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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23장. 어리석은 부자 비유 (누가복음 12:13-21)

by [수호천사] 2021.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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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23장. 어리석은 부자 비유 (누가복음 12:13-21)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몸과 영혼의 구별이 익숙한 일이었으나, nepes(자아, 전인)를 몸과 영혼이 분리될 수 없이 결합해 있는 복합체로 보았던 히브리인의 심상에서는 그런 구별이 낯설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의 부활을 포함했는데, 바울은 이 몸을 영의 몸이라 정의했다(고전 15:44). (463)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셔서 좋다고 말씀하시고 그 속에 인간 존재를 담아두신 육의 세계라는 실체와 분리될 수 있는 영의 복음은 있을 수가 없다. 예수의여러 가르침의 핵심에는 이런 영과 육의 조화, 그리고 이렇게 조화를이룬 영육과 하나님의 관계가 자리해 있다. 예를 들어 주기도는 빵(양식)의 선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간구를 담고 있다. (463)

물질과 관련하여 예수는 기도보다 돈 이야기를 더 많이 하셨다. 예수는 돈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가정하셨다. (463)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소유한 재산과 이 땅을 관리할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다. (464)

어리석은 부자 비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어떤 사람을 다룬다. (465)

 

수사

 

일곱 개 연 중 가운데 연이 중심이 되고 첫 세연이 마지막 세 연에서 역순으로 되풀이 되는 예언적 수사 틀이 다시 등장한다... 대화의 주제는 재물을 쌓아둠이다... (465)

 

주석

 

배경... 아버지는 말이나 글로 유언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땅이 있었고, 두 형제가 이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법에 따르면, 유업은 형이 동의해야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 간청한 자는 아우임에 틀림없다... (467)

예수는 갈라놓지 않고 화해케 하는 분이다.. 이 기사는 예수가 당신이 살아가시던 세상의 사회 정의에 섬세한 관심을 갖고 계셨음을 보여준다(4:16-30을 보라). 특히 이 비유는 물질 소유, 하나님, 그리고 정의의 관계를 반영한다. (467)

정의를 요구하는 명분을 판단함. 정의를 요구하는 명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다... 레슬리 뉴비긴... 정의를 다룬 장... “인간이 내거는 모든 주장은 모호하며,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우리의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착각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만일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해야 한다. 정의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줌을 뜻한다. 복음에 비춰볼 때 우리 문제는, 우리 각자가 자기가 받아야 할 몫을 자기 이웃이 받아야 할 몫보다 지나치게 많이 계산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고수하고자 하는 정의라는 것을 판단해줄 정의를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의의 심부름꾼이아니라 무법 독재의 하수인이다.” (467-468)

1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에서는 많은 공동체가 여러 형태의 정의를 이루려고 투쟁해왔다. 자신이 위하여 싸우는 모든 것이 정의라고 역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자신의 명분을 판단해줄 정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결국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종 뉴비긴이 말하는 무법 독재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 (468)

예수께 간청하는 자는 스스로 정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이미 결정해놓고, 손님으로 오신 랍비가 자기 견해를 형에게도 강요해주길 원한다. 예수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468-469)

예수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재산 분할자로 세웠느냐?”라는 질문으로 대답하신다. 예수의 관심사는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그들을 갈라놓은 분쟁을 처리할 수가 있다. (469)

예수는 자기에게 요청하는 자에게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이신다. 중동에서 이런 호칭은 사람을 퉁명스럽게 부르는 방법이다... 이런 말은 불쾌감을 강하게 암시한다. (469)

소유에는 깊은 두려움이 따른다. 종종 아무 근거 없는 두려움이 - 어느 날인가는 가난뱅이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 따라붙기도 한다... 만족이란 결코 없다. 내면의 불안은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이렇게 만족을 모르는 욕구가 만들어낸 넘치는 재물을 소유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잉여재물에 관한 비유... (470)

그리스도인은 지혜의 말씀과 이어지는 비유를 바탕으로, 만족을 모르는 욕구는 물론 고된 노동이나 윤택한 자연이나 시장의 변동이나 다른 이들의 선물이 만들어내는 잉여 재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471)

그가 자신과 대화했다”... 중동에서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친구들과 오랜 시간 의논하여 결정을 내린다... 이야기 속 인물은 그런 친구가 아예 없는 것 같다. 그는 주위 가족과 어울리지 못한 채 외톨이로 살아간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그가 상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뿐이다. (471)

사람이 많은 부를 얻을수록 이웃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인생사 일반의 이치다. (472)

부자는 이 풍성한 수확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도, 이것을 참 소유주인 그분이 명하신 대로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는 이 수확물을 자기 소유로 여긴다. (472)

암브로시우스... “우리가 가지고 떠날 수 없는 것들은 우리 소유가 아니다... 우리가 베풀었던 긍휼만이 우리를 따라올 뿐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배가 자기 곳간보다 더 안전한 저장고임을 깨닫지 못했다.” (472)

부자가 아는 것은 오로지 내 수확물, 내 곳간, 내 곡식, 내 재물, 내 영혼뿐이다. (473)

