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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는 중세 문명의 전성기였다. 인노센트 3세 때에 교황의 권력을 절정에 달했다... 탁발수도회, 대학교, 고딕양식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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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 전쟁, 전염병, 부패,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침략 등이 13세기의 꿈들을 파괴하고 현대의 새 질서를 향한 새 길을 열었다. (194)
# 새로운 상황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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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세기에 발전한 화폐경제는 중세 말기의 상황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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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주아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가 필요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귀족들에 대항하여 국왕들을 지원했다... 중세 말기 중앙집권 군주제의 성숙은 은행가들 및 상인들의 점증하는 영향력과 병행했다.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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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 13세기 말 스위스 연방 결성...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지는 못했으나 스스로 게르만족임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독일 내부 분열이 초래한 외국의 개입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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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는 보편적 권위를 내세우는 교황의 주장을 잠식시켰다.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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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1337-1475)... “제1차 유럽대전”(First European War)... 유럽 전체가 이에 개입... 돔레미라는 마을 출신의 처녀 잔 다르크(Joan of Arc)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랭스 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1431년에 샤를 7세는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다. 1475년에 평화조약이 체결... (19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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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은 교회 생활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 중 한동안 교황들은 프랑스 아비뇽에 거주... 영국인들은 교황을 적으로 여겼다... 교황청의 영향력이 약화...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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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7년의 흑사병... 당시 기후가 ‘소빙기’로 변했다. 그로 인해 농업생산이 감소하고 기근이 증가했으며, 주민들이 쉽게 병에 걸렸다... 고열과 두통, 구토 등이 생기고 림프절이 부어올랐으며, 심지어 치매 증세도 동반되었다.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닷새 후에 사망했다. 1348년부터 1350년...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전염병 혹은 이에 관련된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3년 후 흑사병은 고개를 숙였으나, 그 후에도 10년 혹은 20년을 주기로 발생했는데 이때의 희생자들은 주로 젊은이들이었다(어른들은 이 병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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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결과... 경제적으로 유럽 전체가 영향을 받았다. 우선 공산품의 소비 장소인 시장이 자취를 감추었다... 실업률이 크게 증가했다... 젊은이들이 희생자가 되었으므로, 죽음의 신이 젊은이들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조상들이 믿었던 바 합리적이고 질서 있는 우주의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 지식인들은 이성의 한계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일반인들은 미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성지 순례를 떠났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성유물 숭배와 매매가 성행했다. 전염병의 공포, 지옥의 공포,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 등이 만연했다. (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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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창궐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기독교인들에 비해 유대인 사망자가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지역에 고양이가 많음... (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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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지속적인 투르크 족의 침입...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스탄불... (201-202)
# 프랑스의 그늘 아래의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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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 8세(베네데토 가에타니)는 유럽의 궁정에서 발생하는 음모들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 개혁을 권력투쟁을 통하여 성취하려 했다... 이전 교황인 셀레스틴은 프란칫코회 수도사다운 소박성으로 개혁을 이룩하고자 했다... 셀레스틴은 겸손... 보니파시오는 오만한 인물... (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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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스틴을 지지한 급진적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 즉 “프라티첼리”들은 보니파시오를 경원함... 보니파시오는 이탈리아에 평화를 가져왔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를 중재함... 1300년 희년을 선포하고 베드로의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전대사-죽은 후 죄를 정화하기 위해 연옥에 머물러야 하는 기간을 사해주는 것-을 약속했다. (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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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와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됨... 종교 부문과 정치 분야의 보편적 권위를 주장하는 교서 「우남 쌍탐」을 발표... 필립을 파문하려고 준비할 때, 납치됨... 구출되었으나 로마로 돌아온 보니파시오는 전처럼 존경받을 수 없었다. (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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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11세(보카시니)... 경건한 도미니크회 수도사... 화해정책... 그러나 필립은 이미 사망한 교황을 재판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려고 함... 교황의 권위에 위협이 되기에 당시 로마에는 지나친 화해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살되었다는 소문...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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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불파의 클레멘트 5세(1305-1314)... 프랑스에 머뭄... 필립의 통제... 템플기사단의 체포와 재판... (20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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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기사단의 부와 세력은 전통적인 귀족들을 강력하게 통치하려는 왕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거슬리는 장애물이었다... 세속 권력의 명령 계통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필립은 이들을 이단으로 기소하기로 마음먹고 클레멘트에게 압력을 가해 기사단의 재산을 프랑스 국고에 귀속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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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교황 시대” 혹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 시대”... 교황들이 로마에 부재(不在)한 것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프랑스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암흑기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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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사후... 72세의 노인을 선출하고 다음 교황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한 22세는 장기간의 즉위(1316-1334)... 친불정책 (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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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12세(1334-1342)... 프랑스인들에게 교황청의 재산을 마음대로 운용하도록 허락...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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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6세(1342-1352)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영국인들이 그를 프랑스의 주교로 간주해서 수포로 돌아감... 아비뇽의 교황청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다. 많은 신자들은 당시 창궐한 페스트를 교황이 로마에 부재한 데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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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센트 6세(1352-1362)는 로마 귀환 준비 중 사망...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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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반 5세(1362-1370)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한 개혁주의자였다. 1365년 로마에 귀환... 로마 시민들의 충성심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서 이탈리아 전체가 무질서 상태에 빠짐으로 아비뇽으로 귀환하기로 결정... (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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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교황은 삼촌인 클레멘트 6세에 의해 17세게 추기경이 된 그레고리 11세(1370-1378)였다. 그가 교황에 선출되었을 때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교황의 로마 귀환을 촉구했다... 1377년 1월 17일 로마로 입성... (21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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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카타리나... 성인으로 시성... 1970년 바오로 6세는 그녀에게 “교회 바사”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21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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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매매, 성직 중임제, 복수성직제, 궐석성직제... 족벌주의...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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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개혁... 교황제도 자체의 개혁이 시급했으므로,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교황 권력의 제한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교황직의 성격을 순전히 영적인 방면으로 통제하는 데로 발전되었다. (215)
# 서방교회의 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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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돌아갈 가능성... 이탈리아인 바리 대주교를 교황 우르반 6세로 선출... 대립교황 클레멘트 7세... 우르반 사망 후 보니파시오 9세 선출... 우르반의 개혁정책을 포기하고 성직매매를 성행시킴... (21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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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 파리대학교의 신학자들은 분열 종식시킬 세 가지 방책을 국왕에게 건의... 1) 두 교황이 사퇴하고 새 교황을 선출, 2) 협상과 중재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자, 3) 전체 공의회를 소집하자... 신학자들은 첫째를 선호... 샤를 7세는 신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클레멘트 7세가 사망하자 새 교황을 선출하지 말라고 요청... 그러나 아비뇽의 추기경들은 베네딕트 13세를 옹립... 샤를은 아비뇽에 소재한 교황에 대한 지지를 확인... (21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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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기독교권은 서로 교황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분열을 종식하기로 함... 공의회운동... (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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