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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제1부 제8장 : 개혁의 갈망

by [수호천사]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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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의회 운동은 분열을 종식시키는 동시에 성직매매와 족벌주의 등 타락한 관습들을 종식시키려 했다. 공의회 운동은 그 때까지 교회가 받아들여온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223)

 

# 공의회 운동

  • 교황의 바벨론 유수 및 대분열로 말미암아 교황직의 도덕적 권위가 약화됨에 따라 많은 이들은 통일성을 회복하고 교회를 개혁함으로써 큰 폐해들을 제거할 수 있는 보편공의회를 원했다. (224)

  • 1409년 피사 공의회... 두 교황 모두의 비합법성 선언 후 해임... 알렉산더 5세를 교황으로 선출... 결과적으로 세 명의 교황이 존재... 알렉산더 사망 후 요한 23세 선출... (로마에 거주했던 우르반 6세를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을 합법적 교황의 법통으로 인정...)... (224-225)

  • 1414년 콘스탄스 공의회...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 아비뇽 계통의 최후 교황인 베네딕트 13는 스페인 해안의 피네스콜라 성채에 도피하여 계속 합법성 주장... 1423년 사망 후 후계자 선출 못함... (226)

  • 콘스탄스 공의회... 분열의 종식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이단과 부패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 후스가 정죄됨... (227)

  • 마르티누스 5... 1423년 파비아 공의회... 이후 교황들은 공의회를 거부... (227)

  • 공의회에 대항한 교황의 승리... (229)

 

# 존 위클리프

  • 위클리프의 이름은 요크셔 주의 위클리프 언 티즈(Wycliffe-on-Tees)라는 마을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영국은 일련의 법규(1351, 1353, 1363)에 의해 교황청의 세력을 제한하려 했다... 영국 정부는 위클리프의 저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하여세속의 통치에 관하여에 표현된 바 지배 혹은 통치의 속성 및 한계에 관한 위클리프의 이론을 환영했다. 위클리프에 의하면 모든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당시 세금 징수 및 교황들의 세속 권력에 관한 문제로 교황청과 분쟁을 벌이고 있었던 영국의 세속 권력자들은 이러한 견해들을 환영했다... 위클리프는 신념의 사람이었으므로 종교적 지배의 한계에 관하여 내세운 그의 주장은 세속 권력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즉 세속 권력도 시민들에 대한 봉사 혹은 섬김의 관점에서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위클리프는 그의 솔직함을 환영했던 사람들의 지지를 잃었다. (230-231)

  •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몸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누가 예정된 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각 사람의 신앙생활에서 맺어지는 열매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말년에 위클리프는 교황도 구원받지 못한 자들 안에 포함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성경이 교회의 소유이며, 교회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 (232)

  • 신학적으로 위클리프의 교리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낳은 것은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문제였다... 4차 라테란 공의회는 1215년에 화체설을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성찬에 관하여에서 이 교리가 성육신에 나타난 원칙을 부인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과 연합하셨을 때 신성의 임재는 인성을 파괴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성찬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떡 속에 임재하면서도 이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례전적이며 신비적형태로 성찬에 임재하지만, 그 곳에 떡이 공존한다. (233)

  • 1381년 영국에서 와트 타일러의 농민혁명이 발생했다. 위클리프는 농민들의 주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반란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롤라드파”(이것은 기원이 분명하지 않는 경멸어로서 그들의 중얼거리며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234)

  • 그의 사후 콘스탄스 공의회가 그를 정죄함에 따라 그의 유골을 파내어 태우고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234-235)

  • 위클리프의 추종자들... 롤라드파... (235-236)

 

# 후스

  • 보헤미아 개혁운동... 경건한 후스(1362-1415)... (236)

  • 당시 영국 왕 리처드 2세가 보헤미아의 공주와 결혼했으므로 프라하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 사이에 긴밀한 유대가 형성... 위클리프의 철학적 입장... 후스는 학자들에게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읽고 토론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리스도의 성찬 임재에 관하여는 위클리프와 의견을 달리하여 전통적인 화체설을 따랐다... (236-237)

  • 피사 공의회와 세 명의 교황... (238)

  • 피사 측 교황과의 대결을 통해 후스는 더 급진적인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자격없는 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39)

