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1959년 한국장로교회 분열 : 통합ㆍ합동의 역사 해석의 차이”
정병준, 『한국교회 역사 속 에큐메니컬 운동』, 115-139쪽 중에서
I. 머리말
분열된 장로교회들은 자기 교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교단 옹호적인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 한국장로교회 분열에 대한 연구들이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객관적이지 못했다.
첫째, 한국장로교회 분열에 대한 초기 역사는 주로 분열 당사자들의 기록과 기억에 근거했기 때문에 교단별로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해석이 고착화되었다. 둘째, 분열 당사자들은 각 교단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 후배들이 사건 상에서 그들의 약점을 지적하기 어려웠다. 셋째, 교회 분열 사건을 다룰 때 실증적 사실보다 교권의 이익과 신학적 가치 평가에 우선 순위를 두면서 객관적 평가를 하기 어려웠다. 특히 선교사들은 교단 분열 직후 교단 화해 운동을 시도하면서 자신들의 기독 자료를 노출하지 않았다. [115-116]
한국장로교회 분열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연구할 방법은 있다. 첫째, 분열 당사자들이 다르게 해석하는 사건을 교차 비교해서 차이점을 살피는 것이다. 둘째, 양쪽의 주장을 비교하면서 역사적 개연성을 찾는 것이다. 셋째, 분열 사건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평가한 역사 자료를 발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사건을 직접 경험한 선교사들의 편지와 보고서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넷째, 교회 분열에 대한 신학적 큰 가치 판단을 보류하고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사회학은 갈등의 원인을 복합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교회 분열을 신학적인 이유로만 보려는 시각의 한계를 넓혀줄 수 있다. [116]
II. ‘삼천만환 사건’과 ‘WCC 신학논쟁’에 대한 해석 차이
한국 교회사가들은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한국장로교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세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는 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첫째는 총회신학교 박형룡 교장과 부지위원회의 신학교 공금 삼천만환 손실 사건이고, 둘째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신학적 차이이며, 셋째는 경기노회 총대 선거를 둘러싼 에큐메니컬 측과 한국복음주의협의회(NAE :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측과의 교권 경쟁이다. [117]
합동 측은 1959년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근본 원인은 WCC가입과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논쟁이었고 ‘삼천만환 사건’은 WCC지지파가 박형룡과 반-WCC파를 공격하는 논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17]
통합 측의 김인수는 박형룡의 ‘삼천만환 사건’을 분열의 근본 원인으로 보고 있다... 통합 측이 ‘삼천만환 사건’을 교단 분열의 주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록 ‘WCC 찬반논쟁’은 있었으나 NAE 측이 교권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분열의 이유가 되지 않았으나 ‘삼천만환 사건’ 이후 NAE가 신학교와 교권에서 주도권을 잃을 위기가 왔을 때, 약화된 교권을 만회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WCC와 에큐메니컬 지지자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118]
박응규는 ‘삼천만환 사건’ 이후, 박형룡의 복귀를 희망하는 추종자들이 신학논쟁을 자극한 면이 있지만 “삼천만환 사건을 무마하려고 신학논쟁을 시작했다기보다는 [그것이] 기존의 갈등 관계를 더 심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평가했다. 합동 측이 ‘삼천만환 사건’을 주원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WCC 찬반논쟁’을 원인으로 강조하는 것은, 합동 측에 보수정통주의를 지키려는 신학적 충실함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118-119]
1953년 이후 장로교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컬 측과 NAE 측 사이에 ‘WCC 신학논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양측의 신학갈등은 교권투쟁으로 표현되었으나 교단 분열까지 의도하지 않았다. 양측은 신학갈등이 증폭되면 적절하게 타협점을 모색했다. 예를 들면, 1957년 제42차 총회에서 NAE 측과 에큐메니컬 측은 ‘에큐메니칼연구위원회’를 통해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모색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지도자들 중에는 두 가지 사상적 조류가 있는데 ① 전 교파를 합동하여 단일교회를 목표로 하는 이와 ② 교회 간의 친선과 사업적 연합을 목표로 하는 이가 있다. …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연속 참가하기로 하며”
또한 1959년 4월 11일에도 양측은 교단 분열을 막고 교회 평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해명서」를 발표했다. 그중 일부는
- 제42회 총회 결의대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파 간 친선과 사업에 한하고 단일교회 운동은 하지 않는다.
