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1959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과정 – 양낙홍

by [수호천사] 2023. 11. 12.
728x90

1959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과정 – 양낙홍

출처 : 한국기독교와 역사 (23), 2005.9, 125-161

 

1. 머리말

 

아무리 미성숙하고 신학이 부재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이처럼 함부로 찢어 나누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풍조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25)

 

자신들의 기원에 대한 당당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합동ㆍ통합 양측 모두 자기 교단의 탄생이라는 이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 주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사건의 전모가 아닌 일부주로 자기 편에 유리한-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126)

 

한국교회에서 수적으로 그리고 영향력에서 최대임을 자랑하는 이 두 교단의 기원에 대한 정직한 연구는 과거 한국교회에서 있었던 불건전한 분열의 역사를 반성함으로 미래에 있어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도모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다. (128)

 

50년대 초 고려신학교와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고신측과 김재준 목사 및 그의 조선신학교를 중심한 진보적 조신측의 이른바 양 극단들을 제거한 한국 장로교회 주류는 이제 신학적으로 온건한 중도 보수로 통일되어 교회의 평화를 이룬 것 같았다. 그러나 이른바 그 중도파한국 장로교회는 불과 몇 년을 못 가서 다시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 관계를 연출하다가 결국 또 다른 분열을 맞이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합동과 통합의 분열을 초래한 요인으로 제시되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박형룡 박사가 관련된 삼천만 환 사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 경기노회 총대 선거가 그것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논자들의 지적처럼, 별개의 사건들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129)

 

대한예수교장로회를 합동ㆍ통합으로 찢어 놓는 직접적 사건들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거기에는 장차 양대 그룹의 수장이 될 두 사람 아시에 오래고도 뿌리깊은 갈등과 불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129)

 

2. 박형룡과 한경직의 해묵은 갈등

 

(1) 박형룡의 신학 노선

 

박형룡은 아직 프린스턴이 이른바 좌경화하기 전인 1923~26년 사이에 그곳의 신학사와 신학석사 과정을 동시에 공부했다. 그 시기는 미장로교회의 신학적 노선 갈등이 절정을 달해 치달아 가던 무렵이었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결국 진보주의가 결정적으로 득세하기 직전인 1926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보다 더 보수적인 켄터키 루이빌의 남침례교 신학교로 진학했다. 프린스턴에 있는 동안 박형룡은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여 프린스턴을 떠나게 될 보수신학의 지도자 그레샴 메이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130)

 

훗날 박형룡의 신학은 더 극단적으로 보수화되었다. 그는 심지어 복음주의 단체인 NAE(복음주의협의회)WEF(세계복음주의협의회)까지도 새로운 자유주의, 새로운 이단이며 용공적이라 부정하고 오직 극단적 보수주의자요, 분리주의자였던 칼 매킨타이어의 ICCC(국제기독교협의회)만을 인정했다. 근본주의의 약점을 극복하고 복음주의의 권토중래를 꾀하는 의욕적 움직임으로 194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인 신복음주의마저도 박형룡에게는 이단신학으로 보였던 것이다. (130-131)

 

(2) 한경직의 신학 노선

 

한경직 목사의 전기를 쓴 한숭홍 교수는 현재 통합측의 신학은 한경직의 신학 성격과 성향에서 표출되고 규정된 신학이라 볼 수 있다고 단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경직 목사의 신학 노선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평가한다. “그의 신학 입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그의 신학이 온건 중도이기 때문일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그의 신학적 입장이나 일관성이나 선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131)

 

한경직 목사는 올바른 신앙 노선을 네 가지로 제시... 첫 번째는 복음주의 신앙이요, 두 번째는 청교도적인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해에 의하면 복음주의 신앙이란 이신칭의교리였다. 다시, 그의 신앙은 성경 중심적 신앙이었는데 한목사는 성경의 중심을 그리스도요 십자가의 진리로 보았다. 한마디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이것들이 한경직의 신앙노선이었는데 그것들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종교개혁의 표어들이었다. 그렇다면 한목사의 신학을 자유주의적이라 부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131)

