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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료실]/[도서 정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2장. 예수 계보와 의인 요셉 (마태복음 1:1-21)

by [수호천사] 2021.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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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요셉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부르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이런 말은 보통 율법에 순종하고 규칙을 만인에게 공평히 적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셉은 정의를 특이하고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규정하여 이를 마리아에게 닥친 위기에 적용했다. 요셉이 생각하는 정의는 법을 평등하게 적용하는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면 요셉이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정의를 더 넓게 이해한 견해가 있었을까?

 

키에르케고어... 공포와 전율에서 진정한 신앙은 절대자와 맺은 절대 관계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다. 둘 사이에는 율법이 없다... 아브라함... 고금을 불문하고 모든 법은 아비가 아들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어떤 법에도 어긋나는 일을 해야만 한다.

 

요셉은 율법이 보통 기대하는 윤리를 뛰어넘어 더 높은 차원의 정의에 순종했다.

 

이사야의 예언은 고난 당하는 종이라는 특별한 종을 묘사한다... 첫 번째 노래는 이사야 42:1-6인데 3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정의를 이뤄내시리라

 

하나님의 이 특별한 종이 이해한 것을 따르면, 정의는 보복으로 지키는 정의”(네가 나를 해코지 했으니 너도 나만큼 해를 입는 것을 봐야겠다)도 아니요 법을 평등하게 적용함”(나는 내가 낼 세금을 냈으니 너도 네가 낼 세금을 내야 한다)도 아니다. 여기서 정의는 약하고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풂을 뜻한다. 이 본문에 구사된 은유 언어는 놀랍고도 강력하다. 고대 세계는 갈대를 펜으로 사용했다. 이라크 남부에서는 요 근래까지도 갈대를 집과 조그만 배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즉 상한 갈대가 아니면 이런 것들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갈대가 상했으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갈대는 꺾어 요리나 난방에 쓸 수밖에 없다.

 

모든 집에는 어떤 형태든 조명이 필요했다. 옛날에는 조그만 진흙 등잔을 사용했으며 올리브유로 불을 밝혔다. 이런 등은 심지가 등잔 옆쪽 주둥이에 달려있었다. 등장에 기름이 떨어지면, 심지가 불타 끊어지면서 불붙은 심지 꼭지가 등잔 주둥이에서 떨어져 불이 날 위험이 잇었다. 이런 사고를 막고자 등잔 아래 바닥에는 종종 물을 담은 그릇을 놓아 두었다. 그러나 이사야 42장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그는 신실하게 정의를 이뤄내신다.

 

요셉은 율법이 요구하는 벌을 넘어, 상처를 입고 지쳤을 한 젊은 여자에게 온유함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요셉은 마리아를 꺼져가는 심지로 보았을지 모른다. 이사야 예언처럼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면, 곤고한 처지에 있는 약자와 짓밟힌 자와 배척받은 자들에게 긍휼 어린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요셉은 마리아를 대할 때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정의에 비추어 행동했다. 예언자 이사야처럼 정의를 이해하는 시각이 요셉의 마음에 박혀 있지 않았으면, 예수는 태어나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매사에 억지로 끌려 다니고 해야 할 말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위기의 순간에 내린 대담한 결정은 한 어머니와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목숨을 구했다.

 

요셉의 분노

 

요셉은 그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자기 약혼자가 잉태했다는 말을 들었다(1:20). 우선 그는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려주는 환상을 체험하지 못했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의 기분이 어땠을까? 여기서 아주 중요한 그리스어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영역 성경들은 이 단어를 똑같이 번역했다. 이 번역은 옳긴 하지만 오해를 낳기 쉽다. 영역 본문은 그가 이 일을 생각할 때에”(as he considered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생각했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단어(entbymeomai)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생각했다/심사숙고했다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는 그는 화가 났다이다. 즉 그는 속이 뒤집어졌다. 이런 경우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자기 약혼자가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요셉은 과연 조용히 앉아 이 문제를 생각했을까?” 도리어 깊이 상심한 채 분노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는 자신이 이해한 정의를 따라 의로운 일을 했고마리아를 인간답게 대했다. 그러나 그랬다고 요셉이 배신당했다고 느껴 분노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어근은 tbymos. 이 말은 복음서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데, 회당에서 회중이 일어나 예수를 돌로 치려할 때 이 회중이 품었던 격노를 묘사한다(4:28).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바로 이 말을 동사로 사용한 사례는 단 한 번으로, 예수 탄생 때 찾아온 현자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헤롯은 이 현자들이 아기가 태어난 곳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베들레힘을 떠난 것을 알고 격노했다(2:16).

 

이 말의 변현 하나가 사도행전 10:19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방인 가정을 방문하라고 명령하는 환상을 본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부정하다고 여겼다. 이런 이유로 베드로가 이 환상에 크게 놀란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도 영역 성경은 보통 그가 이 환상을 심사숙고했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여기서 활용된 그리스어 어근은 베드로가 이 환상이 자기가 오랫동안 지켜온 견해를 뒤집어버린 것에 화를 냈음을 일러준다. 이 환상 때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바라보는 자기의 시각 전체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는 평생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가진 의무가 이방인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어왔다. 그런 그가 오랜 세월 내려온 이해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뒤집어엎는단 말인가? 짐작컨대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지?” 그는 이렇게 물었음이 틀림없다.

 

마태복음 1:20에서는 이 단어에 전치사 en을 더하여 en-tbymeomai를 만들었다. 이 특별한 형태의 단어는 (마태복음은 물론) 신약성경을 통틀어 오로지 한 번 더 등장하는데, 이 경우 악하다라는 말이 그 단어 붙어 있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9:4). 여기서도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리스어 단어(entbymeomai : 9:4에서는 entbymeistbe = 역주)가 문자 그대로 뜻하는 것은 사람 안에(en) 들어 있는 분노와 관련된다. 이는 요셉이 소스라치게 놀랄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가졌을 심정에 들어맞는다.

 

마태복음 1:20에 대한 아랍어 역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8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가 이 문제로 불안해하는(disturbed) 동안.”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초기 아랍어 번역자는 요셉이 속이 뒤집어졌음을 알았다. 이 모든 내용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이 문제로 화가 나 있는 동안이 그리스어 원문을 더 정확히 번역하고,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더 잘 포착한 번역일지도 모른다.

 

요셉은 온 동네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을 만큼 담대함과 배포와 용기와 굳센 인격을 가졌다. 그는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길 원하는 세력이 있는데도 그렇게 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행동으로 옮겼다. 요컨대 요셉은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여 은혜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요셉은 신학자였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 개념은 이사야가 들려주는 고난 당하는 종의 노래에서 나왔다. 이 신학이 마리아와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목숨을 구했다.

 

[6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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