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 송창근ㆍ김재준의 신학을 중심으로 – 장동민
출처 : 한국기독교와 역사 (6), 1997.2, 180-222
1. 한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해석의 역사
채필근은 《아빙돈단권주석》 번역에도 참여하였고 여러 방면의 신사상들을 소개하기는 하였지만 뚜렷한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남궁혁 박사는 자유주의자들이 〈신학지남〉에 기고하도록 허락하지만 자기 자신은 분명한 보수주의자였다고 보여진다. 김영주ㆍ김춘배ㆍ김관식ㆍ조희염 목사 등은 자유주의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저서를 남긴 신학자들은 아니다. (180)
송창근과 김재준의 사상... 이 두 사람의 신학사상이 세세한 점에서까지 일치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서로 유사한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한국교회를 위하여 동지의식을 가지고 협력하였다. (180)
김재준 자신이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바르트주의자’나 혹은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자유로운 신학사상가 정도로 이해되기를 원하였다. 즉 그는 자신이,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그대로 믿는 사람”(정통주의)이나 “성경이 오류가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자유주의)에 속하지 않고, “성경에 다소 오류가 있으나 그 속에 구속하는 이치가 있으니 믿는 사람”의 하나라고 말한다. 한편 정통주의라고 불리우던 보수적인 신학자들도 이들의 신학에 대하여 매우 일찍부터 ‘이사상’(異思想)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이들과 정통신학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박형룡은 1935년에 출간된 그의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에서 김재준의 사상을 《아빙돈단권주석》의 입장과 동일하다고 하여 이를 가리켜 ‘신신학설’(新神學說) 혹은 ‘이사상’(異思想)이라고 부른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까지도 그는 김재준의 사상을 꼭같은 카테고리에 집어넣어서 해석하고 있다. 박형룡은 처음부터 슐라이에르마허, 리츌, 하르낙 등으로 대표되는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와 바르트주의를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다. 박형룡에 의하면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고 인본적인 출발점에서 신학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181)
김재준을 비롯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박형룡의 이해는 곧장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의 김양선 교수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분열을 자유와 보수의 대결로서 파악한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이며 재한국 OPC 선교사로서 12년간 봉직한 적이 있는 간하배(Harvie M. Conn)도 같은 견해이다. 그는 미국의 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김재준의 신학을 역시 자유주의라고 규정한다. 박형룡의 신학적 전통을 가장 잘 이어받았다고 여겨지는 합동측 총신대학원의 공식적인 역사서와도 같은 박용규 교수의 《한국장로교사상사》의 경우에 김양선과 간하배의 글을 많이 인용하면서, 주저없이 김재준과 송창근의 사상을 자유주의라고 단정한다. (181-182)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된 《한국기독교100년사》의 경우, 김재준을 바르트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당시에 그를 자유주의자로 몰아 이단재판을 행하였던 정통주의를 율법주의, 교리주의, 근본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들에 의하면 “조선신학교는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과 18,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두 극단을 함께 지양하고 현재의 세계교회 신학의 주류를 이룬 바르트, 브룬너 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의 방향에서 장로회 신학의 전개를 모색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182)
최근들어 이른바 민족주의 기독교사관이 학계에 대두되면서 김재준을 비롯한 한국의 ‘자유주의자’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김재준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자유주의 신학과 더불어 민족과 민중의 문제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내세주의적이며 현실도피적 기독교를 발전시켜 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맨처음에 주장한 사람은 유동식이다. 그는 《한국신학의 광맥》이라는 책에서 한국신학의 흐름을 3구분하여 김재준의 사상을 ‘진보주의적 역사적’ 신학이라 하였고, 박형룡의 사상을 ‘근본주의적 교리적’ 신학이라고 정의하였다. 다른 하나는 60년대 토착화론의 토대가 되는 감리교 신학자인 정경옥의 ‘자유주의적 실존적’ 이해이다. 역시 감리교 신학자인 송길섭은 한국의 신학을 ‘민족구원의 신앙’과 ‘개인구원의 신앙’으로 대별하였다. 물론 김재준은 전자에 속하고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후자에 속한다. 이후 이 해석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져서 보수주의자들은 민족과 역사의 문제에는 항상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자유주의자들은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민족적, 민중적 기독교의 담지자들로 인식되어 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김재준 자신이 해방 직후 “기독교의 건국이념 : 국가구성의 최고 이상과 그 현실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하여 역사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60~70년대 군사정권하에서 보수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개인주의적 신앙에 머물러 교회의 성장에 힘썼던 반면, 김재준의 정신을 이어받은 한국신학대학의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이 학교 출신 목회자들은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는 신학을 형성시켰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82-183)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이와같은 여러 가지의 다른 해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신학적 입장 혹은 정치적 입지에 따라서 보수주의에서는 김재준과 송창근의 성경오류론에 집중하여 이를 반대하고, 그들과 신학적,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좋은 면만을 보는 것 때문에 두 해석 간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김재준 송창근 신학에 대한 호불호를 막론하고 종래의 해석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어 가지의 문제들이 있다고 보고 필자는 그 문제들에 집중하려 한다. (183-184)
