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3장. 구원자, 현자들 그리고 이사야의 환상 (마태복음 2:1-12 ; 이사야 60:1-7)
어떤 공동체를 상대로 모든 이가 죄인이요 따라서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니 모든 이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사가랴는 누가복음 1:76-77에서 자기 아들 요한을 두고 몇 마디 말을 계속 이어간다.
“이는 네가 주 앞에 가서 그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백성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베푸실 구원을 알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공동체의 문제는 단순히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아니다. 도리어 이 문제는 이 말씀이 공동체 구성원들을 그들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이로 선언한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자들도 역시 죄인이다! 죄인을 위한 구주는 만인을 위한 구주이시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전도서 4:1, “내가 다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억압들을 보았도다. 또 보라. 억압받는 자들의 눈물을. 그리고 그들에게는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구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는 힘이 있으나 (억압받는) 그들에겐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네”]
억압하는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이 모두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갇혀있다. 각 사람에게는 옥 밖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필요하다. 누가복음 본문은 “우리 원수들”은 물론이요 “우리 죄”라는 내부 문제로부터 구원받음을 이야기한다.
현자들은 어디서 축하하러 왔는가?
마태복음 2:1-2
이제 헤롯 왕 때에 예수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으니 보라, 현자들이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와서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동쪽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예배하러 왔습니다.”
만일 이 마기(magi)가 이스라엘 동쪽에 있었고 그의 별을 동쪽에서 봤다면, 그들은 마땅히 인도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서쪽으로 왔다. 이 구절을 해명하는 열쇠는 히브리어에서는 “동쪽”을 가리키는 말이 “떠오름”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들어 있다. 이 그리스어 본문은 (NRSV도) “우리가 그의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동쪽으로부터 온 현자들”...
교회사 초기 몇 세기 동안 로마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동쪽”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히 페르시아를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 문헌에서 Magi는 바빌로니아나 파르티아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동쪽”은 요단 강 저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세기에 성지에 살았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생각하고 말했으리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과 이어져 있는 요르단 사막을 가리켰을 것이다.
부자들은 늘 황금을 소유하기 마련인데, 이런 황금은 아라비아에서 캐냈다. 유향과 몰약은 아라비아 남부에서만 자라는 나무에서 거두었다. 이런 사막 지대에 살던 부자들은 당연히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 교회는 이를 알고 있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유대인 트리포와 나눈 대화』에서 “현자들은 아라비아에서 베들레헴으로 와서 아기에게 경배하고 선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다”고 쓰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로마의 클레멘스도 현자들이 아라비아로부터 왔다고 인정한다.
예루살렘과 이사야 60장은 성탄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일어나라, 빛을 비춰라. 이는 네 빛이 왔고
또 야웨의 영광이 네 위에 임했기 때문이라.
보라, 이는 어둠이 땅을 덮고
짙은 어둠이 사람들을 덮겠으나
야웨가 네 위에 임하시고
그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라.
또 나라들이 네 빛으로 나아오고
왕들이 네 떠오르는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빛나는 영광으로 둘러싸인 “너”는 누구이며, 나라들이 누구의 빛으로 나아온다는 말인가? 계속해서 이사야는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고 네 딸들은 팔에 안겨 오리라”라고 강조한다. 이어 5절과 6절은 이렇게 선포한다.
나라들의 부(富)가 네게로 오리라.
수많은 낙타들이 너를 덮으리니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들이요
스바에서 온 모든 이가 네게 오리라
그들이 황금과 유향을 가져오고
야웨의 찬송을 선포하리라.
독자들은 당연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예수 탄생 이야기는 이사야의 위대한 약속과 관련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마태와 누가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들이 기록한 예수 탄생 이야기를 골랐을까?
예루살렘을 영예롭게 해줄 영광스러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그 사건이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 일어났다고 인식했다. 아기 둘레에는 큰 빛이 있었고 주의 영광이 나타났다. 아랍인 현자들이 아기에게 오면서 황금과 유향을 낙타에 싣고 가져왔다. 목자들은 성(城)이 아니라 그 아기를 찾아왔다. 성을 놓고 품었던 큰 소망이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에게로 옮겨갔다. 정말로 ‘주의 영광이’ 아기를 “에워싸고 비추었다.” 이렇게 성으로부터 아기에게 옮겨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 탄생 이야기는 전승에서 “시온주의의 색깔을 지워버린다.” 예루살렘 성과 관련하여 성취될 것으로 여겨졌던 소망과 기대는 실상 아기 예수가 태어나심으로 다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절대성을 잃는다.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성한 공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성한 역사다...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정말 중요한 예루살렘은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위로부터 내려온 하늘의 예루살렘(계 21:9-27)임을 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일도 없을 것이요, 그 예루살렘을 차지하겠다고 피를 흘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누가는 독자들에게 주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 주위가 아니라 아기 예수 둘레를 비추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약 : 구원자, 현자들 그리고 이사야의 환상
1. 억압하는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이 다 죄인이다. 둘 다 새 구원자가 베푸시는 은혜가 필요하다.
2. 고난이 죄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3. 예언자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죄인이며 그들에게도 은혜가 필요함을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4.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에 특별한 복을 약속했다. 아랍인들이 선물을 갖고 올 것이며 목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큰 빛이 하나님의 영광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비췰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 약속이 한 아기가 나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세세토록 이어온 소망과 꿈”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아기에게 옮겨갔다.
5. 아기 예수가 나셨을 때 유대인 목자들과 이방인인 아랍인들이 함께 와서 구유에 누운 아기에게 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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