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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기독교 100년사]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과 신학사상

by [수호천사] 202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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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 편

 

6. 한국기독교 개혁운동과 민족주체적인 교회 형성

 

2.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교육이념

 

2.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과 신학사상 [332-343]

 

1890년 봄 초기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배선교사 네비우스 목사를 초빙하여 그의 자문을 얻어 선교정책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강력한 자립성과 광범위한 순회선교, 성서에 대한 압도적인 강조 등이었다. 이 네비우스선교방법은 선교정책과 독립교회를 세우는 데 방법적인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1893년 장로회 제1회 공의회에서는 몇 가지 세부적인 항목을 추가하여 선교정책을 세웠는데 이 10개 항목 중 제4항목은 한국인 교역자양성에 힘쓸 것이라는 신학교육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후 남장로회 선교사였던 레이놀즈(W. D. Reynolds) 목사는 한국인 교역자양성책으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안을 제창하였다.

 

  • 1) 어떤 특정인을 교역자로 양성할 저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오랫동안 그 생각을 알리지 말 것.
  • 2) 외국 재정으로 그를 강도사나 전도사로 채용치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
  • 3) 선교사업의 초창기에 있어서만 그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 보내지 말고, 또 그의 교육정도를 일반 교인들의 수준보다 월등히 높이지 말 것
  • 4) 그로 하여금 높은 경지의 영적 체험을 가지는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할 것
  • 5) 그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사실 및 진리 위에 굳게 세울 것
  • 6) 청년 목사지원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 고난이 이길 수 있도록 훈련시킬 것
  • 7) 한국 일반교인의 문화적 수준이 향상되면 거기에 따라 한국인 교역자의 교육 정도를 높일 것

 

레이놀즈 선교사는 한국인을 위한 한국교역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소수의 우수한 본토민을 선택해 신앙적으로 훈련시켜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서 철저하게 연마시켜서 만고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군병이 되게 하자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한국인의 교역자 수준을 한국국민들의 문화적 진보와 보조를 맞도록 교육을 시켜서 교인들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로 지도력을 갖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교육을 받은 본토민 교역자를 선교사와 가까운 곳에 살게 해서 늘 상의할 수 있고 또 선교사 대신에 설교할 수 있으며 자기동포를 자기들의 힘으로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실제로 교회 지도자의 지적 수준을 일반 교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만들어 한국교회를 지도자 없는 교회로 만들어 버렸다.

 

1905년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 및 호주장로교회 선교부의 연합으로 평양에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의 교육방침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교과목은 성서교육을 위주로 하고 그 밖의 신학과목을 중점적으로 가르쳤고 일반 인문과목의 교육은 대체로 등한시되었다. 따라서 성서와 신학을 이해하는 준비적이며 기초적인 일반지식의 결핍은 성서와 신학의 이해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또 신학사상은 보수주의 단일사상이었으므로 다른 신학사상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빈곤하여 비판적인 지식이나 비교적인 판단력이 부족하였다. 신학연구의 자유가 자연히 폐쇄되었고 또 교육정책상 다른 조류의 신학을 소개하지 않았다. 신학사상의 단일화정책은 한국교인들의 신앙을 단순하고 소박한 것으로 만들 것이었으므로 앞날의 자유로운 신학연구의 분위기에 대처할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사상과 신학교육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사상과는 맞지 않았다. 다만 한국교회가 아직 어리다는 것이 신학사상의 통제에 대한 가장 수긍이 갈 수 있는 변명이 될지 모르나 이것 역시 먼 장래를 위한 지혜로운 계획은 못되었다.

 

1910년 세계선교협의회(W.M.C.)가 에딘버러에 모였을 때, 벌써 한국교회의 신학빈곤의 위험성이 냉정하게 비판되고 있었다. 철학적인 개념구성과 분석이 없는 성서 하나만의 교육과 문송(文誦)으로 바람직한 목사훈련의 창달을 꾀하기는 어려웠다.

 

1917년 춘원 이광수는 교역자의 무식을 통박하고 나섰다.