- 에큐메니칼 운동과 NAE 운동은 교회 정치에 대하여 직접으로 관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 우리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은 승인하나 교회의 연합기구인 WCC나 기타기관이 우리 교회의 순수한 신앙과 행위에 지향하는 바에 저해할 때는 이에 대해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한다.
「해명서」는 교단 분열이 일어나기 5개월 전까지도 총회 지도자들이 WCC가 단일교회 운동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친선과 사업에 협조한다고 합의하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양측의 합의를 깨는 새로운 조건이 없었다면 WCC 신학논쟁을 교단 분열의 주원안으로 보기 어렵다. [119-120]
통합 측과 합동 측 모두 ‘삼천만환 사건’이 박형룡 교장의 행정 미숙 혹은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1958년 총회가 임명한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위원장 양성봉 장로)가 당사자들을 조사하고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박형룡이 임명한 신학교 부지위원들 사이에 부정직한 재정거래가 있었고, 박형룡은 로비스트 박호근의 고소(외환불법거래)를 피하려고 사기당한 공금 회수를 포기하려 했던 정황이 드러났다. 이렇듯 ‘삼천만환 사건’은 박형룡과 그 측근의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폭로될 경우, NAE 교권에 큰 타격이 갈 상황이었다. 에큐메니컬 측은 1959년 총회에서 이 사건을 공개화하고 공론화할 기회를 노렸고, 장로교 NAE 측은 이 사건을 방어해야 했다. [120-121]
‘삼천만환 사건’은 신학교 주도권 문제를 넘어서 여러 가지 윤리적 사건들과 함께 NAE 측이 장악하고 있었던 교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파급력이 있었다. [121]
1959년 분열의 원인은 총회를 앞두고 교권을 지키려는 NAE 측과 그것을 끝내려는 에큐메니컬 측 사이의 교권투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121]
‘WCC 신학논쟁’을 한국장로교 분열의 주원인으로 볼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의 여파로 세계교회의 흐름을 알지 못했고, 신학적 경험과 언어의 한계로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형룡이 WCC를 비판하는 근거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칼 매킨타이어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장로교의 분열 과정에서 대부분의 목사들과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따라 교권, 지역, 인맥으로 분열했다. 이것이 진정 신학논쟁으로 칭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 한국장로교회 안에는 NAE 측과 에큐메니컬 측을 지지하지 않는 중립 측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이상근ㆍ임옥ㆍ김세진ㆍ방지일 등은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았고 총회 재연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최종 재연합이 실패하자 통합총회로 합류했다... WCC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유로 통합 측을 택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WCC 때문이 아니라 지역, 인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열의 한쪽을 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일관되지 않고 변화하였다. 해방 후부터 삼천만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그는 미국 선교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했고 그 지원에 힘입어 신학교를 운영했다... ‘삼천만환 사건’ 이후 그는 WCC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타협적 입장에서 공격적 입장으로 바꾸었다. 교권을 장악하고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자신의 위치가 불리해지자 WCC와 에큐메니컬을 공격하는 태도를 강화한 것이다.
- ‘WCC 찬반논쟁’이 원인이라는 주장은 후대에 와서 ‘WCC 원인론’으로 변화했다. WCC 때문에 교단이 갈라졌다는 주장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의 분열 과정에 WCC가 개입한 일은 전혀 없었다. 단지, 한국장로교 안에서 ‘WCC 찬반논쟁’을 WCC 이슈로 만들어서 분열했던 것뿐이다. [122-124]
III. 경기노회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
해방 이후 남부총회에서 총회신학교로 인정됐던 조선신학교와 김재준은 박형룡과 그의 지지 세력에 의해 신학적으로 단죄되었다. 이것은 입국한 선교사들과 월남한 서북 교인들이 힘을 합해서 박형룡을 지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24]
경기노회 에큐메니컬 측은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하면서 정치적으로 약화됐으나, 노회 내 7대 3의 비율을 이루며, 여전히 강력한 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59년 5월 14일 경기노회 총대 선거에서 NAE 측이 16대 12로 승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것은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다.
[경기노회 정기노회 총대 명단, 1959년 5월]
NAE | 에큐메니컬 | |
목사 | 이환수, 서재신, 이대영, 황은균 권연호, 박찬목, 황금천, 백매수 |
한경직, 강신명, 전필순, 배명준 이태준, 김세진 |
장로 | 이광옥, 고찬영, 박희몽, 심 천 이규현, 민상기, 이용성, 김자경 |
서병호, 유 익, 강만유, 이백산 한영생, 정용태 |
- 이 명단은 황금천을 포함시킨 NAE 측의 총대 명단이다. 선행연구자들은 경기노회 총대중 NAE 측을 18명 에큐메니컬 즉은 10명으로 기록했다. 김성준, 『한국교회사』(서울:기독교문화사, 1993), 259. 그러나 이후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된 이후 양측의 총대 명단과 비교하면 16대 12가 정확하다.
