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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에서는 라틴어를, 그리고 동방에서는 헬라어를 사용했다는 큰 문화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자 간의 판이한 정치적 발전 과정 역시 이 두 교회들을 위하여 완전히 다른 상황을 제공했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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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는 황제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신학적 결정을 단행했으므로 더 큰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중세시대 내내 신학 논쟁이 벌어짐... (54)
# 칼케돈 공의회에 이르는 기독론 논쟁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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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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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는 신성이 불변하며 영원하다는 데 합의.. 양 학파 모두 예수가 신이신 동시에 인간이라는 데 동의했다. 문제는 이 연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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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학파 : 수세기 전에 존재했던 클레멘트나 오리겐처럼 신적 진리의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구세주가 신성의 완전하고도 분명한 계시여야 했다. 그의 인성이 가려지거나 약화되더라도 신성을 더 강조하고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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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학파 : 예수께서 인간이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속에는 신격(Godhead)이 존재하지만, 이 때문에 그의 인성이 감소되거나 가려진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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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헬라 철학의 가르침을 따랐던 이전 세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간적인 한계들과 대조하여 하나님을 정의해왔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인간은 항상 변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편재하시며, 인간은 한 번에 한 장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신성과 인성을 정의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육신-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완전한 결합과 현존-은 모순이 된다. (뜨거운 아이스크림?) 이 곤경을 해결하는 방법은 안디옥 학파의 방식처럼 신성과 인성이 실제로 하나로 결합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거나, 아니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처럼 신성이 인성을 압도하여 본성적인 제한들을 극복했다고 선언하는 것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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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 :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어떻게 예수 안에 성육할 수 있는가를 설명함으로써 니케아파의 주장을 더 잘 납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 이성적 영(rational soul)의 자리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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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나리스 이론의 결점 : 완전히 신적 지성만 소유한 인간의 육체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안디옥 학파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 진실로 인간이 되셨을 때에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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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교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지성을 소유하지 않은 인간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지성이 없는 자들로서 구원 받을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취하시지 않은 것을 구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의 신성에 연합한 것을 구원하셨다. 만약 아담의 절반만 타락했다면, 그리스도가 절반만 취하시고 절반만 구원하는 것이 가능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체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면, 전체소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 전부가 말씀에 연합되어야 한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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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나리스의 이론들... 결국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니케아회의 결정들을 재확인했던 회의-에 의해 부인되었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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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학파의 대표자... 42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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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중요성 대두... 안디옥파 우세... 알렉산드리아인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실수를 저지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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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즉 하나님의 잉태자(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크리스토토코스”, 그리스도의 잉태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선포했을 때... 알렉산드리아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실제로 이 논쟁은 마리아보다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다. 즉 문제는 마리아에게 어떤 명예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잉태자이지 하나님의 잉태자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은 곧 성육하신 주님에 관해 말할 때에 그의 인성과 신성을 구별해야 하며, 그에 관한 표현들 중 일부는 인성에, 그리고 또 다른 부분들은 그의 신성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인성과 신성을 뚜렷하게 구별함으로써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보존하고자 했던 안디옥 학파의 전형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네스토리우스 및 안디옥 사람들은 이 두가지 본성이 지나치게 밀접하게 연결될 때에는 신성이 인성을 압도하여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관해 말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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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는 예수 안에 “두 개의 본성과 두 개의 위격”, 즉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즉 인간적인 본성과 위격은 마리아를 통해 잉태되었으나 신적인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적들은 그의 주장 속에서 구세주를 두 개의 존재로 “분리시키는” 위험을 감지했다. 