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갈등과 분립 연구”(1945-1955)
정병준, 『한국교회 역사 속 에큐메니컬 운동』, 79-113쪽 중에서
I. 머리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갈등과 분열 과정은 해방 이전 평양신학교 선교사들의 신학교육 주도권과 획일성, 서북 장로교회의 패권과 지역갈등, 일제 황민화 정책에 대한 협력 문제, 박형룡과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한국인 지도자들 사이의 신학갈등과 감정 문제,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월남 기독교인의 증가, 조선신학교 지지자들과 장로회신학교 지지자들 사이의 교권투쟁, 선교사들의 개입과 영향력 확대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들로 얽혀있다. 또한 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선교회 사이에도 이 문제에 대한 견해가 다양했고, 한국인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김재준 측, 박형룡 측, 중도 측이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주제는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81]
II. 해방 이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갈등과 조선신학교 설립(1925-1945)
1925년 캐나다장로회가 연합교회가 되었을 때, 캐나다연합교회 한국선교회는 전도ㆍ교육ㆍ의료 사역의 주도권을 현지 교회로 이양한다는 원리를 적극적으로 적용했다. 1920년대 중반 기독교를 향한 지식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반성이 고양되고 있었다.
1929년 경제적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평신도들이 선교의 동기와 방법론에 대해 재고를 요청하는 『선교의 재고』(Rethinking Mission, 1932)를 출판했다. 캐나다 한국선교회는 이것을 진지하게 연구했고, 1934년에 새로운 선교정책을 수립했다. 그들은 선교를 모든 생활의 기독교화와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한국교회 지도자가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감독을 감당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의 영향을 받으면서 보수적 경향성이 강화되었다. 1929년 미국장로교 안에서 근본주의 신학을 고수했던 일단의 무리들이 메이첸 교수를 따라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그들은 1933년에 장로교해외독립선교부를 세웠고, 1936년에 미국정통장로교회를 조직했다. 한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들 중 정통장로교회로 떠난 사람은 해밀턴(F. E. Hamilton, 함일돈), 헌트(B. F. Hunt, 한부선),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 허대전) 세 사람에 불과했으나 많은 선교사가 보수주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한국인들을 유학보냈다. 북장로회는 박형룡ㆍ백낙준ㆍ한경직ㆍ윤하영 등을 프린스턴 신학교로 보냈다. 남장로회는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남궁혁을 버지니아 유니온으로 보냈다. 당시 캐나다선교회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평양신학교와 가깝지 않았다. 캐나다선교회 지역 한국 지도자들의 일부는 평양신학교를 거치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그중 송창근과 김재준은 프린스턴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박형룡은 더 보수적인 남침례교 신학교로 갔고, 송창근ㆍ김재준은 학문적인 웨스턴 신학교로 유학갔다. 평양신학교는 박형룡과 남궁혁 두 사람을 한국인 교수로 채용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신학 교육정책과 선교방법 차이는 훗날 한국교회의 신학갈등의 한 원인이 되었다. [82-83]
1938년 신사참배 거부의 여파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문을 닫았고, 선교사들은 신학교육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채필근ㆍ김영주ㆍ차재명 등은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지원을 받아 1939년 3월 27일 ‘조선신학교설립기성위원회’를 조직했다. 한편 이승길ㆍ오문환ㆍ김선환 등은 평양에서 신학교 설립을 주도해 1939년 9월 총회 직영신학교 지위를 획득하고,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채필근을 교장으로 초빙해서 1940년 2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총독부는 “일본적 기독교를 추진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의 발뿌리(평양)에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평양신학교를 승인했다. 후기 평양신학교는 목사들에게 황민화 교육을 하며 친일의 정도가 극심하다.
서울의 조선신학교는 총회에서 사설 기관으로 허락을 받고, 송창근ㆍ김재준ㆍ윤인구 등 일본 유학파를 교수로 초빙해 1940년 3월 경기도청에서 강습소로 인가를 받았다. 조선신학교의 역사적 의미는 최초로 한국인의 손으로 신학교육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신학교육의 지도원리를 다음과 같이 수립했다.
- 조선교회가 복음 선포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 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게 한다.
-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충분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 학설을 소개하고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한다.
- 성경 연구에 있어서는 현 비판학을 소개하되 그것은 성경 연구의 예비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이요 신학 수립과는 별개의 것이어야 한다.
- 어디까지나 조선교회의 건설적인 실제 면을 고려하는 신학이어야하며 신학과 덕에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오, 모략과 교권 이용 등은 조선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러한 논쟁을 피해야 한다.
김재준은 “선교사 집권 시대”의 대안 신학교육으로 세계성, 자율성, 교권투쟁에 이용되지 않는 건설적 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언젠가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과제였다. 그것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일원주의가 지배하던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선교사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기능이 정지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조선신학교는 생존을 위해 일본적 기독교에 협조했기 때문에 이 과제를 수행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1938년 일본기독교대회 대회장 도미타(富田)와 함께 일본으로 도피했던 박형룡은 홀드크로프트를 통해 조선신학교와 평양신학교의 개교 소식을 들었다. 그는 1940년 3월 28일 구(舊) 평양신학교 교장 로버츠(S. L. Roberts, 라부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유주의 신학교의 형성과 보수신학 전통의 약화를 염려한다는 뜻을 전한다.
