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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제2장. “해방 이전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대한 고찰” - 정병준

by [수호천사] 2024.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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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해방 이전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대한 고찰”

정병준, 『한국교회 역사 속 에큐메니컬 운동』, 41-77쪽 중에서

 

I. 머리말

 

한국교회 안의 교회사 연구는 여전히 교파 옹호론적인 입장이 강하다. 그 이유는 분열을 겪으면서 성장한 한국의 교파 교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교회사를 통해 분열을 정당화하려는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있고, 교회사 교육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파 옹호론을 넘어 에큐메니컬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사를 연구해야 할 필요성과 타당성이 크다. [42-43]

 

에큐메니컬은 고대교회 시대에는 보편교회를 지칭했고, 종교개혁 이후로는 교파 간의 관계성을 의미했다. WCC 창립 이후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의 개념은 교회 일치를 넘어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의 보전(JPIC)을 포함한다. [43]

 

II. 한국 개신교회의 출발과 초기 연합운동(1884-1910)

 

1. 수용과 전래의 연합

 

교파주의 교회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들은 주체적으로 신앙을 수용하여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후 선교사들의 복음 전래와 만나면서 한국교회를 발전시켰다. 한국 개신교회는 이러한 복음의 수용과 전래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44-45]

 

2. 초기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컬 운동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영향 아래 기독학생운동(SCM)과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출신들이 많았다... 비록 그들은 교파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교파 교회를 설립했지만, 복음 선교를 위해서 교파를 뛰어넘어 협력할 수 있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갖추고 있었다. [45]

 

1) 성경번역과 성교서회의 설립

 

성경을 토착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복음을 토착화하는 작업이며, 신앙의 통일성을 제공하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특성이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연합활동은 성경번역이었다. [45]

 

2) 장로교공의회와 연합신학교의 조직

 

한국에 도착한 북장로회ㆍ남장로회ㆍ캐나다장로회ㆍ호주빅토리아장로회는 장로회정치를 사용하는 단일 장로교회를 설립하려고 노력했다. 1893년에 장로회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가 조직되었다. [46]

 

3) 장로교ㆍ감리교 선교사들 사이의 협력

 

1905915일 장로교와 감리교(이후 장ㆍ감) 선교사들은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했다. 이 조직의 목표는 선교사업에 서로 협력하고 한국에 단일 개신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단일교회의 명칭을 대한예수교회’(Jusus Church)로 정하고 추가 연합신조까지 마련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장ㆍ감 사이의 교리 차이를 강조하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본부로부터 허락을 받지 못했고, 북장로회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강력한 이견이 있어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장로교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설립했고, 북감리회는 1908년에 한국연회를 창설했다. [47]

 

4) 출판ㆍ교육사업의 협력

 

예배의 일치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수년간 노력해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찬송가(1908)를 출판했다. 선교사들은 영문 잡지를 통합하여 코리아미션필드(Korea Mission Field, 1905.11.)를 발행했다. 또한 선교 정보와 교회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 연합신문 그리스도 신문(1906.7.)을 발행했다. 선교부 연합공의회는 1905년 주일학교위원회를 두어 두 교단의 주일학교 교육을 위해 협조했고 1911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했다. [47]

 

1905년에 베어드(W. M. Baird)는 감리교 연차대회에 참석해서 숭실전문의 공동운영을 제안했다. 이것이 수용되어 1906년에 감리교가 참여하고, 1912년에는 호주장로회와 남장로회가 참여했으며, 1914년에는 캐나다장로회가 참여했다. 1915년에 감리교선교부가 연희전문에 참여하면서 숭실을 떠나감으로써 숭실은 장로교대학이 되었다. [48]

 

1911년 장ㆍ감 선교회들은 기독교 교육을 단일체계로 연합하기 위하여 교육이사회를 구성하고 협력했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정사립학교법을 발표한 후 장ㆍ감의 교육 협력은 깨졌다. 정부의 학력 인정을 받으려면 미션학교 내 성경교육과 예배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한 각 선교회들의 대응 방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48]