 

목사, 전도사……같은 교역자는 최저 계급인 민중과 접하는 동시에 최고계급의 민중과도 접할뿐더러 종교적 의미로 보아 지도하는 자이오. 그리하려면 상당한 학식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요. 신ㆍ구약 성경만 2, 3차 맹독(盲讀)하고 百 가량 되는 설교학이나 배워가지고는 부족할 것이 분명하오. 적어도 기독교의 대표적 수종(數種)의 신학서(神學書)를 열람하고 고래(古來)로 저명한 철학설(哲學說)이며, 종교문학을 열람하고 그 중에도 현대의 철학의 대강과 과학의 정신을 이해하여서 현대문명의 정신과 현대사조의 본류(本流)와 현대문명과 종교와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오. 심리, 윤리, 수사학 지식의 필요함은 물론이거니와 이만 하고야 전도도 하고 지도도 할 것이외다. 그런데 현금(現今) 교역자는 어떠한가요?

 

그는 교역자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수의 교인을 미신으로 이끌고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며, 미신적 신앙을 고집하여 사회의 추세와 병진하지 못함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 사이에는 지역적으로 신학사상에 차이를 나타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한 북장로교의 선교지역은 철저하게 보수적이었고 함경도와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일하고 있던 캐나다연합선교회는 진취적이었다.

 

1925년 캐나다장로교회는 교파 합동으로 캐나다연합교회가 되었다. 이때 연합을 싫어하던 영 목사는 일본으로 떠나고 간도에서 일하던 스코트 목사가 선교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김관식, 조희염 목사 등이 돌아와 캐나다선교회의 교육사업에 동참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신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캐나다연합선교회는 성서비평을 용인하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하고 있었다. 캐나다연합교회의 자유로운 신학연구의 기풍은 1926년 함흥에서 개최한 성경학교 보습생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경학교 보습과 학생들은 스코트 목사의 성서해석이 이전의 영 목사의 성서해석과 달리 매우 자유로운 해석임을 알고 반발하였다.

 

자비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아말렉인과 여리고성의 전멸을 허용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스코트 목사는 이것은 이스라엘 편견사이며 진실된 역사로 볼 수 없다고 하였으며, ‘성서에 역사적 오류가 있느냐?’는 질문에 다수의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스코트 목사의 성서해석은 학생들 사이에서 신신학적(新神學的)인 것으로 규탄되었다.

 

스코트 목사는 1926년 가을 김관식, 조희염 목사 등과 함께 함흥에서 유급교역자회를 소집하고 보수주의신학의 결함을 지적하며, 자신들이 소신하는 성서관과 종교관을 강의하였다. 이때 조희염 목사는 성경전체를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자신의 성서관을 피력하자 당시 보수주의신학에만 젖어 있던 교직자들의 커다란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유주의신학사상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보수와 자유 양신학의 긴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29년경에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극단의 보수주의자들이 분열해 나갔을 때 한국의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함부선 선교사를 비롯한 근본주의자들이 한국의 장로교회와 외국선교사들이 근본주의 5개 신조를 받아들이도록 할 의도로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신조들을 특별히 꼬집어내어서 신조화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 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선교사는 캐나다선교사 스코트 박사였다. 그는 지상을 통해서도 반박문을 발표했다. 근본주의 선교사들은 결국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만주지역으로 건너가 거기서 선교하다가 해방 이후 한국에 다시 돌아와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에서 신학의 자유로운 연구를 지향한 사람들은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한 목사들이었다. 1934신학지남권두언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재준 교수는 신학지남권두언에서 지금까지의 보수신앙을 맹종할 것이 아니라 좀더 한국적인 신학을 선교사와의 관련성을 떠나서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신학건설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신학지남권두언 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인 19355월 이후에는 김재준 교수는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실리지 못하였다. 평양신학과 장로회 총회에서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에게 단죄를 가하였다.

 

1934년 총회에 고발된 두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본 관서학원에서 신학공부를 한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저작문제에 대한 비평적 태도였고 다른 하나는 역시 같은 학교를 졸업한 김춘배 목사의 고린도서의 바울이 말한 여권문제의 현대적 해석이었다. 결국 총회는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한 후 두 사람에게 주장의 취소를 요청하였을 때 그들은 다만 교회에 피해가 미칠 염려가 있을까 하여 취소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는 미국 북장로교회나 호주장로교회에서는 하등의 문제가 될 리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심사위원 가운데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인 회원들을 계몽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양심의 발로가 아쉬웠던 것이다. 이때 다만 캐나다 선교사만이 신학적 양심을 지켜주었다. 한국에 있어서 신학의 새로운 운동과 바람은 캐나다 선교부의 지역에서 일기 시작했다.

