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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1960-70년대 한국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특성과 한계 : 종교사회학적 접근 – 전명수

by [수호천사]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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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한국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특성과 한계 : 종교사회학적 접근 전명수

출처 : 한국학연구 35, 2010.12. 329-359

 

I. 문제제기

 

일반적으로 민주화운동은 “1971년에서 1988년 사이에 한국에 존재했던 두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 저항하여 정치제도의 민주화에 기여한 집합적 행위라는 정의가 보여주는 대로 1970, 80년대를 묶어 살펴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군부 독재와 개발정책이 있었다는 점에서 19615.16 이후 197910.26까지 박정희의 집권 시기에 초점을 두어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할 듯 하다. 1960, 7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급속한 경제발전과 산업화가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권 유린과 반유신체제 저항에 대한 극심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330)

 

종교사회운동에서 종교는 관련 사회운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종교적 가치를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소속된 집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1960-70년대의 개신교 민주화운동에서 개신교는 이 운동이 추구하는 기독교 교리의 구현이기도 하면서 이 운동의 참여자들이 개신교 신자라는 점을 함축한다. (330)

 

개신교 민주화운동을 기술하지 않고서는 1960, 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신교 사회운동이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 과정, 그리고 민족ㆍ민중운동에서 비중이 컸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신교 측에서는 1970년대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진보적 표상처럼 인식되었다는 자부심을 보여준다. (331)

 

본 연구는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특성과 성과를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종교사회학은 종교와 사회의 관계, 또는 종교를 사회적 맥락에서 연구하는 사회학의 한 분야이다. 종교는 사회를 이해해온 인간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사회가 종교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나 양자가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331-332)

 

II. 1960-70년대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전개 : 주체 및 전개방식

 

이 시기 민주화운동은 대체로 1960년대, 1970년대 전반과 후반의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1960년대는 민주화운동의 전단계 내지는 준비기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이에 대한 저항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 사회운동이 부각된 것은 한일협정조인 반대와 3선 개헌 저지운동에서였다. 개신교 측에서는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1965417)을 발표했고, 동경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된 직후(196571) 김재준, 한경직, 강신명, 강원룡, 함석헌 등 목사 및 기독교계 인사 215명이 연서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332)

 

기독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세력 확대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양상은 저항운동의 목표가 설정되어 개신교 지도자들이 선언문이나 성명서를 발표하면 교회나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또는 학생회나 어머니회 주관으로 구국기도회, 연합예배, 철야기도회, 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연달아 일어나 그 선언을 뒷받침하는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이 시기 저항운동의 주체는 주로 교역자와 학생이지만 기도회에 참석한 신자나 일반 시민 모두 암묵적인 동조자로 포함시켜 볼 수 있다. 또 다른 주체는 기독교 교역자들과 학계, 문화계, 재야인사들의 연합그룹으로,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1969)에 김재준 목사는 위원장으로 참여했고, 정계와 재야 종교계 인사들이 위원회에 포함되었다. 김재준 위원장의 이름으로 전국의 신앙동지 여러분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러한 선언문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목표와 지향을 알리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동시에 당대 권력자들이 니관에 저항의 무게로 전달되었고, 사회적으로는 시대를 읽고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333)

 

1960년대 개신교 사회운동은 1970년대 본격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기반을 형성한다. 먼저 운동의 주체로서 개신교단체들의 연합으로, 대표적인 단체의 하나가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YMCA대학부가 통합하여 출범시킨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이고(1969), 이 단체가 시작한 것이 학생사회개발단운동이다. 이 운동은 그간 복음주의적, 교회 중심적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체적인 실천내용과 명확한 사회의식을 갖춘 운동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화운동에서 중요 역할을 한 학생운동은 1970년대를 전후한 기독학생 운동에서 그 초기 모델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고찰된 바 있다. (333)

 

1970년대는 이와 같은 1960년대의 준비기간을 거쳐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특히 운동의 주체가 종교인들과 재야의 연합으로 바꾸어진다. 1960년대 말에 일어났던 운동은 정권의 부패와 잘못된 정책 방향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1973년 유신체제가 출범하면서부터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체제운동으로 변화 확대된다.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48)가 결성되고 개신교에서는 김재준, 조향록 목사 등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했으나 개신교 공식기구가 주관하는 공식적 행동은 보류되었다. 반면 19741127일 결성되고 1225일 정식으로 발족된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지도자들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334)