첫째, 기존의 해석들은 모두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미국적인 배경 하에서만 이해하려 하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미국적 혹은 서구적인 배경이 한국의 자유주의나 정통주의를 망라하여 모든 신학과 신학적 운동들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이라고 하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특히 장로교의 경우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되어 왔다. 박형룡도 김재준과 송창근도 미국에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또한 그들 스스로가 미국적인 신학의 용어와 카테고리를 가지고 논쟁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박형룡은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을 1935년에 쓰면서 1장부터 17장까지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학의 사조들을 나열하여 설명한 뒤 18장에서 김재준을 비롯한 한국의 이사상을 서구신학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이를 비판한다. 김재준도 자신의 신학이 17세기 스콜라적인 ‘정통주의’와 성경에 대한 파괴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자유주의’의 중용을 취하는 ‘바르트주의’에 가깝다고 한다. 그 역시 자신의 신학의 정체성을 미국의 신학적 논쟁 속에서 수립시키려 하고 있다. (184)
김재준과 박형룡의 자의식적 논쟁과 그 부산물인 두 개의 교파와 두 개의 신학 속에서 신학을 하고 역사를 해석하여 왔던 현재의 해석자들은 김재준과 송창근의 신학을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간하배는 “전쟁전의 수십년 동안 미국을 풍미하였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한국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또한 유사한 비난들이 오갔다”고 말한다. 박용규도 “……20세기 미국에서 발생한 미국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 혹은 ‘서역ㅇ에 관한 논쟁’과 매우 유사한 논쟁을 (한국교회에서도) 연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김재준의 신학을 자유주의이다 혹은 바르트주의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 배경 속에는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츌과 포스디고가 어번긍정서와 프린스턴의 분리와 1967년도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자유주의를 미국적 배경만을 가지고 정의하는 것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받아들인 지 반세기도 채 안되는 한국의 신학자들에게 수천 수백 년의 기독교 역사를 가진 서구에서 형성된 자유주의나 바르트주의가 이식될 때에 일정한 한계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자유주의를 논할 때에 그 자유주의가 한국의 특수한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유주의’라고 표기하려 한다. (184-185)
둘째, 한국의 자유주의 해석자들은 하나 같이 김재준이나 송창근의 사상을 처음부터 완성된 하나의 신학체계로 전제하고 접근한다. 1930년대의 〈신학지남〉을 통해 나타난 그들의 ‘자유주의’ 신학과 1950년대 교회의 분열 시기에 있었던 그들의 신학, 그리고 군사독재하에서의 신학이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적인 정통신학은 서로의 논쟁과정을 통하여 극단적인 두 방향으로 서로를 해석하고, 그 해석된 상대방의 신학에 대한 반대로서 자신을 규정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미 신학적인 틀로서 굳어진 1950년도 이후의 신학을 가지고 1930년대의 신학을 해석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은 될지언정,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태도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을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이라고 규정한 유동식 이후의 논의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1930년대의 김재준이나 송창근의 신학은 사회참여의 신학이 아니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오히려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 신앙가들이 사회참여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박형룡이 3ㆍ1운동 당시 숭실의 학생대표로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학생들을 독려하였고, 또한 1920년대에 숭실의 전도단으로서 일제를 거스르는 연설을 하여 10개월간 영어의 몸이 되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산업화와 군사독재 시기인 1960년대 이후에도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나름대로 모든 민족의 문제가 결국은 개인적인 신앙과 윤리 문제에 귀속된다는 믿음하에서 소극적인 행동을 하였을지는 모르나 그들의 뇌리에서 민족의 문제가 떠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960년도 이후에 일어난 현상인 신학적 자유주의와 사회참여의 결합, 그리고 보수주의에서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1930년대에까지 소급시켜서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185)
그간의 연구들을 통해서 해석된 김재준과 송창근을 위시한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은 자유주의적 성경해석과 사회참여라는 두 개의 중심점을 가진 타원형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우선 김재준이 가지고 있었던 자유주의적 신학과 성경관에 대하여 살펴보고,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이라는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보려 한다. 그리고나서 그들의 신학사상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모든 작업을 할 때에 그의 신학사상을 평면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30년대에서 60~70년대에 걸쳐서 형성되어 왔던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이 다루기를 원한다. (186)
2.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과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
우선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김재준의 신학을 파악하는 해석의 난점을 생각해 본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은 이른바 ‘5개의 근본원칙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성경의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기적,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등 기독교의 초자연성의 문제와 연결된 교리들이다. 자유주의자들의 경우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부인하여 그 다섯 가지의 ‘근본조항들’을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그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하여 하였고,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전투적으로 이를 옹호하려 하였다. (186-187)
