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를마뉴 대제의 통치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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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가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웠을 때 서방 기독교권 거의 전체가 황제의 통치 아래 있었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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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지아족과 색슨족에 대항한 전쟁... 784년 프리지아족이 항복... 1년 후 색슨족도 항복하고 수천 명이 강제로 세례 받았다... 색슨인들은 세례를 받는 것은 곧 조상들의 신들을 배반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신들 또한 자기들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후에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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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의 노래』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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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는 황제로서 자신이 세속사와 종교 문제에 있어서 백성들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여겼다. 그는 자격 있는 자들을 감독들로 선별했으나 마치 장군들을 지명하듯이 임명했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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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는 교육받은 인물이 아니었으나 학문을 장려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요크의 앨퀸... 샤를마뉴는 테오둘프를 오를레앙 감독이 임명했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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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의 영광은 그의 사후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 경건한 우리는 양심적 통치자였으나 인물을 제대로 식별할 줄 몰랐다. 그는 수도원 개혁에 열중했다... 루이는 반역 집단들을 진압한 후 적들을 용서해 주곤 했는데, 그로 인해 더 큰 지지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반란들이 발생했다.... 그가 죽은 후 재산은 세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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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의 정복은 서유럽의 경제와 정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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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주된 원천은 화폐가 아닌 토지였다... 교회도 영향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각 교구 및 사원들은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영주들은 감독들과 수도원장들의 환심을 얻기에 급급했다. 이에 따라 특히 감독들과 수도원장들의 임명권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88)
# 신학 활동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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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가 추구한 학문의 부흥은 9세기 내내 열매를 맺었다. 강력한 통치자와 평화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학교들이 융성했고, 사본들이 필사되었으며, 신학 활동이 이루어졌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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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가 세운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활동한 위대한 사상가는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였다... 경건한 루이의 세 아들 중 하나인 대머리 샤를의 궁정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학식으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 (5세기의 어떤 사람... 자기가 마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받은 디오니시우스인양 가장했다)... 이 작품들은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의 산물이었으므로 곧 바울의 신학과 혼합되어 마치 사도 바울이 신플라톤주의자였던 것처럼 취급되었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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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게나, 『본성의 분할에 관하여』... 신플라톤주의적 경향...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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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주요한 신학 논쟁은 스페인의 감독이었던 톨레도의 엘리판두스와 우르겔의 펠릭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했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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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치하에 도주하지 않았던 기독교인의 후예... “모사라베”... 샤를마뉴가 스페인 영토를 회복한 이후 갈등이 존재...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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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판두스 : 모사라베 전례의 일부 구절들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이 신성으로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나 인성으로는 “양자됨에 의하여” 형성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양자론자들)... 그러나 원래 양자론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양자로 선택된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엘리판두스는 예수님이 항상 신이셨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구세주 안에 공존하는 신성과 인성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으므로, 이를 하나는 영원하고 또 다른 하나는 양자에 의해 이루어진 두 가지 형태의 아들됨(sonship)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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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바나의 베아토 : “불신자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 속에서 인간만을 발견했다. 그들은 구세주를 단지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고난당하셨다. 내가 볼 때 나의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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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판두스와 그의 추종자인 우르겔의 펠릭스의 가르침은 프랑크족 출신 신학자들과 교황들에 의해 정죄되었다. 펠릭스는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당했으며, 모사라베들의 영향이 강했던 우르겔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무어족이 다스리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엘리판두스는 자기의 주장 철회를 거부했다. 