 

1934년 감리교 유형기 목사의 편수로 된 단권의 성경주석이 출판되었다. 이때 번역된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은 성서의 역사적 비평을 전적으로 도입한 것이었으며 그 번역진에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재준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길선주는 집필자의 대부분이 자유주의신학자인 것을 지적하여 이 주석의 장로교회 안으로의 침입을 용인할 수 없으며 번역진이 장로교 목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그 일에 대한 엄중한 책임규명을 요구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이 주석이 성서를 파괴적인 고등비평의 원칙으로 해석하며, 계시의 역사를 종교적 진화의 편견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단정하였다. 장로교 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신생사 발간 성경주석에 대하여는 그것이 우리 장로교회의 교리에 위반되는 점이 많음으로 장로교회에서는 구독치 않을 것이며, 동 주석에 집필한 본 장로교 교역자에게는 소관노회로 하여금 사실을 심사케 한 후, 그들로 하여금 집필의 시말을 기관지를 통하여 표명케 할 것

 

그러나 이때 채필근 목사를 제외한 다른 목사들은 이와 같은 총회의 결의에 대하여 신학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당한 조처라 보고 총회에 그 뜻을 따를 수 없음을 표명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있어 자유주의신학사상과 보수주의신학사상과의 갈등이었다.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는 신학적 논쟁과 교회분열의 비극을 일으킬 만한 문제들이 대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총회의 압도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보수주의세력들은 교권을 이용하여 강경한 태도로써 관련자들에 대한 무거운 책벌과 성명서 등을 발표하게 강요하여 얼마동안이나마 교회의 평안은 유지되는 듯하였다.

 

한국장로교회는 캘빈의 신학, 혹은 개혁교회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한국의 평양 장로교신학교는 캘빈주의 위에 선 것이다. 그런데 평신의 조직신학은 18세기의 보수주의, 정통주의 신학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정통주의 신학은 1910년경부터 미국에서 생긴 근본주의 신학과 융합되었다. 그리하여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메첸 교수와 그 일파가 근본주의 신학을 받들고 분리해 나가서 정통파 장로교파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다. 평신을 미국 북장로교회와의 선교관계에서 생각하면 평신의 박형룡 교수의 근본주의 신학이 문제가 될 수 있었으나 이것이 평신과 조선장로교회에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방 전 정통주의에 도전하여 공개적으로 논문을 쓴 사람은 송창근 박사였다. 그는 1934신학지남에 캘빈 탄생 425주년 기념특집으로 요한 캘빈의 생애예정신학에서 예정신앙에란 두 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다. 송박사는 그 논문에서 예정신앙과 사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성경을 읽는 이마다 예정신앙의 은총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선택사상이나 신앙은 思索을 거쳤거나 理論의 과정을 밟아 그 生活에 미친 것이 아닙니다. …… 豫定神學에서 차차 예정신앙 생활에 도달한 게 아니라 예정신앙의 필연적 산물로서 예정신학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정에 대한 해박한 신학이 있다고 반드시 예정신앙을 가진 사람이냐 하면 그것은 만부당한 말입니다. …… 예정문제에 대하여 예로부터 오늘까지 이야기가 많지만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長老會 사람이 되려면 으레히 예정론을 말하고 감리교인이 되려면 으레히 예정론을 부인하고 성결교인이 되려면 덮어놓고 성경을 부르짖어야 되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이나 어느 한때에 되는 게 아닙니다. 한꺼번에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걸제 마다 다된 양을 하려니까 거기에는 流行品, 模造品, 가식자가 많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를 보면 예정론을 중심생명으로 하는 캘빈주의 덤핑시대같이 생각되는 때도 없지 않습니다.

 

송박사는 예정론이나 예정신학을 설명함에 있어 캘빈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신앙요리문답을 속개하지 않았다. 그는 예정론이 교인들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심리에 해를 끼치는 것을 밝혔다.

