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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목차]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유성운 지음

by [수호천사]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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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다시 읽는 유성운의 역사정치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유성운 지음

이다미디어

 

머리말 :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왜 망하지 않았을까? [4]

    - 양반들은 임진왜란 이후 향촌의 지배 질서를 더욱 강화... [4]

    - 1,000년 전 고려든 지금의 대한민국이든 문제의 본질은 같다... [7]

    - 〈중앙일보〉에 연재한 ‘유성운의 역사정치’를 대폭 보강... [8]

 

차례... [10]

 

[1장] 삼국 시대의 역사정치... [15]

 

신라 4대 왕 석탈해의 다파나국은 어디인가? [16]

    - 신라 건국 영웅 석탈해는 일본에서 건너왔다? [16]

    - 석탈해의 시베리아 캄차카반도 전래설이 최근에 부상... [18]

    - 신라에서는 3개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받았다... [22]

    - 박씨 왕실이 앞선 철기 문화 세력인 석탈해와 제휴... [23]

    - 유이민과 정착민이 함께 만든 한반도의 고대사... [26]

 

백제의 시조는 온조인가, 비류인가? [30]

    - 온조와 비류, 누가 진짜 백제의 건국자인가? [32]

    - 고구려 초기 왕위 계승에 패배한 온조와 비류가 남하... [33]

    - 초고계와 고이계가 정권 교체하듯 왕위를 번갈이 계승... [36]

    - 부여의 건국 영웅 동명왕을 숭배하며 백제를 통합... [37]

 

고대 한반도 남부와 왜를 둘러싼 미스터리... [41]

    - 과연 왜는 한반도 남부에 세워진 국가였을까? [44]

    - 고대 한반도 남부는 여러 지역에서 소국들이 난립... [47]

    - 왜는 언제부터 일본 열도를 가리키게 된 것일까? [50]

 

고구려 안시성을 지킨 양만춘과 연개소문의 진실... [53]

    - 당 태종의 10만 대군과 맞서 안시성을 지킨 주인공은? [53]

    - 고구려 장군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에게 항복... [56]

    - 연개소문이 몽골고원의 설연타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 [59]

    - 설연타의 당나라 침공으로 안시성을 포기하고 철군... [61]

    - 당나라 군대와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주인공들... [64]

 

7세기 동아시아 외교전과 왜의 백강 전투 참전... [66]

    - 백강 전투는 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성... [66]

    - 신라의 실력자 김춘추는 왜 일본에 갔을까? [69]

    - 친백제 노선을 이끌던 소가씨 정권 축출 후 다이카 개신... [71]

    - 사이메이 천황의 복귀와 백제 구원군 파견 결정... [73]

    - 평양성 공격을 앞두고 일본을 찾아간 신라의 김동엄... [76]

 

신라에 나타난 처용은 페르시아 왕자인가? [80]

    - 이란의 서사시 《쿠시나메》와 《삼국유사》의 신라 처용 설화... [80]

    - 9세기 당나라의 황소의 난과 페르시아인의 엑소더스... [82]

    - 경주를 덮친 역병을 처치해 서라벌의 영웅이 된 처용... [85]

    - “신라는 공기 맑고 농토가 비옥하고 금이 풍부한 낙원” [86]

 

김춘추와 금춘추, 왜 김씨 발음이 변했나? [90]

    - 조선 왕조의 이(李)가 금(金)을 ‘김’으로 불렀다는 음양오행설... [90]

    - 수ㆍ당 시대의 ‘금’에 가깝던 발음이 점차 ‘김’으로 변화... [92]

    - 군주의 이름을 다른 한자로 대체하는 ‘피휘’... [95]

 

[2장] 고려 시대의 역사정치... [99]

 

고려는 발해의 멸망을 왜 두고만 봤을까? [100]

    - 조선 시대에도 백두산 화산 폭발은 몇 차례 발생... [100]

    - 10세기의 백두산 대폭발을 발해의 멸망 원인으로 지목... [104]

    - 백두산 분화는 발해가 멸망하고 20년 후에 발생... [106]

    - 고려는 발해 멸망 후 유민을 흡수해 국력 키우는 데 몰두... [109]

 

왕건이 호남 차별을 정말 유훈으로 남겼나? [111]

    - ‘훈요십조’는 고려 왕실의 세계관을 반영한 중요한 자료... [111]

    -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의 위치 놓고 학계의 치열한 공방... [113]

           1) 충남 남부 및 전북... [114]

           2) 나주를 제외한 후백제... [117]

           3) 청주~공주~목천... [119]

    - 전라도라는 행정 구역은 고려 현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 [121]

 

서희는 거란과 담판만으로 강동 6주를 챙겼을까? [124]

    - 중국 대륙의 강대국에 실용 외교로 맞선 한반도 왕조들... [124]