 

5) 선교지 분할협정

 

1892년에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사이에서 시작된 이 논의는 1909년에 6개의 장ㆍ감 선교회들 사이에서 최종 합의되었다... 이 정책의 시행을 놓고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의 반발과 혼란을 우려했으나 정책의 취지를 들은 한국 교인들은 교회와 복음을 위해 선교사들의 결정을 순순히 따라주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 속에 나타난 놀라운 에큐메니컬 정신이었고,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의 연합정신에 경이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48-49]

 

에큐메니컬 운동은 평신도들 사이에서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파주의를 통해 기득권을 누리는 교권이 오히려 에큐메니컬 정신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다. [49]

 

3. 초기 부흥운동

 

첫째, 대부흥운동의 발화점인 “1903년 원산부흥운동은 여성들의 초교파적인 모임에 의해 준비되고 촉발되었다.” 이것은 원산이 장로교ㆍ감리교ㆍ침례교의 공동 선교구역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둘째,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ㆍ중생ㆍ성결이라는 신앙의 본질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교인과 교인 사이에, 선교사들과 교인들 사이에 서로 미워하던 감정을 용서하며 화해와 치유가 일어났다. 셋째, 부흥운동은 교회의 신앙과 한국의 토착적 문화가 만나 토착적인 신앙 형태를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50]

 

III. 일제하 한국교회의 연합운동(1910-1930)

 

1. 조선예수교장감협의회

 

1905년에 설립된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General Council)1911년에 ‘Federal Council’로 명칭을 변경했다. 단일 개신교회를 설립하려던 공의회의 목적은 사라졌고, 오직 연합 사업을 목적으로 규정했다... 비록 단일 개신교회 운동은 실패했지만, 신문, 문서선교, 병원과 학교에서는 장ㆍ감이 다시 연합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한국교회는 인구 20만 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1918조선예수교장감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가 탄생했다. 협의회의 회장은 장로교의 김필수 목사이고 서기는 감리교의 오기선 목사였다. 이러한 조선예수교장감협의회의 조직은 토착교회 지도력이 크게 성장했음을 반영한다. [51-52]

 

2.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창설된 후, IMC 회장 존 모트(John Mott)1922년부터 아시아를 순방하며 국가교회협의회(NCC)들을 조직했다. 한국에서는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조선예수교장감협의회가 연합하여 1924924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탄생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0년대에 사회주의의 성장과 반기독교운동, 신사조의 도전에 맞서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신학 수준 향상을 위한 일반교육과 신학교육의 질적 상승에 노력하며, 신문ㆍ방송을 통한 전도, 출판사업, 절제운동, 농촌운동에 주력했다. [52-53]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32년에 사회신조를 발표했는데 이 신조는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투쟁, 혁명 수단에 대해 반대하며 사회적 책임을 천명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교회가 국내사조에 도전하고, 해외 에큐메니컬 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입장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54]

 

3. 조선 감리교회의 통합

 

1920년대 한국교회 내 자치 의식이 높아지면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지도자들은 1924교회진흥방침연구회를 구성하고 자체 합동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1925년에 제출된 통합안이 미국의 두 감리교회에서 부결되자 한국 지도자들은 불가불 단독으로라도 통합해야 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로써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고 한국감리교회는 자치 시대를 시작했다. 또한 남북감리교회가 하나의 신학교를 운영한 것도 교단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54]

 

4. 만주 조선기독교의 설립

 

1941년에는 만주에 있던 장로교회ㆍ감리교회ㆍ성결교회ㆍ동아기독교ㆍ조선기독교(변성옥 중심)5개 교파가 합동하여 만주 조선기독교회를 결성했다. 교파 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이 해뵈에서 단일교단을 설립한 것은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특히 반교권주의를 기치로 기성 교회와 분립했던 조선기독교가 해외에서 기성 교회들과 연합한 것은 에큐메니컬적으로 의미가 크다. [55]

 

VI.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의 초교파적 특성

 