그러나 김재준의 경우 그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였다거나 기적을 부인하였다거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부인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1934)에서 ‘앨마’가 동정녀를 의미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한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에 접촉한 후에 다시 이 예언을 회고한다면 이사야 자신도 마태복음 기자와 함께 또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찬탄하며 그리스도만이 참으로 메시아이심을 다시 한번 선포할 것”이라 한다. 즉 이사야 자신은 이 앨마가 동정녀인이 ‘젊은 여자인지’ 젊은 여자라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이상왕을 그리는 신앙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예언이 성취가 되고 난 후(즉 동정녀 탄생이 있고 난 후)에 다시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김재준도 이 글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자 이 글이 “‘동정녀 탄생 부인설’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마태복음이 인용한 70인역에서는 앨마가 ‘파르테노스’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동정녀라는 뜻으로밖에 쓰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87)
기적에 대하여도 초자연과 자연이 한 인간 안에서 하나가 된 예수 그 자체가 최대의 기적이고 이를 믿는 자에게 자연과 초자연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기적을 문자적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을 가지고 그가 기적을 믿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 김재준은 분명히 그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 편에 서 있었다. 김은 1935년 3월에 〈신학지남〉에 발표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그 의의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이 글을 읽게 되면 이것이 김재준의 글인지 박형룡의 글인지 모를 정도로 그 안에서 자유주의의 냄새도 찾아볼 수 없다. 우선 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절설, 도적설, 환상설과 같은 종래의 부활 반대자들의 이론을 하나하나 반박한다. 그리고나서 적극적인 증명으로서 낙심했던 제자들이 용기를 얻어 교회를 창설할 수 있었던 것을 든다. 그리스도의 부활체의 성격에 관하여는 “증전(曾前)의 몸과 동일성을 가지면서도 그와 동시에 마치 변화산상에서 변화할 때와 같이 영화(榮化), 영화(靈化)된 몸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부활의 종교적 의의에 관하여는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리스도의 품위에 대한 결론적 입증”이며, 또한 “신자(信者)의 구원에 대한 최초 급(及) 최종의 확증”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하여는, “전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 공덕으로 인하야 전인류가 객관적으로 신과 화목함을 얻게된 것”이라 하였고, 부활은 그 십자가의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가납하셨다는 객관적인 증좌(證左)”라고 하였다. 부활이 신자에게 미치는 영향으로서는 이미 영적인 면에서 부활이 시작되었거니와 “냉종에는 우리의 죽을 몸, 즉 육체까지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김재준의 부활에 관한 의견뿐 아니라 그의 기독론, 속죄론, 칭의론 그리고 신자의 최후의 부활에 관한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어느 하나도 전통적인 복음주의적인 교리에서 벗어남이 없다. 특별히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대결이라는 면에서 보더라도 초자연적인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주의의편에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근본주의 쪽의 견해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재준 자신도 이 점을 분명히 한다. 1948년 34회 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퇴진시키고 장로회신학교와 합병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에 그가 쓴 신학적 변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처녀탄생도 기적도 부활도 재림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하는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이는 나의 저서와 아울러 내가 8년강 강의한 것을 들추어 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교안의 프린트물을 보아도 알 것입니다. 그래도 流布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하는 犯法者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88-189)
김재준의 보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다른 글들 가운데 하나가 그의 “뿍맨운동과 그 비판”이라는 글이다. 뿍맨운동은 미국인 뿍맨의 영적 감화를 입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생들이 일으키고 있었던 영적 각성운동이고 새로운 공동체운동이다. 그 후 이 운동은 영국ㆍ남아공ㆍ캐나다 등지에서 매우 활발하게 번성하였다. 이 운동의 특색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모방하기 위하여 정사(靜思)의 시간을 통하여 특별 계시를 기다리며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예배의식, 절대복종을 근간으로 한 윤리, 나눔의 공동체,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적 번쇄함을 무시하는 것 등이다. 김재준은 이들이 자기들만의 방법을 고집하여, 주관적이 되기 쉽고, 영적인 교만에 빠지기 쉽고, 신학의 부재로 인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하는 단점들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교회가 배워야 할 점들로서, 형식보다 영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예배의식, 활발한 개인전도, 신자들간의 뜨거운 사랑, 생활에 나타나는 회개의 열매 등을 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신학과 신앙간에, 교리와 실천간에, 제도와 영적부흥간에 상당히 균형잡힌 틀을 볼 수 있을 뿐이다. (189)
