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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제1장. “해방 이전 교회ㆍ국가 관계의 구조적 변화” - 정병준

by [수호천사]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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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해방 이전 교회ㆍ국가 관계의 구조적 변화”

정병준, 『한국교회 역사 속 에큐메니컬 운동』, 11~39쪽 중에서

I. 머리말

 

이 연구는 19세기초 천주교회의 박해부터 일제 말기까지의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ㆍ국가 관계의 변화를 유형론적으로 분석하겨 그 안에서 교회ㆍ국가 관계가 선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12]

 

서구 기독교 역사 안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나타난다. 1) 카타콤 유형은 이교적 종교국가에 의해 교회가 박해받는 모형이다. 2) 종교국가 유형은 종교가 국가를 이용하는 모형이다. 3) 국가종교 유형은 국가가 종교를 이용하는 모형이다. 4) 배타적 국가-종교 관계 유형은 국가로부터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원하는 모형이다. 5) 정교분리 유형은 정부와 종교가 우호적으로 협력하는 정교분리 모형과 사회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에서 비판적 종교를 박해하는 비우호적 정교분리 모형으로 나뉜다. [12]

 

이 연구는 데버라스가 제시한 네 가지 관계 유형도 함께 사용한다. 데머라스는 종교성과 세속성이라는 한 축과 국가와 정치라는 또 다른 한 축을 함께 분석하면서 1) 종교국가-종교정치 유형, 2) 세속국가-세속정치 유형, 3) 종교국가-세속정치 유형, 4) 세속국가-종교정치 유형을 분류했다. [13]

 

II. 초기 천주교회의 교회ㆍ국가 관계

 

천주교 박해는 특히 붕당정치와 세도 정치 싸움에서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14]

 

천주교회는 전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두 가지 형태로 국가에 대응했다. 째는 신유박해(1801) 때 황사영이 쓴 『백서』에 나타난 것처럼 외세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기해박해(1839) 때 정하상이 쓴 『상재상서』에 나타난 것처럼 조정의 긍휼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14]

 

III. 구한말 개신교회의 교회ㆍ국가 관계(1884-1910)

 

한국교회가 형성한 사회참여적 민족구원적인 신앙유형은 독립협회운동(1896~1898) - 상동파의 을사조약 반대 투쟁(1905) - 신민회 운동(1907)으로 이어졌고, 선교사들이 형성한 비정치적이고 개인구원적 신앙유형은 장로교공의회의 정교분리 결의(1901) - 대부흥 운동(1907) - 백만인 구령운동(1909)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실상 이 양쪽의 흐름 중 어느 한쪽도 버리지 않았다. [16]

 

1. 고종과 개화파의 개신교회 이해

 

1880년 일본 수신사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사관을 방문했고, 참찬관 황쭌시엔이 써 준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쭌시엔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개신교를 두둔하기까지 했다.

 

천주교(天主敎)의 횡행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지만, 그들이 감히 횡행하는 것은 프랑스가 보호해 줌을 믿고서 그러는 것이다. 미국에서 행하는 것은 곧 야소교(耶蘇敎)로서 天主敎와 근원은 같으나 당파(黨派)가 각각 다르다. 야소교의 종지(宗旨)는 일절 정사(政事)에 관여하지 않으며, 그 교인(敎人) 중에는 순박하고 선량한 자도 많다.”

 

물론 위의 글은 청나라의 외교 전략에서 나온 것이지만, 고종과 개화파 정부가 미국과 개신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갖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조선 정부는 기독교는 금지하지만 서구 문물에 대해서는 개방적인 동도서기론적인 입장을 가지고 조미수호조약(1882)을 맺었다. 1883년 미감리교 선교본부가 일본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ay)를 통해 조선의 선교 가능성을 타진할 때 고종 황제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허락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17]

 

개화파 지식인들은 개신교를 통해 서구 문명을 도입하고 국가의 자강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종교를 정치의 수단으로만 보았다. [18]

 

2.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의 배경

 

1885년 선교사들의 정기간행물 Foreign Missionary부탁받지 않은 것은 어떤 일이든 하지 마라, 또한 조선의 붕당정치에 간섭하는 것보다 선교 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고 당부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선교정책 중 하나였다. [19]