“평양신학교는 총회 이름으로 설립된 학교이기 때문에 총독부 인가를 받을 수 있었고, 따라서 남쪽의 교회들은 남부총회를 설립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 선교회가 자유주의의 통제를 받아서 이전의 정책을 변경할까 염려가 됩니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경기노회 중심으로 서북 교권에 대항하여 총회분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경기노회의 전필순 등은 남부 교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조선신학교를 후원했으나 김재준은 교권 쟁탈에는 관심이 없었고 신학교육에 관심을 두었다. 일제 말 1943년 4월 전필순과 윤인구는 감리교회의 정춘수와 함께 일제의 단일기구 추진에 보조를 맞추어 혁신교단을 세웠다. 이사장과 학장이 혁신 교단의 통리와 교육국장을 맡으면서 조선신학교는 잠시 문을 닫았다. 김재준은 함태영을 이사장으로 세워서 새롭게 조선신학원을 시작하였다. 장로교회에서는 김영주가 경기노회를 재건했고, 감리교회에서는 이규갑을 중심으로 감리교 원상운동을 하면서 전필순의 혁신교단은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84-86]
III. 총회의 두 개 신학교 인준(1946~1949)
1. 조선신학교의 인준과 반발
해방 이후, ‘일본기독교조선교단’(1945.7.19. 통리 김관식, 부통리 김응태)은 조선기독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생존을 모색했으나 다수 교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어서, 이듬해 해산하여 각자의 교파로 환원했다. [87]
제32회 장로회 총회(1946.6.12.-14. 승동교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신학교가 이런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서북 교권과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아직 약했고, 박형룡 등 보수 교계 지도자들이 해외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신학교는 각 선교회에 교수와 이사 파송을 요청했다. 캐나다선교회는 이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북장로회는 신학교육에 참여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며 결정을 유보했다. 남장로회는 “순정통적인 성경해석과 신학”을 가르치고 “현 교수진을 총퇴진”시킨다면 교수 1인과 이사를 파송하고 “약간의 경상비를 담당”하겠다는 솔직하지만 거친 답을 했다. 호주장로회는 재정과 인력이 적어 현실적으로 지원하기 어려웠다. 한편 경남노회의 한상동과 주남선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사상을 재건할 목적으로 고려신학교(1946.9.20.)를 설립했고 곧 박윤선이 교수로 참여했다. [87]
제33회 총회(1947.4.18.-22. 대구제일교회)가 개회되던 날, 김재준ㆍ송창근ㆍ정대위 교수의 신학사상과 고등비평학 교육에 불만을 가진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자, 총회는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송창근과 김재준을 면담했다. 김재준이 “성경은 신앙과 본분에 대해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며 “계시로서의 신구약성경은 절대 무오함을 믿는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총회에 제출하고,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김재준은 성경이 역사적, 과학적 차원에서 무오류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이를 부드럽게 피했다. [87-88]
박형룡은 1947년 9월 20일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직(1947.10.14.-1948.4)을 맡았으나 총회 지원을 받는 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장로회신학교 설립운동에 참여했다. 1948년 초 이정노ㆍ이인식ㆍ이재형 등 원로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 설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3월 15일 대전제일교회에 모여 이사회의 재선과 현 교수진의 총퇴진을 내용으로 하는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제34회 총회(1948.4.20.-23. 새문안교회)에 제출하기로 하고, 그것이 실패할 때 장로회신학교를 재건한다는 계획을 논의했다. 조선신학교 이사회는 이 안건을 부결시켰으나 김재준 교수를 연구차 1년간 유학을 보내고, 윈(S. W. Winn, 위인사), 보켈(H. Voekel, 옥호열), 커닝햄(F. W. Cunningham, 권임함), 스코트(W. Scott), 박형룡, 김진홍, 심문태, 명신홍을 새로운 교수로 청빙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때 방청하던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물리적으로 항의했고, 임원들은 비상 폐회를 선언한 후 현장을 떠났다.
김재준은 조선신학보에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과거 평양신학교 선교사들의 열등한 신학교육과 정통장로교파(메이첸파)의 활동을 비판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진정서 사건의 배경과 경위를 설명했다. 또한 자신의 퇴진 문제에서 교리와 정치가 아닌 학문적인 평가를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박형룡은 김재준의 ‘진술서’를 비판하면서 1946년 김재준이 「새사람」 11월호에, “소위 정통의 가면을 쓰고 교회를 교란하는 이단자를 배척함”이라고 쓴 내용을 언급한다. 박형룡과 김재준 사이의 신학논쟁에서는 감정의 칼끝도 발견된다. 김양선은 “김재준 교수가 단속적(斷續的)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강렬히 비난하지 않았더라면, 금일과 같은 장로교회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본질은 신학교육의 주도권을 획득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를 향한 김재준의 비판을 교회 분열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88-89]
1948년 제34회 총회 직후 ‘장로회신학교설립기성회’는 북장로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북장로회 대표 아담스(Edward Adams, 안두화)는 5월 3일, 북장로회 실행위원회의 결정사항을 기성회에 전달했다.
