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콜라 신학의 후기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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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절정에 달한 스콜라 신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녔다. 1) 난해한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미묘한 구분들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 철학과 신학 사이의 괴리였다. 이성에 의해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신적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지는 진리 사이에 틈이 증가했다. 3) 구원을 인간의 행위에 의해 획득되어야 할 목표로 삼으려는 서방신학의 경향이 중세 후기의 신학에서 절정에 달했다. 심지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의 공덕이 되는 경건한 행위가 되었다. (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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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시대의 학자들은 신앙과 이성 사이에 기본적인 지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같은 특정의 계시된 진리들이 이성의 합당한 사용에 의해 추론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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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 이후 가장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영민한 박사”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의 난해성과 정교한 용어 사용은 복잡하고 다양했기 때문에 평생 철학과 신학을 연구한 인물들만 이해할 수 있었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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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의 윌리엄(1280-1349)... “오캄의 면도날”, “검약의 원리”로 유명... 하나의 질문에 응답하거나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치 않은 존재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오캄의 원리이다. 다시 말해서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오캄의 시대 이후 이 원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대적하는 논거로 사용되어 왔지만, 그것은 오캄의 목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존재는 합리적 논거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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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교리...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구원함을 받은 것은, 그것이 유일한 방도였거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이 인간의 대속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적당한 방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었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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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임재는 항상 기적으로서,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캄의 제자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당나귀 안에 성육신하실 수도 있었다고까지 주장했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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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지성은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조차 불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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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으로는 하나님의 깊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준 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을 기꺼이 믿으려 한 신학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떤 교리나 진리가 합리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되었기 때문에 믿으려 했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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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5세기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권위의 문제가 특히 중요... 인간은 이성으로 교리의 진리나 오류를 증명할 수 없었으므로 무오한 권위의 토대 위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오캄은 교황 및 전체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성경만이 무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의회야말로 최종적 권위라고 확신했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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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의 능력이 보잘것없었으므로, 공의회가 아니고는 더 이상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회를 개혁하며 특정 교리의 진리 여부를 결정할 권위 자체가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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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말기의 신학자들은 믿음으로서만 아니라 의존(trust)으로서의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성이 의심하게 이끌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의존해야 한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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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고 번잡한 이론과 사고의 전개는 당시 학문적 신학의 복잡성과 복음의 단순성 차이를 감지한 많은 이들의 반발을 받았다. 이러한 반발의 일부가 “근대 경건운동”으로 나타났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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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만약 그대에게 겸손이 부족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욕하게 된다면, 그대가 심오한 사상으로 삼위일체를 논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참으로 아무리 고상하게 들리는 언어도 인간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덕이 충만한 생활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회개를 정의할 줄 아는 것보다 이를 경험하는 것이 낫다. 만약 그대가 성경 전체를 암송할 수 있고 모든 철인들의 금언을 기억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헛되고 헛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 (268-269)
# 고전학문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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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혹은 부흥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라는 용어 자체는 전(前)시대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암시하는 역사적 기간에 적용된다.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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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고대의 고전시대와 자기들의 시대 사이에 놓은 중간기 정도로 평가... 중세 최고의 예술을 “고딕양식”이라고 이름 붙인 데서도 동일한 편견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이 야만족인 고트족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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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만물의 척도로 삼은 경향에 주어진 명칭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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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문의 부흥...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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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문에 대한 관심의 부활은 1437년 구텐베르크가 이동 가능한 인쇄기를 발명한 것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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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저술의 정확한 본문을 밝혀내기 위한 “본문 비평”이라는 학문이 발생했다... 고대 저술 및 문서들의 내용에 많은 오류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한 학자들은 일부 고대 원문들의 진정성에 의심을 갖게 되었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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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의 기증 문서』를 엄밀하게 조사한 학자 로렌조 발라는 후대의 산물임을 증명했다... 발라는 사도들이 한 구절씩을 맡아 삽입하여 사도신경을 저작했다는 전설을 강하게 반박했다... 발라는 교황의 비서였는데, 교황은 그의 그러한 연구와 결과에 괘념하지 않았다. 이는 이러한 연구 결과들이 일반 대중들과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낸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시행되고 토론되었기 때문이었다. (274)
# 실재에 대한 새로운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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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그린 아담의 모습.. 중세 서적에 등장하는 허약한 아담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창조하기 위해 태어나서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르네상스의 인간관을 표현하고 있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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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의 목적은 자신이 살단 시대의 이상대로 “보편적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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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선과 악 양쪽에 걸쳐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그 시대의 저술가들 중 하나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중요한 주제였다. (276)
#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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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있어서 르네상스는 번영의 시대인 동시에 격동의 시대였다... 개혁 직전의 교황청은 이러한 번영과 음모와 격동과 르네상스의 이상을 배경으로 하여 존재했다... 에우게니우스 4세... 교황청의 대부분은 예술의 후원자들이었으며, 최고의 예술가들을 로마로 끌어들여 장려하고 아름다운 저택과 성당과 기념물들로 도시를 장식함으로써 기독교권의 수도다운 모습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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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5세(1447-1455)...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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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릭스투스 3세(1455-1458)... 스페인의 보르자 가문에서 배출된 최초의 교황... (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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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스 2세(1458-1464)...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려 한 마지막 르네상스 교황이었다... 『우주구조론』...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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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스 2세(1464-1471)는 삼촌이 교황(에우게니우스 4세)으로 즉위하자 교회를 통해 출세하는 것이 쉬울 것을 깨닫고 생업이던 상업을 버린 후 성직을 택한 기회주의자였다... 색을 탐하다가 중풍으로 사망... (27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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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투스 4세(1471-1484)... 교황직 매수... 교회는 그의 가문의 기업이 되었으며, 전체 이탈리아는 교황의 조카들을 부자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벌어진 전쟁과 음모에 개입되었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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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센트 8세(1484-1492)... 선출 전 약속에 대해 교황의 권력이 지존한 것이므로 어떤 서약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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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6세(1492-1503)... “알렉산더는 천국의 열쇠와 제단, 심지어 그리스도까지도 돈을 받고 팔아넘길 것이다. 그것은 그의 당연한 권리이다. 왜냐하면 돈을 주고 그것들을 샀기 때문이다.” (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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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스 3세... 26일 만에 병명 미상으로 사망...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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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2세(1503-1513)... 삼촌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됨... 율리우스 시저를 모범으로 삼겠다는 의미에서 그 칭호를 택함... 예술의 후견인... 미켈란젤로, 라파엘... 전쟁과 약탈을 즐김... (28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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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0세(1513-1521)... 로렌조의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 그의 관심은 교회의 복리보다 예술과 사치에 있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교황 위에 있었던 인물...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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