 

1) 미국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정치의 교회간섭을 막는 정교분리론을 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선교사들은 우호적 정교분리문화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2) 선교사들이 들어간 나라들이 일반적으로 문화적으로 미개하거나 정치적으로 불안해서 선교사들이 본의 아니게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 있었고 이것드링 선교에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3) 미국 정부는 조미수호조약 이후 조선에 대해 이른바 우호적 중립”(friendly neutrality)외교적 불간섭원칙을 고수했다...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으로 인해 혹시라도 극동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을까 염려했던 미국무성은 주한 외교관을 통해 선교사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주었다. 4) 선교사들은 1801년부터 대원군이 실각하던 1873년까지 조선 정부가 천주교에 대해 무자비하게 박해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박해의 위험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사들은 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해 개신교회의 비정치성과 천주교회와의 차별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19-20]

 

3. 충군애국의 종교-민족 구원의 신앙 형성(1884-1900)

 

1) 선교사들의 인도주의적 정치참여

 

갑신정변(1884) 직후, 알렌은 치명상을 입은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을 치료해 살려냄으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회, 특히 장로교회가 선교의 우위권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일 뿐 정치적인 목적은 없었다...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자,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의 교인이 되어 차르의 신하가 될 것을 두려워한 고종 황제는 언더우드에게 조선의 국교회로 장로교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제안을 했다. 어차피 하나의 종교를 택해야 한다면 사심이 없는 미국의 종교를 택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언더우드는 그것을 거절했다. 만일 당시에 장로교로 국교화가 이루어졌다면 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것이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려 신앙적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고, 정치적인 적을 양산해 복음 전파에 방해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 언더우드의 정치적 거리두기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21-22]

 

2) 독립협회와 교회의 정치참여

 

한국 개신교회는 충군애국의 종교로 출발했다... 189672일 창립하여 189812월 말 강제 해산된 독립협회는 비종교적인 단체였지만 그것을 주도한 핵심 인물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 [22]

 

신용하는 독립협회의 계보를 1) 서구 시민사상의 영향을 받은 흐름, 2) 개신 유학 전통을 가진 국내 사상파, 3) 민중의 직접 대표, 4) 개화파 무관으로 분류했다. 그 중 첫 번째 부류는 대부분 근대 교육과 정치 훈련을 받은 진보적인 기독교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23]

 

독립협회가 창립된 직후 자발적으로 전국에 지회들이 조직되었는데 많은 경우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23]

 

교회가 전근대적 충군애국 사상의 한계를 벗어나 독립협회와 함께 근대적 시민국가 의식을 꿈꾸게 되었을 때, 고종과 정부는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했고, 교회ㆍ국가 관계는 긴장 관계로 변했다. [24]

 

3) 초기 기독교인들의 민족 구원과 신앙

 

독립협회 기독교 지도자들과 옥중 개종자들은 신앙과 민족, 신앙과 국가를 연결시켰다. [24]

 

조선 감리교회 최초의 집사 설교자였던 최병헌은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종교여정치관계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겉과 속’, ‘수레와 바퀴’, ‘입술과 치아처럼 서로 보완하고 의존하는 관계로 보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최병헌은 정교분리와 비정치화를 시도하는 선교사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것은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애벌레의 생각처럼 어리석은 논리라고 비판하였다. 그에게 교리와 정치사상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 부합하며, 어그러뜨리지 않고 서로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와 정치는 마음()과 행동()의 관계와 같아서 종교가 바로잡혀 있어야 바른 정치가 나오게 된다고 했다. [25]

 

4. ‘정교분리’와 ‘비정치화’ 신학의 확립(1901-1910)

 

1) 장로교공의회의 ‘정교분리’ 결의(1901)

 

19019월 장로교공의회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을 결의하고 전국교회에 발표했다. 이 결의문은 먼저 롬 13:1-7, 딤전 2:1-2, 벧전 2:13-17, 22:15-21, 17:24-27, 18:36을 제시하면서 정교분리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했다.