우리는 1930년대 한국교회의 자유주의를 연구할 때에 한국의 신앙과 신학과 교회의 모습이 미국의 그것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즉 김재준도 송창근도 모두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유교적인 교육을 받고 세속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청년 때에 극적인 회심을 하고 예수를 믿고 한국적인 보수주의 교회에 오래도록 출석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기존교회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보고 새로운 성경해석의 방법을 소개한다고 하여도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면이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까지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사고가 철저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서 과학과 세속화를 받아들였던 미국의 자유주의와는 사고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교회사의 논의에서, 심지어 박형룡의 김재준 이해와 또한 김재준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까지, 이와 같은 김재준의 ‘복음주의’ 신학적인 면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단지 그의 성경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서, 그가 성경의 문자적 영감을 부인하고 과학적 역사적 오류를 말하였으니만큼 그는 자유주의자라고 여겨져 온 것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김재준을 평가할 때에 근본주의-현대주의간의 갈등이라는 미국 신학에서 통용되는 도식 속에서만 그를 이해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박형룡이 김재준을 비롯한 1930년대의 자유주의자들을 볼 때에 미국의 신학적 분쟁을 배경으로 하여 판단하였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189-190)
1930년도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 사이를 방황하면서 “한 개의 겸비한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심정을 좀더 이해하고 그의 뜻을 따를까”를 걱정하는 신학도의 모습이었다. 이 때에 나온 글들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예언서 연구를 비롯한 구약의 연구들이었다. 그는 고등 비평의 결과를 수용하고 자기 나름의 해석법을 제창하기는 하였으나, 정통적인 교리들과 초자연적인 성경의 기사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자유주의와 정통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해방 후에 바르트 신학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하나의 신학적인 대안을 발견한 것이다. 즉 김재준은 바르트 신학을 배워서 자신의 신학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독창적인 신학이 바르트 신학과 유사한 것을 알게 되고 이에 자신의 신학을 그것에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이후에는 항상 자신의 신학이 신정통주의 신학이며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와 정통주의의 장점만을 따서 만든 신학이고 세계적으로 공인된 진정한 기독교라고 하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한다. (190-191)
그러나 김재준은 결국 완전한 신정통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신정통주의는 단지 하나의 참고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박형룡 박사의 빨트 신학평론 ‘정통과 신정통’ 독후감”이라는 글을 통하여 박형룡이 본 바르트주의가 너무 바르트를 오해한 것이고 사실의 바르트는 정통에서 그렇게 멀지 않다는 점을 주장한다. 즉 바르트의 입장에서 박형룡의 설명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트가 정통주의 교리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바르트를 옹호한 것이다. 김재준은 자신의 비교적 정통주의의 입장에 서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박형룡이 바르트를 초연신론자라고 말한 데 대하여 바르트가 초연신론처럼 보인 것은 자유주의에 강력하게 대항하려다가 과격한 초월적인 용어를 연발한 것일 뿐, 바르트의 근본정신은 초월하실 뿐 아니라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바르트가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한 것은 다만 그가 “원죄의 책임자 추구 등에는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대신 그는 낙관적인 역사관을 완전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무릎을 꿇게 한 성경주의자라는 변호이다. 또한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고 초역사로 보았다고 한 박박사의 비판에 대하여, 김재준은 박형룡의 바르트 비판에는 일면 동의할 수 있지만 자신은 십자가의 역사성을 믿는다고 말한다. (191-192)
그는 바르트 신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정통주의 신학과 대조시킨 것이 아니라, 바르트 신학 속에서 자신의 신학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자기 식으로 바르트를 이해하고 이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김재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현실성’과 ‘역사적 사실성’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93)
김재준은 브룬너의 신학이 메첸의 신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신학이 정통주의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비록 말로 신정통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마리도 이야기하여서 김재준은 근본주의의 다섯 개 근본조항을 믿는 ‘자유주의자’이며, 그리스도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비롯한 성격 기록의 역사성을 믿는 ‘바르트주의자’였다. (193)
송창근의 경우도 비슷하다. “말씀에 대한 묵상”이라는 그의 글은 그의 바르트주의적인 계시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요 인격이신 유일한 말씀이시며,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계시는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객관적 역사적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믿음에 객관적 터가 되는 역사적 계시를 경(輕)히 여기는” 경건주의나 신비주의적 신앙에 대하여 여러번 경고를 하고 있다. 요컨대 송창근이 바르트주의에 찬동하고 있는 것은 단지 생명과 감격이 없어지고 교리주의화 율법주의화된 것처럼 보이는 조선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일 뿐, 바르트의 전 신학 체계를 받아들여 역사적으로 나타난 계시를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193-194)