폐회 후에 총회 전도부 총무 황금천 목사는 자신이 탈락된 것에 이의를 제기했고, 노회 임원들이 투표용지를 재확인한 결과 그가 80표를 얻어 당선권 안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환수 노회장, 강신명 부노회장, 서기와 개표위원 몇 사람은 투표지와 계산 명세표를 인봉한 후,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5월 19일 노회 임원, 개표위원 등이 모여 투표 결과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재개표해야 한다는 임사부장 전필순 주장 대신 임원이 개표할 수 있다는 규칙부장 이인식의 주장을 받아들여 임원이 재검표를 했다. 그 결과 “다수표의 차이가 있었으며 한두 사람의 당락 차이도 있었다.” 임원회는 가장 적은 표를 얻은 사람을 명단에서 빼고, 황금천을 총대 명단에 넣어 노회촬요에 발표했다. 그러나 노회원들 사이에서 임원회가 노회 허락 없이 총대 투표지를 재검표한 것이 문제가 되자, 임원회는 총사직하기로 하고 6월 11일 임시노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임시노회에서 NAE 측은 임시노회가 임원 사임권을 다룰 수 없다고 주장했고, 다른 편은 안건이 올라왔으니 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반론했다. 그러자 NAE 측이었던 이환수 노회장은 돌연 비상정회를 선포하고 퇴장했다... 6월 18일 87명의 회원이 모인 자리에서 이환수 노회장은 비상정회 선언을 해제한다고 선언하고, 6월 29일 승동교회에서 임시노회로 모일 것을 합의하였다.
6월 29일 87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회장 강신명의 사회로 임시노회가 진행되었다. 강병모는 임원회의 검표를 인정하자며 동의했고, 김용준은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개의안을 냈으며, 임옥은 정기노회 투표용지를 검사하고 그것을 인정하자고 재개의했다. 세 안건 중에서 노회장이 “재개의”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65대 65 동수가 나왔다. 노회장은 결정권을 사용해서 가결을 선포했다. 1955년에 개정된 총회 헌법(정치)는 “만일 가부가 동수가 되는 경우에는 회장이 결정하고 회장이 此를 不願하면 해안건은 자연 부결되나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이환수의 결정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노회원들 사이에서 개의와 동의에 대해서 왜 가부를 묻지 않는가의 항의가 있자 노회장은 자신의 결정을 취소하고 개의에 대한 가부를 질문하려고 했다. 이 항의는 잘못된 것이었다. 회의 진행상 재개의 안건의 통과되면 개의안과 동의안에 대해 가부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결정을 취소한 이환수 노회장도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양낙홍은 이환수가 회의법에 무지했거나 확신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환수가 회장에게 부여된 정회 권한과 결정권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회의법에 무지했다기보다는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서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취소하고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혼란이 더 가중되었다. 강만유 장로가 사회자 교체를 요구하자 회장은 일시 자진 퇴석했다. 잠시 정회 후 속회했을 때 NAE 측 회원 40여명 이상이 회의에 불참했다. 속회 후 개의와 동의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김용준 개의안에 81표가 나왔고, 강병모의 동의안에 9표가 나왔다. 임옥의 재개의 안건에 찬성했던 회원 중 16명이 총대 재선거를 지지하는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임옥의 재개의를 오해하고 찬성했거나, 아니면 경기노회 NAE 측에 대한 불신 때문에 개의안으로 돌아서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재선거 결과는 28명의 총대 중 26대 2로 에큐메니컬 측이 압승했다. [안광국은 이대영을 제외한 전체를 에큐메니컬 측이라고 증언하지만, 이광옥 장로는 NAE 측이었다. “제44회 총회는 분열되다-비화선교백년(39),” 「기독공보」(1975.11.15.)] 이것은 경기노회 임시노회의 NAE 측이 대거 불참하여 일어난 결과였다. 그들은 이미 논란의 소지가 있는 정기노회에서의 총대 명단을 총회에 그대로 제출하겠다는 결정을 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총회 임원의 대부분이 NAE 측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이 또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경기노회 임시노회 총대 명단 – 1959년 6월]
NAE | 에큐메니컬 | |