제도권 밖 기독교 민족운동은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의 교회지배, 교권주의, 교파주의적 분열, 개인 구원에 함몰된 종교 신학을 비판했고, 신앙의 힘을 통해 사회개조에 참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는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금주금연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초교파적으로 참여하면서 나타났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은 수양동우회와 동지회처럼 교회 안에 지역 파벌을 강화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주었다. [55]

 

1. 독립협회운동

 

18981225일 정부는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키며 이상재 등 17명의 중심인물을 체포했다. 나머지 지도부는 망명과 추방의 고초를 겪었다. 선교사들은 이때부터 교회의 비정치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되었고, 1901년 장로교공의회의 정교분리선언이 있었다. [56]

 

2. 기독청년학생운동

 

1) 협성회와 기독교청년회(YMCA)

 

1896년 배재학당에서 시작된 협성회는 최초의 근대식 학생 조직으로 회의 규칙을 훈련하는 토론회 모임이었다... 1901YMCA 총무로 내한한 질레트는 협성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배재학당 안에 학생 YMCA를 조직했다. [57]

 

조이제는 엡윗청년회를 최초의 기독청년조직으로 보고 있다. [57]

 

1924년 조선 YMCA-YWCA가 연합해서 세계학생기독연맹(WSCF)에 가입하면서, 일본 YMCA의 감독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제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기독청년학생운동은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 직접 접촉하면서 제도교회 조직보다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상과 변화를 더 빠르게 이해하였다. [58]

 

1932년 안창호계의 동우회와 이승만계의 동지회의 갈등으로, 이대위 간사는 장로교회의 면려청년회 조선연합회 총무로 자리를 옮겼고, 1935년에는 신흥우가 중앙 YMCA 총무직을 사임하면서 YMCA 활동은 더 약화되었다. 1938년 조선 YMCA연합회는 일본 YMCA에 흡수됐고, 학생 YM-YWCA1941년에 사라졌다. [58]

 

2) 엡윗청년회와 면려청년회

 

엡윗청년회는 감리교 조직이었고, 면려청년회는 장로교 조직이었다. 18975월 미감리회가 엡윗청년회의 중앙조직을 세운 후, 청년조직이 개교회로 확대되었다... 190611월 친일파 감독 해리스는 이또 히로부미의 지령에 따라 엡윗청년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엡윗청년회는 1920년에 복원되었지만, 비교적 온건한 활동을 했다... 장로교의 기독면려회는 1913년 새문안교회에서 최초로 조직되어 확대되었으나 31운동 이후 잠시 활동이 중단되었다. 1921년 앤더슨(W. Anderson) 선교사가 면려회를 재조직한 후, 경북지방에 면려청년회가 활성화되었고 1924년 면려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조직되었다. 1925년에는 기관지 진생(眞生)이 발간되었다... 19376월 일제는 동우회 사건을 통해 주요 간부를 검거했고 그 여파로 면려회 운동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58-60]

 

3. 신민회와 105인 사건

 

1907년은 한국 기독교계가 민족운동 노선과 종교적 운동노선으로 양분되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신민회의 목표... “아국의 부패한 사상과 관습을 혁신하야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해 사업을 개량해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야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 [60]

 

신민회의 중심 지도력은 서북지역의 장로교 세력,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교회 세력,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 YMCA에서 나왔다. [60]

 

105인 사건... 선교사들은 고문의 야만성과 일제의 교회 탄압을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국제 여론에 굴복한 일제는 투옥한 사람들을 조기 석방했다. 정의와 인권을 위한 교회의 국제적 연대는 중요한 에큐메니컬 활동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31운동에서도 나타났다. [60-61]

 

4. 3ㆍ1운동과 임시정부

 

한국교회는 31운동 과정에서 큰 희생을 당함으로써 외래종교 위치에서 민족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61]

 

김용복은 31운동에 참여한 불교ㆍ천도교ㆍ기독교가 서로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세 종교 모두 유교의 관점에서 반() 정통종교였고, 변혁적인 메시아사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종교언어역사적 기제(機制)”가 서로 연결된 것으로 분석했다. [61-62]

