회직영 인정은 이미 교단의 경향 각지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 조직과 활동을 통하여 무난할 것으로 알고 있었고 총독부 학무국 당국자들과의 사전양해도 얻어놓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동시에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 까닭은 평양을 중심한 서북지방 장로교회 인사들이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의 신규설립을 추진하고 평양의 일본관헌들을 설득하여 총독부로부터 신학교 설립인가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양지방의 교계인사들 중에 친일적인 사람들은 이미 신사참배 수용문제와 관련되어 그 지방의 일본관헌들과 다 친하였으며 일본관헌들은 서북지방의 장로교회가 한국장로교회의 교권중심 세력을 형성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신학교 설립을 인가해 주는 것이 앞으로 총독 정치에 유리하게 될 것을 노렸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던 채필근 목사가 평양신학교의 교장으로 초청을 받고 평양으로 떠나가버렸다.

 

조선신학교가 총독부에 제출한 신학교 설립인가 신청서는 결국 기각되어버렸고 1939년 장로회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직영신학교가 아닌 신학교로 인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교 설립위원회는 이러한 곡절을 겪고 난 뒤 경기도청에 학원인가를 제출하였으며 1940322일 조선신학교는 강습소인가증을 받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조선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4월 2일 개원식을 갖게 되었다.

 

역경을 딛고 어럽게 개교한 조선신학원의 앞길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어려운 문제가 중첩하였다. 개교한 지 6개월이 지나 설립자 겸 원장이신 김대현 장로가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9409월부터 일제는 기독교계 인물들의 검속을 자행하였다. 강의 중에 김재준 교수는 연행되어 갔는데 신령회라는 기독교계 비밀독립운동단체를 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학생들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김교수를 구속하지 않고 풀어주었다.

 

조선신학원은 사설상습소와 같은 것이어서 매년 인가갱신을 해야만 했다. 학교령에 의한 학교인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장로회 교단의 징역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중심한 교단의 교권 장악자들은 조선신학원의 학원인가 갱신을 방해하는 정체적 공세를 펴고 있었기 때문에 본학원은 한해 한해 유지하기도 힘겨운 일이었다. 또한 장로교 총회는 조선신학원은 목사 양성소가 아니고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인정하고 졸업생에게는 목사 자격을 안 주기로 가결했다.

 

19425월 강습소 인가가 끝났으며, 다시 청원하였으나 인가는 나오지 않았다. 수업은 여전히 계속했지만 무인가 신학원으로 전락된 상태였다.

 

그 당시 학교령에 의하여 경영하는 신학교는 성결교회의 경성신학교뿐이었다. 그래서 감리교신학교, 조선신학원은 경성신학교에 합동하여 경성신학교의 이름으로 신학교육을 계속하자는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성신학교 측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194212월 조선신학원은 감리교신학교와 연합하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에서 합동교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19434월 일제는 조선혁신교단조직을 강요하고 조선의 모든 교파들을 통합하여 교회관리를 용이하게 만들고 동시에 일본정신과 국가체제에 맞지 않는 성서내용과 찬송가 가사들을 삭제 또는 수정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조선신학원 학생들은 얼마동안 감리교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받았으나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각기 혁신교단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주장이 있어 합동수업은 중지되었다. 이때 이 혁신교단과 신학교 통합에 불응했던 김재준 교수는 덕수교회당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하였고 원장이 되어 학교를 이끌어 갔다. 혁신교단이 와해된 후 일본 경찰들은 수시로 학교에 와서 온갖 위협과 회유를 일삼았다. 이때 일제는 성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모세 5, 요한계시록은 폐지케 했으며, 나중에는 4복음서 외에 신구약성서 전부를 금지하고 찬송하고 제한하였다.

 

일제는 조선교회의 일본적 기독교로의 전환과 구조개혁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경찰이 조선신학원 교육을 방해하는 길은 전시를 이유로 학생들이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수시로 동원해 가는 방법이었다.

 

조선신학원 학생 중에는 개별적으로 사상조사를 받아 검거되어간 사람도 있었다. 일제는 서울시내 영등포지역 도로 보수작업에 본교학생들을 수시로 징용해 갔다. 이렇게 학업에 방해를 받기보다는 차라리 전교생이 단체로 일정한 일터에 가서 일하면서 수업을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45년 교수와 학생들은 전교생이 평양시 선교지에 있는 종연 군수공장에 징용되어서 해방이 될 때까지 고된 작업을 하게 되었다. 고된 노동이었지만 학생들은 서둘러 일을 끝내고 남은 시간을 공부에 힘쓰겠다고 교섭하였지만 다른 노동자의 항의로 여의치 않았다.

 

조선신학원은 수난기에 태어나 일제의 식민통치와 교권주의자들에게 여러 가지 탄압과 압박을 받았지만 그 기간을 잘 견디고 8.15해방을 맞았다. 개원 이래 1945년에 이르는 동안 모두 5회에 걸쳐 12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조선인에 의한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교회일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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