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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기독교회사 - 민경배]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by [수호천사] 2021.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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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회사 - 민경배]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한국기독교회사] - 민경배(대한기독교출판사)

 

1. 唐(당)을 통하여 접촉된 경교(景敎)

 

  • 묘하게도 기독교는 한국 역사의 비극적인 위기마다 언제나 한 번씩 접촉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접촉으로 끝났을 뿐, 역사적인 중요성을 남긴 체계적이요 계속적인 선교의 진행은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지나가곤 했다. (31)
  • 로마 제국에서 이단자로 낙인이 찍힌, 경건한 신학자 네스토리우스는 그가 파문을 당하던 431년에 벌써 눈길을 멀리 동방에 돌리고 있었다.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와 그 일파는 페르샤에 있는 에데사 시(市)에 작은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방 선교의 설계도를 그렸다. 숱한 신학도들이 여기서 훈련을 받고, 인도나 중국의 아득한 이국(異國)을 향해 복음의 소식을 소리쳐 전파했다. (31)
  • 중국에 들어와서 이 기독교는 이름을 경교(景敎)라고 불리었다(635). 광명의 종교라고 해서 그렇게 하였다. 당시 당(唐) 제국의 황제는 태종(太宗)이었고, 태종은 아라본(阿羅本-아브라함의 중국명)이라는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를 처음 맞아 그의 설교를 경청하고, 신하 여럿과 함께 이 신앙에 열에 넘치는 반응을 보였다. 파사사(波斯寺)라고 하는 교호당을 세워 신민(臣民)의 개종에 기여한 것을 보아도 그의 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31-32)
  • 신라와 경교의 접촉 가능성... 1625년에 중국 서안부 근처에서 이른바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중국말과 시리아 말로 경교의 선교 내력과 당시의 선교 현황 등이 736자 정도로 잘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경교비와 꼭 같은 모조품이 한국 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에서 1917년에 발견되었다. (32)
  •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묘한 형태의 돌 십자가... 김양선에 의해서 숭전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이 돌의 십자가사 여부도 아직 학계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뭐라 단정해 말하기는 어렵다... 경교가 당대 황금기에 적지 않은 공헌을 남겼다면, 이 꼭 같은 영향의 요소가 당을 통해서 동진(東進)하여 신라와 일본에 전파되었으리라는 점을 가정할 수 있다. 일본의 사에끼 교수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일본이 당조 전체를 통해서 경교 내지는 중궁의 옷을 입은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중국 문화가 일본에 전달되는 경로가 어김없이 한국이었다면, 경교의 영향이 일본에 미쳤다는 증거 이상으로 한국에 그 영향이 더 미쳤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이다. (33)
  • 한국 불교와 경교적 기독교 내지는 이집트의 노스티시즘과 놀랄만한 유사점... 선교사(史)적 입장에서는 한국이나 극동 여러 나라에 있는 이른바 북방(北方) 불교의 독특한 교리가 기독교, 혹은 일부의 초기 기독교 이단 분파의 어떤 근원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확증을 제거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보고 싶다. 더욱이 “Pistis Sophia”의 교리와 한국 불교의 가르침 사이에 있는 현저한 상사점(相似點)은 칼 바르트까지 시인할만큰 뚜렷하다. 그는 이 형태의 불교를 “프로테스탄티즘의 한 형태”로까지 전망했던 것이다. (33)
  • 선교사(史)의 대가인 로빈슨도 “조심성 있는 역사가가 이 같은 증거를 소홀히 다룰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던 것이다. (34)
  • 신라인의 위대성은 그 해상 상역(商易)의 전개에서도 수긍이 간다... 7세기나 8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해상권은 지중해와 인도양, 그리고 극동, 이 셋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도양과 극동의 바다 항로를 맺은 해상 세력은 신라인이 주관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라인의 발길이 인도양 해안에까지 미치었을 것이다. 신라 상품이 이즈음에 시리아 등의 회회교국(回回敎國)에서 매매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수상할 바가 없다. 경교는 시리아에서 왕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신라의 접촉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34)
  • 팔라디우스(Palladius)가 19세기 초에 명(明)나라에서 처음 발을 놓았을 때, 여기저기 흩어져 이슨 기독교의 역사적 흔적을 두루살피며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묘한 책자에서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하였다는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자가 다름 아닌 한국의 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쓰기를 “이 한국 책이 언제 쓰여졌는지, 또 어디서 이와 같은 종교에 관한 지식을 수집했는지 불행하게도 알 수가 없다”고까지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34-35)
  • 신라가 경교와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그리고 그 교리와 신앙의 어떤 면이 무의식적으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 어느 모퉁이에 작용해서 이제는 가려내지 못할 형태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는 경교의 신라 도입은 낭만적인 하나의 화제로 남기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35)