3. 성경의 새로운 해석, 성경무오설 그리고 성경영감론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 정통신학에서는 성경의 완전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주장하고 김재준은 성경에도 오류가 있지만 그 사상에서 영감되었다고 하는 일종의 사상영감설을 주장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김재준의 온건한 면을 염두에 두고 그가 1930년대에 〈신학지남〉에 발표한 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성경오류론과 성경의 영감론에 대하여도 재고해 보아야 될 필요를 느낀다... 30년대의 글들 가운데서 성경의 영감이나 전통적인 교리를 반대하는 글은 발견되지 않는다. 박형룡은 이와 같이 김재준의 글 속에서 전통적인 교리를 반대하는 글들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장로교가 사상의 통제가 비교적 심하였기 때문에 김이 본색을 숨기고 비교리적 문제들에 대하여만 말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한 글들의 배후에는 성경무오의 부정과 자유주의라는 마각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김재준이 이 글들을 통하여 부정하려고 하였던 것은 성경의 영감이 아니라, 성경을 “지금 나에게 성신으로 말씀하시는 산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것보다 성경을 교리변증의 교과서 같이 여기고 간 데마다 교리 구성 자료만 찾아내려” 하는 이른바 ‘교리주의적 성경해석’을 부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94)
그 해석 방법론을 정리하자면, 1) 성경은 교리의 저장고가 아니라 살아 잇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와 접하였을 때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살아 있는 글이니 만큼 성경을 대할 때에도 성경 저자의 실존적 영적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 2) 그 성경저자의 실존적 영적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알기 위해서 당시의 사회를 연구한 글들을 인용한다... 3) 그러나 김재준의 의도는 그 저자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저자가 우리와 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을 우리의 삶 속에 좀더 친밀하게 적용시키려는 것이지, 결코 기존의 교리체계를 파괴하거나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보여진다. 최소한 1930년대의 김재준에게 있어서는 그러하다.... 이러한 김의 해석방법이 다른 보수적인 비평가들 특히 박형룡과 같은 사람에게는 성경영감을 반대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최소한 박형룡은 그의 《선평》에서 김재준을 파괴적인 성경비평가들과 구분없이 생각하였다... 박형룡을 비롯한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영감설과 성경해석방법론의 다양성을 구분하지 못하였다. 즉 성경의 한 가지 해석방법-문자적 해석-외에 다른 해석방법은 영감을 반대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성경이 교리들의 저장소라고 하는 구프린스턴적인 신학방법론과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다 보니 계시의 발전이라든가 구속사적 흐름이라든가 저자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어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해석이 기존의 교리와 반드시 일치하여야만 하였다. 욥기의 시적인 표현들이 영혼불멸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 욥기에 영혼불멸의 사상이 희미하다고 말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김재준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의 ‘앨마’ 해석이 기존의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이를 비판하였다. (196-197)
원래는 단지 해석방법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는 성경의 무오와 유오 그리고 성경의 축자영감과 사상영감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구프린스턴적인 신학의 방법론 성경의 해석법을 비판한다. 또한 정통주의의 성경관에 대하여는... 성경문자무오설이며 또한 기계적 영감설이라고까지 규정한다... 김재준은 정통주의자들의 성경의 문자적 교리적 해석은 성경문자무오설을, 다시 성경문자무오설은 성경의 기계적 영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성경해석은 성경의 과학적, 역사적 무오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는 바르트주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경의 사상영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7-198)
성경의 유기적 영감에 관하여는 김재준과 박형룡의 어떤 쪽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 편이 모두 성경의 ‘오류’라는 단어에 매달려서 서로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보수주의에서는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이 유기적 영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또한 ‘오류’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김재준도 역시 자신의 해석방법을 고수하기 위하여서는 성경의 과학적 역사적 ‘오류’는 양보되어져야 하고 이는 다시 사상영감으로밖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1930년대의 김재준은 성경의 오류나 해석=성경의 문자적 무오=기계적 영감 대 실존적 해석= 성경의 과학적 역사적 유오=그리스도 중심의 사상영감이라는 이분법을 설정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1930년대부터 성경의 유오와 사상영감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예로서 성경비평학자들의 글들을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을 들 수가 있다. 하지만 성경비평학자들의 글을 인용한다고 해서 그가 성경의 유오를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99)
웨스트민스터의 실바 교수는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 당시에 프린스턴을 중심한 보수주의 학자들이 성경의 영감과 무오의 교리를 고수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의 방법에 대하여 문을 열어두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의하면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19-20세기 서구 자유주의의 도전은 세 방향에서 왔는데 첫째는 창세기의 과학적 정확성이나 역사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과학과 진화론의 도전이며, 둘째는 성경의 고등비평, 그리고 세 번째는 복음서의 조화에 관한 문제이다. 실바는 구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의 전통은,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양보하더라도, 또한 어느 정도 성경의 고등비평을 인정하더라도, 또한 복음서의 조화 문제에서 역지 조화가 아닌 편집자의 의도를 인정하는 해석법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성경의 유기적 영감설과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오히려 “강요된 해석학적 의견일치는 무의미하며 더 나쁘게는 성경 권위를 파괴”한다고 하였다. (199-200)