 

예정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바로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던 캘빈 자신의 태도와 아주 일치하는 것이었다. 캘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교의학적으로 성서에 있는 예정신앙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변증한 것이었다. 캘빈은 난해한 예정론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여 교인들의 신앙을 혼미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송박하는 조선교회에 정통주의가 해로운 것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그 자신은 캘빈의 성서적 신학과 성서적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그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정통주의를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극단의 자유주의와 다름없이 정통주의신학도 미국에서 직수입한 극단의 보수주의라서 일시적 기세를 보이는 것이니 이것은 다 우리의 정신운동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무비판적 모방인 것을 입증하는 可畏한 현상이외다. 극단의 보수주의를 그대로 가져다가 참 진리운동보다도, 敎理論보다도, 기독교의 信德보다도, 黨爭과 폄론을 일삼으려는 사람들이 일 小景氣를 얻어 의의 추대를 즐겼다.

 

그는 근본주의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극단의 보수주의, 즉 근본주의와 정통주의는 이것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였다.

 

만우의 신학사상은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토대와 방향을 정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극단의 정통주의, 보수주의신학사상에 대하여 비판적 인물들이 19393월 조선신학교 설립위원 중에 많이 들어 있었으며, 그들은 조선신학교의 교수와 강사로서 역할을 하였다. 송창근, 함태영, 한경직, 조희염, 윤인구, 김관식, 채필근, 김재준 등이 그 면모였다.

 

김재준 목사는 캐나다장로교 선교지역인 함흥 경흥 출신으로 송창근 박사의 권유로 서울에 오게 되었고, 1920년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감화로 회심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신학의 길을 선택하였고, 1925년 송박사의 안내로 일본 청산학원에 유학하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때 일본, 특히 청산학원은 거의 래디칼한 자유주의였고, 그 당시 뉴욕 유니온의 출장소 격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식별할 지식을 습득한 셈이었다.

 

그때의 분위기를 김목사는 이상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곳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치고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에 들어가 박형룡 박사를 가르친 바 있는 메첸 교수에게 강의를 듣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근본주의신학방향에서 자신의 신학을 재측정하였고 새로운 자극과 전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것을 보유하면서 복음의 자유하는 정신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 근본적인 것과 시대적인 것, 게시되는 문화의 분간을 혼동하지 않고 언제나 시대에 앞서면서 시대를 포섭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서를 다시 보자는 노력 – 무슨 그 비슷한 방향이었다.

 

김재준은 내가 영향 받은 신학자와 저서라는 글에서 위와 같은 그의 신학방법 핵심을 토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역사참여 거부에서 오는 불만을 역사도피의 신비상태(부흥회)에서 보충해 보려고 하였다. 여기서 자파(自派)의 교리체계를 절대화하여 사상적으로 폐색정체된, 소위 ‘정통주의 신학’이 신자의 지성을 사로잡아버렸다.

 

그는 한국교회의 신학에 사상적으로 폐색된 정통주의신학에 포로되어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음과 같은 당시 상황을 회상하였다.

 

서른 두 살 되던 겨울에 귀국했다. 교회도 사회도 숨막힐 정도로 폐색(閉塞)과 체증에 걸려 있었다. 가까스로 어느 중학교에 교사로 붙을 수가 있어서 우리 새세대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장로교교단에서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보수주의세력에 의해 평신의 접근은 차단되었고, 1930년대 대부분을 중학교 교목과 성경교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1933년 고등비평학을 구사한 성서 연구논문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을 발표하였고, 그 후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고신학지남에 기고하였다. 그의 비평연구는 1935년 권두언이 문제가 되어 더 이상 발표될 수 없었다.

 

박형룡 목사는 김목사의 글을 신학지남에 싣지 못하도록 하였다. 평신의 보수주의적 전통은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저작 문제’, ‘김춘배 목사의 여권 문제’, ‘아빙돈 주석문제’, ‘적극신앙단의 문제등과 연결되면서 진보주의신학은 용납되지 못하였다.

 

초대선교사들의 보수신앙에 기초하여 설립된 한국교회는 희년(禧年)에 이르러 한인(韓人)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음이 역력하게 되었다.

