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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3ㆍ1운동 100주년에 ‘북간도’로 향한 이유 –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역사’ - 반태경 CBS 피디,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감독

by [수호천사]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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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에 북간도로 향한 이유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역사’ - 반태경 CBS 피디,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감독

 

프롤로그

 

누군가의 삶은 곧 역사다. 역사는 시대를 살아갔던 누군가의 흔적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리 쉽지만은 않다. 특히 역사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재구성하는 작업은 이중고를 겪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왜 이리 학술적으로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았냐고 비판하고, 다른 누군가는 왜 이리 쉽게 풀지 않았냐고 질책하기 때문이다. (315-316)

 

왜 북간도인가

 

북간도(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에서 펼쳐졌던 기독교인의 항일독립운동... 31운동 전후 펼쳐진 만세시위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용정 313 만세시위의 중심에 기독교/대종교 등 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영혼 구원을 통해 내세(來世)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데, 100여 년 전 북간도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십자가와 총을 함께 들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317)

 

북간도와 기독교

 

사실 간도(間島), 북간도라는 지역의 특성을 명쾌히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과 여전히 간도는 우리 땅이다라고 주장하는 일각의 흐름 속에서, ‘간도는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시작한다면 시작부터 늪에 빠질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본 작품은 1800년대 후반 김약연(1868~1942)을 위시한 일군의 무리들이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로 집단 이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317-318)

 

함경북도 일대의 실학자, 무관 출신인 집단 이주자들의 지도자들은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두만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기독교 역사학자 이덕주(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초창기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경제적 빈곤의 원인이 정치적인 배경, 즉 일제의 침략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일종의 계획 이민을 수행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 분석처럼 이주자들은 수백만 평의 땅을 구입해 마을과 학교를 세우고 민족공동체를 꾸려갔다. 농사의 소득 일부도 자발적으로 교육과 독립운동(독립군) 후원에 쓸 정도였다고 한다. (318-319)

 

당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던 이동휘(1873~1935)가 한일 합방 전후 북간도 일대를 방문해 기독교 전도와 교육활동을 진행했고, 이 영향으로 김약연 등 명동촌 지도자들이 집단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명동촌 지도자들은 명동학교 등을 세워 민족교육과 기독교 신앙교육을 실시했고, 여기에서 배출된 많은 인물들이 이후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남한의 민주화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319)

 

북간도의 기독교가 항일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에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1900년대 초반 효율적인 기독교 선교를 위해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단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교파가 선교지 분할협정(Commity Agreements)을 진행했고, 함경남북도 및 북간도 일대 선교는 캐나다 장로회에서 관할한 것이다. 물론 선교사 개인 별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경우도 많았지만, 한일 병합 이후 대부분의 교파 / 선교부가 일제 식민지 당국에 적극적으로 맞서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319)

 

캐나다 선교부는 북간도 일대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던 기독교인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북간도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던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 / 민산해), 의료선교사로 제동병원과 보신ㆍ협신학교를 세워 독립과 애국계몽운동에 힘쓴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rson / 구례선)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간도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김약연이 캐나다 장로회에 보낸 청원서 등이 다큐멘터리에 소개되기도 한다. (319)

 

신앙을 실천한 사람들

 

19192, 음력으로 무오년(戊午年)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조소앙이 작성했고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선언은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김약연 등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들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321)

 

그리고 국내 31운동 준비와 함께 북간도에서도 만세시위가 준비되기 시작했고, 313일 용정 서전평야에서 3만여 명이 모인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그 자리에서 북간도 일대의 기독교 등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17명이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했는데, 17명 중 10명 이상이 기독교인들이었다. 또한 당시 기독교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구춘선(1857~1944, 이후 대한국민회 회장 역임)이 사전 격문을 발표하는 등 기독교가 중심이 된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만세시위라고 평가된다. (321)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포고’(布告)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이 ‘313독립선언포고문에는 일제에 항거해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는 함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위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중국 관헌들의 발포로 십수명의 사망자가 생길 정도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본격적인 실천’, 즉 무장투쟁으로 접어들게 된다. 무기 구입을 위해 일제가 만주 철도 건설자금으로 이송하던 현재 화폐 가치 수백억 원의 현금을 탈취한 ‘15만원 탈취 사건및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에서 펼쳐진다. (321)

 

그 때(항일무장투쟁 시기에) 교회라는 곳은 독립군들이 오는 곳이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독립군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여러 가지 편의, 숙소를 배정하며 아낌없이 지원했다.” 다큐멘터리에서 최초로 공개된 북간도 2세대 지도자 문재린(1869~1985, 문익환-동환 목사의 아버지) 목사의 육성이다. (322)

 

북간도의 후예들

 

북간도의 한인들은 미래를 위한 민족교육을 계속해 왔다. 그 상징이었던 명동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20년대 중반 폐교됐으나, 용정의 은진학교 / 명신여학교 등에서 교육은 이어져 왔고 새로운 인물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문동환, 장하린(종로서적 설립자), 강원용(경동교회 목사), 안병무(민중신학자) 등이 그들이다. 은진학교 교목으로 이들을 가르치던 김재준(1901~1987) 목사는 해방 이후 남한에 내려와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교단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기장으로 불리던 이들은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인 기독교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322-323)

 

이들은 국공내전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남한으로 떠밀려 온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문재린 목사의 경우 만주 및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 한 위기도 겪었다고 증언할 정도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전쟁 이후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어떻게 민주화와 통일을 외쳤을까 하는 점이 참 궁금했었다. (323)

 

김상근 목사의 회고... “문익환 목사는 당신도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윤동주 같은 그런 깨끗한 시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괴로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동주에 대한 그리움, 윤동주가 지향했던 독립을 한쪽 가슴에 안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런데 친구였던 장준하(1918~1975)의 죽음을 접하고, ‘준하야, 네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이어 가겠다라고 결단을 한 후 투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324)

 

북간도의 후예들

 

신앙신념실천하려 헌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교를 넘어 많은 국민들에게 위로와 도전이 되기만 바랄 뿐이다. (325)

 

문동환 목사...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질 거야.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내가 영웅적으로 산 게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지. 역사가 우리를 만들어줘.”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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