박형룡은 그의 학위논문에서 프린스턴의 이와 같은 해석의 유동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논문에서 말한 바와 같은 문자적 해석을 포기하고 과학의 발견을 받아들이는 해석법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김재준 같은 이가 보기에 박형룡의 《선평》에 나타난 영감론을 기게적인 것이고 “성경문자설을 문자적으로 변증하기 위하여 애쓰신”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200-201)
실바 교수가 말한 두 번째 충돌점인 고등비평에 대하여는 박형룡은 한결 더 강한 대응을 보인다. 그는 100페이지가 넘는 《선평》에서의 고등비평에 관한 글 속에서 신구약의 고등비평들의 결과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이를 반대하고 비판하였다. 한 번도 그의 논문에서 과학적 발견을 수용하였던 것처럼 고등비평의 결과를 수용한 적이 없다. 구약에서의 비평은 성경의 초자연성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취급되어 전통적인 견해의 옹호에 주력하였다. 공관복음의 문제에서는 주로 이 세 복음의 기사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며 세 복음서가 동등하게 가신적(可信的)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고, 불일치가 있더라도 사소한 것뿐이라 하였다. (201)
박형룡은 그의 학위논문에서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유지하면서도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연과학의 발견들을 인정하고 이를 해석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그로부터 겨우 4년 뒤에 《선평》을 쓸 때에는 그와 같은 새로운 해석법을 수용할 여지가 거의 없는 엄격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이방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프린스턴과 침례교신학교에서 가지고 있던 유동적 해석의 가능성이 어떻게 해서 사라지게 되었을까?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박형룡이 비록 논문에서는 프린스턴과 남침례교신학교의 학풍에 따라서 과학의 발견과 성경의 무오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무오의 의미를 양보하고 새로운 해석법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노력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함의를 알지 못하고 단지 참고서적들을 인용하여 성경무오를 변정하려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 와서는 한국의 신자들과 교계의 반응과 수준을 고려하여 자신이 미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학설들을 다 소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두 이유가 복합되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1930년대의 한국에서는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한국 목사들 사이에서도, 또한 정통주의에서도 ‘자유주의’에서도 성경의 영감과 해석을 분리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누구보다도 박형룡 자신이 미국에 가기 전에 한국에서 가졌던 이런 사상이 미국의 4년 간의 공부를 통하여 완전히 개조되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201-202)
4.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
김재준의 신학을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이라고 규정한 대표적인 사람은 유동식이다... 한편 송길섭은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유형을 보수주의적 신학과 “개인구원 신앙 노선”의 연합과 그와 반대로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참여적 사회개혁 의지가 강한 민족구원 신앙”으로 대별된다고 하였다... 그 후 많은 한국 신학사상사와 교회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이들의 구분을 따라서,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개인구원적 보수주의와 사회참여적 진보주의로 나눈다. 김재준을 사회참여 신학의 태두로 보는 까닭은 물론 그의 60년대 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민족민주주의적 저항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그의 이와같은 말년의 사회참여의 신학은 그 뿌리를 1930년대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202-203)
해석자들이 김재준과 송창근의 신학을 사회참여적 진보주의라고 규정하는 근거는 어떤 것들인가? 대체로 두 가지의 증거를 들고 있다. 첫째는 그의 1930년대의 관심이 구약성서의 예언서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재준의 사회참여의 신학의 모태가 그의 예언서에 대한 비평적 연구에 있었다고 하는 점을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은 역시 유동식이다... 두 번째의 초기 김재준의 사회참여 신학의 표출은 그의 반선교사적 민족주의적 신학교육의 이념이다. 조선신학교의 설립취지서(1939)가 이를 잘 말해준다.
“초대에는 선교사가 주체이었고 반드시 신자가 개체(sic.)이었으나 시대는 점차로 전개되어 양자의 관계는 상호협조의 상태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반도의 신자인 우리가 교회사역의 주체가 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교역자들을 양성하는 긱돤인 신학교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손으로 경영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반선교사적 민족주의적 신학교육 이념이 60년대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때에 민족민주주의적 사회참여의 신학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3-204)
필자는 보수주의 신학을 개인구원적이라고 규정하고 이와 반대로 김재준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을 사회참여적 혹은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우선은 1930년대 이전의 보수주의 신학이 개인구원만을 중요시하고 사회참여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3ㆍ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또한 1930년대의 김재준이 보수주의자들 이상으로 특별히 사회참여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와 그의 동료 송창근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던 농촌사업이나 교육사업 등에 대하여 부정적인 언급을 많이 하였다. 이종성이 옳게 지적한대로 1930년대의 김재준은 “학자적이고 또 세상의 일과 현실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연구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이러던 그가 “60년대에 와서는 아주 강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으로 전환했다”는 ‘양극적인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60년대의 김재준의 모습과 1960년대의 ‘근본주의적’인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보수교단의 상(像)을 가지고, 1930년대의 김재준의 신학을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이라고 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형룡의 신학을 보수적 개인구원의 신학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204-205)
