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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제1부 제5장 : 이슬람에 대한 공격

by [수호천사]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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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또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내용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명령하신다. 전쟁터에서, 혹은 전쟁터를 가다가 육지나 해상에서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은 즉시 모든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위대한 선물에 의거하여 참전하는 모든 자들에게 이를 하사한다.” - 우르반 2- (129)

  • 십자군은 자체의 열정에 의해 뜨거워진 기독교가 본질에서 벗어난 많은 예들 중에서 가장 노골적인 것이다. (129)

 

# 제1차 십자군 원정 [130]

  • 에게리아라고 알려져 있는 에테리아... 에테리아의 순례기(4세기?)11세기에도 보급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방의 기독교가 성지를 헌신의 대상으로 여긴 방식의 본보기이다. (130)

  • 그레고리 7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구하고 성지를 회복할 원정을 꿈꾸었지만 생전에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가 없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반 2세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스 1세의 지원 요청에 응답하여 투르크족에 대한 원정을 선포했고,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라고 외치며 응답했다. (130-131)

  • 당시 유럽의 여러 지역이 가뭄과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외국으로 원정하자는 부름은 귀족들과 하류 계층 모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종말론적 환상들이 다시 나타났다. (131)

  • 은자 피에르의 지도 아래 쾰른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132)

  • 공식적인 십자군 전쟁은 우르반이 대표로 지명한 퓌(Puy)의 주교 아데마르가 이끌었다. 그와 동행한 다른 지도자들은 부용의 고드프리(Godfrey of Bouillon), 레몽 드 생질(Raymond of Saint Gilles), 보에몽(Bohemond), 그리고 탄크레드(Tancred)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고 황제 알렉시우스의 영접을 받았다. 은자 피에르도 패잔병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이들은 비잔틴군의 도움을 받아 투르크족의 수도인 니케아를 탈환했다. 황제는 십자군이 도시를 약탈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비잔틴인들이 먼저 입성했다... 다소(Tarsus)의 성벽 앞에서 탄크레드와 고드프리의 동생 볼드윈이 언쟁을 벌였다. 볼드윈은 원정을 포기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이들의 지도자로서 에데사의 백작의 칭호를 받았다. 나머지는 안디옥을 포위했다. (132)

  • 안디옥 포위... 성안에 거주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출신 기독교 신자들이 성문을 열어 주었다. 십자군들은 하나님이 원하신다”(God wills it)라고 소리치며 성 안으로 들어갔고, 투르크 수비병들은 성채로 피했다. 그러나 성채에 피신한 투르크 병사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나흘 후 투르크 대군이 도착했으므로, 십자군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거룩한 창이 안디옥에 묻혀있는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 창을 발견... 닷새 동안 금식과 기도 한 후 이들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투르크 군을 향해 돌진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악한 짓을 하지 않았다. 다만 창으로 찔렀을 뿐이다.” (132-134)

  • 십자군 지도자로 임명된 아데마르 주교가 포위 작전 도중 열병으로 사망... 부용의 고드프리가 새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109967일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이집트 출신의 파티마족 아랍인들이었다(이들은 모하메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니케아와 안디옥의 십자군은 수니파 투르크족과 싸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는 파티마족은 시아파였다. (134)

  • 예루살렘 공격... 종교적 의미를 띠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맨발로 성을 돌며 참회의 찬송을 불렀다... 1099715일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학살... 부용의 고드프리에게는 성묘”(聖墓)의 수호자라는 칭호와 작위가 주어졌다. 1100년 그를 계승한 그의 형제 볼드윈은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이 왕국의 주요 봉신들은 안디옥 왕자 보에몽, 에데사 백작 볼드윈, 그리고 트리폴리의 백작 툴루즈의 레이몽이다. (135)

 

# 후기 십자군 원정 [135]

  • 예루살렘 정복 이후... 일부는 성지에 남았으나 다른 이들은 무장 순례라 볼 수 있는 여행을 마친 후 귀향했다. (136)

  • 아동 십자군 원정” (136)

  • 2차 십자군 원정의 원인이 된 것은 1144년 알레포의 술탄에 의한 에데사의 함락이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예루살렘 왕국을 구하기 위한 정규군의 조직을 촉구했으며, 준비 없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갈 것을 주장하는 감정적 설교가들을 반박했다. 마침내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의 영도 아래 20만명의 군대가 성지를 향해 떠났으나, 이들은 투르크 군에게 거듭 패했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6-137)

  • 예루살렘 왕국은 한동안 융성하여 아말릭 1세 때에는 카이로에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재도전을 시작하여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의 영도 아래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137)

  • 그레고리 8세는 십자군 정신의 부흥을 요구했다. 이 제3차 십자군 원정은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황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그리고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2세 등 세 명의 국왕이 이끌었다... 프리드리히는 물에 빠져 죽었고 그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리처드와 필립은 2년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아크레를 함락시켰다. 필립은 리처드의 부재를 틈타 그의 영토를 빼앗을 속셈으로 귀환했다. 리처드도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중 독일 황제에게 포로로 잡혀 막대한 몸값을 약속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137)

