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청을 압도하고 권력자들과 대결하며 멀리 성지 이스라엘의 해안에까지 미친 개혁의 물결은 수도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101)
# 수도원 개혁 [102]
-
수도원 자체도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102)
-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102)
-
909년 아키텐의 공작 윌리엄 3세가 당시 수도원들보다 더 나은 수도원을 바라면서 작은 수도원을 세웠다... 베르노를 수도원장으로 초빙... 베르노는 『규율집』에 충실할 것 및 수도원 개혁을 위한 노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 윌리엄은 자신의 사냥터인 클뤼니(Cluny)를 수도원 부지로 제공... (103)
-
1000년이 끝나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화해하기 위해 수도원과 사원에 재산을 기증하곤 했다. (103-104)
-
클뤼니 수도원... 수도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르노, 오도(926-944), 아이마드(944-965), 마이욜(964-994), 오딜로(994-1049), 휴(1049-1109)... 7대 원장 폰티우스(1109-1122)는 앞선 수도원장만큼 유능하지 못했다... 후임자 피터는 가경자(可敬者, Venerable)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로서(1122-1157) 폰티우스 시대에 잃은 것을 대부분 회복했다. 클뤼니 개혁의 한 가지 특징은 수도원들이 완전한 재산 소유권을 소유함으로써 봉건영주의 변덕에 좌우되지 않은 것이다. (104)
-
“제2 클뤼니 수도원들”이라는 조직이 등장 (104)
-
최초의 수녀원이 11세기에 휴(Hugh)가 클뤼니 수도원장 시절에 설립된 마르시니 수도원이다. (105)
-
수도사들과 수녀들의 주된 활동은 베네딕트의 『규율집』이 명한대로 성무일과, 즉 기도와 성경 강독을 하는 것이었다. (105)
-
클뤼니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수도원적 모범에 따른 교회의 전반적 개혁이라는 목표에 합류했다. 당시 교회이 수뇌부에 만연했던 부패와 비교해 볼 때 클뤼니 운동은 하나의 기적, 새로운 여명을 가져다 줄 하나님의 개입으로 보였다. (106)
-
11세기에 교회 개혁의 목표는 이미 수많은 수도원 공동체에서 벌어지던 움직임의 연장으로 파악되었다... 툴의 부르노...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즉위... 교회 개혁가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국왕들이나 귀족들을 비롯한 일체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106)
-
제거해야 할 가장 시급한 폐해는 성직매매였다. 귀족들, 왕들, 그리고 황제들에 의한 감독들 및 수도원장들의 임명도 엄격한 의미에서 성직매매는 아니었지만 이와 밀접한 양상을 띠고 있었으므로, 특히 세속 통치자들이 개혁의지를 지니지 못한 지역에서는 금지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106-107)
-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107)
-
밀란의 파타린파... 이들은 성직자 독신제도를 주창했는데, 사제들ㄹ의 결혼을 일종의 축첩제도라고 주장했으며 사제들의 부인들을 창녀라고 칭하면서 그들을 남편의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로렌스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결혼한 사제들의 집례하는 성례를 거부했다. 주교가 이성과 전통에 호소하려 했으나, 파타린파는 그 주교를 성직매매 죄로 고발했다. 주교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후일 성인으로 시성된 요한 괄베르토는 그 주교가 성직매매자라고 선포하면서 도시의 거리를 행진했다. 힐데브란트도 존 콸베르토를 도와 가담했다. 존경받고 있는 개혁파 수도사인 다미안은 중용과 인내와 사랑과 평정을 요구했다... 불시험... 주교는 도시에서 도망쳤고, 그의 가족들은 집에서 끌려나와 거리로 쫓겨났다. (107-108)
-
베데딕트 수도원 운동의 또 하나의 기초 요소인 순명(順命)도 11세기 개혁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교황에게 순종... (108)
-