 

그는 자신이 신신학으로 오해받은 두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송창근ㆍ김재준 두 사람과 인간적으로 가깝기 때문이지만 신학사상은 그들과 다르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많은 이들은 그가 보수적 정통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쯤 되는 신학 노선을 가졌다고 본다... 한숭홍은 그의 신학 노선을 온건한 신정통 보수주의정도로 말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132)

 

그가 프린스턴에서 3년간 공부했던 1920년대 후반(1926~1929)은 바로 그곳의 보수 진보 갈등이 극에 달했다가 결국 진보주의자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던 때였다... 한경직 목사는 메이첸을 따라 웨스트민스터로 가지 않고 프린스턴에 남는 쪽을 택했다. 자유주의를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고있던 프린스턴 진보파의 입장을 따르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한 선택에는 그의 신학적 성향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132)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인 1930년대 중반 아빙돈 주석 번역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한경직은 다시 다소 진보적 성향을 노출했다. 한경직과 박형룡의 신학적 충돌 가운데 첫 번째 경우... 박형룡 박사는 한경직 목사의 신학이 자유주의의 냄새가 난다고 의심했을 것이고 한경직 목사는 박형룡이 시대에 뒤떨어진 답답한 보수주의자라고 불만을 가졌을 수 있다. (132-134)

 

한경직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은 일찍이 1939년에 서울에 설립된 조선신학교 이사진에 참여한 데서도 드러난다... 1948년 장로교신학교 설교에서 박형룡은 조선신학교가 첫째, 신사참배에 가담하여 일본적 기독교로 화했고, 둘째, 자유주의 신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정통 신학교가 될 수 없다고 조선신학교를 정면으로 부정한 바 있다. (134)

 

50년대 초에도 두 사람의 마칠의 기회가 없지 않았다. 김재준 교수와 조선신학교의 처리 문제를 두고 김재준과 같은 경기노회에 속한 한경직 목사는 노회로 더불어 총회에서 그에 대해 우호적이며 옹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134)

 

박형룡 박사가 관련된 삼천만 환 사건... 이 사건이 없었다면 장로교의 또 한 차례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다른 큰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훨씬 지체되었을 것이다. (135)

 

3. 박형룡 삼천만 환 사건과 NAE측 대응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부끄럽고 부도덕한 방식으로 통하는 수단, 즉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하는 방식에 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적산인 남산 기지 불하되지 않았고, 박형룡은 박호근에게 속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에 교활한 박호근은 사기 혐으로 제소당하지 않기 위해 선수를 쳤다. 미국에서 온 일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박형룡과 총무처장을 당국에 고소했던 것이다. 사회적 망신의 위험에 처한 박형룡은 박호근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면서 문제를 얼버무리려 했다. (135-136)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교회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정부 관리들을 매수하는 방식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기독교 윤리 의식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 일이요, 사회적으로도, 설사 당시 한국사회에 그러한 행태들이 만연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사회 승인이라는 행정 절차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막대한 교비를 처분한 결과 학교에 심대한 재정적 손실을 끼친 책임이 있었다. 한마디로 박형룡의 책임은 대내외적으로 중대한 것이었다. (136)

 

1957125일 제28회 실행이사회는 교장과 총무과장의 사면 건을 이사회에 넘기고 특별경비 지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이어서 19583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박형룡의사표를 수리했다. 그러나 사표 수리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이사 42명 중 38명이 참석한 투표에서 20:17, 기권 1로 가까스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는 데에서 입증된다. 그처럼 불미스럽고 중대한 과실을 범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형룡을 지지하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회는 후임 교장이 선출될 때까지는 박형룡이 교장 사무를 계속 보게 하면서 후임 교장 인선 위원으로, 선교사 3(인톤, 감부열, 감이도), 실행 이사 대표 3(김윤찬, 김재석, 그리고 전필순 : 미참 경우에 노진현), 전체 이사 대표 3(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했다. 후임 결정은 전체 이사회 2/3의 가표가 있어야 하며 9월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은 빨라도 10월 초에나 취임할 수 있었다. (136-137)