 

2. 蒙古를 통하여 접촉된 카톨릭 교회

 

  • 몽고가 세계 제국의 걸설을 목표로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우선 회교도 국가라는 사실을 몽고 자체가 알고 있는 이상, 서구의 기독교는 오히려 몽고와의 제협을 바라게 되었고, 또 거기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까지 찾아 타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기독교를 몽고쪽에 끌어들이게 한 동기는 십자군을 십여차 파견하고도 회복의 염을 내지 못한 성지 팔레스틴을 몽고군이 쉽게 점령하고 기독교인의 순례를 자유롭게 해준, 그 종교 정책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은 종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남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엇다. 그는 모든 종교가 다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했고, 이 원칙을 신실하게 준행하고 있었다. (36-37)
  • 서구의 기독교회는 여기서 신의 섭리를 보았고, 따라서 때를 놓치지 않고 사절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교황 인노센트 IV세가 제1차로 파송한 사람이 카르피니 신부였다(1246). 교황의 의도는 결국 기육 칸(징기스칸 후계자)을 개종시키자는 데 있었다... 결실은 바라는 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후 여러번 사절과 선교사를 파송... 루브루크.. (37)
  • 루브루크는 1253년 5월 7일, 콘스탄티노플 시(市)를 떠나 몽고의 수도였던 칸바리크(和林)에 와서 바투의 아들 사르타(Sartak)을 만났다. 서구에서는 이 사르탁이 기독교인일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루브루크는 몽고에 닿자마자 깊은 환멸에 빠졌다. 그러려니 했던 사르탁은 신자가아니었고, 다만 몽고 왕실의 일부 여관(女官)들이 기독교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몽고 왕궁 안에서도 서구에서 노예로 잡혀와 그 때에는 다 상당한 신분에서 일하고 있는 여러 서구계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중 어떤 여인은 칸의 후실이었다. 루브루크는 “약탈자”라고 불리던 몽카 칸과 여러번 만나 신학적인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다할 인상을 주지못한 채 그의 선교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루브루크는 한국을 처음 세계에 소개해서 아직도 영어의 우리나라 표기로 되어 있는 “Korea”라는 이름을 남기게 한 사람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루브루크는 몽고가 동진해서 일본을 침공하려고 고려에 막대한 군장비를 강요하고 또 선박 건립을 출혈로써 재촉하고 있을 때, 압록강까지 왔다가, 그 보고 들은 바를 교황청에 써보낸 편지 가운데 언급한 일이 있었다... 기독교는 그때 몽고에 와서 별다른 성과를 남긴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그것 하나로도 우리 교회사와 관련이 의미 깊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37-39)

 

3. 日本을 통하여 접촉된 기독교

 

3-1. 일본 안의 기독교와 임진왜란

 

