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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야만족이 로마 국경을 넘어 침입한 것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훈족과 수에비족, 그리고 반달족과 부르군트족 등 많은 종족들로 채워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멸망을 통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사랑의 자비를 찬양할지어다. - 파울루스 오로시우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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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많은 독립 왕국들이 건설... 수도원주의와 교황제도에 새로운 기능과 권력을 부여했다. (15)
# 게르만족 왕국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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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족들”의 대부분은 실상 로마제국 안에 정착하여 멀리서 앙모해 왔던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 원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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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년 라인 강을 건넌 반달족은 프랑스와 스페인 일대를 방랑하다가 429년 지브롤터 해역을 건넜고 439년에 카르타고를 함락시켰다... 그 후 다시 바다를 건너 시실리,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등을 점령했다. 455년에 로마시를 약탈했는데, 당시의 참상은 45년 전 고트족의 침입 때보다 혹심했다... 이들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파였으므로 가톨릭 신자들과 도나투스주의자들을 계속 박해했다.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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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약 1세기 동안의 반달족 통치가 끝난 후 이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었던 이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영도 아래 잠시 부흥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인들이 “헬라인들”이라 불렀던 동방의 침입자들은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를 도입했다. 이들은 교리에 있어서 서방 가톨릭교회와 일치했으나 문화와 일상생활은 현격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7세기 말 무슬림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했을 때 기독교는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으며, 결국에는 사라졌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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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족은 378년 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인들을 패퇴시키고, 발칸반도를 휩쓴 후 410년에 로마를 점령했다. 그들은 415년에 스페인에 침입하여 8세기 초 무슬림들에게 정복되기까지 그곳을 통치했다. 그 왕국의 정치적 역사는 혼란과 투쟁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모두 34명의 왕들 중 15명만 자연사하거나 전사했고, 나머지는 암살 혹은 퇴위의 운명을 맞았다. 이들 역시 아리우스 파였으나 반달족만큼 자기들 영내의 정통주의자들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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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의 왕 레카레드(586-601)가 AD 589년 톨레도에 회의를 소집하고 니케아 정통 신앙을 받아들였다. 왕의 뒤를 이어 귀족들의 대부분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얼마 후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졌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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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도자는 세비야의 이시도르이다. 그는 가능한 한 고대 문화를 계승ㆍ보존하려 했던 학자이다. 그가 저술한 『어원학』은 당시의 지식수준을 보여주는 백과사전으로서 종교 분야뿐만 아니라 천문학, 의학, 농업 등 거의 모든 지식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 과거의 지식과 지혜들을 수집하여 분류하는 데 전념했으므로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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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카레드의 개종 후 교회는 서고트 왕국이 입법자 역할을 했다... 633년에 소집된 톨레도 공의회는 사제들이 감독의 허락 아래서만 결혼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불순종할 경우에 해당 하제는 “상당 기간의 고행”에 처해지는 반면, 그의 아내는 감독이 취하여 노예로 팔게 된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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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에서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기독교에 개종시키지 말도록 포고했다. 그러나 이미 강제로 개종한 자들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이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유대인과 접촉 금지... 할례를 행할 경우 자녀들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한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아내와 자녀들에게서 떠나야 했다. 그 반대의 경우, 즉 유대인 아내가 개종을 거부할 경우에 그들의 결혼은 무효였으며, 그녀는 남편들과 자녀들에게서 떠나야 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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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릭(710-711) 왕 때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에 침입하여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때쯤 기독교가 왕국에 자리 잡았으므로 교회를 중심으로 반도의 재탈환 투쟁이 시작되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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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대부분 동안 고울(Gaul) 지방은 아리우스파인 부르군트족과 아직 이교 신자들이던 프랑크족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반달족들과는 달리 부르군트족은 정통 신자들을 핍박하지 않았다... 516년 지기스문트 왕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로 개종했으며, 곧 나머지 국민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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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족은 원래 독립 부족들의 엉성한 동맹이었다. 그러다가 메로베우스가 창시한 메로빙거 왕조에 의해 어느 정도 통일을 이루었다. 베로베우스의 손자이며 메로빙거 왕조가 낳은 최고의 영웅 클로비스는 기독교 신자인 부르군트족의 공주와 결혼했는데, 전쟁터로 가기 전날 밤에 만약 자기 아내가 믿는 하나님이 승리를 허락한다면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AD 496년 크리스마스 날 그는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얼마후 대부분의 부족이 세례를 받았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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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빙거 왕조의 궁재(궁내장관) 카를 마르텔(“망치”라는 의미)이 프랑크족 군대를 이끌고 당시 스페인을 점령한 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이 심장부를 위협하는 무슬림들을 대패시켰다. 그는 732년 프랑크족 병사들을 거느리고 투르(또는 푸와티에) 전투에서 이들을 격퇴했다... 