가난 문제... 애매한 태도... 모범적 수도사는 무소유의 단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수도원은 재산과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신자들의 선물과 유산을 제공함으로 수도원의 재산은 증가함... 개헉자들은 많은 감독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면서도 수세기 동안 축적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교회의 권리를 정당한 것으로 옹호했다. (109)
-
축적된 막대한 재산이 클뤼니 개혁운동 실패의 결정적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109)
-
11세기 교회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재산이었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권력자들의 음모에 대적하여 가난하고 압박받는 자들의 편에 설 수 없었다. (110)
-
피터 다미안은 베네딕트 규율이 요구한 것보다 훨씬 가혹한 내핍생활을 이상으로 추구했다. (110)
-
11세기 말 몰렘의 로베르가 창설한 시토(Citeaux) 수도원이다... “시토회”(Cistercian)...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마르다의 직분보다 마리아의 직분이 우월하다고 확신...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묵상으로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다... 뛰어난 설교가... “닥터 멜리플루우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꿀처럼 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오 거룩하신 주님”과 “구주를 생각만 해도”라는 두 찬송이 지금도 유행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묵상에 전념한 신비주의자, 교황청 뒤에 혹은 그 위에 위치한 영향력이었으며, 교회 개혁의 지도자, 제2차 십자군 원정을 가능하게 한 설교가, 그리고 신학적 변화에 반대한 보수주의자였다. (110-111)
# 교황제도와 교회법의 개혁 [112]
-
1140년에 편찬된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은 교회생활을 다스린다고 간주되는 많은 법들을 편찬하고 조정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이것은 다섯 개의 주요 문서들과 결합하여 『교회법대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교회법대전』은 1917년까지 가톨릭교회 법의 기초였다. (112)
-
힐데브란트는 브루노에게 “만약 황제에게서 교황직을 받아 로마에 입성하게 되면, 이는 사도가 아니라 배교자로서 그 도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112)
-
훔베르트는 로타링기아 수도원에서 학문에 전념했고 성직매매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는 자기의 논문 『성직 매매자들에 대항하여』에서 당시의 권력자들을 준엄하게 비판했다... 성직 매매자들이 집례한 성례가 무효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수세기 전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와 논쟁하면서 거부했던 주장이었다. 그는 그후 1054년 성 소피아 성당의 제단에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음으로써 동방과 서방의 분열을 공식화시키게 된다. (112)
-
힐데브란트... 로마에서 수도사로 지낼 때 장래의 교황 그레고리 6세를 만났다. 그레고리 6세는 교회의 개혁을 원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힐데브란트를 측근에 두었다. 당시 정식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세 명 나타났고, 그레고리는 교회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그레고리 6세의 임종을 지킴... 2년 후 브루노는 로마를 향해 가면서 힐데브란트에게 자기가 진행하려 하는 교회 개혁에 합류해 줄 것을 요청했다. (113)
-
힐데브란트... 그레고리 7세... (113)
-
맨발로 로마에 입성한 브루노... 레오 9세... (113)
-
레오 9세의 개혁... 성직자 독신제도와 성직매매 금지를 통한 교회 개혁이야말로 권력자들에게서 교회를 되찾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달은 대중들은 이 운동을 지지했다. (114)
-
레오 9세... 독일의 하인리히 3세... 반란을 일으킨 로렌의 고드프리를 파문... (114)
-
레오 9세의 두 가지 오류...
-
1)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에 정착한 스칸디나비아인들에게 무력을 사용한 것. 스칸디나비아인들에에게 패배... 임종직전까지 포로 생활을 함...