 

 

31운동 기독교 민족대표 [62]

관서 장로교 길선주(평양), 이승훈ㆍ김병조ㆍ이명룡(정주), 양전백(선천), 유여대(의주)
감리교 신홍식(평양), 최성모(해주)
기호 장로교 김창준ㆍ박동완ㆍ박희도ㆍ신석구ㆍ오화영ㆍ이필주(서울), 정춘수(원산)
감리교 이갑성(대구)

 

31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 여성들의 초교파적인 민족운동도 두드러졌다. ‘대한애국부인회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서울과 평양의 장ㆍ감여성들이 피감자를 구호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려는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조직이었다. 31운동 이후 기독여성들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WCTU, 1923)를 통해 여성 에큐메니컬 조직을 건설했다. 이 중 한국 YWCA는 순전히 한국 기독여성들의 손으로만 건설된 자발적인 조직이었다. 또한 기독여성들은 1927년에 사회주의 여성단체와 협력해서 근우회를 창설했다. [62-63]

 

19195월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애국단체이지만 승려들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한독립애국단의 철원군단은 도피안사()에서 조직되었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강원도 월정사의 승려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63]

 

5. 신간회와 기독신우회

 

신간회 운동은 기독교가 한국 역사 속에서 민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연대한 아주 특별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간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조병옥은 19295월 정인과ㆍ김인영ㆍ이용설ㆍ이대위ㆍ전필순ㆍ이승훈ㆍ조만식 등 당시의 지도자들과 함께 ‘기독신우회’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1928년 예루살렘 IMC 에서 돌아온 정인과의 활동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보수적 한국교회는 사회 현실로부터 내세적 종교 생활로 도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기독신우회는 지식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에 직면해 속죄 구원과 함께 사회 복음을 중흥하며 타계주의로 도피하지 않고 추가 신앙적 동력을 가지고 사회악과 싸우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63-64]

 

6. 적극신앙단 운동

 

중앙 YMCA 총무 신흥우... 19326월 장로교의 8, 감리교의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적극신앙단을 조직했다적극신앙단 선언은 아래와 같다.

  1. (우주관) 나는 자연과 역사와 예수와 경험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을 믿는다.
  2. (인생관) 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악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것을 인생생활의 제1원칙으로 삼는다.
  3. (개인해방) 나는 남녀의 차별없이 인간의 권리, 의무, 행위에 있어서 완전한 동등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4. (개인대사회) 나는 신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개인의 취득욕이 인간적 공헌욕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5. (사회대개인) 나는 사회가 많은 사람에게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 승등적(昇登的) 균형과 안정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창설단원으로서는 비보수적인 선교사들, 진보적인 한인 목사와 평신도들, 교회와 공식관계가 적은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적극신앙단은 서북 교권, 보수주의 신학, 연합기관에서 선교사들의 독주에 대립하는 구도로 조직화 되었다는 것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64-65]

 

V. 일제하 한국교회의 분열구도

 

한국교회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기의 에큐메니컬 정신이 약해지고 교파주의가 강해졌다. 1920년대 중반부터 교회 내부의 갈등이 드러나면서 1930년대 중반에는 분열 구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구조는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분열의 단초가 되었다. [66]

 

1. 서북과 비서북 세력 간의 갈등

 

장로교회는 서북(평안도, 황해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932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장로교인 211,440명은 서북 55%, 중부 4.5, 영남 18.9%, 호남 13.9, 관북 7.7%의 비율로 존재했다. [66]

 

1932년 감리교인은 48.645명인데 중부 64%, 서북 33.2%, 관북 2.1%, 호남 0.2%의 분포를 보였다. 따라서 감리교회는 주로 서울ㆍ경기 지역에서 교육사업, 부녀사업, 의료선교에 치중하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66-67]

 