 

박형룡이 교장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게 되자 동년 55일 실행이사회는 박형룡이 교장 명의는 유지하되 사무는 명신홍(내무), 계일승(외무) 두 사람이 맡게 했다. 여론이 점점 더 악화되어 618일 서울에서 모인 실행 이사회는 후임 결정 때까지 박형룡이 계속 집무하게 한다는 대전 이사회의 결정을 취소하고 교장 사무 임시집행위원 3(노진현, 이권찬, 양화석)을 선정하면서 박형룡은 명예 교장 겸 교수로 남게 했다. (137)

 

19589월 서울 영락교회당에서 모인 제43회 총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직 사면을 인준하고 그를 명예교수직에 임명하면서 총회장 노진현 목사를 교장 서리로 임명하고 학교 실무는 계일승 목사가 담당케 했다.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를 신학교의 명예 교장 겸 교수로 추대키로 한 자신들의 결정에 대한 총회의 재가를 요청했으나 그 제안은 부결되었다. 이 보고를 마친 후 신학교 이사들은 삼천만환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전원 사임했다. 일부 이사들이 삼천만환 사태의 진행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입하여 일을 바로잡지 않은 과실이 있다는 것이었다. 총회는 재정에 대한 7인 조사위원을 선정키로 하고 그 인선을 공천부에 일임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학교에서 물러났고 그가 맡고 있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삼천만 환 재정 사거는 그럭저럭 수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 처리에 불만을 가진 지도급 인사들이 있었으니 이른바 “NAE이라 불리는 보수적 신학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박형룡이 교장 직에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의 재기를 시도했다. 43회 총회에서는 신학교 이사 전원의 사임이 수락되었기 때문에 총회 직후 있을 가을 노회는 이사들을 새로이 선정해야 했었는데 NAE측은 바로 그 노회에서 박형룡의 지지자들이 다수 이사로 선출되게 함으로써 그의 복귀를 성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외로 부진하여 1959120일 새 이사회가 모였을 때 실행 이사 총 14인 가운데 NAE측은 단 네 사람(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뿐이었다.... 안광국은 “NAE측이 이사를 자파에 유리하게 당선시켜 총회 의사와 배치되는 교권 유지 운동을 하는 것을 직감하고 그들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리하여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 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한 결과 (신학교 이사 수에서)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한 것이었다. (137-138)

 

정규오, 박찬목, 조동진, 이환수 같은 박형룡의 추종자들은 박형룡이 물러나고 다른 교장이 들어서면 교단의 신학이 좌경화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교장 직에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믿는 이들은 그리하여 박형룡의 일선 후퇴가 보수 신학의 후퇴자유ㆍ진보 세력의 득세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가 보수, 정통 신학을 유지하려면 박형룡 박사의 위치가 신학교에서 확고하게 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들이 박형룡 방어에 그처럼 집착했던 이유는 자신들의 계파적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1958년 제43회 총회가 모이기 전, “이른바 NAE측 목사들이 삼각산에서 기도회로 모인다는 구실로...... 총회를 대비하여 사전 정치 공작을 폈다. 이들은 NCC측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격침시킨다는 목표로 우선 몇 사람을 택하여 집중 공격하기로 했다.” 일차로 지목된 인사가 그들이 “NCC측의 대표 인물”, 혹은 “NCC의 거두로 본 한경직 목사였다. 그들은 그가 시무하던 영락교회 단상 뒷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가 우상이라는 억지스러운 공격을 퍼부었다. (138-139)

 

박형룡의 추종자들은 박형룡의 교장직 복귀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갔다. 그 목표를 위해 이들이 채택한 수단은 양편의 신학적 차이들을 부각시키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에 대한 일반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NAE측은 부지 매입 사건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신학 논쟁을 일으켜 에큐메니칼측을 비방하면서 용공이니 신신학이니 하는 말로 사건을 호도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박형룡측 인사들이 박형룡을 유임시키기 위해 들고 나온 주제가 WCC의 신학적 문제점이었다. (140)