왜냐하면 구세주의 통일성은 진정한 연합이 아니라 합일로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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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의 반대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키릴 감독... 뛰어난 정치력... 431년 6월 에베소 공의회...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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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인 안디옥의 존과 그 일행의 도착이 지연... 네스토리우스 변론 허락하지 않고 안건에 상정하여 토의한 후 그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감독직을 박탈함... 안디옥의 존과 그 일행... 키릴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네스토리우스를 복직시킴... 키릴의 반격... 테오도시우스 2세가 개입하여 키릴과 존을 체포한 후 양측의 회의가 모두 무효라고 선언... 433년 키릴과 존은 합의에 도달... 키릴의 공의회 결정이 유효한 것으로 결정... 네스토리우스는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안디옥의 어느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다시 안디옥의 친구들에게서마저 버림을 당한 채 페트라라는 한적한 도시로 이송되었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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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알렉산드리아의 승리... 휴전... 444년에 디오스코루스가 키릴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되었는데, 그는 극단적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입장의 옹호자요 책략가였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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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수도사 유티케스... 구세주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시지만 “우리와는 동일한 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함... “연합 이전에는 두 개의 본성, 그러나 연합 후에는 하나의 본성”이라고까지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 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플라비안은 유티케스의 가르침이 가현설에 가깝다고 판단하여 그를 정죄함... 디오스코루스가 책략을 통해 황제는 449년에 에베소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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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 의장 디오스코루스의 편파적 회의진행... 극단적인 알렉산드리아주의의 입장을 취함... 교황 레오의 서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음... 플라비안 사망... 온건한 형태로라도 안디옥 학파의 입장을 주장하는 이들과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 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은 성직에 임명될 수 없다고 공포되었다... 로마의 레오는 분노하여 이 회의를 “강도들의 회의”라고 불렀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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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말이 넘어지면서 황제가 목이 부러져 사망... 여동생 풀케리아와 남편 마르시안이 그 뒤를 이음... 풀케리아는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되어야 한다는 서방 교회의 주장에 동의한 바 있었으나 극단적인 알렉산드리아파가 아니었으며, 449년의 에베소 공의회가 지나쳤다고 믿고 있었다... 레오의 요청으로 451년 칼케돈에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했다(제4차 보편공의회)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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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공의회(451) : 디오스코루스와 유티케스를 정죄했으나, 2년 전에 에베소의 “강도들의 회의”에 참가했던 이들을 모두 사면했다...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었고, 많은 이들은 이 서신이 자기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고 선언했다(터툴리안의 주장을 반복... “한 위격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존재)... “신앙의 정의”를 반포... 알렉산드리아파와 안디옥파 모두를 배척하면서 이전에 개최된 세 차례의 위대한 공의회(325년 니케아, 381년 콘스탄티노플, 431년 에베소)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확인하고 있음...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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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공의회 “신앙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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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을 따라서 우리는 한 분이시며 같은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데, 그는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동시에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한 분이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며, 또한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같은 본질 지니고 계시며, 그의 인격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데, 죄로부터는 떨어져 있으나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같으시고, 그의 신성에 관해서는 역사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그러나 그의 인간적 출생에 관해서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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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이시고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그는 두 가지 본성으로 인식되는 바, 혼돈 없이(without confusion), 변화 없이(without change), 구분 없이(without division), 분리 없이(without separation) 계신 분이며, 성질들의 차이는 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각 성질들의 차이는 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각 성질의 특징들은 보존되고, 한 인격과 생존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오며, 두 인격으로 분리되거나 나눠짐 없이 한 분 같은 성자요 독생자이시며, 말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와 같은 사실은 심지어 가장 최초의 예언자도 그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로도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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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엄밀하게 정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를 넘어서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 그 범위를 제한하려 했다. 물론 구세주에 관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복음서의 그것과는 판이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성경 외적 사고의 유형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문제들이 제기된 형태를 고려해 보면, 칼케돈에 모였던 감독들이 성육신의 실재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하기 어렵다.