“총회가 파송한 이사회가 있고, 총회 통제 아래서 모든 자산이 총회에 속한 하나의 신학교를 지원하는 것이 본 위원회의 정책입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인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로 설립된 신학교 대표들에게 통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89]
1948년 5월 25일 ‘장로회신학교설립기성회’는 장로회신학교의 개교를 결정했고 이사회(이사장 이정노)를 조직했다. 이사회는 박형룡을 임시 교장으로 임명하고 6월 9일 남산 조선신궁 별관 자리에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했다. 장로회신학교 설립에는 이정노ㆍ이인식ㆍ이재형ㆍ김선두ㆍ김광주ㆍ노진현ㆍ권연호ㆍ김재석 등이 가세했고 남장로회가 적극 지원했다. 북장로교 선교회는 1948년 9월에 입국한 킨슬러(F. Kinsler, 권세열)에게 “한동안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지 말라”고 권고했다. [90]
김재준과 조선신학교가 1947년의 ‘진정성’ 사건과 1948년의 ‘조선신학교 개혁안’ 등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다수 지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총회는 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 고려신학교로 세력이 삼분되었으나 조선신학교 측(이후 조신 측)이 가장 많았다. 이것은 서북 교권에 대항했던 전필순을 중심으로 한 서울ㆍ경기 지역 외에도 충남ㆍ전북ㆍ김제ㆍ목포 등에서 조선신학교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 이같은 세력 균형에 변화를 일으키는 조짐이 일어났다. 1949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반민특위 활동이 조선신학교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전필순과 정인과가 체포되었다. 조선신학교 교장 송창근은 심사대상자는 아니었지만, 신경과민으로 진정제를 복용하던 중 미국 밥 존스 대학의 초청장을 받고 즉시 도미했다. 미국에서 그는 고혈압으로 6개월간 반신불수가 되었다가 가까스로 회복하여, 1950년 3월 즈음 배로 귀국했다. 킨슬러는 1949년 3월 19일 북장로교 선교부 동아시아 총무 존 스미스(John Smith)에게 보낸 편지에서 “많은 기독교 목사들이 여기에 깊이 관련되었고 한국인들 사이에 그들의 평판이 불미스럽게 되었다는 점이 우리를 아주 부끄럽게 합니다.” 또한 그는 “조선신학교 교장 송창근 박사가 미국에 있는 것이 행운이고... 시국강연, 신사참배, 미소기바라이 등으로 일본에 협조했다는 여론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변수는 장로회신학교 설립 운동에 힘이 실렸다는 점이다. 그동안 조선신학교의 신학 방향에 거부감이 있어 침묵하던 교회 지도자들은 박형룡의 등장을 구심점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결국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갈등 과정은 교권 다툼으로 전개되었다. 조신 측은 제33회와 제34회 총회(1947-1948)에서 총회장 선출에 실패했고, 부회장에 함태영과 이태학을 당선시켰다. 총회장은 2회 연속 이자익이 당선되었다. [90-91]
2. 제35회 총회의 장로회신학교 인준
장로회신학교 지지자들은 제35회 총회(1949.4.19.-23. 새문안교회)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13개 노회 중 7개 노회(충북ㆍ경북ㆍ경동ㆍ경남ㆍ군산ㆍ순천)가 ‘청원서’ 혹은 ‘헌의서’를 올렸다. [나머지 6개 노회는 충남ㆍ목포ㆍ제주ㆍ전북ㆍ경기ㆍ김제였고 기독교장로회의 설립 시에 경북노회와 군산노회, 경서노회와 함께 가담했다] 총회가 열리기 전 김재석(전남노회장)은 한국을 방문 중인 존 스미스에게 보낸 1949년 4월 11일자 편지에서 “총회는 합법적인 통일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오직 이 신학교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통일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장로회신학교 측(이후 장신 측)은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만들어 놓은 후 조선신학교의 인준을 취소하겠다는 뜻을 사전에 북장로교 선교부 책임자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제35회 총회에서 최재화(경북)는 박용희(경기)에게 49대 46의 표 차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하여 총회장이 되었다. 총회 임원 8명은 4대 4로 갈라졌다. 회장 최재화, 서기 유호준, 회록서기 안광국, 회계 이순필은 장신 측이었고, 부회장 박용희, 부서기 서정태, 부회록 서기 김종대, 부회계 김영주는 조신 측이었다. 그러나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인준하는 건은 51대 36으로 15표라는 큰 차이로 통과되었다. 이때 총대 92명 중 선교사가 16명이었다. 여기서 호주선교사 2명을 제외한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압도적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지지했다.
1949년 4월 29일자 「기독공보」는 총회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기사를 두 가지 실었다. 첫째, 박병훈(경북)ㆍ김춘호(군산 장로) 등 대체로 소장파들이 조선신학교를 향해 일방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이때 조선신학교 반대 세력은 김재준을 신학적 자유주의자라는 논점을 넘어 성서유오설을 주장하는 이단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둘째, 한경직은 “양심의 자유의 보장”을 강조하면서 김재준을 변호했다.