 

박형룡의 측근들인 NAE측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이용하여 역공을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WCC는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하는 단체이다. 거기에 가입하자고 하는 에큐메니칼측은 고로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런데 박형룡 박사가 신학교 교장직에서 떠나면 신학교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고 그 경우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자유주의 판이 된다. 그것을 막으려면 박형룡을 유임시켜야 한다. (140)

 

NAE측이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켜 단지 행정적 도의적 책임의 문제를 신학적 노선 문제, 심지어는 색깔론으로 변질시켰다는 해석은 제3자격인 한 고신측 사가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남영환 목사는 박형룡의 추종자들이 그 무렵 에큐메니칼측이 용공 자유주의라는 공격을 강화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141)

 

4. WCC 가입 문제와 에큐메니칼 논쟁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 김현정, 명신홍, 유호준 목사가 대표로 참석했다. 그 무렵 일각에서는 WCC가 용공, 신신학, 세계 단일교회 운동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총회 정치부 서기 김현정 목사는 WCC결코 각 교파의 신조 통일을 의미함이 아니요, 각자의 신조를 존중하면서 연합사업을 함으로써 회원 교회 사이의 친선과 상호 협조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141-142)

 

19569월 제41회 총회(회장 이대영)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찬반양론 끝에 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연구위원은 한경직(위원장),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박형룡, 박병훈, 정규오(서기), 황은균 목사였다. 위원회는 이듬해 1957년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2회 총회(회장 전필순)에 보고하기를,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 중에는 단일 교회를 목표로 하는 이들과 교회의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했다. 이때 보고자는 서기 정규오였고 박형룡 박사가 위원회의 그 결정사항을 보충 설명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WCC 가입에 대한 박형룡 박사의 견해가 무조건 참여 불가가 아니라 선택적 참여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총회는 한국 장로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친선과 사업 협조에만 참여하고 교파 합동에는 반대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정규오는 제42회 총회 이후 에큐메니칼 문제에 대한 찬반 양론이 더욱 격렬해졌다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1958년의 43회 총회(노진현 총회장)에서는 연구위원회가 보고할 합의된 내용이 없어 아무런 보고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142)

 

WCC 가입 문제에 대해 NAE 측의 대부 격인 박형룡 박사는 애초에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인 이른바 NAE측 인사들의 입장보다는 1957년의 제42회 총회가 채택한 입장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박형룡의 본래 입장은 한국 장로교회가 WCC에 참석하는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박형룡보다는 정규오 등 NAE측 인사들의 WCC에 대한 태도가 더 경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42-143)

 

김요나의 관찰에 의하면, 42회 총회의 공식적인 결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WCC 문제가 게속 쟁점이 되었던 이유는 다분히 파벌 정치적인 것이었다. 19558월 한국 NAEWEF(세계복음주의협의회)에 가입했다. WEFWCC에 대립적인 입장에서 창립된 단체였다. 따라서 한국 NAE도 자연 WCC에 대해서 뿐 아니라 WCC에 대해 우호적인 이른바 에큐메니칼측 인사들에 대해서도 적대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NAE측과 에큐메니칼측이 총회 임원직을 차지하기 위한 파벌들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143)

 

1958년 가을, WCC가 용공이라는 한국교회의 의혹을 부추기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195811월 미국 NCC 주최로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세계질서연구회외(WOSC)에 참석한 500여 명의 미국 에큐메니칼 개신교 지도자들이 중공 승인과 UN 가입 및 공산 국가와의 공존을 미국 정부에 건의하고 그 선전비로 3,500만 불의 거액을 사용키로 했다는 소문이 한국교회에 들렸던 것이다... 당시는 빨갱이라는 말만 들어도 한국인들이 패닉 현상을 일으키던 시대였다. 크리하여 총회 임원 선거를 통해 에큐메니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NAE측은 1959년 총회를 앞두고 에큐메니칼측의 득세를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들의 주된 전략은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할 뿐 아니라 총대 숫자도 가장 많은 경북노회를 중심으로 WCC의 용공성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에큐메니칼측을 아예 신신학, 용공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43-144)