평양신학교와 북장로회의 지원을 받는 서북장로교회는 한국교회 안에서 교권 그 자체였다. 이에 비해 서울ㆍ경기지역이 중심이 된 남부교회들은 장ㆍ감이 연합해 서북 교권의 독주를 막으려고 했다. 따라서 장로교의 서북 교권은 자신들에 대립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67]

 

2. 신학적 보수-진보의 대립

 

장로교회의 주류는 평양신학교의 교수들(주로 매코믹ㆍ구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 가르치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을 수호하려고 애를 썼다... 1920년 이후에 들어온 장로회 선교사들은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다. 반면 감리회 선교사들은 사회복음까지 수용하는 진보적 성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장ㆍ감의 신학적 차이는 갈등으로 확산되어 서북의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서울의 언더우드와 에비슨 조차 근대주의자로 여겼고, 특히 해외유학파에 대해서는 강한 배타성을 가지며 의심하고 경계했다. [67-68]

 

장로교 내부의 보수-진보 갈등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사이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69]

 

3. 선교사와 교권에 반발했던 소종파 운동

 

민경배는 이러한 운동을 여섯가지로 분류했다.

  1. 신학적 이단 종파 : 김장호의 “조선기독교회”(1918)
  2. 반선교사적 종파 : 장로교의 최중진계 “자유교”(1910), 이만집계 “자유교”(1918), 신흥우의 “적극신앙단”
  3. 반교권 종파 : 감리교의 만주지역 선교 과정에서 생긴 현성원, 한동규, 변성옥 등의 “조선기독교회”(1935), 성결교의 이탈파들이 형성한 “조선 하나님의교회”(1936)
  4. 무교회주의 종파 : 김교신, 함석헌의 “성서조선” 운동, 최태용의 “복음교회”(1935)
  5. 신비신령주의 종파 :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유명화의 “예수교회” 운동, 황국주의 신비주의
  6. 환상적 애국적 종파 : 박동기의 “시온산 제국” [69-70]

 

4.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의 갈등과 교권 장악

 

서북 교권은 안창호의 흥사단을 지지했고, 남부교회의 중심인사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면서 중앙YMCA와 흥업구락부, 적극신앙단과 관련을 맺었다... 일제는 19376수양동우회사건19382흥업구락부사건을 일으켜 양쪽 지도부를 검거한 후 사상전향을 시도했다. [71]

 

5. 장ㆍ감 에큐메니컬 운동의 분열

 

193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이 시작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억압은 더 가속화했다. 그러나 교회들은 교파 특색을 강화하며 연합운동을 깨뜨렸다. 첫 번째 사건은 정인과가 주도한 신편찬송가사건이었다. 장ㆍ감은 1908년부터 찬숑가를 함께 사용해왔고, 1931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신정찬송가를 출판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선교사들이 장ㆍ감의 교계 인사들과 충분한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장로교 총회는 1932년에 신정찬송가사용을 금지하고 1934년 단독 편찬을 단행하였다. 1935년 종교교육부 총무 정인과 목사가 총회장이 되던 해에 장로교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탈퇴하고, 장로교 전용 신편찬송가를 발행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교파연합의 신앙보다는 장로교 특유의 신앙노선을 자랑스러워하던 분위기가 있었다. [71]

장로교의 서북 교권은 다양한 단체들과 교단들이 동등한 대표권을 갖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안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연합공의회를 교파연합기관으로 변경하려는 뜻도 이루지 못하게 되면서 탈퇴를 결정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교회가 지닌 공의회성을 무시하고 힘으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72]

 

두 번째 사건은 교파연합 주간지 기독신보사건이다. 장로교의 전필순 목사는 1929년부터 기독신보에 근무하다가 일제의 반-선교사 압력에 힘입어 1933년 사장이 되었다. 그는 적극신앙단을 옹호하면서 선교사의 지원을 받는 서북 교권과 충돌했다. 기독신보발행기관이었던 예수교서회는 전필순을 해임하고 유억겸을 사장으로 임명했으나, 당시 한국인이 소유한 신문은 조선총독부 관할이었기에 예수교서회는 이미 소유권을 잃은 상태였다. 결국 기독신보는 경영난으로 인해 193781일에 휴간계를 내고 복간하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서북 교권의 독주와 연합기관 안에서 선교사들의 독주에 저항하려 했던 전필순 목사의 방식도 독선적이었다. [72-73]