    - “고려-거란의 국교를 위해 압록강의 여진족을 내쫓자” [125]

    - 소손녕이 서희의 역제안을 수용한 이유는 고려 군사력... [128]

    - 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처한 고려와 발해는 형제의 나라였나? [129]

    - 북방 강대국을 상대하며 생존한 고려 외교의 3대 전략... [132]

 

고려의 수차례 국교 요청, 일본이 거절한 이유는? [138]

    - 고려 문종의 중풍 치료를 위해 일본에 의사를 요청... [138]

    - 왜 고려는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원했나? [139]

    - 고려를 신라의 계승국으로 인식해 국교 요청을 거절... [142]

    - 8~11세기의 약 400년을 일본은 헤이안 시대라 부른다... [146]

 

난세에 외교의 정석을 보여준 고려 태자 왕전... [150]

    - 대몽 항전 주도한 무신정권 무너지고 몽골과 화친 협상... [150]

    - 태자가 중국에 도착하자 남송을 공략하던 몽케 칸이 사망... [152]

    - 쿠빌라이를 선택한 왕전의 도박으로 승자의 편에 섰다... [153]

    - 쿠빌라이 칸도 고려가 내건 6가지 조건을 파격적으로 수용... [157]

    - 고려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몽골의 세계 경제망에 편입... [161]

 

여ㆍ몽 연합군의 규수 침공, 고려와 일본의 관계 파탄... [164]

    - 1267년에 쿠빌라이 칸의 일본 입조 요구로 정세 악화... [164]

    - 몽골의 일본 침공을 막기 위한 고려의 필사적 노력... [166]

    - 여ㆍ몽 원정군의 흉포함을 전하는 ‘무쿠리’와 ‘고쿠리’의 전설... [168]

    - 삼별초가 대몽 항전의 연합전선을 펼치자고 일본에 제안... [171]

 

[3장] 조선 국왕의 역사정치... [175]

 

이성계의 수도 천도와 경복궁 풍수의 드라마... [176]

    - 고려 왕조의 기득권을 깨기 위해 이성계가 천도를 결단... [176]

    - 1라운드는 새 수도 후보지 선정 : 계룡 vs 한양... [178]

    - 2라운드는 한양 내의 길지 선정 : 무악 vs 북악... [178]

    - 3라운드는 경복궁 입지의 풍수 논쟁 : 인왕 vs 북악... [180]

    - 조선 왕조의 대물림에서 맏아들 잔혹사는 풍수의 영향? [184]

 

토지개혁 외친 건국 공신, 경기도 땅 20% 챙겼다... [187]

    - 사전 혁파 등 급진적 토지개혁론을 외친 정도전... [187]

    - 토지대장을 불태우고 과전법 실시로 역성혁명 완성... [191]

    - 조선 초기 공신전 남발로 국가 재정 위기를 초래... [193]

    - 조선 개국공신들의 땅 따먹기는 ‘내로남불’ 결정판... [198]

 

명에 지극한 사대 외교로 국익을 챙긴 세종... [200]

    - 어느 국왕보다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극진히 챙긴 세종... [200]

    - 간의대를 철거하라는 세종, 철거를 말리는 신하의 대립... [201]

    - 세종은 왜 명나라 사대에 정성을 들였나? [204]

    - 세종은 두만강 유역의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명나라와 갈등... [208]

 

조선 노비가 만든 연은법이 일본을 살찌웠다... [212]

    - 김감불과 김검동의 연은분리법이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었다... [212]

    -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은분리법과 은광 채굴에 철퇴... [214]

    - 조선에서 금지한 연은분리법이 일본으로 유출되어 만개... [216]

    - 세계 제2의 은 생산국인 일본은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달... [218]

 

영조는 왜 10여 년이나 금주령에 집착했을까? [223]

    - 1년 동안 술을 빚다가 섬으로 유배된 밀주업자만 700명... [223]

    - 흉년의 조짐이 있으면 조정은 일찌감치 금주령 시행... [224]

    - 금주령을 내려도 권세가는 피해 가고 서민들만 어려워진다... [226]

    - 수신의 군주 영조는 왜 금주령에 집착했을까? [229]

    - 서울 중심가에 밀주를 만들어 파는 비밀 공간 성행... [233]

 

[4장] 조선 사림의 역사정치... [237]

 

중종의 총아 조광조는 왜 붕당 수괴로 처형됐나? [238]

    - “누구를 우두머리로 합니까?” “조광조를 우두머리로 하라” [238]

    - 조광조는 주류 교체를 위해 과거제 대신 현량과 실시... [240]

    -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했다” [243]

    - 강남 좌파가 떠오르는 조광조와 기묘사림... [245]

 

여당에서 한순간에 몰락, 소수파 북인의 흥망성쇠... [249]