 

교회 분열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보다 확실하게 교권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은 이 경우에도 진리임이 입증된다. 통합측과 합동측 분열의 결정적 발단은 총회 총대권을 둘러싼 분규였다. (144)

 

5. 경기노회 총대 선거 부정 사건

 

19599월 대전중앙교회에서 개최될 제44차 총회에서는 박형룡 교장 건을 중심 의제로 다루게 되어 있었다.... 1959514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경기노회 제72회 정기회가 열렸다... “전 노회원의 7로 추산되던 에큐메니칼측을 18:10으로 누른 NAE측의 압승이었다... 총회 전도부 총무 황금천 목사의 탈락... 투표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결과는 개표위원들의 실수80표를 득표하여 당선되었어야 할 황목사가 당선자 명단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519일 노회 임원들, 개표위원, 임사부장 전필순 목사, 규칙부장 이인식 목사 등이 총회 사무실에 모여 개표상의 실수에 대한 시정 방법을 논의했다. 임사부장은 그러한 경우 본래 임시노회를 열어 시정하는 것이 원칙이니 그렇게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규칙부장은 임원들이 재검표하면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임원들은 그 견해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임원들이 전면 재검표에 착수한 결과 실제로 오류가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오류의 정도에 대해서는 보고서마다 차이가 있다. 기독공보는 재검표 결과 정기노회 때와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적고 있다... 노회 임원들은 정기노회 때 공식적으로 선포된 선거 결과가 아니라 임원들이 재검표한 결과를 노회 촬요에 발표했다... 임원회에 대한 수습 방식에 노회원들의 불만스러운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론이 부정적으로 돌아가자 도의적 책임을 느낀 임원들은 총사직을 결의하는 한편 611일에 임시노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상정 안건은 1) 44회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황금천 목사의 항의 건, 2) 임원 사임의 건 등이었다. 611일에 열린 임시노회에서는, 노회의 위임 없이 임원들이 재검표했던 것은 과실이었으나 착오를 시정하기 위한 양심적행위였다는 점에 대해 양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2, 즉 임원 사임 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회장은 아마도 자신을 비롯한 임원들의 순수한 재검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어 사퇴시키려는 에큐메니칼 측의 정치적 의도가 불순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만, 돌연 비상 정회를 선포하고 퇴장해 버렸다.... 동월 1887명의 노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부회장 강신명 목사의 사회로 노회가 속회되었다. 먼저 회장 출석 권면 위원 이태준 목사는 회장과의 교섭 결과를 노회 앞에 보고했다. 비상 정회를 선언한 후 이루어진 속회는 불법이므로 권면위원들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는 반응을 회장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증경 노회장 전필순 목사와 노회장에 의해 소집된 임원회는 노회의 속회에 대한 합의를 보고 그 속회에서 회장이 비상 정회 선언 경위를 설명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8일의 속회에 참석한 회장은 비상 정회 선언이 경솔한 행동이었음을 인정하고 비상 정회를 해제한다고 선언했다. 그 회의는 다시 6월 말 전에 속회하기로 결정하고 해산했다... 18일의 결의에 따라 노회장은 임시노회 속회 소집에 대해 노회원들에게 정식으로 통보했고 629일 승동교회에서 임시 노회가 속회되었다. 직전 노회, 즉 회장의 비상 정회 선언과 퇴장 후 부회장 강신명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부서기 김덕수 목사가 기록했던 속회의 회의록 낭독과 그것에 대한 한 시간 가량의 토의 후 회의록이 받아들여졌다. 안건 토의에 앞서 5월 정기노회 시 총대로 선정되었던 고봉윤, 김세진 목사 두 사람은 총대 직을 자신 사퇴했다. 총대 선거에 대한 황금천 목사의 항의 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안이 제기되었다. 첫째, 강병모 목사는 임원회에서 검표하고 발표한 결과를 인정하다고 동의했다. 즉 황금천 목사의 누락 건만 시정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정기노회 때의 발표 결과를 그대로 받자는 것이었다. 둘째, 김용준 목사는 재선거를 하자고 제의했다. 임원회가 월권에 의해 검표했으며 결과적으로 본래의 결과와 큰 차이가 있으므로 임원들의 검표 결과를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셋째, 임옥 목사는 검표 위원을 그 자리에서 선정하여 5월 정기노회 시의 투표 용지들을 다시 한번 검사하게 하자고 재개의했다. 개표상의 착오는 재검표를 통해 시정하면 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임시노회에서 총대를 선출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144-148)