  • 요한 23... 면죄부 판매... 교황 요한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국왕은 후스에게 침묵을 명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입장이 널리 알려졌으므로 군중들은 체코인들에 대한 교황청의 착취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요한 23세는 재차 후스를 파문했다. 조국 전체를 복잡한 신학 논쟁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개혁자 후스는 프라하와 그의 강단을 떠나 시골에 은거하면서 시급한 개혁을 위해 필요한 저술을 계속했다... (240)

  • 콘스탄스 공의회... 요한 23세는 공의회와는 상관없이 직접 그를 재판하려 했다... 황제는 자신이 발행한 신변보장에 위배되는 교황의 행동에 항의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후스의 사상이 별로 환영을 못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이 이단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을 깨달았으므로 이 문제에서 손을 땠다... 요한 23세는 콘스탄스에서 도망치면서 후스를 석방할 수 있도록 지기스문트에게 감방 열쇠를 주었지만, 지기스문트는 그 일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방해될 것으로 여겨 후스를 더 안전한 감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141565일 후스는 공의회에 불려갔다... 이곳을 떠나 도주했던 요한 23세도 며칠 전 죄수로서 잡혀온 뒤였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공의회는 정통신학의 수호자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240-241)

  • 나는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공의로우시며 유일한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소할 것이다. 그분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 왜냐하면 그분은 거짓 증인들이나 오류에 가득한 회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와 공의 위에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41)

  • 당시 공의회의 지도자들이 추구한 것이 후스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철회였으므로, 이들은 이에 응하라고 후스에게 권면했다. (241)

  • 후스의 최후... “주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 이 잔인한 죽음을 불평 없이 맞이합니다.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 주소서.” ... 며칠 후 그의 동료 프라하의 제롬도 화형에 처해졌다... (242)

  • 보헤미아인들의 분노... 공의회는 프라하 대학의 해산을 명령하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콘스탄스로 소환했으며, 보헤미아 국왕이 이단을 지원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242)

  • 보헤미아에는 공의회에 반대하는 집단이 나타났다... “타볼파”(농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종말론 운동). 덜 급진적인 호렙파”... 무력 개입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4개 조항에 동의... 보헤미아 저항 운동의 기초... 1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스럽게 왕국 전체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 2조는 이종 성찬을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떡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평신도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후스가 그의 생애 말기에 도달한 결론)... 3조는 성직자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사도적 가난을 규범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4조는 공적인 범죄, 특히 성직매매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43-244)

  • 국왕 바츨라프가 사망한 후(1419)... 합법적 후계자는 후스를 저버린 지기스문트였다... 보헤미아인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음... 하위 귀족 출신인 지스카의 지휘를 받은 타볼파로 구성된 보헤미아군에게 패한 지기스문트 병력... 1421년 전투에서 애꾸였던 지스카는 한쪽 눈마저 실명한 후 타볼파를 떠나 호렙파에 합류했다(1424년 페스트로 사망)... 보헤미아인들은 1427년과 1431년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244)

  • 바젤 공의회... (244-245)

  • 보헤미아... 형제교단... 형제연맹... “모라비아파” (245-246)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페라라 출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플로렌스 행... 로렌조 데 메디치의 초청... 유명한 학자 피코 미란돌라가 그의 추천인... 성 마가 수도원에서 성경을 강해... 로렌조 데 메디치의 비위를 건드림... (246-247)

  • 사보나롤라가 성 마가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일부 수도사들은 로렌조를 찾아가 그의 지원에 감사의 뜻을 표하라고 조언함... 로렌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직책을 차지하게 된 만큼 은둔하여 하나님께 기도로 감사하겠다고 응답했다. 얼마 후 그는 수도원의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로렌조마저도 임종 시에 사보나롤라에게 최후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247)

  • 로렌조의 후계자... 피에트로 데 메디치...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남진... 플로렌스 방어에 자신이 없었던 피에트로는 뇌물을 주기로 작정... 플로렌스 시민들은 피에트로를 추방... 사보나롤라가 중재에 나서서 해결... 플로렌스 시민들은 프랑스의 동맹이 됨... (247-248)

  • 사보나롤라는 종종 광신적이고 무지한 수도사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학문 연구가 개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의 주도 아래 정기적으로 허영의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248)