필자는 1930~1950년 초반까지의 초기 김재준과 그 이후의 반독재 투쟁을 하는 후기 rlaw2ㅐ준을 연결해 주는 끈으로서 초기의 예언서 연구와 반선교사적 신학교육 이념을 들고 있는 것에 의문을 갖는다... 김재준이 예언서 연구에 ‘몰두’한 것은 아니고 구약을 연구하다 보니 예언서와 시가서에 관심이 가지게 된 것이라고 본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것은 그의 역사인식이라든가 현실참여의식 때문은 아니고, 구약성경들 가운데 위에서 말한 부분들이 성경 속에서 그 성경 저자의 영적이며 ‘실존적’인 자기 표현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나 아모스의 연구에서 물론 그 시대의 불의한 정치적, 의식주의화된 종교적 상황이 묘사되고 있지만, 김재준이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예언자들의 그 시대를 보는 안목과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접속될 수 있었으며, 이것이 그 예언자들의 실존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어떻게 용기를 줄 수 있었는가 하는 점, 그리고 그것이 예언서 해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가 하는 점이다... 좀더 실존주의적인 저자의 상황에 대한 ‘동정적 통찰’을 가지고 신존주의적으로 접근한 연구는 바로 그의 시가서 연구들이다. (205-206)
김재준이 1930년대에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을 연구하였던 까닭은, 그 예언서가 기록된 암울했던 시대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이거나 이에 대하여 투쟁하기 위한 도전과 용기를 부여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예언자들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의식이 어떻게 그들의 예언서에 표출되었는가를 추적해 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가 1960년대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기독교의 현실참여에 대한 신학의 직접적 배경을 1930년대의 예언서 연구에서 찾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207)
초기의 김재준의 신학 속에서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을 찾기 힘들다고 말한 것은 송창근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송창근이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큰 이유는 〈신생명〉에 실린 그의 글 “사회문제에 대한 예수의 기여”에서 “나사렛 예수는 그 생장한 것이나, 교육 밧은 것을 보와도 일개 푸로레타리아, 일개 평면, 일개 노동자, 일개 무산자이다”라는 문장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글의 의도는 예수님이 민중운동의 지도자나 혹은 무정부주의자였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구세주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려 하였던 것이다... 〈신학지남〉에 발표하였던 그의 글 “기독교윤리문제”에서도 그는 새로운 사회윤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기독교윤리의 기초가 ‘산 신앙’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이었다... 송창근은 당시 조선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청년운동, 종교교육운동, 농촌운동, 사회사업운동 들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악마’의 유혹으로 여기었고, 민족운동을 “불같이 타오르는 민족적 적개심에 의한 지배욕 쟁패적 기분운동”으로 생각하였다. (207-208)
1930년대의 초기 김재준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믿어져 온 현실참여의 증거를 반선교사적 신학교육 이념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도 그리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1980년대의 반미감정을 1930년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1930년대 반외세 감정의 대상은 미국보다는 일본이어야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재준이 선교사들과 특별히 그들의 교육을 싫어하였던 까닭은 그들이 외국인이라서보다는 그들이 가르치는 신학이 그가 보기에 너무 틀에 박힌 교리주의적 정통주의였기 때문이다. (208)
김재준은 한국적 신학의 수립을 그 이념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세운 선교사들의 신학교육 이념을 반대하였던 것은 그들이 성경비판학을 가르치지 않음으로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따라서 진정한 경건을 저버리고 논쟁과 교권다툼에 빠지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인 것 같다. (209)
5.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자유주의’의 특징
1) 신앙의 정의와 교리주의에 대한 반대
정해진 교리에 지적인 동의를 하는 객관주의적인 신앙관을 부정하고, 실존적이며 주관적인 응답과 산 체험을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이며 영적인 관계가 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학문화하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그는 처음부터 상당히 비판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당시의 장로교회를 비판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신앙의 객관적인 교리체계의 지성적 동의에 그치게 한다고 생각되는 장로교회의 교리주의 때문이다. (209-210)
조선신학교 교육이념 중의 ‘가장 복음적인 신앙’이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신앙을 지성적 교리에 예속시킴으로써 형식주의와 독선에 빠지게 만드는 정통주의 신앙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211)
해방 후의 김재준은 자신을 신정통주의 신학운동과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신정통주의가 성경문자무오설과 객관적 교리주의를 부정하고 생명적인 성경계시에 의존할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는 ‘복음은 불변이나 신학은 변한다’고 한 브룬너의 말을 인용하여 신학과 교리는 시대에 따라서 “그 생각의 표현방법과 그 생각하는 양식과 용어가” 변천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바르트의 사상 중에서, 객관적인 교리나 성경의 문자를 믿는 것보다 주관적인 고백이어야 한다는 점만을 받아들인 것이다. (213-214)
2) 복음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학문의 자유
그의 ‘복음의 자유’ 개념은 곧바로 ‘양심의 자유’ 개념과 통한다. 신앙의 자리는 김재준에게서는 ‘양심’이다. 양심은 신앙과 도덕의 활동을 맡은 기관이요 따라서 “인간의 영의 지성소”이다. 그러므로 김을 심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죽은 교리 교조를 가지고 산 인격의 지성소에서 불붙는 거룩한 생명의 불꽃인 양심을 짓밟는” 행위인 것이다.