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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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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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론자들” (65)
# 그 외의 신학 논쟁들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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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는 디오스코루스를 순교자로 생각하고 플라비안과 레오를 이단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리아도... 콘스탄티노플에 소재한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가열됨... 세금, 인종적 갈등...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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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바실리쿠스... 476년 칼케돈의 결정 사항들을 철회하고 새 공의회를 소집... 제노가 황제위를 회복하고 바실리쿠스의 계획을 취소함...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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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년 제노의 “통합 칙령” : 논쟁이 발생하기 이전에 공동으로 신봉했던 교리로 돌아오라... 새로운 혼란을 가져옴... 교황 펠릭스 3세가 황제에게는 신자들의 신앙 내용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의 지지를 받는 제노... 결국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공개적 분열이 생김... 동서방 두 감독이 모두 사망한 519년까지 분열... 519년 저스틴 황제와 오르미다스 교황이 합의하여 실질적으로 칼케돈의 결정사항들로 복귀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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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의 황위를 계승한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는 비잔틴 제국이 낳은 가장 유능한 황제... 그는 칼케돈파와 단성론파의 차이점은 대체로 표현상의 것이므로 회의와 대화를 통해 양측이 화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후일 기독교 역사가들은 이 점에 있어서 황제의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상이하고 다루기 힘든 문화적ㆍ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갈등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던 듯하다... 단성론파 주교들 중 일부를 복위시킴...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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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년 황제의 재촉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신학 회의 개최 : 유명한 칼케돈파 신학자였던 비잔티움의 레온티오스의 칼케돈 신조 해석으로 말미암아 지도적 단성론자들 중 일부가 화해의 길이 열렸다고 선언했다... 황제는 여전히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하는 백성들의 충성심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공의회 자체가 아니라 특히 공의회를 거부한 이들에게 특별히 강경했던 세 명의 안디옥파 신학자-테오도르, 테오드레트, 이바스-의 저술들을 정죄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 때문에 “삼장 논쟁”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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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553년에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제5차 보편공의회라 일컬어지는 이 공의회는 삼장(Three Chapters)을 정죄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죽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반대했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그들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단성론자들이 불쾌하게 여긴 그들의 저술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칼케돈의 결정들을 철회할 것을 원한 사람들이 이에 만족하지 못했으므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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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충성심을 회복시키려 한 마지막 황제는 7세기 초의 헤라클리우스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세르기우스(Sergius)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존재하지만 의지는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의지가 인간적 의지를 대체했음을 의미한 듯하다... 그의 주장이 이렇게 해석되었으므로, 과거 아폴리나리스를 향했던 것과 비슷한 반론, 즉 인간적 의지가 없는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스도의 이성일의론”이라고 알려진 세르기우스의 입장은 교황 호노리우스의 지지를 받아 오랜 논쟁이 지속되었다. 때마침 아랍인들의 정복이 시작되어 시리아와 이집트가 함락되었다. 이 두 지역에서 칼케돈에 대항한 반대가 가장 강력했으므로 제국은 칼케돈에 반대하는 자들과의 화해를 추구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648년에 콘스탄스 2세는 그리스도의 의지 혹은 의지들에 관한 논쟁을 금지했다. 결국 680-6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6차 보편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이성일의론”을 정죄하고 호노리우스 교황이 이단이었다고 선포했다. (그후 19세기에 교황 무류설 선포와 관련하여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황이 이단으로 정죄된 이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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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 사용에 관한 논쟁...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기독론 논쟁의 마지막 사건...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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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에 여러 명의 비잔틴 황제들이 성상들에 반대하는 조처를 취했다. 레오 3세(황제, 717-741년)가 성상 파괴를 명함... 레오의 아들 콘스탄틴 5세는 754년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사용 금지하고 정죄함...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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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숭배자들 중 가장 유력한 신학자는 다마스쿠스의 존이었다. 무슬림 치하에 살았으며 칼리프 정부의 고관이었으나 사임하고 최초의 수도가사 되었으며 사제가 된 사람... 『정통 신앙에 대한 주석』(동방정교회 교리를 체계화한 것이요, 이슬람과 관련하여 저술된 최초의 기독교 저술)... 유념적인 것과 본질상 신비인 무념적인 것을 신학적으로 구분.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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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을 비롯한 성상숭배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이 정통 기독론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했다. 만약 예수님이 진정한 인간이셨고 그 안에 하나님이 현현하셨다면, 어떻게 그분을 묘사하는 것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에 따라 인간을 지으셨으므로, 최초로 형상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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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5세가 소집한 공의회에서 정죄된 인물 중 하나인 다마스쿠스의 존... “우리가 서로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을 하나의 모양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요 미친 짓의 극치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셨으므로... 