 

회장이 먼저 재개의에 대한 찬반을 물으니 65:65 동수가 나왔다. 가부 동수인 경우에는 사회자가 결정한다는 회의의 원칙을 기억한 회장은 그 안에 대한 찬성 쪽에 투표하고 가결을 선언했다. 통상회의법에 의하면, 이제 개의나 동의에 대해서는 찬반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실제 이때 규칙부장 이인식 목사는 가결을 선언했다. 경기노회 총대 문제가 합법적으로 일단락 될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 순간 정당한 회의 진행을 저지하는 발언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149)

 

회장이 재개의의 가결을 선언하자 강만유 장로가 항의했다. 아마도 왜 개의와 동의에 대해서는 가부를 묻지 않는가 하는 항의였을 것이다. 회장은, 아마도 자신이 따랐던 회의법에 확신이 없었던지, 엉뚱하게도 가결을 취소했다. 이에 경기노회 보수파의 대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박찬목 목사는 안건 없는것을 물을 수 없다고 항의했다. 결국 개의와 동의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전자에 대해서는 찬성이 81표였고 후자에 대한 찬성은 9표였다. 그리하여 경기노회는 총대를 전면 재선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윤수, 박찬목 목사와 박희몽 장로는 결과에 대해 항의를 제기했다. (149)

 

두 번째 안건은 임원 사임에 관한 것이었다. 회장이 관련된 이 안건 처리를 위해 회장은 증경회장 중 연장자인 전필순 목사에게 사회를 부탁한 후 하단했다. 강만유 장로는 임원 전체의 사임을 받자고 동의했고 최중해 목사는 회장과 서기의 사임만 받자고 개의했다. 장시간 토론 끝에 표결하지 개의에 찬성 66, 반대 25, 동의에 대한 찬반을 물으니 (회의법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3:0이었다. 결국 개의가 채택되어 회장과 서기가 사임하게 되면서 그 순간부터는 부회장 강신명 목사가 사회를 보게 되었다. (149-150)

 

일설에 의하면, 그 임시 노회에는 NAE측이 대부분 불참했다고 한다. 그 의미는 자명했는데 그것은 재선거를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설사 에큐메니칼측이 임시 노회에서 재선거를 통해 결과를 역전시키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자신들의 불출석을 근거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에큐메니칼파 일색인 임시노회에서의 재선거 결과는 자명했다. 총대 28인 가운데 26인이 에큐메니칼 측의 인사들로 선출되었다. 반면 NAE측에서는 단지 목사 한 명, 장로 한 명만이 경기노회 총대단에 포함되었다. (150)

 

6. 제44회 총회의 파행과 장로교 분열

 

결국 NAE측과 WCC측 모두 자신들이 선호하는 총대 명단을 총회 서기에게 접수시켰다. 전 경기노회장 이환수 목사는 정기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 명단을, 강신명 목사는 임시노회에서 선출된 총대 명단을 서기부에 제출했다. 이환수 목사가 정기노회 총대 명단을 총회 서기부에 제출했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관측자들이 있다. 총회에는 틀림없이 NAE측 총대들이 다수파일 것이므로 결국 두 명단을 놓고 표대결에 들어가면 정기노회 명부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결구 8-9년 전인 1952년 부산 총회가 고신측 경남노회를 총회에서 제거하기 전에 일어났던 상황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한 노회에서 두 개의 총대 명단이 올라왔고 총회는 어느 것을 합버적 명단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150-151)

 