  •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반(反)종교개혁.. 예수회(1534) 등장... 중세기를 통해서 로마 교회에 충성을 바쳐 오던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이 중심...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프란시스 사비에르... 카톨릭 신앙의 해외 확장만이 이미 터전을 유럽 안에서 굳히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할 길이라고 믿고, 당시 해운력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세계 도처에 퍼져 나가 선교에 몸바치고 있었다. (40)
  • 사비에르가 포르투갈 왕의 요청으로 인도와 극동에 파견된 것이 1541년 4월, 중국 해안에서 망향에 서러운 눈을 감고 영면한 것이 1552년 12월... 그가 남긴 업적은 역시 일본에 대하 최초의 기독교 선교의 체계적 수행이다... 그가 인도의 고아에서 떠나 일본의 쿠우슈우(九州)에 상륙한 것은 1549년 7월의 일이었다. 그는 놀랄 만큼의 사회심리학적 통찰과 정치적 생태의 구조 이해를 통해서 선교 전략의 핵심을 이미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공교롭게도 다이묘(大名)들과 친숙한 관계를 맺을 수가 있었다... 사비에르의 일본 인상은 경이와 찬탄, 그것이었다. 1549년 11월 5일자의 편지... “내 생각으로는 이제 앞으로 이교인(異敎人) 중에서 일본과 견줄 백성이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들은 아주 선량한 품위의 인간들이며 기질이 착하고 악의가 없으며, 놀라운 정도의 의리로 명예에 목숨을 걸며... 사교성이 넘치고 지식욕에 불타며...”하는 장황한 찬사였다. 선교사 공통의 과장적 표현이라는 점을 아무리 감안한다 할지라도, 그의 인상이 얼마나 압도당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은 당장에 알아차릴 수 있다. (41)
  • 일본에 입국한 예수회 신부들은 당시의 통치자 오다 노부나가의 관용 아래서 상당한 포교의 결실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다. 오다가 남달리 종교적 신앙심에 끌려서 그렇게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때 일본 대교구의 부사로 있던 사람은 그의 보고문 속에서 “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다만 하나님이 선택해서 신앙의 길을 열도록 준비하는데 쓰시고 계실 뿐”이라고 밝힌 일이 있다. 사실 오다는 신학교의 설립의 위해서 “비와” 호(湖)에 있는 아담한 대지를 공여하였을 정도였다. 그의 이러한 관용은 불교에 대한 그의 혐오에서 일부 왔을 것이다. 그는 불교의 군사적 정치적 세력을 위험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41-42)
  • 이러한 관용책은 다음의 실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도 처음에는 상당한 정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배불적(排佛的)인 경향도 진언파(眞言派)의 불승들을 못박아 죽인데서 나타났다. 사실 그는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오오사까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 곧 일본 대교구의 부사 콜호(Coelho)와 여덞 명의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明)과 조선을 곧 정복할 터인데, 그 다음에는 “전역에 걸쳐 교회당을 건립하고, 그들 백성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카톨릭) 성도(聖道)를 신앙하도록 하겠노라” 장담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난 다음의 사태를 관찰하면, 그의 태도는 기독교에 관한한, 정치적 상업적 동기에만 끌려 조령모개한 모호선을 띠고 있었고, 내심으로는 깊이 증오했다는 말박에 못하게 되어 있다. (42)
  • 토요토미... 일본 안에 오랫동안 쌓여온 강력한 무사(武士)들의 힘을 위협의 요소로 보고 이를 분산시키거나, 아니면 이들이 차지할 땅을 해외에 확보함으로써 일본 안의 통일을 저해할 원인들을 제거시키려고 했음이 확실하다... 그가 반(反)기독교적인 감정에 끌려서, 군(軍) 안에 있는 기독교인 무사들을 전장에서 희생시켜 없애려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 이유로서 부산에 상륙한 군인 25만여의 병력 가운데 최소한도 10% 이상의 군인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통계를 지적할 수 있겠다... 고니시 유끼나가 군단의 병사들은 “거의 전부가 다 기독교인”...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우리 나라 해변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구츨라프(1803~1849)도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장군들은 대개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역시 기독교인이었다”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1592년 조선해협을 건너왔던 그리스도인 군병들은 7년 이후 마지막으로 다 철퇴할 때, 극소수 아니면 거의가 고국에 귀환하지 못하고 산야 혹은 바다에서 피살되었거나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 넘어갔다는 것이다. (42-43)
  • 아우구스티노(Augustin)라는 세례명의 카톨릭 신자 고니시를 비롯한 몇몇 장군들은 행군하면서 앞세우고 나가는 깃발에 십자가의 형상을 그려놓고, 하늘 높이 휘날리면서, 침략의 거친 발길을 옮겨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의 표지 아래서 이들이 남달리 인간적이요, 덜 잔인한 살상을 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다. (43-44)
  • 조선 정략에 앞서 도요토미가 예수회 신부들을 만났다... 그는 신부들의 주선으로 포르투갈에서 장비가 훌륭한 군함을 몇 척 획득하는 것밖에 다른 요구가 없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명나라가 조선을 돕겠다고 해서 파군을 결의하고 서두를 때, 묘하게도 명군의 총사령관이 마테오 리치(1552~1610)를 방문하고 조선 내에서의 군사작전을 포괄적으로 진단한 바 있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일본 주재 예수회가, 다른 쪽에서는 명 주재 예수회가 각각 작전 교사(敎唆)를 하고 있었다. (44-45)

 

3-2. 일본 침략군과 함께 스쳐간 기독교

 