 

  1. 우리 목사들은 대한 나라 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하여 도무지 그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를 작정한 것이오.
  2. 대한국과 우리 나라들과 서로 약조가 있는데 그 약조대로 정사를 받되 교회 일과 나라 일은 같은 일 아니라. 또 우리가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 일 보는 회가 아니오 또한 나라 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오.
  3. 대한 백성들이 예수교회에 들어와서 교인이 될지라도 그 전과 같이 백성인데 우리 가르치기를 하나님 말씀 거슬림 없이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원을 복종하며 나라 법을 다 순종할 것이오.
  4. 교회가 교인이 사사로이 나라 일 편당에 참예하는 것을 시킬 것 아니오. 금할 것도 아니오. 또 만일 교인이 나라 일에 실수하거나 범죄하거나 그 가운데 당한 일은 교회가 담당할 것 아니오. 가리울 것도 아니오.
  5. 교회는 성신의 붙인 교회요 나라 일 보는 교회 아닌데, 예배당이나 교회 학당이나 교회 일을 위하여 쓸 집이오. 나라 일을 의논하는 집은 아니오. 그 집에서 나라 일 공론하러 모일 것도 아니오. 또한 누구든지 교인이 되어서 다른 데서 공론하지 못할 나라 일을 목사의 사랑에서 더욱 못할 것이오.

 

이 결의문은 우선 교회를 보호하고 정치적 오염으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의 내용은 목사가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만 강조하고 종교의 자유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결과 한국의 교인들은 정교분리 원칙에 대해 국가의 종교개입 항목은 배제한 채, 종교의 정치참여만을 금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26-28]

 

2) 을사늑약 이후 선교사들과 기독교 민족운동의 다른 길

 

1905년 가쓰라-테프트 비밀각서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했다. 이제 선교사들은 교회ㆍ국가 관계의 파트너는 일본으로 바뀌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한국교회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를 통해 나타났다. [28]

 

일제는 한국교회가 민족주의 운동의 산실이며 선교사들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선교사들을 회유했다. 1905년 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주재 북감리회 감독 해리스를 초청해서 정치상 일체의 사건은 불초 본인에게 맡기고, 금후 조선에서 정신적 방면의 계몽교화에 관해서는 원컨대 귀하 등이 그 책임을 맡아주시오.”라고 말했다. [28-29]

 

1907년은 기독교의 종교운동 노선과 민족운동 노선이 양분되는 분기점이었다... 일제의 입장에서 대부흥운동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분노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정치적인 효과가 컸다. 그러나 민족운동 노선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1907년에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29]

 

선교사들은 신앙의 영적인 속성’, ‘영원한 나라를 강조하며 정교분리와 교회의 비정치화를 고착시켰지만, 한국교회의 신앙은 민족의식과 결합되어 31운동으로 이어졌다. [30]

 

IV. 일제하 개신교회의 교회ㆍ국가 관계(1910-1945)

 

일제하 교회ㆍ국가 관계를 이해하려면 첫째, 신도 국가인 일본의 천황제 종교 정책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고, 둘째, 일제와 선교사들의 관계 변화를 밝혀야 하며, 셋째, 일제와 기독교 민족운동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30]

 

일제사 선교사를 다루는 방식은 협조와 통제였다. 국제 여론을 일본에 유리하게 이끌고 껄끄러운 한국교회를 통제하는 데 선교사는 훌륭한 도구였다. 선교사와 일제의 우호적 관계는 미일 관계가 악화되는 193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30]

 

1. 일본 내 교회ㆍ국가 관계

 

18892월 공포된 일본제국 헌법 제28조는 일본 국민은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거나 국민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는 한, 신교의 자유를 갖는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국가의 안녕과 질서 파괴라는 조항은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고 또한 헌법 제3조가 천황의 신성불가침을 명시했기 때문에 신교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 법조문이었다. [31]

 

1912년 일본 내무성은 삼교회동 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일본 내 신도ㆍ불교ㆍ기독교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고 국가 기여도에 따라 세 종교의 권익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즉 천황에 대한 외경(畏敬)과 경애(敬愛)의 이념을 국민들 마음에 고취시키는 국민 교화 운동의 임무를 각 종파들에게 부여하여 충성 경쟁을 끌어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31-32]