 

1970년대 전반은 3가지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1970년대 초입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자살(1970.11.13.), 이 사건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방향이 단순히 반체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 도시빈민, 영세소상인 등의 기층대중의 생존권 투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다음은 남산부활절 예배(1973.4.22.)에서 행한 시위기도로, 이 사건은 위수령과 10월 유신 이후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 전반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이다. 19744월 서울과 지방의 대학들의 참여하에 민중ㆍ민족ㆍ민주전선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학생과 지도급 인사들, 종교, 학술, 문학계, 언론계, 재야인사들이 구속된다. 더욱 당국이 이 사건을 공산주의와 연결시킴으로서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반공과 용공의 극단적인 대립이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334)

 

이러한 운동은 첫째 모두 1960년대 말 재정비된 기독교 단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특성을 지닌다. 예로 전태일 사건에서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남산부활절 예배에서 KSCF와 함께 도시선교위원회의 멤버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데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일으킨 범국민적 유신헌법 철폐 데모(1973.10.2.)에서는 한국기독학생회의 학생사회개발단 활동에 참여하였던 대학생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34)

 

둘째 개신교 사회운동의 전개방식이다. 전태일 사건에서처럼 학원 중심에서 교회 중심으로 옮겨가고, 문리대생 데모나 민청학련 사건에서처럼 학원에서도 기독교 신자 학생들이 저항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을 초점화한 움직임은 처음 학생들(서울대 법대, 상대 등)에 의해서였고, 새문안교회 학생회가 열흘 후 전태일 추모기도회(1970.11.22.)를 가졌으며 이어 KSCF가 연동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보고 근로기준법의 정당한 시행을 촉구했다. (335)

 

셋째 사건 발생 후 구금된 개신교 목회자, 신자, 재야인사들을 위한 교회의 대응방식이다. 교단 노회, 여전도회, 각 기독교 단체들의 성명서, 탄원문, 선언문, 추모예배, 추모기도회, 연합기도회, 금식기도회, 철야기도회, 금요기도회 등이 계속 이어짐으로서 이 문제가 개신교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하는 문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범사회적으로 당국의 탄압이나 날조가 알려지고 이를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교회가 운동을 위한 기초적인 자원인 지도자, 구성원, 의사소통망, 성원간의 결속성을 제공하고, 여기서 민중신학과 같은 프레임이 결정됨으로써 민주화운동에의 동원이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335)

 

1970년대 후반은 각계 인사들의 서명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화단체의 지속적인 결성과 정권퇴징 시위 그리고 성직자 구속 및 구속인사에 대한 성명서 발표와 기도회 개최가 연이은 시기였다... 197631일 민주구국선언, 1978년 각계인사 300여명의 서명으로 민주주의국민연합이 발족되어 8.15 선언문이 발표되고, 곧 이어 각계인사 402명이 서명한 국민연합선언(1978.10.17.)이 나왔다. 다음해 31일에는 민주주의 국민연합을 계승 발전시키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결성되고, 3.1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된다. (335)

 

다음 조직의 연합 개편이 지속된다. 여기에는 기독교단체들 간의 연합도 있고 재야와의 연합도 있다. 전자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가입 6개 교단 청년회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의 창설(1976.1.29.),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사회정의 실현과 교회갱신을 기치로 내세움으로서 기존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형성된 진보기독학생운동이 교회 안으로 확산되는 입구가 된다. 1970년대 후반의 기독청년운동은 EYC가 성명서, 기도회, 시위 등의 방법을 통하여 70년대 초반의 KSCF를 대체하면서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했다. 후자로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의 창건(1977.11.29.)을 들 수 있다. 이 조직에는 KNCC 인권위원회,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기독자교수협의회, 기독학생총연맹,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동아투위, 양심범가족협의회가 포함되었다. (336)

 

III. 민주화운동에서 드러나는 개신교의 현실인식과 문제점

 

1. 복음이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과 민주화 이념의 종교적 승화

 