  • 사보나롤라의 몰락은 정치적 상황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249-250)

 

# 신비주의

  • 14,15세기는 특히 신비주의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였다... 신비주의가 활발했던 곳은 라인강을 따라 존재하는 독일 및 저지재 국가들이었다. (251)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 알려진 에크하르트 폰 호크하임... 하나님에 관한 모든 단어들을 정확하지못하며, 따라서 엄격하게 말해 오류이다... 인간의 개념으로는 신성을 파악할 수 없음을 증명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높이고,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진정한 지식은 합리적이라기보다 직감적이라는 그의 신비 사상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나님은 연구나 합리적 이론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성 속에서 무아(無我)의 경지로 소멸되는 신비적 명상을 통해 알게 된다. (251-252)

  • 모든 존재와 경계를 초월하는 신격의 진정한 정수 속에 나는 이미 존재했다. 거기서 나는 스스로를 원했다. 그곳에서 나는 스스로를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인 인간을 창조하기를 의도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나의 존재에 따른 스스로의 원인인 바 이는 영원한 것이다. 물론 나의 존재의 생성과정은 시간적인 것이다.” (252-253)

  • 많은 사람들은 그가 범신론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이단의 혐의를 받아 정죄되었고, 로마에 항소했으나 사건이 해결되지 전에 사망했다. (253)

  • 베르나르와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역사적 인간으로, 즉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묵상하는 중에 영감을 받았다. 반면 에크하르트는 성경적 사건들의 역사적 시간이나 지리적 장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인간은 내적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따라서 중재자들 없이하나님께 간다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 (253-254)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사후에 그가 소속되었던 도미니크 수도회를 중심으로 많은 추종자를 얻음... 요한 타울러, 하인리히 수소... 에크하르트의 이론을 해석... (254)

  • 플랑드르 출신의 신비주의자 루이스브렉의 존... 플랑드르의 신비주의자 게르하르트 그루테... 루이스브렉과 그루테는 근대경건운동을 형성하고 유행시킨 인물들이다. 그것은 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본받는 데 중심을 둔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학파가 낳은 가장 유명한저술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로서 가장 널리 읽히는 경건 서적이 되었다. (254)

  • 자유영의 형제단... 자기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회나 성경과 같은 중재 수단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들... 영적인간이므로 육체는 정욕을 따라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고 주장... (254-255)

  • 그루테의 가장 위대한 업적... 공동생활 형제단의 설립... 수도생활에 뜻을 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계속 직업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뛰어난 학교들을 설립했다. (255)

  •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255)

  • 노리치의 줄리안(1342-1417)... (256)

  • 신비주의 운동은 교회나 성직계급을 대적하지 않았다. 이들의 지도자들 중 일부가 고위 성직자의 잘못, 특히 사치와 향락을 비난했으나, 대부분은 그들의 경건이 가져다주는 내적 평화에 만족했으므로 교회의 권위에 대적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256)

 

# 대중 운동

  • 위클리프의 교훈들은 원래 그것들을 지지한 옥스퍼드의 학자들이나 귀족들을 통해 생존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권위자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상치되는 복음을 들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닌 롤라드 파를 통해 전파되었다. (257)

  • 후스 파는 결국 타볼 파에게서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타볼파의 신념을 후스로부터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종말론적 기대로부터 생성된 대중들의 종교성에서 추출되었다. (257-258)

  •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수도원우동이 그들의 부친이나 남편이나 아들들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여성들의 소규모 집단... “베긴”(beguine)이라고 불리고 그들의 수녀원은 beguinage라고 불렸다... 이와 비슷한 집단을 이룬 남성들은 베가드(beghard)라 불렸으며...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258)

  • 채찍질 고행자들... “2의 세례라고 주장하기 시작... “열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게 됨... (258-260)

  • 한스 뵘이라는 젊은 목동이 주도한 운동... 16세기 재세례파 운동에 기여한 듯... (260-261)

  • 중세의 마지막 시기는 종교적 불만과 사회적 문제들이 결합된 불안정의 시대였다. 기존 질서를 의지하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부유한 권력자들을 지지하는 동시에 일체의 저항 운동을 억압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반성직자주의가 성행했는데, 이것은 근대적 세속화의 움직임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전해진 공의(公義)에의 소망에서 영감을 발견했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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