  • 인노센트 3세가 소집한 제4차 십자군 원정은 더 큰 실패작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이집트에 소재한 살라딘의 본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유명한 설교자 풀크 드 뇔리(Foulques de Neuilly)가 십자군을 일으키고 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풀크는 고리대금 및 온갖 형태의 사회적 불의를 극단적으로 대적했다. 그는 화폐경제의 발달로 말미암아 부자들이 돈을 사용하여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들은 여전히 가난한 상태에 머무는 현상에 분노했다. 풀크는 십자군을 장려하는 설교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 큰 임무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선언했다... 풀크와 교황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계획이 추진... 콘스탄티노플의 왕좌를 두고 두 사람이 경쟁... 하나가 인토센트에게 왕위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 십자군을 지원해 주겟다고 약속... 인노센트는 거절했지만, 십자군들을 이집트로 수송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베네치아인들은 많은 액수의 돈을 받고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가는 데 동의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플랑드르의 볼드윈(Baldwin of Flanders)을 콘스탄티노플 황제로 지명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의 라팉제국(1204-1261)을 세웠다... 라틴 총대주교가 지명됨으로써 최소한 형식상으로 동방과 서방이 재결합되었다... 인노센트 3세는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교회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비잔틴인들의 저항... 니케아 제국이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함으로써 라틴 제국은 종말을 맞았다... 서방 라틴권에 대한 동방 헬라권의 적개심이 심화되었다. (138-139)

  • 예루살렘 왕이 이끈 제5차 십자군 원정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그쳤으므로 별다른 성과을 얻지 못했다. (139)

  •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끈 제6차 원정은 다른 원정들보다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황제와 술탄이 협정을 체결하여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과 아크레에 관련된 성지로 통하는 도로들을 프리드리히에게 양도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에 입성했는데, 아무도 그를 왕으로 임명해주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예루살렘 왕에 즉위했다. 그를 파문했던 교황 그레고리 9세는 분노했으나 유럽을 기뻐했으며, 프리드리히를 예루살렘의 해방자라고 불렀다. (139)

  •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이끈 제7, 8차 원정은 대실패였다. 왕은 제7차 원정 도중 무슬림의 포로가 되어 막대한 몸값을 지불했고, 8차 원정 중 튀니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이때가 1270년으로서 십자군 원정의 종말에 해당한다. (139)

 

# 스페인 국토회복운동 [139]

  • 8세기에 무슬림에게 멸망한 서고트 왕국의 일부가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명맥 유지... 프랑크족... 두 세력을 중심으로 스페인인들이 레꽁끼스타”, 즉 국토회복운동이라 부르는 이슬람에 대한 저항이 시작된다. (139)

  • 기독교 국가로서의 스페인 통일에서 야고보(St. James)의 무덤 발견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티아고(Santiago), 즉 야고보의 성지에 이르는 도로가 북부 스페인과 서방 기독교권의 접촉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결국 야고보는 무슬림에 대항한 투쟁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 “이슬람 교도를 멸망시키는 야고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140)

  • 스페인 무슬림의 전성기는 929년 코르도바의 아미르 압둘라만이 칼리프가 된 후였다... 1031년 코르도바의 마지막 칼리프가 다른 당파들에 의해서 해임되면서 무슬림지역은 분열되었다. (140-141)

  • 1085년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이 옛날 서고트족의 수도였던 톨레도를 장악했다... 1212년 기독교 왕들이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무어인들을 격파함으로써 국토회복운동은 급격한 진전을 보였다. 1248년 당시 스페인에 잔존한 무어 왕국은 그라나다 뿐이었으며, 이 왕국도 카스티야 국왕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명맥을 유지했다. 마침내 1492년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가 그라나다를 함락시켰다. (141)

 

# 이슬람 공격의 결과 [141]

  •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서방 신자들과 비잔틴 신자들 사이의 증오와 불신이 깊어졌다. (141)

  • 서유럽에서 십자군 원정과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은 교황의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42)

  •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의 경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지와의 잦은 접촉을 통해 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인성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42)

  •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들, 족장들의 뼈,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인들의 치아 등 성유물들이 유럽으로 들어옴에 따라 성유물 숭배가 가열되었다. (142)

  • 군사 수도회의 설립에 따라 수도원의 이상도 새로운 방향을 취했다. (142)

  • 템플 기사단, 칼라트라바 기사단, 알칸타라 기사단, 산티아고 기사단... (143)

  • 템플 기사단이 많은 부와 세력을 획득했기 때문에 1307년 프랑스의 국왕 필립 4세는 교황 클레멘트 5(1305-1314)의 묵인 하에 그들을 이단, 마술, 도덕적 해이 등의 혐의로 고발하여 프랑스 내에 있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143)

  •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은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말타를 다스렸다. (144)

  • 십자군 정신은 이단들에 대한 대항에서도 나타난다. (144)

  • 신학 분야에서 무슬림과의 새로운 접촉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철학자 마이모니데스와 무슬림 철학자인 이븐 루슈드(서방 문헌에서는 아베로에스로 알려져 있다)는 코르도바 출신이다. 이들과 그 동료들은 고대 철학을 부활시켜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신학적 문제들에 접목시켰다. 특히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방대한 주석을 남겼는데, 이 때문에 그는 후에 주석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들은 그후 13세기에 철학과 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44-145)

  • 당시 유럽에 발생한 경제적ㆍ인구 통계학적 변화와 십자군 원정들 사이에는 복합적인 관계가 있다... 십자군 원정 시대에 도시와 상업이 발달했다... 토지보다 통상과 교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부의 원천들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도시들이 성장했으며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래 도시에 사는 자들이라는 의미인 부르주아는 주로 당시 점차 경제 및 정치력을 획득해가던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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