‘양심의 자유’는 곧바로 ‘학문의 자유’와 연결된다... 김재준에 의하면, 학적 양심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신학이나 교리만이 아니라 성경도 포함된다. (214-215)
3) 성경비판의 수용
그가 고등비평적 성경해석과 접하게 된 것은 그가 일본의 청산학원과 미국의 웨스턴신학교에 유학할 때이다... 성경의 고등비평은 기독교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 주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김재준은 말한다. 즉 성경이 평면적으로 이해되어 교리의 저장고가 됨으로 신학자들의 추상적인 교리옹호에 사용되기보다, 성경 속의 사건이나 인물이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 앞에 뚜렷이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진정한 모습이 그림같이 재생”될 수 있다고 하였다... 김재준은 성서비판이 성경의 진의를 더 잘 드러내 주면서 복음 진리에는 하등의 손상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216-217)
4) 양심과 도덕
김재준은 신앙의 자리를 ‘양심’이라고 함으로써 그의 신앙개념 속에 도덕의 요소가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1930년대의 그는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 하고 신앙을 영의 활동으로 보면서도, 그 생명 안에 도덕도 포함시켜서 이 둘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18)
해방 후의 조선신학교의 문제와 자신의 신신학문제 때문에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그가 본 신앙과 도덕이 없는 사람,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은 바로 교권을 이용하여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는 자신의 재판관들이었다. “그(김재준)가 이단이 아닌 줄 알면서도 순진한 교인들을 꼬여 자기 당파에 더 많이 붙이기 위하여, 또는 자기의 그에 대한 증오감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이단’ ‘신신학’ 운운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용서 못 받을 ‘성신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219)
건국 이후에는 그의 이 신앙과 도덕의 문제가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참여’에 관한 논의로 발전된다... 역사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이유는 “이것이 복음의 씨를 받을 소재”요 토양이기 때문이고, 그 목적은 결국 인격에 복음의 씨를 심는 것이다. (219)
김재준이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와 역사의 문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준 신학적, 신앙적 기초가 바로 이 “도덕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복음을 믿어서 생명이 소생하는 영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생명인 그 복음은 동시에 도덕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도덕적 생명의 자리는 바로 양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앙을 도덕적 생명을 소유하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단순한 신비주의나 도피주의로부터 벗어나서 역사의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실존적으로 결단하는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9)
1930년대부터 사회참여의 의식을 가지고 신학을 해온 것이 아니라, 도덕적 생명으로서의 신앙이 1960년대 이후의 군사정권과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불의의 상황과 만날 때 김재준은 자유를 위하여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9-220)
또한 그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도덕을 단순한 율법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 예수를 믿은 후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칼빈주의의 통상적인 율법관, 그래서 신율법주의로 빠지기 쉬운 장로교회의 모습을 비판하면서 도덕은 반드시 영적이며 생명력이 있는 신앙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였다. (220)
이런 식으로 윤리를 신앙과 일치시킬 때에는 구체적인 윤리규범보다는 생명있는 신앙을 강조하는 상황윤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요컨대 김재준은 신앙의 핵심을 도덕적 생명이라고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앙이 도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도덕의 기초가 생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220)
송창근도 역시 ‘종교적 윤리’ 혹은 ‘윤리적 종교’를 말하는데 이것은 김재준의 ‘도덕적 생명’과 같은 뜻이다. 한편으로 종교는 반드시 윤리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 윤리라고 하는 것이 규범을 가진 구체적인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내부에 만들어주신 새로운 의지에서 그리고 구원의 감격에서 나오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송창근은 윤리보다 감격과 생명을 더 강조하고 김재준은 비교적 도덕을 많이 이야기한다. (221)
결론
김재준이나 송창근의 경우에는 신앙에서의 주관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객관적 기반인 역사적 사실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초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르트주의자들인 것이다. (222)
그들이 세운 조선신학교는 곧 서구의 그야말로 자유주의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창구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김재준이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을 없다고 하겠습니까”라는 태도를 취한 것의 의도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해석의 유동성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가 분명히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구속의 사상에서는 영감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과 그 신앙적 의의를 분리시키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 성경의 비평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고 장려함으로써 그 비평적 접근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전제들까지도 쉽사리 전파되게 되었다. 성경의 교리적인 사용을 금하고 실존적인 접근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들의 후학들은 매우 급속히 역사적인 기독교의 교리로부터 해방되었다. 윤리의 기반이 도덕적 생명에 기초한 ‘자유’이다 보니 규범윤리의 근거는 없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윤리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된 목표로 하는 군사독재 시절에는 분명 민족의 역사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미 모든 규율로부터 해방을 부르짖는 후기 근대사회에 와서는 어떠한 윤리적 의의를 지니게 될지 의문이 든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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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한국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특성과 한계 : 종교사회학적 접근 – 전명수 (0) | 2023.11.12 |
박용희(朴容羲)의 신앙과 사역에 대한 연구 – 이선호 (0) | 2023.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