“장노교 신조의 제一은 성경을 믿는 것이다. 장노교의 八원리 중에 제一원리는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표준된 성경이나 신조를 믿으되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점은 다소 다를 수도 있는 일이니 그것은 자기 양심대로 믿어야 한다. …세 부분의 해석과 양심의 말단까지 통일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평화는 유지키 곤난할 것이다. 이것은 김재준 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김교수가 성경을 믿고 신조를 믿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는 이 큰 본문제에 있는 것이다.”
한경직은 성경과 신조를 믿는다면 성경 해석에 양심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며, 교권으로 김재준을 정죄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인준은 찬성했다. [92-93]
IV.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합동 시도(1949)
1. 신학교합동위원회의 활동(1949년 6-7월)
제35회 총회 이후 한경직은 두 신학교를 합동하자고 제안했다. 총대들은 세 가지 입장에서 합동 안(案)에 따랐다. 첫째, 두 개의 직영신학교는 향후 교단 분열의 씨앗이 된다는 입장, 둘째, 합동이 불가한 줄 알지만 상대방에게 구실을 주지 않으려는 입장, 셋째,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다수파의 의견을 따르는 입장이 있었다. 총회는 ‘신학교합동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은 남궁혁, 위원으로는 이창규ㆍ배은희ㆍ윤하영ㆍ이대영ㆍ아담스(북장로회)ㆍ린튼(남장로회)이었다. 신학교합동위원회는 양측에 제1안을 제시했다(1948.6.29.). 그 내용은 양 신학교의 무조건 합동, 교수진의 전원 퇴진, 양 학교에서 각각 15인의 이사를 파송해서 직원을 선정하되 30명 중 8인이 반대하면 부결한다는 것이다. 조선신학교 이사회는 양 신학교의 합동에는 찬성하지만, 이것은 교수진뿐만 아니라 학교 명칭, 건물, 재단, 학생문제 등 거론할 것이 많으니 더 연구하자고 제안했다.
합동위원회는 제2안으로 7개의 합동 원칙을 제시했다(6.30). 교명, 교칙, 집기에 관한 항목을 제외한 핵심 네 개 항은 다음과 같다.
- 신학교육은 순복음주의를 기준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준수할 것.
- 양교 직원(교수)은 전부 퇴진할 것.
- 이사회는 총회에서 승인한 이사로 조직하되 투표권은 출석원의 3/4 가결로 함.
- 교장과 교수는 이사회에서 정하되 교장은 한인 원로목사 중에서 하고, 교수는 중요 과목을 선교사로 하되, 남장로 2인, 북장로 3인, 호주, 카나다 각 1인씩 하고 기여 과목은 한인 목사 중에서 적재(適材)로 충당할 것.
장신 측과 조신 측은 제2안을 수용하지 않고 각각 요구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합동위원회는 양 측의 제안을 모아 제3안을 제시했다(7.1).
장로회신학교 이사회의 요구에 대해
- 교직원 재선에 대해서는 총회 선정 이사회에서 3/4으로 가결한다.
- 이사회 가결권을 2/3로 해달라는 요구는 거절한다.
- 교장 및 교수 결정을 이사회에 일임해달라는 요구는 거절한다.
조선신학교 요구에 대해
- 양교 현 직원을 무조건 합동하자는 요구는 거절한다.
- 교수 채용에서 선교사와 한인 구분 없이 투표하는 것은 이사회에서 3/4으로 가결한다.
결국 신학교합동위원회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여러 가지 사안이 있었지만 그 초점은 김재준 교수를 해임하는가 유임하는가의 문제였다.
2. 북장로회를 향한 장로회신학교의 요청
신학교합동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전, 박형룡은 1949년 6월 2일에 북장로회에 신학교 지원을 요청하는 영문 손 편지를 보냈다.
“북장로회의 여러분께 우리가 바라는 것은 호의적으로 재정과 교수 요원을 지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 선교회에 특별한 호의와 도움을 청하는 이유는 북장로회가 과거 신학교와 교회 발전의 황금시기에 평양신학교를 지도적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귀 선교회는 과거에 재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경건하고 학문적인 교사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같은 마음으로 우리 신학교를 교회의 영적 센터(spiritual center)의 계승으로 간주한다면, 적절한 재정과 마땅한 교사를 보내서 우리를 지원하는 것을 어찌 주저하겠습니까?”