    - 북인은 광해군과 함께 ‘짧고 굵게’ 살다 사라진 붕당 세력... [249]

    - 남인의 기반은 낙동강 상류, 북인의 기반은 낙동강 하류... [253]

    -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활약과 광해군 옹립으로 정권 장악... [256]

    - 숙청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아 서인 정권에 참여한 북인들... [259]

 

성리학의 거두 이황은 수십만 평 땅부자였다! [262]

    - 이황은 평생 노력해 부를 쌓은 자수성가형 자산가의 표본... [262]

    - 수십만 평 땅과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한 성리학의 거두... [264]

    - 조선 중기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 [267]

    - 노비를 활용해 황무지 개간과 상품 작물에도 손댔다... [270]

    - 앞으로는 청빈을 내세우고 뒤로는 재물을 쌓은 조선 사대부들... [273]

 

병자호란의 충신과 간신,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 [275]

    - 대명 의리론을 앞세운 척화론은 강력한 힘을 가진 정치 담론... [276]

    - 인조반정 1등 공신 최명길은 왜 주화론의 깃발을 들었는가? [279]

    - 인조에게 결사항전을 주장한 척화론자 김상헌의 행보... [283]

    - 조선 성리학자들은 최명길을 ‘간신’, 김상헌을 ‘충신’으로 규정... [285]

 

호락논쟁, 노론을 두 동강 내다! [287]

    - 호락논쟁, 집권 세력 노론이 호론과 낙론으로 대분열... [287]

    -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290]

    - 낙론은 청나라 교역과 상공업 발전시키자는 이용후생론 주장... [292]

    - 노론 시파는 정조 개혁에 협조, 노론 벽파는 정조와 정치적 대립... [294]

    - 100년간 이어진 호락논쟁은 보수 집권층인 노론계의 혁신 과정... [296]

 

조선은 정조 사후 왜 100년 만에 망했나? [298]

    - 정조의 죽음 이후 그의 개혁을 소멸시킨 주원인은 무엇? [298]

    - ‘정조 키즈’ 김조순이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막을 올렸다... [300]

    - 1800년 5월 그믐날, 오회연교에서 정조와 신하의 균열... [304]

    - 1794년 정조의 야망과 갑자년 구상은 왕권 강화 조치... [305]

    - 조선의 세도 정치는 붕당 정치의 해악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308]

 

조선 과거제와 신분제, 오성ㆍ한음은 금수저였다! [311]

    - 이항복과 이덕형은 막강한 배경을 지닌 ‘금수저’ 출신... [311]

    -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작동한 조선 초기의 과거제... [313]

    - 조선 정계의 중심 세력이 된 사람들ㄹ이 신분제를 법령으로 규정... [316]

    - 생계 걱정 없이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는 소수 계급의 특권... [318]

    - 3년에 1번 치르는 시험에서 선발된 33인이 과거 급제자... [323]

 

[5장] 임진왜란의 역사정치... [327]

 

임진왜란 때 관군이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이유... [328]

    - 상주에서 800~900명의 관군은 약 2만 명의 일본군에 전멸... [328]

    - 일본군의 속도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제승방략 체제... [329]

    -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 제1~3방어선이 다 무너진 상태... [334]

    - 여진족을 토벌한 맹장 신립의 군대도 일본군의 조총에 전멸... [336]

 

호남을 지켜낸 경상우도의 북인 의병장들... [341]

    - 의 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등은 북인 조식의 문하생... [343]

    - 낙동강 수로를 장악한 의병들이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 [344]

    - 진주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난세의 영웅 김시민... [347]

    - “진주성이 무너지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350]

 

조선, 임진왜란 와중에 하이테크에 눈을 뜨다... [354]

    - 조총병을 앞세운 일본군은 부산 상륙 20일 만에 한양 점령... [355]

    - 이순신도 임진왜란 이듬해 자체적으로 조총 개발을 시도... [358]

    - 선조는 왜군 포로를 죽이지 말고 조총 개발에 투입하라고 지시... [360]

    -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군을 격파한 조선의 조총 부대... [363]

 

선조는 임진왜란 승전의 주인공이 되려 했다! [369]

    - “왜란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이다!” [369]

    - “우리나라 장졸은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372]

    - 선조 자신을 임진왜란 승리의 주연으로 삼은 정치적 술수... [374]

    - 광해군은 각지 의병과 관군의 분전을 적극적으로 발굴... [378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망하지 않은 이유... [380]

    - 임진왜란 이후 50년 만에 사치 풍조를 우려하는 상소문 등장... [380]

    - 임진왜란 후 재건 프로젝트인 ‘여민휴식’을 국정 어젠다로 실천... [382]

    - 황무지 개발 위해 국가 소유의 토지를 민간에 불하... [383]

    - 중앙 정부의 재정 규모 축소, 개간 사업을 위해 세금도 경감... [385]