그는 평소 생각과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나누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친구가 없다. 그는 철저히 혼자다... 그는 자신에게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고 일러주는 (전도서의) 첫 부분만 기억한다. 그러면서 하난미이 해 아래에서 그에게 주신 사는 날을 이야기하는 후반부는 제멋대로 잊어버린다. (473-474)

그의 문제는 자아(네페스)의 본질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요, 그 자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475)

즐거워하다로 번역하 말은 euphraino이며, 바보를 가리키는 말은 aphron이다. phron은 횡경막(diaphragm)과 관련이 있다. 여러분이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횡경막(가슴)을 쫙 펼 수 있는 지점에 이르면 목표 지점에 도착한것이요, euphraino 상태에 이른 것이다. 전도서 설교자의 충고에 따라 이 인물은 자신이 그런 황홀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그 앞에는 그가 먹고 마시고 euphraino할 수 있는(즉 횡경막을 쫙 펼 수 있는), 다시 말해 즐거워할 수있는 호시절이 펼쳐질 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사실은 a-phron(바보)이라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그는 쫙 펼 횡경막도 갖지 못한 자였다. 이런 비참한 상태로 떨어진 이유는 넉넉한 양식과 음료가 자신의 참되고 유일한 자아를 온전히 떠받쳐준다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아/영혼은 하나님이 아니라 비싼 음료를 찾느라 갈급해했다. (475-476)

하나님은 언제라도 당신이 빌려주신 것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실 수 있었다. 그리스어 본문은 네 영혼/자아(네페스)를 네게 요구한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빌려준 것을 돌려달라는 말이다... 목숨은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며 빌려온 것이다. (476)

전도서 설교자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한정된 날 동안에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경고를 함께 덧붙인다... 전도서 2:18-19... (476-477)

예수는 다시 당신께 청원하는 이에게 에둘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유산 싸움에서 이겼다 치자.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떡할래? 이 땅의 삶 저편을 내다봐라. 네가 받은 유업이 장차 누구 것이 되겠니?” (477)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계속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부를 얻지 못한다... 예수는 진정 그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의 시각으로 생각해보라고 권면하신다... ‘유업을 내가 주관하든 내 형이 주관하든, 우리 형제는 모든 거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둘 다 우리가 소유한 재물을 잘 관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을 잘 사용할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하나님께 진다. 우리 부와 우리 삶은 하나님이 빌려주신 것이다. 우리가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이 얻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를 억누르지 않는다면 우리 둘 다 파멸할 수 있다’ (477)

 

요약 : 어리석은 부자 비유

 

1. 진심을 담아 정의를 갈구하는 외침이라도 자아비판을 따르지 않으면 순전하지 않으며, 예수는 그런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2. 인간관계가 깨진 경우, 아무리 정의를 갈구하는 외침이라도 거기에 대한 대답이 그 관계를 파탄 내는 데 기여한다면 예수는 답을 주시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사람을 갈라놓는 자로 오시지 않았다.

3. 예수는 단순히 벌어들이는 수입이 아니라 필요에 관심이 있으시다(참고 마 20:1-16). 여기서도 예수는 자기 위주로 정의를 갈구하는 외침을 병의 한 증세로 이해하신다. 그는 이런 외침에 응답하시길 거부하고 도리어 그런 외침이 만들어내는 상태를 치유하려고 애쓰신다.

4. 재산은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소유다. 때로 이런 선물은 수고하지 않고 얻은 잉여 재물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 비유 속 부자는 자신의 모든 재물이 자신만의 소유며, 그것을 사사로이 사용할 목적으로 보관할 권리고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절박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자기 부를 나눠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5.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의 필멸성을 간과했다. 그는 자기 목숨과 재산을 모두 지키지 못했다.

6.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이 빌려주신 것이다. 그것은 선물이지, 권리가 아니다. 이 이야기속 부자는 자기가 자기 영혼/목숨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이 별안간 그에게 빌려주신 목숨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시자 자기가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7. 많은 재물을 얻고 더욱 많은 재물을 쌓음에서 안전과 멋진 삶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잘못 생각한 것이다.

8. 하나님은 이야기 속 부자에게, 그가 자기 부를 주관할 힘을 장차 누가 갖게 될지 모를뿐 아니라 그 힘을 가질 자를 통제할 수도 없음을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재물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못 박으신다. 부자가 아무리 자기 재산이라며 지키려 해도, 그가 무덤에 들어가면 결국 누가 그의 재산을 소유하겠는가?

9. 풍족한 삶은 자신을 위해 쌓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쌓는 삶에서 발견할 수 있다.

10. 야고보서는 부자가 그가 추구하는 것을 좇다가 스러질것이라고 말한다(1:11). 예수는 바로 이런 현상을 비유로 묘사하신다. 어리석은 부자의 재산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파괴해버렸다. 그에게는 그의 영혼/목숨/자아를 나눌 이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나쁜 일은, 그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11. 시편의 시인과 달리, 어리석은 부자는 그의 자아/영혼/목숨의 본질을 오해했다. 그는 영혼을 먹고 마실 것으로 살찌우고 유지할 수 있는 몸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478-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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