박형룡은 이 편지에서 ‘영적 센터’라는 표현을 7번 사용했다. 한국 교회의 ‘영적 센터’였던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로 무너졌고 이제 남한에서 장로회신학교가 그 ‘영적 센터’를 계승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 글에서는 평양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하는 인물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자신을 영적 센터로 여기는 자의식이 엿보인다. 그러면서 신학교 소유권과 운영에서 북장로회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참여를 호소했다. 그는 아담스ㆍ킨슬러ㆍ크로더(J. Y. Crother, 권찬영)를 이사로 파송하고, 킨슬러를 교수로, 캠벨(Archibald Campbell, 감부열)과 보켈을 방문교수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49년 6월 13일 장로회신학교 이사장 이정노는 아담스에게 이사회 소집에 비공식적으로 참석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북장로회는 신학교 운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8월이 되어 박형룡은 북장로회에 두 차례의 편지를 보냈다. 8월 20일의 편지에서 그는 총회의 신학교 합동 노력이 실패했으니 이제 북장로회가 주도적으로 하나의 신학교를 선택하고 지원하라고 요청했다. 남장로회의 지원만으로 남한의 “영적 센터”를 회복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8월 31일 편지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선교부의 신학교 복구기금에서 재정 및 건물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다른 신학교는 충분한 건물을 가지고 결정사항 그 목적으로 귀 선교회에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처음으로 조선신학교를 언급했다. 북장로회의킨슬러는 1948년 하반기부터 장로회신학교 교수직을 시작했다. 북장로회는 그 외에 드러내놓고 한쪽을 지원하지 않았다. [95-97]
V. ‘제3의 총회신학교’에 대한 선교회들의 입장
1. 제3의 총회신학교 안건에 대한 각 선교회의 입장
아담스는 1950년 초 제36회 총회를 앞두고 입장을 바꿔서 선교사들이 참여하는 ‘제3의 총회신학교’를 세워 신학교 논쟁을 매듭지으려고 했다. 그는 1950년 2월 21일 캐나다선교회를 제외하고 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에서 영향력 있는 9명의 선교사들에게 대외비로 편지를 보내 의견을 탐문했다.
“총회신학교합동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나는 합동의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에, 합동위원회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두 신학교를 합치는 것에 의존하지 말고 그와 별도로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권위를 가진 총회가 총회 직영신학교를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기는 총회가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세우고, 다른 신학교[역주 : 조선신학교]의 결정은 별개로 하고, 그 안에 장로회신학교를 병합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성향과 수준을 갖추는 것입니다.”
호주장로회의 커닝햄(W. Cunningham)은 “총회가 현시점에서 또 하나의 신학교를 세우는 것은 혼란을 가중하게 될 것”으로 보고 이 제안에 반대했다. 그는 비록 어렵지만 한국교회가 “신앙의 견해 차이를 넓게 인정하는 관용에 이를 때 성취되는 … 신학교육의 통일”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한국교회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고 선교사들이 그 선을 넘으면 실수 또는 지혜롭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호주장로회는 미장로교회와는 달리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을 겪지 않았고, 1942-1951년 장로교회ㆍ감리교회ㆍ회중교회 사이에 연합교회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적 다양성 속 일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박형룡과 장로회신학교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광주의 녹스(R. Knox, 노라복)은 “유일한 해결책은 총회가 권위를 세워서 조선신학교에서 근대주의를 일소하던가 총회와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남ㆍ북장로회가 대전에 신학교를 세우고 장로회신학교와 합쳐서 총회신학교로 인준을 받자고 제안한다. 전주의 린튼(W. B. Linton, 인돈)은 장로회신학교와 합하는 제3의 총회신학교 제안을 지지했다. 순천의 의료선교사 엉거(J. K. Unger, 원가리)는 3월 1일에 모인 순천선교지부의 입장을 모아 ‘제3의 신학교’를 반대하면서 “장로회신학교가 우리 입장을 대표하는 유일한 신학교”라고 말했다.
한국인 지도자들 중 아담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안동의 크로더가 아담스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손 편지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제 김광현 목사가 신학교와 관계된 계획을 갖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두 신학교를 폐지하고 선교사와 한인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설립해서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된다면 교장으로서 최고 적임자는 솔타우(Soltau)라고 제안했습니다. … 나는 비슷한 노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에게 말해 주었지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97-100]
2. 김재준과 송창근의 노력
1949년 말 김재준은 「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이념」이라는 문건을 조선신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그 내용은 1896년 레널즈가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 지도 방향을 설계한 내용을, 장단점으로 언급하면서 비판한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모토가 “자유로운 나라의 자유로운 교회”였음을 강조하면서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의 지도원리”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그 내용은 조선신학교창립 10주년 기념대회(1950.3.31.)에서 별지로 배포되었다. 김재준은 제36회 총회를 앞두고 신학교 합병에 반대하면서 조선신학교의 정체성과 방향을 강조했다.
1949년 말 미국에 체류하던 송창근은 매코믹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칼빈 주석의 편집자인 조셉 헤로투니언(Josehp Haroutunian)에게 김재준의 어려움을 전하면서, 김재준의 신학 진술을 동봉했다. 해로투니언은 1949년 12월 19일 송창근에게 보낸 편지에 김재준의 신학사상은 미국장로교회 입장에서 문제될 것이 없으며 그가 당하는 고통에 공감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 신앙고백서는 신앙과 행위에서 성경의 권위를 말하며 축자영감을 주장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 계시의 증인은 하나님이고 성경의 기록자가 아니라는 김교수의 말은 옳다.
- 17세기 칼빈주의와 존 칼빈의 칼빈주의를 종일시하는 것은 역사적 무지함이다.
- 칼빈과 바울의 예정론은 구원론적인 것이지 모든 일상의 예정이 아니다.
-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필요와 조건에 맞추어 주어진 것이라는 김교수의 견해를 지지한다. 김교수를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내모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아니고 죄다.
1950년 3월에 귀국한 송창근은 이 편지를 인쇄해 제36회 총회에 배포하며 자신과 김재준의 신학을 변호하려고 했다. 조신 측은 또한 “한국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배포하며 선교사들의 내정 간섭행위를 비판했다.