-
2) 훔베르트를 자기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한 것... 훔베르트의 엄격성으로 말미암아 레오의 사망 직후인 1054년에 대분열이 발생했다. (115)
-
로마인들이 새 교황을 뽑되 독일인을 선출하도록 결의... 새 교황 빅토르 2세는 레오의 정책들을 답습했다. 로렌의 고드프리가 다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하인리히 3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교황이 그를 도왔으며, 황제는 임종 시에 어린 아들 하인리히 4세를 교황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빅토르가 한동안 교회와 제국을 동시에 통솔할 수 있었으므로, 그가 주장한 개혁은 급격히 진전되었다. (116)
-
개혁가들은 니콜라스 2세의 주도 하에 제2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했으며, 그 공의회는 그후 교황들을 선출할 방법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주교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추기경들이 교황 선출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추기경들의 동의를 얻고, 마지막으로 로마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알렉산더 2세는 추기경들에 의해 정식으로 선출되어 개혁을 계속했다. (116)
-
힐데브란트... 그레고리 7세... 일반인들이 그의 선출을 요구하고, 추기경들이 이에 동의... 교황청 아래 세계를 통일하여 한 목자 아래 한 양떼를 이룩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성경을 여러 민족어로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역을 로마의 수중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116)
-
그레고리 7세는 서유럽에서 성직매매와 성직자들의 결혼에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했다. 1070년에 개최된 종교회의에서는 성직매매를 정죄하고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을 명했다. 그레고리는 평신도들이 성직매수자에게서 성찬을 받는 것을 금함으로써 이 종교회의의 결정을 강화했다... 일부에서 그레고리를 이단으로 비방했다(어거스틴은 분파주의자들이 집례한 성례전이 유효하다고 선언했고 교회가 그에 동의했었기 때문)... 프랑스의 반발... 성직매매와 성직자 결혼을 반대한 양면 공격은 지혜롭지 못했다(이미 결혼하여 아내를 버리기를 거부하는 성직자들을 단결하게 만들었다)... 그레고리와 그의 동료들은 수사들의 이상인 독신제도를 개혁에 추가함으로써 교회개혁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117)
-
그레고리는 정복왕 윌리엄이 통치하던 잉글랜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교황의 고문으로 있던 시절부터 노르만디에서 잉글랜드에 침입하려는 윌리엄의 계획에 동조했었는데, 정복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교회 개혁에 찬성했던 윌리엄은 성직매매에 대한 교황의 공격을 지지했다. (117-118)
# 교황청과 제국의 정면대결 [118]
-
그레고리는 하인리히 4세가 (개혁파 교황의 보호 아래 성장했기에) 개혁운동을 지지할 것으로 믿었다... 하인리히는 제국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자기를 지지하는 인물드를 성직에 임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18)
-
하인리히 4세는 폭정과 간음과 마술 등의 혐의로 그레고리를 퇴위시킨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이 결정을 “교황이 아니라 거짓 수도사에 불과한 힐데브란트”에게 통지했다. (118-119)
-
그레고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 베드로의 권위와 힘에 의하여, 그리고 교회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나는 국왕 하인리히를... 금령 아래 두노니 그가 독일과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을 금지한다. 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거나 맹세하고자 하는 일체의 서약들을 무효화한다. 그리하여 그가 국왕으로서 복종 받는 것을 금한다.” (119)
-
카노사(Canossa)... (120)
-
독일에서 그레고리와의 어려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킴... 그레고리는 하인리히를 신뢰할 수 없었으므로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황제의 추종자들이 교황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클레멘트 3세라는 이름으로 대립교황의 선출했다... 하인리히가 반란을 진압... 1081년 하인리히는 로마로 진군했다... 그레고리가 기대할 수 있는 지원군은 남부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노르만인들이었으나 이들을 파문한 바 있었다... 비잔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레고리는 성 안젤로 성으로 도피했다... 노르만족이 개입하여 로마를 장악하고 학살하고 수천명을 노예로 팔았다... 여러 날 동안 폭력과 약탈을 당한 로마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한 오랜 폭력과 혼란 속에서 클레멘트 3세와 지지자들은 도시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121)
-
그레고리는 1085년 임종하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증오했다. 이 때문에 객지에서 죽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22)
-
