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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기독교 100년사] 조선신학교의 역사적 의의

by [수호천사] 202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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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 편 

 

6. 한국기독교 개혁운동과 민족주체적인 교회 형성

 

2.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교육이념

 

4. 조선신학교의 역사적 의의 [347-350]

 

장공 김재준 목사는 조선신학원이 설립되기 이전 한국교회의 과거는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규정한다. 그 이유는, 역사는 자주적이며 주체성을 지닌 한국인에 의해 창조일 때만 한국기독교회로서 자기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미국 기타 서구제국의 선교국 교회들의 선교사의 일부로서 구성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이 한국기독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사상에 비판이 있어야 하며 얼이 없이 단지 주입되고 추종되는 가운데 교회성장이 늘었다면 늘인 정도로 한국교회로서의역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역을 하나님은 조선신학교에 맡겼다는 것이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섭리를 나타내신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 조선신학교는 정통주의, 근본주의 일색을 극복하였다. 조선신학교는 한국교회에 자유, 자주, 비판, 진취 등 독립적 학문활동을 전개하며 한국교회에 역사성을 부여하였다. 다음으로 조선신학원은 불원간 닥쳐올 일본의 조선통치의 종말에 잇따라 생길 한국기독교의 새역사 현실을 준비하는 일이 되었다. 선교사 지배 시대는 끝나고 본토민에 의한 한국기독교 역사의 새장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선신학원 개원 후 불과 5년이 되면서 실현되었다.

 

한국교회는 단일 보수사상만을 가지고 새시대, 새현실에 대처해 나갈 수 없는 것이었으며, 보수단일 사상의 방파제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현실을 준비하는 일은 역사적 통찰력과 투시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으며 그들은 신학교육과 한국의 교역자양성에 대한 먼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은 외국선교사 배척운동이 아니고 한국교회가 역사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순응하는 것으로 되었을 뿐이다.

 

조선신학원을 설립하는 데 정재(淨財)를 바친 김대현 장로는 분명히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외래선교사의 인력과 재력에 의존해서 신학교육을 해왔으나 이제 선교사들의 교육권시대는 지나갔고 한국의 본토민 교회와 본토민 신학자들이 본토민 목회자를 교육하고 양성할 때가 왔다는 분명한 시대의식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런 역사의식적 용단을 저해하는 사람들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김대현 장로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성서에서 찾아내어 답장에 밝히게 하였다. 그 말씀은 구약 전도서 3장에 있는 말씀으로

 

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며,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고 헐 때가 있으며 세울 때가 있다.

 

이 말씀은 김대현 장로가 바로 본 시대변천의 혜안이며 역사의식이었다. 한국의 교역자는 우리의 인력과 재력으로 양성해야 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일제시대 우리민족의 일반교육권은 일본인이 장악하였고, 그리고 신학교육원은 선교사들이 장악하였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선교사 의존사상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신학의 형성이나 발달은 본토민 교수들이 교수권을 가질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원 개원식사에서 분명히 밝히기를

 

하나님은 적은 일에 충성한 자를 돌봐주신다는 말씀을 나는 내 경험에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선신학교란 간판으로 처음부터 크게 벌리는 데 두려움을 느껴왔는데 이제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초라하게 작은 간판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나무 자라듯이 오래오래 더디 자라는 생명일수록 더 견실한 법입니다. 나는 원래부터 이소성대(以少成大)를 원합니다. 이제 이 작은 조선신학원이 꾸준히 자라 전조선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유명한 신학교로 결실할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김대현 장로의 순수한 교육적 정신의 발휘를 읽을 수 있다.

 

만우 송창근은 일찍부터 역사에 눈을 떴다. 기독교 민족운동가 이동휘를 따라 북간도에 가서 독립군사관학교로 알려진 소영자의 광성학교를 다녔으며 이동휘의 권고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기독교와 민족은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그는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평양신학에 가지 않고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에는 남대문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불온창가 유포죄로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만우는 교계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많은 인물을 발굴하고 키웠던 것이다. 인재발굴, 인물사랑, 후배양성의 뜻은 후에 조선신학교의 설립과도 연결된다. 3.1운동 이후 만우가 일본으로 새로운 자기 훈련을 위해 떠난 것을 장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한국에서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이 전적으로 장악했기 때문에 …… 의기와 꿈으로 피어오르는 젊은 지성인들의 기미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만우는 일본으로 뛰었다.

 

만우의 역사의식 가운데 가장 뚜렷한 점은 추제성이었다.

 

이다음 너희들은 남의 밑에서 월급장이 노릇을 아예 할 생각 말고 하다 못해 군고구마 장사라도 하면 남들이 와서 자네들을 찾을 때, 군고구마 주인 있어? 하고 물을 것이요.

 

만우는 신학생들에게 주인이 된다는 것 나라와 민족의 주체성을 가진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한국교회가 재정적으로 사상적으로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조선신학원을 시작하였다. 해방 후 장로교회가 진보적인 개방주의 신학사상과 보수주의 정통고수의 신학사상이 맞부닥쳐 소위 신학교 문제논쟁이 오랜 시일 동안 벌어지고 있을 때 만우는 정통을 외치는 사람은 밥통을 따르는 사람이다는 농담을 하면서 신앙과 학문의 자유, 선교사의 신학이 아니라 주체적인 학문비판을 가진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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