“일부 선교사들이 현재의 한국장로교회를 다른 교단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선한 뜻으로 그들에게 제공한 투표권을 남용해서 한국교회의 분열에 개입하고 있다.” [100-101]
3. 조선신학교 신학에 대한 북장로회의 입장
아담스는 1950년 5월 9일 해로투니언에게 편지를 보내서 사적인 편지가 총회에 배포되었다고 알려주며, 한국의 신학교 갈등을 바라보는 북장로회의 입장을 설명했다. 아담스는 미국교회가 한국장로교회의 논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한국 상황에 대한 판단 없이 이 논쟁에 뛰어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며 과거 일제강점기에 송창근과 김재준이 협력자였다고 비난받은 상황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논쟁은 약 80%가 교권투쟁이고, 신학적인 문제는 10-15%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공개적으로 논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저도 김교수의 진술을 읽었을 때 역시 거의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장로교 사상 체계에서 그의 신학은 관용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갔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제가 듣는 말입니다. 김교수의 진술은 귀하의 편지로 쉽게 옹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선교부의 원칙은 가능한 이 논쟁에서 멀리 있는 것이고 한국인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신사에게 비판적이라고 기록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아담스는 신학교 갈등 안에서 교권투쟁이 진행되고 있으며, 김재준을 공격하는 세력이 편협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한국교회의 갈등과 교권투쟁에 미국교회가 끼어드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입장은 미북장로교 선교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1950년 12월 9일 킨슬러가 존 스미스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난다. 킨슬러는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조선신학교와 남장로회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킨슬러는 자신의 입장을 편지를 통해 변호한다.
“믿어주십시오. 나는 본부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폭넓은 범위를 가진 하나의 신학교를 통해 모든 그룹을 함께 묶어서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의심을 받았고 심지어는 극단적 보수 그룹은 제 방식에 대해 거부했습니다. 풀턴 박사[역주 : 남장로교 선교부 총무]는 그의 선교부의 원로선교사 일부가 나에게 크게 실망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북장로교 선교부 본부의 입장은 하나의 신학교 안에 모든 그룹을 묶어서 교회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 교수 출신으로 장로회신학교 교수인 킨슬러는 조선신학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 부분에 대한 비난이 커지자 킨슬러는 편지를 통해 자신을 방어하는 입장을 보였다. 두 신학교를 합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장로회는 한국교회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도, 1950년 초 총회신학교를 세워서 장로회신학교를 흡수한다는 계획을 가졌다. 그들은 양쪽의 화합이 불가능하고,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평양신학교를 계승한다는 명분과 다수가 따를 가능성이 있는 장로회신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총회신학교 계획은 전쟁으로 1년 연기되었다. [102-104]
VI. 총회신학교 설립ㆍ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직영 취소(1950)
1. 제36회 총회
제36회 총회(1950.4.21.-25. 대구제일교회)는 5일간 격론을 벌이며 공전했고, 욕설과 폭력이 일어나 무장 경찰이 개입해 정회하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조신 측은 중앙선교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장신 측은 경남 5개 노회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김길창계는 1949년 3월 8일 소수가 모여 별도의 노회 허락 없이 경남노회를 분립했다. 총회는 전권위원 5명을 구성해 경남노회 지역을 삼분하고, 김길창계 보호를 결정했다. 이에 고신 측 경남법통노회가 반발하고, 그 와중에 박형룡계 중립파도 생겼다. 사실상 경남노회는 5개로 나눠졌다. 장신측 입장에서는 5개 중 3개 노회가 조신 측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총대권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제36회 총회는 이같은 혼란 중에서도 “성경유오설을 주장하거나 선전하거나 옹호하는 자를 각 노회에 명령하여” 엄중 처리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신학교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결의했다.
“신학교 문제는 각 노회 대표 2인씩, 총회 임원 4개 선교회 대표 1인씩과 신학교 합동위원(언권만)이 7월 상순에 청주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성안을 얻어 이를 각 노회에 수의(垂議)하여 표결 수의 과반수로 결정키로 할 것.”
그러나 6ㆍ25전쟁이 일어나고 7월에 청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연석회의가 취소되면서 성안을 하고 노회 수의하는 과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2. 제36회 총회 속회
6ㆍ25 전쟁 중에 진행된 제36회 속회 총회(1951.5.21.-29. 부산중앙교회)에서는 조신 측과 장신 측의 교권 균형이 급격히 깨졌다. 또한 송창근의 납북은 조선신학교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게다가 전쟁으로 군작전 지역과 민간인 여행 금지지역에 거주하는 총대들이 부산 총회로 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별히 조신 측 총대들 다수는 경기ㆍ충남ㆍ전북ㆍ군산ㆍ목포에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미군 군목의 자격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자파 총대를 데려올 수 있었다. 속회 총회에서 조신 측은 51대 56으로 5표 차의 소수파가 되었다. 이전 총회장 선거에서는 차점자가 부회장으로 선출되는데 속회 총회에서는 5표 차의 다수표를 이용해 모든 개별 임원을 투표했다. 8명의 임원 중 조신 측 임원은 김종대(부서기)와 서정태(부회록 서기) 둘이었다.