  • 일본군... 울산과 웅천을 잇는 18개 성으로 퇴거... 이때 곰내(熊川)에 머물고 있던 고니시는 휘하 군단의 압도적인 수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일본 예수회 교구장 코메즈(Pierre Comez)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달라는 서간을 발송했다. 코메즈는 이 부탁에 따라 포르투갈 시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를 일본인 후깐(不干)과 함께 조선에 파견했던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기독교 성직자 세스페데스가 곰내에 도착한 것은 1594년 엄동설한의 12월 28일이었다. 얼마후 세스페데스는 코메즈 교구장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친필의 서간문이 현재도 포르투갈의 “아쥬따” 고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 편지에는 그의 일행의 일정, 조선과 일본 사이에 진행된 화평공작, 고니시와 함께 마련한 영내의 예배 처소, 일본 군졸들이 겪는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여러 군사들의 고해성사에 관한 기록들... 조선인에 대한 선교의 착상이라든가, 이 겨레가 겪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화, 그리고 그 영혼들의 안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따라서 그를 경로로 해서 기독교가 조선인에게 접촉될 수는 없었다. (45-46)
  • 달레(C. H. Dallet)라는 저명한 예수회 사학자의 『조선 성교회사』에 보면 세스페데스가 조선인과 접촉할 수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594년 신부 세스페데스는 조선인과 접촉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조선 사람들이 취할 전략이라는 것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성의 주변 지방을 완전히 무인지경으로 청야화함으로써 이들 일본군을 고립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북쪽 지방으로 피난가고, 침략자가 미치지 못할 먼 곳으로 흩어져 갔다.”
  •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오래 잔류해 있지 못했다. 고니시와 함께 조선에 왔던 악명높은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도였고, 그래서 늘 고니시를 적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도요토미에게 고니시를 모함하면서 세스페데스라는 신부를 진중에 초치해서 모반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할 일이 있었다. 이론 곤궁에서도 계속 조선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세스페데스는 불가불 곰내를 떠나 일본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47)

 

3-3. 일본 속의 조선 기독교인들

 

  • 세스페데스는 장기간의 일본 조선 원정을 통해서 수많은 조선 비전투원이 노예로 잡혀 일본에 끌려와서는 군비를 조달하는 방편으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참상을 목격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들 노예를 다시 막대한 금액으로 전매(轉賣)해서 남양 각지에 팔아넘겼다. 같은 포르투갈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인과 선교사와의 사이는 이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시종 불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47)
  • 선교사들은... 1598년 7월 4일, 나가사끼에서 협의회를 열고 인신매매에 종사하는 상인에게는 벌금을 과하게 하고 그 중 악질적인 상인에게는 파문의 종교적 형벌을 내리기로 의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처리가 종교상의 벌칙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실정적(實定的) 효과는 없었고, 따라서 한낱 조소거리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선후책에 치중하는 방편을 썼다. 종교적 사회행동의 제한이 여기 있었다. 우선 선교사들은 일본인 다이묘들을 설득해서 그런 만행을 가능하게 하는 노예 전출을 삼가게 하고, 또 노예 매매의 반복을 금해줄 것을 종용하고, 몰인정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힘닿는데까지 손을 써 노예 구출을 모색했다. 그래서 일본으로 붙잡혀 오는 조선의 노예들을 상인과 군인들의 독아(毒牙)에서 탈출시켜 이들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어로 번역된 각종의 교리서들을 가르쳐서 이들을 복음의 길로 인도하려고 애썼다. (48)
  • 나라 잃은 포로의 몸으로 서러운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내던 조선인들은 이 복음의 소식 속에서 사람다운 삶의 보람을 찾았으며, 깊은 영혼의 안주(安住)와 지열(至悅)의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 더욱이 도요토미 이후 천하의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가 엄격한 기독교 박멸 정책을 쓸 때 고귀한 신앙의 꽃을 피웠던 수많은 조선 포로 신도, 혹은 귀화 신도들은 장엄한 순교의 향기를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 널리 퍼뜨렸던 것이다. 일본 기독교사상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수백 명 중에서 조선인으로서정배, 투옥, 형고를 겪은 사람이 25명 있고,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이가 21명, 그들 중에서 9명은 1867년 7월 2일자로 로마 교황 피우스 9세가 순교 복자로 시복(諡福)한 205인 일본인 수에 포함되어 있었다. (48)
  • 임진왜란의 쓰라린 민족의 비극은 근대 초기의 조선으로 하여금 철저한 대외 불신임의 국책을 고수하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에 대해서는 그 도(度)가 심했다... 일본에서부터 시작한 선교는 조선에 접수, 수용될 확률이 역사상으로나 심리상으로 거의 없었지만, 명(明)과 청(淸)에서부터 뻗쳐진 선교의 길에는 청초(淸初)의 명분 수립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응이 훨씬 달가왔다. 친중(親中)의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중국에 향하던 눈길은 일본에 대한 것보다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강요된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기독교의 수용은 여하간 그쪽 방향이 훨씬 쉬웠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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