 

1938년 일제의 교회탄압에 밀려 만주에서 지내던 박형룡은 귀국하여 19479월 부산에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그 후 서울에서 총회신학교 재건에 힘쓰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소위 자유주의신학자로 알려진 김재준 교수가 조선신학교의 주도권을 쥐고 신학교육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적 정통사학을 고수하려는 박형룡과 교역자들은 보수신학교 재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박형룡이 가졌던 신학자로서의 사명은 김재준을 자유주의신학자로 규명하여 단죄함으로써 보수주의신학전통을 확립하고 지속하는 일이었다.

 

1934년 선교 50주년을 맞이할 때까지 한국교회는 신학교육으로부터 목회, 의료 등 교회의 모든 생활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의 지도와 보육 아래 있었다. 특히 그 당시의 신학교육에 대해 김재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신학교는 일종의 직업특수학교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거기서 전수하는 신학사상이란 것은 소위 정통주의신학이라는 고정적이요, 물상화한 조문들이었고, 전수방법은 주입식이었다. 따라서 그 신학교교육은 철저한 ‘교파적’인 신학이며 자기교파 이외에 대한 관심은 전혀 무용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 이런 신학교가 단 하나만 허용되었고, 그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인간은 그 창설자들의 신학에 일획도 다른 것이 없도록 예정된 인간들이었다.

 

당시의 신학교육과 신학사상이 이처럼 보수주의로만 기울어져갈 때, 김재준 교수의 의중에는 신학교육에 대한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35전당건축에서 인간건축이란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옛 사람도 百年之計在於樹人이라 했으니 인물 기르는 것이 건설의 기초원리임을 알 것이 아닌가? 그런데 50년 이래의 조선교회는 과연 반석같이 흔들리지 않는 인물을 양성하기에 얼마나한 계획과 노력을 하여 왔는가?

 

40년 동안 한국의 보수신학의 요람이었던 평양신학교가 1938년 무기휴학을 선언한 후 선교사들의 통제와 간섭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손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여론이 교회일각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19404조선신학원이란 명칭으로 초대원장 김대현 장로를 비롯한 김영주, 함태영, 이정로, 윤인구,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하고, 서울 승동교회 지하층에서 그 역사적 개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김재준 교수는 다음과 같은 교육이념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조선신학교로 하여금 복음선포의 실력에 있어서 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학적, 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도록 할 것
2) 조선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
3)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 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캘빈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4) 성경연구에 있어서는 현대비판학을 소개하며, 그것은 예비적 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이요 신학수립과는 별개의 것이어야 할 것
5) 어디까지나 교회의 건설적인 실재면을 고려해 넣은 신학이어야 하며 신앙과 덕의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오, 모략과 교권의 이용 등은 조선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러한 논쟁을 하지 말 것

 

이상과 같은 조선신학교의 설립은 선교사와 보수주의자들의 손을 떠나 한국인 진보주의신학자들의 지도로 된 것으로서, 이전의 평양신학교와는 전혀 다른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여 김재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404월 조선사람의 손으로 조선신학교가 서울 승동교회 지하층에서 개교되었다. 이것은 조선교회 50년 사상에 있어 처음되는 기록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이날부터 참된 의미의 조선교회가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다른 기관은 모두 조선사람에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신학교만은 기어코 선교사들이 경영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선교사 우월권, 선교사 주권을 유지하려면 조선 교역자의 질()을 선교사 이하의 선()에 정지시켜야 될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신학교육을 완전히 선교사가 독점하는 방법을 취할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조선사람으로서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고 선교사가 일제히 귀국한다는 것은 비록 전쟁에 의한 불가피한 사태라 할지라도, 벌써 선교사 집권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이상의 이념은 신학교육의 수준과 학문연구의 자유와 성서비판학의 수용과 교회를 위한 신학을 제시하면서 이런 신학교육은 어디까지나 복음적이며 경건을 동반하는 것이며 캘빈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것은 김재준 교수의 개인의 창안이 아니고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 위원들과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모색한 신학교육의 이념이며 이상이었다. 이 이념은 자유로우면서도 복음적인 면, 즉 자유와 보수성의 종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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