목사 | 이대영 | 강신명, 김덕수,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이태준, 용회창, 고봉윤, 이성규, 이영의, 최중해, 김세진, 정기환 |
장로 | 이광옥 | 서병호, 진석오(연동), 강만유, 유익, 이규석, 김봉충(승동), 유자수(남대문), 강신규(마포), 정용태(해방), 석선진(새문안), 전흥경(한양교회), 표재환(왕십리) 한영생 대신 허봉락(새문안) |
박용규와 양낙홍은 정기노회 투표결과를 재점검하여 결정하자는 임옥의 재개의 안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은 에큐메니컬 측이 패배한 선거를 다시 뒤집기 위해 임시노회에서 총대 재선거를 요구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문제는 선거의 공정성에 문제를 일으키고, 절차를 어겨 불신을 조성한 NAE 측의 불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선교사들의 기록은 “정기노회 투표용지는 이환수 노회장의 손에 너무 오래 보관되어 있어서 그 진실성이 의심받았다”고 말한다. 임옥의 재개의 안건이 관철되지 못한 것은 에큐메니컬 측의 재선거 요구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이환수 노회장이 자신의 정당한 결정을 갑자기 뒤집은 것 때문이다. 또한 총대 재선거의 과정에서 NAE 측이 전략적으로 불참석한 것도 상황을 잘못 판단한 불찰이었다. [124-129]
IV. 제44회 대전총회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
1959년 9월 24일 대전 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에서는 양측의 합의에 따라 경기노회를 제외한 각 노회 총대들이 “임시”와 “정기”라는 부호를 가지고 투표한 결과 124대 119, 기권 5표로 임시노회 측이 총대로 결정되었다. 총회장 노진현은 임시노회 총대가 정식 총대로 총대석에 앉도록 선포하였다.
그러나 NAE 측 총대들은 패배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합동 측 연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를 비판한다. 첫째 중립을 지켜야 할 선교사 23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5표 차이로 임시노회 측이 이겼는데, 선교사 표를 제외하면 한국인 지지자는 소수표라는 주장이다. 둘째, 총대는 정기노회에서 선출되어야 하며 임시노회는 총대 선거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주장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있다. 박용규와 박응규는 정규오의 주장에 따라 선교사 총대가 23명이라고 계산했는데 실제 선교사 총대는 19명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심각했던 경기노회에는 선교사 총대가 없었다.
- 미연합장로회 : 옥호열(한남), 허일9충북), 보계선(충남), 어라복, 구의령(경북), 부례문(경동), 라의수(경서), 우열성(경주)
- 남장로회 : 김기수(대전), 심득민, 조요섭(전북), 박대위(전서), 부명광, 조요한(전남), 보이열, 인휴(순천), 한부만(목포)
- 호주장로회 : 서덕기(경남)
그리고 19명의 선교사 총대 중 미연합장로회 선교사 8명과 호주장로회 선교사 1명은 임시노회 측 총대를 지지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남장로회 선교사 총대 9명 전원이 임시노회 측 총대를 지지했다고 볼 수 없다. 린튼(William Linton)을 비롯한 상당 수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오랫동안 박형룡과 호남 NAE의 성장을 지원했다... 합동 측 역사가들의 주장대로 모든 선교사 총대들이 에큐메니컬 측을 지지했다면, 최소한 남장로회는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NAE 측의 윤리적 문제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본국 교회가 WCC 회원교회였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측을 지지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선교사들은 1947-1953년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대립할 때 조선신학교와 김재준을 축출하는데 협조했고, 한국장로교회 신학교를 이끌어갈 인물로 박형룡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합동 측 역사가들이 1959년 장로교 분열 과정에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에도 온당치 않은 부분이 있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분열에 개입한 것은 1959년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1952년 제37회 총회가 김재준을 제명할 때에도 선교사들의 개입이 있었다. 당시 김재준 제명에 찬성과 반대 사이의 표 차이는 불과 8표였다. 당시 선교사 총대는 12명이었다.