그의 아들 피핀 단구왕은 “바보”라고 알려진 칠데릭 3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교황 자카리아스의 동의 하에 칠데릭을 폐위시켜 수도원에 유폐했다. 그 후 피핀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보니파시오 주교에 의해 국왕에 임명되었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중세 초기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로 등장하여 교회의 개혁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교황에 의해 황제에 임명된 인물이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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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비스처럼 강력한 왕 시대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통치자들에게 순종했다. 그리하여 왕들이 주교를 임명하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다... 주교의 직분과 함께 막대한 토지가 부여되었으므로 주교는 대 영주였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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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은 로마제국의 통치에 완전히 예속된 적이 없었다. 하드리안 황제는 섬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성벽을 건축했는데, 그 남쪽은 로마제국의 일부였으며, 북쪽에는 픽트족과 스코트족이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 군단이 철후한 후, 남아있던 자들은 앵글족과 색슨족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앵글인들과 색슨인들은 그 후 켄트, 에섹스, 서섹스, 동 앵글리아, 웨섹스, 노섬브리아, 머시아 등 일복 왕국을 건설했다. 이 침입자들은 모두 이교도였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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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교회는 과거의 믿음과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국가들, 특히 스코틀랜드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선교사는 콜룸바.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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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기독교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초래한 중요하고 지속적인 결과는 사제에게 행하는 죄고백이었다...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새찬송가 484장)는 두루이드 교도들의 악한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한 켈트족의 기도문을 번역한 것이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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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아일랜드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영토에서 발달한 기독교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교회는 주교들의 다스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수도 공동체의 원장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부활절 날짜와 몇 가지 교회 의식을 거행하는 양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수도사들이 정수리가 아니라 이마를 삭발한 것은 이들의 저항을 보여주는 예이다. 결국 이 관습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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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그레고리... 대영제국에 관심을 가짐... 590년에 교황이 된 9년 후 그레고리는 자신이 속했던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인 어거스틴의 지도 아래 선교사들을 앵글족에게 파견했다... 어거스틴은 캔터베리(켄트의 수도)의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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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년 휘트비 종교회의...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는 콜룸바로부터 전수되었다는 전통을 고수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전통을 반대하고 유럽 대륙의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 교회 전체에 걸친 통일성을 추구한 서방 기독교권의 특권과 압력이 초래한 불가피한 결과였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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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년 헤룰리(Heruli) 족의 지도자인 오도아케르가 최후의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루스를 폐회시킨 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제노에게 제국이 통일되었음을 통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노는 처음에는 기뻐하면서 오도아케르에게 “애국자”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러나 곧 양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으므로 황제는 헤룰리 족을 제거하기 위해 동고트족에게 이탈리아를 침공하도록 회유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한동안 동고트족의 치하에 놓였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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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족 아리우스파... 정통 신앙을 유지하려 했던 주민들은 반역 혐의로 박해를 받았다.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 보에티우스가 테오도릭 왕에 의해 투옥되었다... 『철학의 위안에 관하여』를 남김... 예정과 자유의지, 그리고 선한 사람들이 망하고 악한 사람들이 흥하는 이유를 다룸... 542년에 장인 심마쿠스와 함께 처형당함... 2년 후 교황 요한도 감옥에서 사망...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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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잠시 중흥을 맞은 비잔틴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휘하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를 보내어 이탈리아르 평정하려 했으며, 20년간의 군사원정을 통하여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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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년 롬바르드 족이 이탈리아를 침략... 콘스탄티노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교황들은 8세기 중반부터 북쪽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따라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 사이의 동맹이 발전되었으며, 결국 샤를마뉴가 서로마제국의 황제에 임명되었다. (27)
# 베네딕트 수도원운동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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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수도원운동은 세 가지 면에서 동방의 그것과 달랐다. 1) 서방 수도원운동은 보다 실질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들은 자기부인이라는 전제 하에서 육체를 징벌하는 대신, 세상에서의 선교를 위해 영혼과 아울러 육체를 훈련하고자 했다. 2) 동방처럼 독수도생활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서방 수도원운동은 공동체 내에서의 생활을 추구했다. 3) 동방의 수도원처럼 교회의 지배층과 계속적인 갈등을 겪지 않았다... 서방의 수도원운동은 교황들, 주교들, 그밖에 다른 교회 지도자들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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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수도원 운동의 형성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480년경 이탈리아의 누르시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베네딕트이다... 