1959924일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총회는 벽두부터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로 파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역시 19504월 대구서문 교회당에서 열린 총회가 경남노회 총대권 문제로 총회 첫날부터 혼란에 빠졌던 역사의 재판이었다... 표결 결과는 아슬아슬하게도 정기노회 명부지지 119, 임시노회 명부지지 124, 기원 5표로 에큐메니칼 측의 승리로 드러났다. 총회장은 임시 노회명부가 선정되었음을 선포하고 총대 명부에 그 명단을 기재하도록 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던 셈이다. (151)

 

NAE측은 약오른 패배자”(sore loser)의 비신사적인 모습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총회가 속회되었을 때 전 경기노회장 이환수 목사는 이미 전날 종결된 경기노회 총대 문제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NAE측 장로들인 박희몽, 김자경이 나와 에큐메니칼은 용공, 신신학, 단일 교회 운동이라고 고함쳤다... NAE 측에 속했던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당파를 초월해서 객관적으로 사회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보다 계파적 소속감에 의해 더 많이 지배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위해 정치부와 전 총회장들 연석회의를 열게 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152)

 

결국 총회장이 제안한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것은 총회장의 제안을 총회가 받아들였다는 의미인데 심사숙고와 많은 논란 끝에 자신들의 투표로 결정했던 바를 바로 다음 순간에 무효화하는 이 총회는 이미 권위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어쨌든 연석회의는 총회로 하여금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범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총회에 제시했다. “현 총회의 정세하에서는 회무를 원만히 진행하기가 곤란하므로동년 1124일까지 총회를 정회하고 그때까지 경기노회가 스스로 총대를 다시 결정해 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만일 그러한 결정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사실 그 전날 총회가 표결을 통해 두 개의 경기노회 총대 명단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내렸어야 하는 결정이었다. 그것은 한 나라 교회 전체의 최고 지도자들의 모임이라는 총회로서는 극히 유감스러운 무질서였다. (153)

 

연석회의의 제안이 표결에 붙여졌다. 만일 이영헌의 기술이 정확한 것이라면, 여기서 다시 총회장이 사회자의 위치를 악용하여 자기가 속한 정파의 입장을 관철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124일까지 총회를 정회하자는 안에 대한 가부를 총회장이 물었을 때 !” 보다 에큐네미칼측의 아니오!” 소리가 분명 더 컸다고 한다. 회의법상 아니오에 대한 호응이 비슷하게 들릴 경우 사회자는 찬반에 대한 계수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총회장은 일방적으로 가결을 선포했다. (153)

 

총회장의 계속적인 불법적 사회에 흥분한 에큐메니칼측도 이제 비이성적이고 무질서한 대응을 시작했다. 총회장이 총회의 정회와 11월 속회를 선포하고 회원들이 퇴장하고 있는 순간 별안간 에큐메니칼측 안광국 목사가 강단으로 뛰어 올라가 미리 준비한 임원 불신임안이라는 극단적인 재용의 제안을 낭독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사회자나 된 듯이 가히면 예 하시오!’라고 가부를 물었다. 사회자의 불법을 반대한다는 측의 회원이 사회자 이상의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성적인 자제력을 상실해버린 총회의 에큐메니칼측 회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그 제안을 기립 가결했다... 상기된 안광국은 , 가결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하고 급히 하단했다. 회의장에서는 야유와 환호성이 뒤섞여 어지러운 가운데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154)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에큐메니칼측은 분개할 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의법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 총회장의 유도에 결국 경기노회 총대권과 관련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졌던 총회 결정이 무효화되어 버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개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분노와 흥분 속에서 그들은 중대한, 에큐메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쩌면 가장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NAE측의 회의 진행상의 비신사성에 흥분하여 총대의 공정한 선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교회 일치를 결정적으로 깨뜨리는 과오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 분리도 불사할 각오를 한 안광국,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목사 등 지도자들을 필두로 한 에큐메니칼 측은 그날 밤 미선교부에서 대절해 준 기차를 타고 상경, 연동교회에서 전필순 목사의 사회 하에 자기들끼리 제44회 총회를 속회, 총회장 이창규 목사 등 임원들을 선출하고 공석이었던 신학교 교장 서리로 계일승 박사를 임명했다. 비극적 교회 분리가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154-155)