    - 조선이 임진왜란 뒤에 망하지 않은 것은 역사의 오랜 물음표... [389]

 

조선과의 국교 위한 쓰시마섬의 위험한 도박... [391]

    - 조선은 1606년 도쿠가와 막부의 가짜 국서를 받고 국교 재개... [391]

    - 쓰시마섬은 왜 조선과 국교 회복에 적극적이었을까? [394]

    - 무역 재개로 쓰시마섬의 번영과 조선의 은 유입량 확대... [397]

    - 18세기부터 쓰시마섬과 조선 상업 자본이 함께 내리막길... [400]

    - 조선 조정은 왕릉 훼손과 가짜 국서의 ‘진실’을 묻기로 결정... [402]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은 조선 귀환을 거부했다... [403]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끌려간 조선 피로인은 약 10만 명... [405]

    -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은 7,000명, 9만 명은 일본 땅에 남았다... [409]

    -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피로인의 처지... [411]

 

일본 도자기를 꽃피운 조선 도공의 파란만장한 삶... [416]

    - 규슈 아리타에서 도조로 받드는 조선인 도공 이삼평... [416]

    -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들은 왜 대부분 규슈로 끌려갔을까? [418]

    - 나베시마냐 시마즈냐, 엇갈린 조선인 도공들의 운명... [420]

    - 사쓰마번에서 활약한 조선 도공 심당길의 12대 후손이 심수관... [423]

    - 조선 도공에서 일본 외무대신까지, 박평의 가문의 굴곡된 여정... [424]

    - 조선에 남았다면 이삼평이나 심수관이라는 이름이 남겨졌을까? [426]

 

[6장] 조선 사회의 역사정치... [429]

 

중종의 지진 정치가 조광조 운명을 갈랐다! [430]

    - “927년 3월 황룡사탑이 요동하여 북쪽으로 기울었다” [431]

    - 조선 사대부들은 ‘천인감응설’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 [434]

    - 지진 핑계로 훈구파 제거한 조광조가 지진에 발목 잡혔다... [436]

 

한반도 덮친 우역으로 조선 경제는 만신창이... [440]

    -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의 동북아시아 국제전으로 우역 확산... [441]

    - “우역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다” [444]

    - 우역으로 소가 떼죽음을 당하자 농업에 차질이 생겼다... [447]

    - 청나라의 허가를 받아 조선은 몽골로 소 매매 교섭단을 파견... [449]

 

17세기 소빙기 한파로 100만 명 죽은 경신대기근... [452]

    - 17세기는 북반구에서 일어난 소빙기 현상이 극에 달했던 시기... [452]

    - 이상 기후인 소빙기의 한파로 조선의 경제도 꽁꽁 얼었다... [455]

    - 경신대기근의 대재난을 겪는 처참함이 실록에 가득했다... [458]

    - “왕(현종)은 근심하고 노고하며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였다” [460]

 

백성 위한 호랑이 사냥이 결국 백성만 잡았다... [463]

    -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호랑이의 씨가 말랐다? [463]

    - 조선 초기 대규모 농지 개간으로 호랑이 생태 환경 위협... [465]

    - “우리 고을에 무슨 호랑이가 있다고 호랑이 값을 거두는가?” [468]

 

딸의 부동산 투기에는 영조도 눈을 감았다... [474]

    - 서울의 집값 문제는 조선 시대에도 큰 고민거리였다... [474]

    - 18세기 100여 년 동안 서울 집값은 10배가량이 뛰었다... [476]

    - 18세기, ‘금수저’ 자녀도 한숨 쉰 서울 집 구매... [479]

    - 고위공직자들도 한양의 주택시장을 교란하는 데 한몫했다... [480]

    - 주택 매매 통제한 영조도 자녀 문제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482]

 

강진에 귀양 간 정약용, 자녀에게 ‘인 서울’ 당부... [484]

    - 경화사족들은 출신 당파를 초월에 서울 안에서 기득권 확대... [486]

    - 서울에 거주한 세도 집안에서 문과 급제자가 다수 배출... [488]

    - 자녀 문제에선 장래와 성공을 고민하는 ‘아버지’ 정약용... [491]

 

조선통신사는 왜 19세기에 막을 내렸나? [493]

    - 19세기 초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힘의 균형이 무너진 시기... [493]

    - 일본 전역에서 45개 접대 지역의 체류 비용은 일본 부담... [495]

    - 조선통신사는 막부의 취임이나 경사를 기념하는 사절단... [497]

    - “귀국에는 「만국전도」가 없습니까?” [499]

    - 조선 유학자와 일본 국학파인 20대 가메이 난메이의 만남... [501]

    - 계미 통신사 행차 100년 후 강화도 불평등 조약 체결... [505]

 

참고문헌...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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