- 회장 : 권연호
- 부회장 : 김재석
- 서기 : 김상권
- 부서기 : 김종대
- 회록서기 : 강인구
- 부회록서기 : 서정태
- 회계 : 정일영
- 부회계 : 김교완
신학교문제특별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두 신학교의 이사회를 해체하고, 9월에 총회신학교를 설립하여 모든 자원을 총회신학교로 합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총회와의 관계 유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총회에서는 이 보고서를 안건으로 삼아 표결에 부친 뒤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으며 다음 사항을 결의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 위해 과도 이사를 총회에서 선정하되 과도 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위원으로 하기로 가결하다.”
조신 측에서는 김세열ㆍ서정태 외 8명이 이 결의를 헌법과 총회 결의에 대한 위법행위라고 지적하며 항의서를 제출했다. 그 이유는 첫째, 제36회 총회 본회의에서 결의한 대로 신학교 문제는 노회 수의를 해야 하며, 비상사태로 인해 시행할 수 없을 경우 전회(前會)의 결의를 번안(飜案)하여 새로운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신학교문제특별위원회의 보고서는 보고내용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며, 총회는 안건에 대해 정식 토의와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양선은 두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총회가 보고내용을 정식 안건으로 인정하고 거수결을 거쳤기 때문에 일단락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첫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경남법통노회를 배제한 것과 교권으로 저지른 위법적 행동을 인정했다. 한편 다수파들은 김재준 파면, 조선신학교 인가취소, 위임된 조선신학교 출신 목사들에 대한 노회의 재심사 등을 제안했다.
속회 총회에서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를 정죄한 총회지도자들은 경남의 김길창계는 받아들이고, 경남법통노회(마산노회)에는 입장권을 주지 않았다. 이것이 총회에서의 고신 분열을 가져왔다.
조신 측은 속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가 총회 직영은 되지 못해도 총회가 인정하는 신학교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후 총회로부터 배제되면서, 조선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1951년 9월 총회신학교는 대구에서 수업을 시작했고, 노회 대표와 선교사로 이사회가 구성되었다. 초대 교장은 캠벨이 임명되었다.
한편, 6ㆍ25전쟁 과정에서 월남한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피난시키고 구호물자를 공급하는 데 공헌한 선교사들은 총회에 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들과 월남한 목회자들 사이에는 깊은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총회신학교가 대구에서 개교할 때 학생들의 3/4은 실향민이었다. 이것은 향후 서북 교회가 남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신 측과 장신 측의 세력 균형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양측은 공존의 가능성이 컸다. 만일 6ㆍ25 전쟁 이전에 장로교회가 분열되었다면 교단은 거의 반반으로 분열되었을 것이다. [105-108]
VII. 김재준과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교)의 정죄와 퇴출(1952-1953)
1. 제37회 총회와 이북노회
제37회 총회(1952.4.29.-5.2. 대구 서문교회당)는 15개 노회에서 125명의 총대(선교사 총대 13명)가 모였다. 당시 총회장 김재석과 서기 김상권 등 전 임원이 김재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총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북노회 10개가 월남한 것으로 인정하여 제31회 총회(1942) 당시 총대 수 78명을 새로운 총대로 받았다. 1950년대 중반까지 신설된 약 2,000개의 교회들 중 90%가 피난민이 세운 교회였다. 피난민 교회들은 실향민의 고통을 보듬고 격려하면서 남쪽의 교회와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문화를 유지했다. 장로교 총회가 이북노회를 받아들인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78명의 새로운 총대를 수용한 것은 과도한 대표권이었고, 조선신학교를 배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포함된 결과였다.
총회에서 다수파는 조선신학교와 관련해 네 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첫째,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장로교 목사 후보생 자격을 주지 않는다. 둘째, 김재준 교수의 목사직을 면직하고 해당 노회(경기노회)에 그 사실을 본인에게 통지하라고 지시한다. 셋째, 조선신학교 캐나다 교수 스코트에게 해당 노회(함남노회)에서 조사를 받도록 지시한다. 넷째, 조선신학교와 위의 두 교수가 교수한 견해를 승인, 지지, 전파하는 모든 회원들을 조사해서 징계하도록 각 노회에 지시한다.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과 스코트를 정죄하자고 발언한 사람은 박내승(경동노회장)이고, 이북노회 총대권을 헌의한 사람은 김윤찬(평양노회)이었다. 비상사태 선언을 요청한 6인의 대표는 권연호(경기노회)였다. 훗날 1957년 박형룡 교장의 삼천만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내승(총무과장)과 김삼대(부지위원장)는 각각 481만환을 학교에서 받았으며, 김윤찬(임시 사무처장)은 67만환을 받아갔다.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를 배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은 총회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를 보좌하는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1952년 7월 8일 항의 그룹들은 대구제일교회에서 호헌대회를 소집하고, 세 가지 이유로 총회를 기소하며 그 결정에 대한 취소를 요구했다. 첫째, 김재준과 스코트를 재판 없이 유죄 판결한 것, 둘째, 노회의 수의(垂議) 없이 신학교 안건들을 직접 표결한 것, 셋째, 한국신학대학교(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 교회를 섬길 기회를 주지 않는 것 등이다. [108-110]
2. 제38회 총회와 기독교장로회의 출범
제38회총회(1953.4.24.-28. 대구 서문교회)는 25개 노회에서 188명의 총대가 모였다. 이북노회 총대 숫자는 69명이었다. 이북노회가 총대를 파송하면서 김재준을 옹호하는 총대들은 절대 소수파가 되었다. 총회는 김재준을 면직하고 한국신학대학교를 최종적으로 배제했으며, 호헌대회에 참가한 모든 사람과 성경무오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강력하게 징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총회신학교 교장을 선교사에서 박형룡으로 변경하는 청원도 허락되었다. 전필순(경기노회장), 구연직(충북노회장), 박용희(목포노회장)는 김재준 목사의 면직과 본인의 진술 없는 징계, 한국신학대학교 졸업생에 대한 목사안수 거부, 노회 수의 없이 한국신학대학교의 직영을 취소한 것의 부당성을 시정해달라고 헌의했으나, 총회의 다수파는 1952년 37회 총회의 결정을 그대로 시행한다고 결의했다. 반면 정규오(순천노회장)가 이른바 호헌대회에 참석한 총대와 그들의 성명서에 서명한 총대에 대해 총대 자격을 주지 말자고 한 헌의는 그대로 허락했다.