 

이제 NAE측은 교회 분열의 주된 책임자라는 부담을 벗은 채 자기들의 총회를 11월에 승동교회에서 개최했고 그 장소 이름을 따라 승동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WCC를 영구 탈퇴하기로 가결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했다. 또 총회의 혼란 방지를 위해 교직자들은 NAE도 탈퇴하기로 했다. (155)

 

7. 장로교 분열에 미친 미 선교회의 영향

 

107일 미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성명서... 대전 총회가 진행 중 허다한 불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중 가장 현저한 것은 총회를 19591124일까지 정회시킨 일이라고 지적한 성명서는 연동교회에서 9월에 모인 통합측 총회를 유일한 합법적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로 인정했다. 그리고 11월에 승동교회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는 NAE측 총회의 정통성을 미연이 부인했다. (155-156)

 

비교적 보수적인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조차 비슷한 입장을 표명했다. 102일 그들이 제44회 총회에 대해 발표한 성명서는 에큐메니칼측을 지지하고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장로교 분열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대두될 수 있다. 그들이 NAE측의 비신사적이고 불의하고 무질서한 총회 진행에 대해 분개하고 그 불법성을 지적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요 또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측이 자기들만의 총회를 연 것을 정당화하고 그 회의 정통성을 공적으로 선언한 것은 부정확한 판단의 결과였을뿐 아니라 경솔하고 성급한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언으로 인해 결국 NAE측과 에큐메니칼측의 분리는 더 공고화되었기 때문이다. 연동교회에서의 모임을 유일한 정통 장로교 총회로 인정하면 나머지 NAE측은 틀림없이 자기들만의 총회를 열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대한민국에 장로교회가 또 하나 생기게 될 것은 불을 들여다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그러한 결과를 불사했다. 연동측이 독자적 총회를 그처럼 신속히 개최하기로 결정한 배후에는 선교사들의 격려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총회 정회 날 밤 상경을 위해 선교사들이 열차를 전세내어 주었다는 것이 그것을 함의하지 않는가? (156)

 

칼빈은 교회 분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사유로 기독교 존립에 관계되는 근본 교리가 부정될 때로 한정했었다. (156-157)

 

8. 맺음말

 

세계교회협의회에의 참가 문제가 대두되기 전에는 양자 어느 쪽도 신학적 이유로 양자가 한 배에 탈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자 모두 역사적 기독교의 근본 진리에 대해서는 공통된 고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보수적이냐 조금 덜 보수적이냐 하는 정도가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국제기구에의 가입 여부에 대한 견해 차이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될 수는 없다. (157)

 

박형룡과 한경직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 박형룡이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메이첸의 웨스트민스터측 및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그리고 다른 한편에 한경직이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프린스턴신학교 및 미장로교회(PCUSA)가 있었다. 실제로, 양자 사이에 미국의 두 카운트 파트너에게서와 같은 심한 신학적 차이가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신학이 이식된 나라의 각 대변인들은 작은 견해 차이에도 예민하게 대립했다. (157)

 

복음주의 동지회 51이 처음에는 순수하게 정통 신학의 보수를 위해 모였지만 후일에는 정치색을 띠고 교권 장악이라는 비본질적인 목적을 위해 파당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다. 물론 경기노회 총대 사건이나 제44회 총회의 자초지종을 보면 에큐메니칼측도 교권 장악을 위한 열심히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이 감지된다. (158)

 

장로교 분열에 미국교회라는 요인이 많이 작용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158)

 

분열의 요인은, 양편의 지도자 두 사람의 해묵은 충돌, 그 두 사람의 배후에 각각 존재하는 미국장로교회의 영향, 실재하거나 혹은 그리 심각하지도 않은 신학적 차이에 대한 상호간의 과장된 인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권장악을 위한 양측의 당파적 대결이다. (158-159)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