개신교는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에큐메니칼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교단 역시 진보와 보수, 또는 현실에서 정의 구현과 실천을 내세우는 측과 종교적 영성추구라는 복음 위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측으로 나누어지낟. 에큐메니칼의 정의는 본래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서 일치를 추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교회의 일치란 각 종교가 또는 교단이 공존하여 공동선을 추구함으로서 이루어지는 평화이다. 핵심은 그간 기독교가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집중했음을 반성하고 이제 교회는 세계를 위해 존재하고 세계를 섬겨야 하는 존재임을 확인하면서 복음전도가 삶을 통해 증거되어야 하며,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337)

 

한국에서 본격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은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참여한 뒤로부터 볼 수 있다. 에큐메니칼 정신은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개신교 지도자들의 선언문에서 드러난다. 김재준 목사는 부정으로 얼룩진 1960년대 말 국회의원 선거를 보고 불의가 있을 경우 어느 편, 어느 누구의 소행이든 간에 이를 묵과하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 이 땅에 의를 세우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표명했다. 역사의 문제는 그대로가 신앙의 문제로 이 둘은 분별되어 있으나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의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육적인 인간의 세계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의 문제가 그대로 신앙의 문제라는 것은 1960년대 말 한국 기독교가 표명하기 시작한 신앙 고백이었다. (337)

 

그러나 개신교 사회운동의 전개에서 보여주는 한 가지 특성은 신학적 해석의 다양화에 따른 교단과 교회의 분열이다. 신앙의 정체성 문제와 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의 고민과 갈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표출되어 왔다. 해방 후, 특히 19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산업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이러한 복음주의 교단과 에큐메니칼 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교단 간에 첨예한 분열과 대립이 나타났다. 먼저 WCC의 가입 문제를 중심으로 장로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리되고,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참여자들과 정권과 밀착된 산업화 세력에 동조하는 측이 대립하면서 이것은 다시 용공과 반공의 이념적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338)

 

당대 개신교가 전체 민주화운동의 어느 정도를 대표하였는지는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개신교 민주화운동자들의 의식과 목표를 담은 선언문은 민주화운동의 당위성을 받아들이고 직접 행동에 나섰던 이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338)

 

김재준 목사가 1969815범국민투쟁위원회위원장의 이름으로 전국의 신앙 동지에게 전하는 성명서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 복음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준다. (339)

 

민주화운동에서 제시된 선과 악의 기준은 주로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의한 인간적 판단을 근거로 하는 반면 개신교 선언문에는 이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기독교 성직자들이나 학생, 교단과 단체들이 발표한 선언문은 그들의 선언이 곧 절대성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한다. (339)

 

개신교 민주화운동 선언문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그것은 이 운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사명에 충실하려는 철저한 책임감은 바로 순교자적 자세로 이어진다. (340)

 

2. 경제발전과 통일에 대한 개신교의 인식과 민주화운동 참여자의 수적 한계

 

학계 일각에서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수적으로 소수라는 점, 따라서 그들의 공로를 개신교 전체의 기여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341)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신자들이 수적으로 많지 않은 이유... 1960,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체와 전개방식은 기독교 인사들과 재야 또는 각계인사들의 연합에 근거한다. 따라서 그 시기 민주화인사들의 공격대상은 무리한 산업화를 주도하는 산업화세력이었고, 반면 산업화세력은 민주화인사들을 용공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수적 소수 역시 이 시기 경제문제나 통일 논의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341)

 

1960-70년대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키워드는 아마도 경제발전일 것이다. 경제 발전의 단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는 수출 촉진 정책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한국 경제발전모형의 특징으로는 주로 성장지상주의’, 관치경제와 불균형적이며 대외지향적인 공업화전략이 거론된다. 경제발전에서 나타난 이러한 특성은 한국 종교계 전체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와 발맞추어 양적으로 큰 성장을 보여준 개신교는 경제발전의 모형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시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던 산업화세력과 교회의 성장을 꾀하던 기독교간의 긴밀한 관계가 비판을 받았다... 개신교는 정권과 매우 긴밀한 유착관계를 맺은 것으로 간주된다... 기독교인 다수는 침묵했고 민주화ㆍ인권ㆍ통일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소수였다는 것이 고찰되었다. (341-342)