제38회 총회 석상에서는 장로교 신학 노선에 대한 강원용과 박병훈의 논쟁도 있었다. 강원용은 한국신학대학교의 방향이 세계 장로교회의 주류 노선인 프린스턴과 매코믹과 에든버러 신학교의 신학 노선을 지향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병훈은 김재준의 신학은 슐라이어마허, 리츨, 벨 하우젠의 비평학을 따르는 자유주의이고,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신정통주의이며, 헤겔식 변증법을 방법론으로 사용한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은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따라 성경대로 믿는 신앙임을 주장했다. 강원용이 장로교회 안에서 다양성의 공존을 모색하려 했다면, 박병훈은 신앙적으로 이설을 가진 자와 공존할 수 없다는 적대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박형룡은 이때의 박병훈을 향해 “한국의 아타나시우스”라고 평했다.
이로 인해 노회와 개교회에서는 분열이 일어났다. 한국신학대학교 지지자가 다수파인 노회에서는 반대파들이 탈퇴했고, 반대로 한국신학대학교 반대파가 다수인 노회에서는 지지자들이 탈퇴했다. 1953년 6월 10일 한국신학대학교 강당에 9개 노회(전북ㆍ군산ㆍ김제ㆍ충남ㆍ경서ㆍ경북ㆍ목포ㆍ충북ㆍ제주) 47명의 대표가 모여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했고, 김세열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111-112]
VIII. 맺음말
김재준과 조선신학교가 한국교회에 던진 메시지는 신학적으로는 신학의 세계성, 자율성, 교권투쟁에 이용되지 않으려는 건설적 신학을 과제로 삼은 것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서북 장로교회의 교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 교역자들 중 다수는 평양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고,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었다. 또한 복귀한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위기 속에서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는 그 뜻을 실현하기가 어려웠다. 다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의 박해와 6ㆍ25전쟁 위기 가운데, 교회의 생존을 위해 박형룡으로 대표되는 보수신학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갈등은 신학 교육방식의 차이를 넘어 교권투쟁, 지역갈등, 감정적 상처로 얽혀있었다. 서북 장로교회는 1938년 이후 신학교육의 주도권을 놓쳤고, 해방 이후 남한에서 생존하면서 강력하게 단결했으며, 신사참배 문제를 신학적 자유주의의 문제와 연결시키면서 평양신학교의 보수신학 회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남 법통노회를 배제하고 김길창계 노회를 승인하는데 협조하기도 했다. 함경도, 호남의 일부, 서울 경기지역의 장로교회의 다수는 서북에 패권을 다시 부여하지 않기위해 조선신학교를 지지했다.
캐나다선교회는 조선신학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호주장로회는 한국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려고 했으나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남장로회는 처음부터 박형룡의 장로회신학교를 지지했다. 북장로회는 1949년까지 외면상 중립을 지켰으나 신학교 합동운동이 실패하면서, 1950년부터 선교사와 한국인으로 구성된 총회신학교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50년 4월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세웠다. 총회신학교의 신학교육은 교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 데 공헌했으나, 복고적이었고 교권투쟁에 이용되었다. 이 점은 계속되는 장로교회의 분열을 예고한다.
1949년까지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사이의 팽팽한 세력 균형을 깨뜨린 것은 6ㆍ25전쟁이었다. 총대들이 대구와 부산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총회의 다수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북 10개 노회 78명의 총대를 인정함으로써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를 배제하는 지원을 받았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갈등과 배제의 역사는 향후 일어나는 교권갈등과 교단 분열에 영향을 준 나쁜 선례를 남겼다. 예를 들면, 정치적 반대 세력에게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교권으로 정죄하는 경향이 생겼고, 교권의 유익을 위해 비법과 불법을 용인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교권갈등을 신학적 정통성 유지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나쁜 선례들이 지속되지 않도록 교권과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려고 했다.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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