 

19369월 장로교회 총회는 선교지 분할협정시 맺었던 장ㆍ감 양교회의 분할선을 일방적으로 폐기한 후 감리교에 통보했다. [73]

 

6.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에큐메니컬적 해석

 

지금까지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는 관점은 주로 세 가지였다. 첫째, 자유주의자들은 신사참배에 쉽게 굴복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절개를 지켰다는 입장이다. 둘째,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였지만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며, “생존의 문제에 대해 각자의 양심과 믿음의 분량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셋째,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였다는 입장이다. 셋째 입장은 가장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주장이다. 우리는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한국교회의 분열로 신사참배 문제에 공동의 증언을 하는 데 실패했던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73]

 

당시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도 한국교회와 선교사들도 모두 신사참배가 정치인가 종교인가 하는 이분법에 휘말려 분열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첫째,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신사참배의 본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수준이 너무 저급했고, 둘째, 1930년대 서북-비서북, 보수-진보, 선교사-반선교사로 분열된 교회로서는 일제의 분열 정책에 대응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기독교적 국가권력 앞에서 교회는 좀더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했다. [74]

 

7. 반-에큐메니컬적 교회일치

 

193858일 조선총독부의 개입과 지원으로 조선기독교연합회가 발족했고 조선예수교연압공의회’(NCC)919일 해산되었다. 19416일본기독교단이 창립된 후, 1943년 장로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 되었고 감리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 군소교단들은 강제 해산되었다. 1945719, 장로교와 감리교, 구세단은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74-75]

 

교회의 일치는 반드시 그 안에 교회의 갱신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며 하나님 선교의 도구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일치가 된다. [75]

 

VI. 맺음말

 

첫째, 한국 개신교회는 토착적이고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의 신앙수용과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전래)의 만남을 통해 그 초기 유형을 형성했다. 교회의 보편성은 그 지역성을 통해 구현되고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앙과 신학의 문화적 주체성과 토착화는 중요한 에큐메니컬 영역이 되어야 한다.

 

둘째,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에큐메니컬 정신은 성경번역, 기독교문서출판, 주일학교교육, 미션학교운영, 의료사업, 신문발간, 합동찬송가 발행, 선교지 분할협정, 대부흥운동, 백만인구령운동 등에 녹아 있고 한국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은 공의회성을 통해 발전되었다.

 

넷째, 사회참여운동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다.

 

다섯째, 에큐메니컬 운동을 깨뜨린 외부적 요인으로는 일제의 탄압(개정사립학교법, 신사참배 강요, 민족운동 탄압)과 분열 정책, 단일 교회 거부와 같은 해외 선교본부의 입장이었으나 더 보질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내부적인 요인들이었다.

  1. 가장 큰 문제는 지역갈등과 패권주의였다.
  2. 『아빙돈 단권주석』 단죄, 김영주ㆍ김춘배ㆍ김재준 목사에 대한 신학적 정죄 등에서 나타나는 배타적이고 폭 좁은 신학적 이해가 분열을 낳았다.
  3. 전필순 목사의 「기독신보」 사유화와 신흥우의 적극신앙단 경우처럼, 교회의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독단적인 개혁운동은 연합에 역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여섯째, 초기 에큐메니컬 운동에서는 YMCA, YWCA, 엡윗청년회와 면려청년회 등에서 평신도, 청년, 여성들의 참여와 역할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교권이 강화되어 에큐메니컬 운동이 약화되자 이들의 역할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평신도, 여성, 청년의 역할을 활성화할 때 에큐메니컬 운동의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75-77]

 

정병준, 『한국교회 역사 속 에큐메니컬 운동』, 41-77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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