- 북장로회 : 권세열, 옥호열, 감의도(경기), 감부열, 우베례(경북), 권찬영(경안), 라이온(경동)
- 남장로회 : 조요셉(전북), 조하파(목포), 타요한(제주)
- 호주장로회 : 라례인(경남)
선교사들은 12표의 투표권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 자파 총대가 부산 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교통편도 제공했다. 그 결과 박형룡과 NAE 측은 총회신학교의 지도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59년의 분열에 선교사가 개입한 것만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1957년 삼천만환 사건 이후 NAE 측은 미연합장로회 선교사들과 지속적인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NAE 지도부의 일부가 비윤리적으로 선교회 재산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분실된 삼천만환 안에도 선교부가 지원한 재정이 포함되어 있었고, 1957년 대구 NAE는 선교회와 경북노회 사이에 맺은 정관을 폐지하고 선교병원과 미션스쿨의 경영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1958년 말 경북노회 서기는 캠벨 선교사 사인을 위조해서 신명여학교 기숙사 블레어관을 개인소유로 변경했다. 1959년 NAE 측이었던 총회 서기는, 선교회가 지원한 총회 회의록 인쇄비와 태국 선교비에 대해 스캔들을 일으켰다.
두 번째 갈등 이유는 1958년 미북장로회와 해외선교부가 명칭을 ‘미연합장로교회’와 ‘에큐메니칼 선교와 관계위원회’로 변경한 후, 한국장로교총회 헌법에서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실시한 노회 수의 과정에서 NAE 측이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 때문이다. 그러면서 선교 재정을 한국교회로 이양하는 것은 환영하고 수용했다. 이런 과정에서 NAE 측은 미연합장로회가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다 넣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선교사들이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패배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선교사들에게 돌린 것이다.
경기노회 정기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들이 정상적으로 총대가 되지 못한 것은 에큐메니컬 측의 책임이 아니다. NAE 측의 개표 오류, 임원들의 불법적인 투표용지 재점검, 이환수 노회장의 결정 철회, 총대 재선거 과정에서 NAE 측 회원들의 불참이 일차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정기노회 총대만을 합법적 총대로 인정한다면 대전총회에서 투표로 경기노회 총대를 결정한다는 안건에 합의하지 말았어야 했다. 합의한 이후에 선거에서 패배한 후 합의를 뒤집은 것은, “약 오른 패배자의 비신사적인 태도”였다. 이 부분은 박응규 교수가 아주 객관적으로 지적했다.
“이 상황에서 임시노회에서 선정한 총대 건도 문제였고, 선교사들이 일방적으로 한편을 지지한 것도 문제였지만, 일단 그 안을 받아들여 투표에 부친 이상 그 결과에 승복했어야 했다.”
또한 대전총회가 열리기 전에 NAE 측 임원들은 두 가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다. 제44회 총회의 개최장소는 원래 새문안교회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총회소집 공고에 개최장소를 대전중앙교회로 발표한 것이다. 처음에 총회가 공식적으로 총회 장소를 대전중앙교회로 교섭했을 때는 양화석 목사와 교회가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미연합장로회의 협동사업부 통합식을 거행하는 것도 고려하여 새문안교회를 총회 장소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 당시 군산노회의 이창규 목사를 총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자, NAE 측 총회 임원들이 총회 장소를 갑작스럽게 대전중앙교회로 변경했다. 강신명이 시무하는 새문안교회에서 총회를 할 경우 부총회장 양화석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또 다른 의심스러운 행동은 개회 한 달 전에 총회 총대 명단을 모든 총대에게 통지해 주어야 하는데, 44회 총회는 총회가 개회하고 총대 호명 시간이 되었을 때 총대들에게 명단이 배부된 것이다.
9월 28일 총회 4일 째까지 NAE 측은 경기노회 총대 건을 문제삼아 정상적인 회의 진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총회의 가결을 얻어 증경총회장들과 회의를 해서 다음과 같은 안을 제시했다.
- 현 총회 정세로는 회무의 원만한 진행이 곤난하므로 11월 24일 화요일까지 정회하고 그 전으로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게 하고 다음 속회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한다.
- 특별위원회를 정부총회장, 증경회장, 각 노회장으로 구성하고 총회의 당면 문제를 수습토록 한다.