엘리판두스와 펠릭스 모두가 사망한 후 논쟁은 잠잠해졌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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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오케 논쟁.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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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신학자들 사이에 발생한 신학 논쟁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론과 성찬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문제였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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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에 관련된 논쟁 : 오르바이스의 고트샬크 수도사 – 예정론 문제에서 어거스틴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결론지었다... 어거스틴의 정신과는 달리 신랄하게 그것을 설명하고 옹호함...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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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문제 : 코르비의 수도사로 후일 성인으로 추존된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의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하여』라는 논문... 떡과 포도주는 축성되는 순간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주장... 대머리 샤를은 코르비의 라트람누스에게 이 문제를 명백히 밝히라고 부탁... 라트람누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속에 진정으로 임재하지만 이는 다른 물리적 육체의 임재와는 다른 종류이며, 또 그리스도의 성체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의 역사적 몸과는 다르다고 대답했다.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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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제4차라테란 공의회(1215년) - 화체설 (93)
# 새로운 침입자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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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인들 – 노르인... 잉글랜드 웨섹스의 알프레드 대왕... 데인족의 왕 카누트의 잉글랜드 전체 정복... 프랑스, 스페인 진출...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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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르족... “헝가리인”... 고대 훈족...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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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납과 무쇠의 암흑시대” (96)
# 교황제도의 타락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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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링거 왕조의 몰락) 제국의 권위가 약화됨에 따라 교황들이 서유럽 전체에 통용될 수 있는 막강한 권위를 가진 존재로 간주되던 짧은 시기가 있었다. 858년부터 867년까지 계속된 니콜라스 1세의 통치... 『거짓 교서』... 하드리안 2세... 교황의 명성을 높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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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8세... 무슬림의 침입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뚱보 샤를과 비잔틴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응답 못받음... 독살됨... 망치로 머리가 깨뜨려짐...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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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년 스테파누스 8세... “시체들의 회의”를 주재...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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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4년 세르기우스 3세는 적수들이었던 레오 5세와 크리스도퍼 1세를 감금한 후 살해...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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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락트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난 딸 마로지아... 세르기우스의 정부... 세르기우스가죽은 후 마로지아와 그녀의 남편 투르키아의 귀도는 라테란 궁을 점령하고 요한 10세를 감금한 후 베개로 질식시켜 죽였다. 그후 레오 6세와 스테파누스 7세가 잠시 교황좌를 차지한 후, 마로지아는 자신과 세르기우스 3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요한 11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위에 올렸다. 요한 11세가 사망하고 나서 30년 후에 마로지아의 손자 요한 12세가 교황이 되었고, 그 후 그녀의 조카가 요한 13세로서 교황이 되었다. 그의 후계자 베네딕트 6세는 요한 13세의 동생 크레센티우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모 졸려 죽었다. 요한 14세는 보니파시오 7세에 의해 지하감옥에 유폐된 채 굶어 죽었거나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보니파시오 7세도 독살되었다. (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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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황제 오토 3세가 교황이 될 사람을 결정할 수 있었다. 23세의 조카를 교황으로 지명했는데, 그가 그레고리 5세이다. 그 후 유명한 학자인 오리야크의 게르베르트를 지명했다. 실베스터 2세의 칭호를 택한 게르베르트가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함...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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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가 죽은 후 데오필락트 가문의 크레센티우스... 투스쿨룸의 백작들에게 굴복... 투스쿨룸가는 베데딕트 8세, 요한 19세, 베네딕트 9세를 임명했다(15세에 교황이 됨)... 12년 후 1045년 베네딕트 9세는 막대한 금액을 받는 대가로 교황직을 포기... 그의 대부 그레고리 6세가 교회 개혁을 시도했으나 베데딕트 9세는 양위 약속을 철회했고, 크레센티우스 가문에서 다시 자기들의 교황을 내세우고 실베스터 3세라고 불렀다... 독일의 하인리히 3세가 중재에 나섬... 그는그레고리 6세와 회견한 후 공의회를 소집하고 클레멘트 2세를 교황에 지명함...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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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2세는 하인리히를 황제에 임명하고 나서 얼마 후에 사망... 하인리히는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고 있던 툴의 감독 브루노에게 교황직읠 제의, 브루노는 로마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한 교황직을 수락하지 않으려 했다... 자기와 비슷한 이상을 품고 있는 힐데브란트와 훔베르트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떠났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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