힐데브란트는 임종 전에 노령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교황이 될 마음이없었던 노인은 그 뜻을 받아들여 빅토르 3세라는 칭호로 교황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지자들에 의해 로마에 입성했으나 곧 병에 걸렸으므로 평화롭게 죽기 위해 몬테카시노로 돌아갔다. (122)
-
개혁파에서는 우르반 2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로마시를 탈환하고 클레멘트 3세를 축출했다. 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일으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레고리 7세의 정책들을 유지했다... 프랑스 필립 1세를 결혼 문제로 파문했다... 독일에서 하인리히의 아들 콘라드의 반란을 조장했다. 콘라드는 자기가 황제가 되면 주교들에 대한 임명권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이들을 패배히키고 제국회의를 통해 그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122)
-
우르반의 후계자 파스칼 2세(1099-1118)는 클레멘트 3세의 죽음과 함께 분열이 종식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황제가 클레멘트 대신 다른 교황을 임명함으로써 분열은 계속되었다. (122)
-
하인리히 4세는 반역을 꾀한 자기의 아들 하인리히에 맞서 전쟁을 준비하던 중 1106년에 사망했다. 평화를 원했던 파스칼은 비록 세속 권력자들에 의해 수행된 성직수임이라도 전대(前代)에 시행된 성직임명을 유효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앞으로 평신도에 의한 성직수임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에 불복하는 자는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과거를 청산한 동시에 새 황제에 도전... (123)
-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에 침입했으며, 파스칼은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인리히자 제안하고 파스칼이 동의한 절충안은 황제가 주교들에 대한 성직수임권을 포기하는 대신 교회는 고위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는 봉건적 특권들을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성직자들로부터 세속적 권력을 박탈하겠다는 의도였다. 파스칼은 “성 베드로의 유산”만 로마 교회가 보유한다는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 (123)
-
세속 권력의 상실을 두려워한 고위 성직자들의 반발... 권력 상실을 두려워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킴... 파스칼은 침묵했으나 독일의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황제를 파문했다... 무력을 사용한 황제... 독일에서의 상황이 좋아지자... 이탈리아 침공... 파스칼은 성 안젤로 성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죽음... 황제의 개입을 두려워한 추기경들은 서둘러 새 교황을 선출했다. 겔라시우스 2세... 프랑스로 피신... 제국은 적이 되었고 남북의 노르만인들은 믿을 수 없었으므로, 교황들은 독일 황제들에 대항하여 자기들을 지원할 동맹자로서 프랑스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124-125)
-
칼릭스투스 2세(1119-1124)는 황제의 친척... 보름스 협약(1122)... 고위 성직자들을 원래의 전통대로 자유스럽게 선출하되 황제나 그의 사절들이 현장에 참석하도록 결정되었다. 종교인들만이 고위 성직자들에게 목회적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와 홀을 하사하되, 봉건적 권리, 특권 그리고 재산들과 이를 대표하는 상징들을 하사하는 권한은 계속 권력자들의 수중에 두었다. 또한 황제는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 봉건 영주들이 교회 재산을 침해하는 행위를 방지하기로 약속했다. (125)
-
개혁파 교황들의 게획은 성공했다. 성직자의 독신제도가 서방 교회 전체에서 시행되었다. 한동안 성직매매도 사라졌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최정상에 달하기까지 교황청의 권력도 계속 증가했다. (126)
-
고위 성직자들의 임명을 둘러싼 논쟁은, 개혁파 교황들이 성직자들의 독신문제에 있어서는 수도원적 이상을 고집한 반면 가난의 이상에 관하여서는 또 다른 입장을 취했음을 보여준다. (126)
-
개혁파 교황들은 교회의 재산이 그리스도와 가난한 자들에게 속한다고 보았으므로 세속 권력자들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산들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 이론적으로는 소유자가 아니라 수호자인 주교들의 개인적 야망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127)
'[기타 자료실] > [도서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제1부 제6장 : 중세 기독교의 황금시대 (0) | 2021.02.23 |
---|---|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제1부 제5장 : 이슬람에 대한 공격 (0) | 2021.02.23 |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제1부 제3장 : 제국의 부활과 계속되는 부패 (0) | 2021.02.23 |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제1부 제2장 : 동방 기독교 (0) | 2021.02.23 |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제1부 제1장 : 새로운 질서 (0) | 2021.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