20세쯤 은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동굴에서 살기 시작... 명성이 높아지면서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 공동체를 몬테카시노로 이전... 베네딕트의 명성은 매우 높아 동고트족의 왕이 그를 방문할 정도였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자신이 폭군으로 간주한 왕에게 독설과 저주를 서슴지 않았다.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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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의 위대성은 그가 공동체를 위해 작성한 『규율집』에 있다... 수세기 동안 서방교회 수도원운동의 기본적 모습을 결정... 극단적 금욕주의 대신에 비록 엄격하기는 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질서와 규범을 통한 지혜로운 수도 생활을 추구한다... 정주(定住)와 순명(順命)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독재할 수 없으며 스스로도 하나님과 『규율집』에 따라야 한다... 권면... 문책... 파문... 체벌... 추방... 육체노동... 기도(수도생활의 핵심)... 성무일과... 필사... 교육의 중심지... 농경지 면적 증가에 도움... (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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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년 베네딕트가 몬테카시노에 설립한 수도원이 롬바르드족에게 약탈당하고,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그의 『규율집』을 가지고 로마로 도피했다... 후일 교황이 된 그레고리가 이 『규율집』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교황청의 지원 아래 베네딕트의 규율은 서방 교회 전체에 전파되었다. (34)
# 교황제도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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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Pope)이라는 단어는 “아버지”(Father)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초기에는 중요하고 존경받는 감독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중요한 것은 “교황”이라는 칭호의 기원이 아니라, 어떻게 하여 로마 감독이 중세시대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가톨릭교회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권위를 누리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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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초기 시대부터 수적 성장이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안디옥이나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들이 로마의 교회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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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교황의 권위가 크게 고양되었다. 동방의 제국은 그 후 1,000년쯤 지속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법과 질서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의 유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교회가 맡았다. 그리하여 침략자들에 의해 와해된 통일성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서방에서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감독, 즉 로마의 감독이 핵심이 되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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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레오”...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로 “교황”이라고 불린 인물... 그는 당시의 신학적 논쟁,특히 그리스도 안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관한 논쟁에 참여했다. 레오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은 그가 로마의 감독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크게 힘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잔틴 황제들과 동방의 주교들은 로마의 감독이 자신의 권위 영역을 확장하려한 부적절한 시도로 여겼다... 452년 이탈리아는 훈족의 침입을 받았다... 레오는 “하나님의 채찍”이라 불린 아틸라를 만나러 갔다... 아틸라는 로마를 침입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방향을 돌려 북으로 진군했는데, 얼마 후에 사망했다... 레오가 로마의 감독이던 455년에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했다. 당시 그는 침입자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가 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반달족의 지도자 게이세리쿠스와 협상했다.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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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교회 건축의 기초로 삼으셨으므로 베드로의 직계 후계자인 로마의 감독이 교회의 머리라고 확신했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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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제국의 부흥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신성한 지혜이신 그리스도에게 헌정된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했다. 건축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현재 이슬람의 특징인 첨탑들로 둘러싸여 있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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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는 교황이 롬바르드족의 위협에 대항하여 도시를 보존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571년 교황 베네딕트 1세가 사망했을 때 롬바르드족이 로마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를 계승한 펠라기우스 2세는 이들에게 뇌물을 주어 도시를 구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원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그는 프랑크족에게 북쪽의 배후에서 롬바르드족을 물리치도록 요청했다. 당시의 협상은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이것은 그 후 프랑크족이 교황들을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이 될 미래를 가리켜준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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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는 역사상 가장 유능한 교황들 중 하나였다... 영국 선교를 위해 어거스틴과 동료들을 파견했던 사람... 540년경 로마의 옛 귀족 가문에서 태어남... 동고트 왕 토틸라와 당시 부주교였던 펠라기우스(후일 교황 펠라기우스 2세)의 담판을 목격함... 베네딕트회 수도사가 된 후 교황 베네딕트는 그레고리를 행정위원회의 일원인 부제에 임명했다... 교황 펠라기우스 2세의 대사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어 6년동안 신학적 논쟁과 음모에 휘말림... 로마의 전염병 발생... 교황 펠라기우스 2세의 사망... 성직자와 시민들이 교황으로 선출함...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촉진하기 위한 조처를 취함... 스스로를 위대한 힙포의 감독(어거스틴)의 제자로 생각하는 데 만족... 어거스틴이 상상하고 추론했던 문제들을 그레고리는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임(예를 들어 연옥 교리)... 구원 교리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변질시켰다. 