 

종교 내에서의 성장주의는 종교의 양적 성장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종교문화의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종교 내에서의 성장주의의 확산은 보편적인 가치나 윤리규범의 제시를 위한 활동보다는 신자의 증대와 물리적 시설의 확장에 보다 관심을 갖도록 하였으며, 물질주의ㆍ물량주의ㆍ경쟁주의ㆍ업적주의ㆍ형식주의ㆍ권위주의 등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들을 한국 종교문화의 특성으로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성장주의는 기복이나 신비체험을 중요한 선교방법으로 내세움으로 건전한 신앙의 형성을 저지하였는데, 기복과 신비체험에 대한 강조는 신앙생활을 감각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시킴으로써 종교의 사회적 체험을 간과케 했던 것이다. (342-343)

 

1970년대 이후 개신교의 급격한 성장은 친정부활동과 연관된 경제성장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있었던 민족복음화운동이 성황리에 개최된 것이 군사정부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지 않았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곳에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이유 역시 그들의 의도적인 조정에 의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경제성장주의의 혜택을 받는 자나 피해자,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측이나 저항하는 측 그들 모두가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나 심령의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 종교생활의 변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개신교의 대중적 영성주의전략이었는데, 이 선교 전략은 1960년대 한국 개신교의 신자증가율을 412.4%로 이끈 것으로 고찰되었다. (343)

 

이와 같이 변화된 종교생활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철저히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들의 건강과 안정, 그리고 소원 성취에 집중하고, 반면에 주변 이웃이나, 사회, 국가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344)

 

동서 냉전시대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양쪽 진영의 화해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펼쳤는데, 이 운동이 남북화해 내지는 통일운동에 모범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서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 신학자들은 에큐메니칼 대화를 통해 이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했거니와, 1967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대화를 위한 에큐메니칼 협의회가 마리엔바드에서 열렸고, 기독교는 마르크스주의에게서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사회를 변혁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344)

 

WCC 역시 처음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으나 점차 사회주의 사상을 기독교신학에 적극 수용하면서(1968년 웁살라 총회), 신앙과 사회 및 정치적 참여의 동일시(1975년 나이로비 총회) 등으로 복음이 정의와 인간존엄성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 인간의 보편성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배격해야 하는 의무, 목숨까지도 버리는 참여를 포함하는 것임을 선언했다. (345)

 

개신교 인사들이 정치계, 학계, 재야인사들과 함께 발족시킨 민주주의 국민연합’(1978)이 그 다음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 명칭을 변경한 데에서도 반공이념에 맞서 통일문제에 적극 개입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345)

 

군사정권을 옹호한 사람들의 명분은 반공이데올로기였다... 개신교의 민주화운동 참여가 소수인 한 가지 이유가 통일에 대한 전향적 의식이 가져온 불안감이 여전히 대다수 국민에게 남아있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345)

 

IV. 1960-70년대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사회적 기여와 한계

 

1. 교회 및 기독교회관의 ‘민주화운동 공론장’ 형성에 관한 문제

 

공론장이란 기본적으로 여론이 형성되는 장, 즉 시민들의 일상적인 관심사에 대해서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을 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공론장은 이미 많은 비판이 제기된 것처럼 하버마스가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를 통해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경제활동을 하던 브르주아의 보호를 위한 영역으로 상정한 것이다. (346)

 

1970년대 한국은 민주화의 문제가 절박했다. 무엇보다 1960, 70년대 시민사회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와 기독교회관은 사람들의 견해를 모으고 힘을 집중시키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교회의 기도회와 예배는 긴급조치9호의 치하에서 최후로 남겨진 자유집회였다. (346)

 

먼저 교회는 1960, 70년대 인권을 억압하는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나 그로 인한 피해자 문제를 부각시켰다... 다음으로 교회는 신앙적 동지자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에 같은 뜻을 가졌던 이들이 모여 논의하고 연대를 형성하여 이를 바깥 세계에 전달함으로서 여론을 일으키고 중지를 모으는 공론화장소이며 연대의 장이었다... (346-347)

 