 

2. 선교사들과 일본 정부의 관계

 

1910년 한일협약 이후 조선총독부는 한국 내 선교사들에게 치외법권 등의 특혜를 유지하고 선교 협조를 약속하면서 그들을 통해 한국교회를 통제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 선교사들은 한국을 문명화시키는 일본의 역할이 복음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32]

 

기독교규제를 위해 일제가 제도화한 법령으로는 1915개정사립학교규칙포교규칙이 있었다. ‘개정사립학교규칙은 미션학교에서 성경교육과 예배를 금지시키고, ‘포교규칙은 교회설립을 허가제로 변경했다. 1920문화통치하에서 교회설립은 허가제에서 다시 신고제로 바뀌었지만 종교용 건물이 독립운동에 사용되면 폐쇄할 수 있다는 조항을 첨가했다. 또한 개정사립학교규칙을 재개정하여 사립학교를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했다. 이로써 일제는 종교재산 보호라는 이득을 부여하면서 조선총독부의 통제권을 강화시켰다. 193948일 일본과 조선에서 종교단체법이 통과되었다. 교파ㆍ종파ㆍ교단의 설립이 신고제에서 인가제로 환원되고, 교역자의 자격, 교규와 종규도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33]

 

3.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은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된 후 무력화되었다가 31운동을 통해 다시 사회정치 세력으로 부활했다. 특히 YMCAYWCA의 지방조직은 민족운동에 중요한 토대를 형성했다. [34]

 

1920년대의 운동방식은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외교 운동’, 민족 경제 수립을 목표로 한 물산장려운동’,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는 민립 대학 건립 운동등이 있었다. [34]

 

1930년대 한국 사회는 광주학생사건, 610만세사건, 신간회 해소 등으로 좌절에 빠져 있었다. 기호계 기독교 민족운동은 외적으로는 근본주의, 내세지향적 개인신앙, 선교사 의존을 비판하면서, 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지향하는 ‘적극신앙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적극신앙단은 서북 기독교계와 보수 교계의 견제와 반발로 인해 무력화되었다. [35]

 

일제는 수양동우회 사건’(1937.6)흥업구락부 사건’(1938.2)을 일으켜 지도자들을 검거하고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그 후 이들 중 대다수는 적극적 친일 협력자로 변절했다.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은 한국교회의 공교회 조직이 보수화되고 탈역사화되어 갈 때 사회참여의 역할을 감당하고 한국교회가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35-36]

 

4. 신사참배에 나타난 교회ㆍ국가 관계

 

일제는 신사는 국가 의식이고 종교가 아니다라는 정교분리론을 사용하여 한국교회를 분열시켰다. 한국교회의 다수는 선교사들이 알려준 정교분리 이분법 이외에 교회ㆍ국가의 관계를 이해하는 다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보는 측과 국가 의식으로 보는 측으로 양분되었다. [36]

 

일제의 정교관계 유형은 종교국가-세속정치유형이었다. 이런 유형은 세속 정치가 종교를 이용해 타 종교의 굴복을 요구하게 된다. 침략 전쟁과 결합된 신도 국가 종교는 조선의 교회를 처절하게 박해하고 굴복시켰다. [36]

 

V. 맺음말

 

기독교인 보편 교회의 일원인 동시에 국가의 시민이다. 한 개인 혹은 공동체의 삶 속에서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인 실체들이다. 양자의 관계는 역사 속에서 때로는 동일시되기도 하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기도 하면서 우호적인 정교분리론을 발전시켜왔다. [37]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이식시킨 정교분리론은 정치의 교회간섭을 막으면서 공공의 선을 위해 교회와 정치가 협력하는 우호적 정교관계가 아닌, 교회의 비정치화에 목적을 두면서 한국교회 안에 불충분한 정교분리론을 심어주었다. [38]

 

일제하에서 친일과 배교,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경험은 해방 후에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정치에 유착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를 비정치화하기 위해 사용된 정교분리론은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무디게 만들어 교회가 정치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38-39]

 

정병준, 『한국교회 역사 속 에큐메니컬 운동』, 11~39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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