교부들은 신자들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없고 또한 독서할 시간도 없음을 발견하고는, 마치 성경 본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처럼 이들을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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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년 니케아에서 제7차 보편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바 엄격한 의미의 예배인 “라트리아”와 성상들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보다 약한 의미의 동경인 “둘리아”를 구별했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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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년에는 성상들이 결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동방 교회들은 이 사건을 “정교승리제”로서 기념하고 있다. 서방 교회에서는 787년 공의회의 결정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라트리아”와 “둘리아”의 구분이 라틴어로는 바르게 표현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 내에서 제한된 의미로 성상들을 공경하는 데 합의했다. (72)
# 동방의 분파 교회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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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교회... 410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당시 페르시아 수도였던 크테시폰의 총대주교를 교회의 지도자로 옹립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받자 안디옥 학파를 따르는 많은 신학자들이 페르시아로 도피... 니스비스에 학교를 세움...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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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에서 “단성론”이 가장 강했던 곳은 이집트와 시리아였다... 칼케돈 공의회 결정에 대한 반대에 콥트족의 불만이 결합됨... 칼케돈 정통 신앙을 받아들인 신자들은 “멜키파”(“제국의” 기독교인들이라는 의미)... 에티오피아 교회는 콥트 교회를 따라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하고 “단성론파”가되었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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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신자들은 칼케돈파와 “단성론파”가 균등하게 양분됨... 단성론파의 지도자는 야콥 바라다에우스... “야곱파”라 불렸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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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교회도 “단성론파” 교회이다... 페르시아 침략 당시에 비잔틴 제국이 도와주지 않음... 페르시아 치하에서 어느 정도 자치를 누림... 아랍인들의 박해... 11세기 투르크족의 점령으로 소아르메니아를 세움... 투르크 족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 아르메니아 공화국 (73)
# 아랍 정복 이후의 동방 정교회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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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파 동방 기독교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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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년 슬라브 왕국들 중 하나인 모라비아 국왕 로스티슬라브는 콘스탄티노플에 진리를 가르쳐줄 인물을 보내다라고 편지를 보냄... 콘스탄티노플 측에서 자기들의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키릴과 메토디우스를 선교사로 파견함... 키릴은 슬라브어를 기록할 수 있는 알파벳을 고안하여 성경, 종교서적들, 예배의식 등을 번역했다... 교회 예배 의식에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만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게르만족 출신 선교사들의 반대... 교황은 키릴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으나 교황청의 감독을 받도록 결정했다... 906년 헝가리 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함녀서 모라비아 왕국이 사라짐...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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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국왕 보리스가 개종하면서 서방 교회와 정교회 출신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우스의 후계자들이 대주교를 임명하여 불가리아 정교회를 지도하도록 함... 917년에 보리스의 아들 시므온이 “짜르”(황제)라는 칭호를 취함으로써 비잔티움으로부터 독립 선언... 10년 후 대주교를 총대주교로 개칭...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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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의 선교 활동 중 가장 큰 성공은 키예프 루시와 러시아의 개종... 950년 올가 여왕이 개종... 손자 블라디미르(980-1015)가 비잔틴 제국에 선교사들을 요청함... 988년 블라디미르로 많은 백성들이 세례를 받음(우크라이나 교회와 러시아 교회가 시작된 해)... 아들 야로슬라브는 콘스탄티노플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로마로부터는 멀어졌다.... 1240년 몽고의 침입으로 2세기 이상 통치할 때 기독교는 강력한 유대를 보여줌... 16세기에 투르크족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선언하고, 지배자들은 황제를 의미하는 “짜르”라는 칭호를 택했으며 모스크바 감독(혹은 주교)을 총대주교라 칭했다. (7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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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우스의 분열(867년)” : 포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몰아낸 혁명 후에 총대주교에 임명되었다. 포티우스와 이그나티우스 모두 니콜라스 교황의 지원을 요청... 니콜라스는 이그나티우스의 편을 들었다. 포티우스는 서방 교회가 니케아 신경에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의미의 “필리오케”라는 단어를 삽입했다는 이유로 서방 교회를 이단으로 선언했다... 서방교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오염시켰다고 포티우스는 주장했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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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경의 변경은 처음 스페인에서 발생하여 프랑스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샤를마뉴 시대에 아헨에 소재한 왕립 예배당에서 낭송된 신경에 “필리오케”가 포함되어 있었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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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오케 논쟁의 부산물은 현재 사도신경이라 불리는 로마 교회 구 신조의 부활이다. 프랑크족과 비잔틴인들 모두를 잃고 싶지 않았던 교황들은 당시 거의 잊힌 상태에 있었던 이 신경을 니케아 신경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로마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서방 교회에서는 니케아 신경 대신 사도신경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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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에 최종적인 분열이 발생... 불가리아 대주교 오크리드의 레오는 서방 교회가 서직자들의 독신을 보편적 법규로 강요하는 것, 무교병을 성찬식에 사용하는 것 등이 오류라고 공격했다...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로 사절을 보냄... 그가 뽑은 추기경 훔베르트는 헬라어를 알지 못했고 배우려 하지도 않음(성직자들의 독신주의 지지,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골자로 하는 개혁을 주장)... 1054년 6월 16일 교황의 이름으로 파문 선언...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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