1973년 말 이후 교회는 민주화운동의 통로가 아니라 오히려 운동을 시작하는 발원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개교회 학생회의 역량의 성장은 1971년 교회청년협의회가 교회청년연합회(1973.12.18.)로 재건됨으로써 보다 조직화되었다. (347)

 

교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은 197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더욱 강화된다. 그것은 그만큼 학원가에 대한 당국의 검열과 구속이 더 심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348)

 

교회와 함께 기독교회관 역시 공론장의 임무를 수행했다... 1970년대 기독교회관은 기독교내 교단 연합뿐만 아니라 각계인사들이 모여 단체를 결성하는 장소가 된다. (348)

 

교회가 진정으로 민주화운동의 공론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대형화, 기복신앙을 부추기고 물질적 성공에 매달리고 있었기에... 확실히 1970년대 교회의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349)

 

1960, 70년대 교회나 기독교회관이 적어도 개신교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공론의 장이 되어준 것은 의심할 바 없으나 일반인에게도 민주화의 성지로, 당국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인식되었는지는 좀 더 고찰을 요한다. (349)

 

2. 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문제

 

예언자란 신의 대언자란 의미를 지닌다... 저들을 예언자로 간주하는 것은 저들이 자기 시대의 사회에 대하여 경고한 신의 심판이 실제로 수십 년 후에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거나, 하나님의 심판, 구원, 메시아의 강림과 그의 재림, 역사의 종말을 예언한 데서 예언자라 할 수 있다. (350)

 

한국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개신교 교역자들의 지향은 경고와 심판의 예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한 개혁과 변화의 의지가 수반된다는 점에서 애굽왕 바로의 폭정에 항거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에서 인도해 나온 모세와 유사해 보인다. (351)

 

구터만은 종교사회운동이 임시 체류지로부터 나오는 엑소더스 스토리를 함축하고 있는지, 아니면 선택된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는지에 기초하여 이를 거류민 운동과 선민운동으로 분류했다. 그에 의하면 거류민 엑소더스 스토리는 그 운동의 참여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공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능력을 주는 반면, 선민운동은 운동 지지자의 주목을 민주주의에 해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개신교 민주화운동은 개인이 아닌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말할 것도 없이 거류민 엑소더스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52)

 

구터만은 대표적인 거류민 엑소더스 스토리의 지도자로 마틴 루터 킹을 든다. 그는 킹에게 현대판 모세로서의 위상이 일찍부터 주어지고 그리고 자주 반복되어 왔음을 환기시킨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개신교 지도자들 역시 억압적이고 불의한 군사정권을 경고하고 다가올 심판을 경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핍박받는 민중을 이끌고 나와 민주라는 기독교적 그리고 사회적 가치와 윤리를 실현하려고 한 점에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적 위상을 지닌다. (353)

 

민주화운동에서 개신교 내지는 종교계 인사들의 참여가 그 운동의 합법성과 신뢰성을 제고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지도자들 역시 그 초점이 대부분 정계 재야인사들과 함께 그 운동을 이끌고 탄압받았던 민주화에 있지 개신교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354)

 

V. 맺음말

 

개신교는 동원자원의 측면에서나 민주화 이념의 정립에 있어 이 시기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개신교 민주화운동 내지 종교계의 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일부에 포함되거나 가려져 그 종교적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개신교의 교리로 운동을 포장하거나 이를 그 안에 편입시킨 듯한 인상을 준다. (354)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각 분야의 인사들이 연합하여 단체를 결성하고 선언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도 단지 민주화인사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개신교적 정체성이 좀더 지켜질 수는 없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355)

 

공론장으로서의 기독교회관과 명동성당의 차이... 사회 일반의 시각에서는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서 각인되는 데 비해 기독교회관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355)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가 현실의 모든 사회문제를 정부지도자에게 맡기고 이에 무관심하는 것은 그 사회적 역할을 등한시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종교사회학자 벨라(Robert N. Bellah)가 주장한 것처럼 종교가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적 이상에 비추어 현실의 정치체제에 대하여 도전하고 비판하며 충격을 가하는 것으로, 실제로 이렇게 할 때만 사회는 학습의 과정을 거치고 따라서 발전하는 것이다. (35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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