위의 동의안이 있었지만 개의안도 성립되어 있었다. 증경총회단과 총회 임원회와 각 선교부 대표 1인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위원회로 하여금 타협점을 찾아서 보고하게 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노진현 총회장은 회의 진행법에 따라 개의를 먼저 묻지 않고 동의에 대해 “가”를 묻고 “아니오” 소리가 있었음에도 기습적으로 결정을 선포하고 총회의 정회를 선포했다. 이것은 적법 절차를 무시한 비정상적인 행동이었는데 사전에 충분히 계획된 절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기노회 총대 결정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에큐메니컬 측 총대는 150명이고 NAE 측 총대는 121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원 선거를 할 경우, NAE 측 교권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삼천만환 사건에 대한 재정보고서, 태국 선교비와 총회회의록 인쇄비 스캔들에 대한 추궁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상황이 터져 나올 것이 분명했다. NAE 측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총회를 정회하고 경기노회 총대를 다시 뽑아오도록 상황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총회장의 의사 진행 권한을 불법적으로 사용해서 정회를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모든 선교사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심지어 박형룡에게 우호적이었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조차 이러한 회의 진행의 불법성을 지적했다.
박응규 교수는 이를 “당시로서 총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었다”고 평가하고 “총회장이 선포한 이상 그대로 따라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총대 다수는 이 결정을 “합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총회장의 역할은 총대들의 의사 결정을 위한 회의의 사회자이지 초법적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통합 측의 견해에 따르면, 안광국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총회 임원 불신임안을 낭독했다. 불신임 안에는 149명의 총대가 서명했다. 불신임안의 이유는 ① 총회 장소를 불법적으로 결정한 점, ② 총회 명단을 한달 전에 발표하지 않은 점, ③ 경기노회의 총대를 불법으로 취급한 점, ④ 회의법을 무시하고 회의를 혼란케 한 점 등이었다.
노진현 목사는 총회를 11월 24일까지 정회한다고 선포하고 사회석을 떠났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총대들은 ‘강제 정회’에 항의하며 회의 진행을 요구했고 중앙교회 담임목사가 강제력을 발동해서 회원들을 바깥으로 몰았다.
안광국이 ‘임원불신임안’을 미리 준비한 것은 NAE 측에서 임원 선거를 하기 전에 총회를 강제로 정회한다는 것을 사전에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임원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총회를 비정상적으로 정회시키려는 NAE 측의 사전계획에 대해 에큐메니컬 측은 임원 불신임안으로 대응하는 사전계획을 준비한 것이다. 합동 측에서는 에큐메니컬 측의 행동이 최종적으로 총회를 깨는 행동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통합 측에서는 불법적인 소수파의 행동에 대해 총회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 한 것으로 해석한다. [129-137]
V. 맺음말
1959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에 대한 선행 연구 중 통합 측에서는 ‘삼천만환 사건’을 주원인으로 강조하면서 ‘WCC 신학논쟁’을 가볍게 다루었고, 합동 측에서는 ‘WCC 신학논쟁’을 주원인으로 강조하면서 ‘삼천만환 사건’의 영향을 간과했다. [137]
‘삼천만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WCC 신학논쟁’은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NAE 측은 이 논쟁을 통해 강한 세력을 형성했고, 결국 교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1957년 NAE 측과 에큐메니컬 측은 신학논쟁이 심각해지자 교단 분열을 염려하며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 그러나 이 균형을 깨뜨린 사건이 ‘삼천만환 사건’이었다. 합동 측 역사가들은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지만 ‘삼천만환 사건’은 심각한 윤리적 사건이었고, 당시 에큐메니컬 측은 그것으로 총회에서 NAE 측 교권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통합 측 역사가들은 삼천만환 사건 이후 NAE 측이 박형룡의 교장 복귀를 위해 에큐메니컬을 공격한 것이 분열의 원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건을 좁게 해석한 것이었다. ‘삼천만환 사건’은 NAE 교권이 걸린 문제였다. 1959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을 설명할 때, ‘WCC 신학논쟁’과 ‘삼천만환 사건’ 그 어떤 하나를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
통합과 합동의 분열 과정에서 승동 측이 연동 측을 향해 비난했던 것은 경기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를 인정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임시노회에서 총대를 뽑았다는 것이고, 제44차 총회에서 안광국 목사를 중심으로 불법적으로 ‘총회 임원 불신임안’을 내고 총회를 분립하여 연동 측 총회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아주 예민한 시기에 경기노회 NAE 측은 선거의 공정성 유지에 실패하고, 절차를 무시하고, 투표용지를 재검표했으며, 임시노회 총대 선거에 불참하는 선택을 했고, 경기노회 선거를 승인하는 최종 결정을 이환수 노회장 스스로 차초하는 결정적 오류를 저질렀다. 그리고 제44차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측이 ‘임원 불신임안’을 계획하는 것은 불법적으로 총회를 정회하려는 NAE 측의 사전계획에 따른 대응 행동이었다. [13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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