그레고리는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예정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를 도외시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이 만족하실 만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이는 보속을 통해 수행되었는데, 보속은 통회, 죄곡백, 그리고 실제의 처벌 혹은 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제의 사죄가 첨가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용서를 추인하는 행위이다. 교회와 계속 교제하는 중에 죽은 신앙인이 자기가 지은 모든 죄에 관한 보속을 제공하지 못했을 때에는 최종 구원을 얻기 전에 연옥으로 가게 된다. 살아 있는 이들은 연옥에 있는 사자들을 위해 미사를 올림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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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는 미사 혹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가 새롭게 희생된다고 믿었다. 이같은 희생으로서의 미사라는 개념은 그 후 서방 교회의 표준 교리로 정립되었다가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부인되었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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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기독교 교사들이 대중적인 미신을 제거하고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놀겨했는 데 반해, 그레고리는 당시에 널리 유포되던 전설들을 기독교 신앙을 반영하고 인정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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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후계자들 시대에 교황청은 불운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교회에 권위를 행사하려 했다... 교황 호노리우스(625-638)는 자신이 그리스도 단의론자(Monothelite)-예수 그리스도에게 두 본성이 있지만 의지는 하나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론적 이단을 따르는 사람-이라 인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몇 년 후 이단적인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한 토론을 금지하는 황제의 명령에 불응한 교황 마르틴 1세가 납치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었다.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수도사 막시무스는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혀와 오른팔이 잘린 후 유배되었다... 이때부터 그레고리 3세(731-741) 때에 이르기까지 교황이 선출되어 로마 감독으로 임명되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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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트족의 위협... 자카리아스 교황은 “바보”라고 불린 칠데릭 3세의 폐위에 동의하고 피핀을 황제로 앉혔다... 피핀은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롬바르드족에게서 탈환한 여러 도시를 교황에게 양도했다... AD 800년 성탄절에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를 서방 제국의 황제에 임명했다. (46)
# 아랍의 정복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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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의 가르침... 처음 환상에서 “온 세상의 주인의 이름으로 암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코란”이라는 단어는 “암송”을 의미한다. 모하메드는 자기가 새 종교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히브리 선지자들과 예수를 통해 계시하셨던 내용의 완성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로서 인정했으나, 기독교인들의 주장처럼 신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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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의무... 1) 근본적인 유일신 신앙,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2) 의무화된 다섯 차례의 예배. 3) 소득의 2.5%를 납부하는 희사(zakat)로서 일반적으로 부자들의 재산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된다. 4) 이슬람력 9월(라마단)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 및 음료의 섭취와 성행위를 금하는 것. 5) 경제적ㆍ신체적으로 능력이 있는 모든 무슬림이 평생에 한 번은 메카 성지 순례를 행하는 것.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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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가 메디나로 도주한 A.D. 622년을 이슬람교 원년으로 계산한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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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의 통치권은 칼리프들에게 전해졌다. “칼리프”는 “계승자” 혹은 “후계자”라는 의미의 아랍어다. 아부 바르크(632-634) 때 아라비아 전역이 통일되었으며, 무슬림들은 최초로 비잔틴 제국군에 대항해 승리를 거두었다. 오마르(634-644)의 영도 아래 아랍인들은 시리아에 침입했다. 635년에 다마스쿠스를 정복했고, 638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집트에 후일 카이로로 알려질 도시를 건설... 642년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킴. 647년에는 제3대 칼리프인 오트만(644-656)의 주도로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했다... 지구상에 등장한 가장 강력한 왕국들 중의 하나인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 (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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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칼리프 알리(656-661)와 경쟁자들의 투쟁으로 말미암은 대분열-시아파는 알리를 지지, 수니파는 경쟁자들을 지지-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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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695년에 카르타고 함락되었고 가톨릭, 도나투스파, 아리우스파, 그리고 비잔틴파 등의 기독교 분파에 시달리던 북아프리카 주민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711년에 타리크가 소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약할 대로 약해진 상태에 있던 서고트 왕국을 휩쓸었다... 피레네 산맥을넘어 서유럽의 심장부를 위협했다. 이들은 732년 투르 전투에서 카를 마르텔에게 패배했으니, 이로 인하여 무슬림의 제1차 확장이 종식되었다.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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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의 확장은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 예속된 백성들의 불만 덕분에 가능했다. 비잔틴 제국의 경우에 그러한 불만이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단성론이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기독교의 지리적 형태가 변화되었다. 그때까지 기독교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발전해왔었다. 그러나 이제 그 중심축이 북에서 남으로, 브리튼제도와 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성립되었다. (50-51)
무슬림의 침략 및 그에 대한 기독교의 반작용이 오랫동안 발전해온 기독교의 군사화 과정을 지속시키고 가속화했다... 콘스탄틴 이후 국가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책임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정전론(Just War Theory)를 발달시켰는데, 이 이론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이 특정 상황에서 폭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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