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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인물이야기] 해외 이산가족의 아버지, 어머니 전충림, 전순영

by [수호천사]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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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해외 이산가족의 아버지, 어머니 전충림, 전순영

 

출처 : 월간말, 2007.8, 212-217

정지영 기자

 

해외 이산가족의 아버지, 어머니라 불리는 전충림, 전순영 부부. 이들이 맺어준 이산가족이 벌써 1만여 명, 딸린 가족까지 합치면 수만 명을 헤아린다. 이들은 어떻게 민간 차원의 이산가족찾기를 시작하게 됐을까. 그 이야기는 전충림이 평양을 방문해 누나 전일림을 만나고, 그로써 이 옷감이 전순영의 손에 건네진 1979년에 시작된다.

 

# 용정에서 만난 사람들

 

고 전충림은 1923, 전순영은 1927년 중국 용정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삶의 배경은 당시 용정지역의 특수성과 연관돼 있다. 일제 강점기 용정에는 많은 조선 기독교인들이 모여 살았고, 그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가 많았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의 선구자들 중 용정 출신이 많은 이유다.

 

문재린 목사와 그의 아들 문익환, 문동환 형제가 용정에서 살았다. 문익환의 여동생 문선희는 전순영과 중학교 시절 책상을 같이 쓰던 짝궁이었다. 그래서 문동환 목사는 아직도 그를 만나면 아이 때처럼 순영아하고 부른다.

 

문익환 목사의 스승이자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재준 목사도 용정에 있었다. 전순영의 13살 터울인 오빠 김선문이 김 목사와 함께 교원 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 전순영의 부모는 캐나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우유 목장을 하며 부유한 생활을 했고, 당시 드물게 2층집에 살았다. 그래서 이 집 2층에 또래들이 모여 장기도 두고 모임도 하곤 했다.

 

강원룡 목사도 김재준 목사의 제자인데, 늦은 나이에 용정에 공부를 하러 왔다. 김명주는 전순영의 학교 선생이었다. 당시 강 목사는 용광동에 집을 빌려 교회를 만들어 전도했고, 이 일을 함게 하며 강 목사와 김명주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용정의 분위기 속에서 전충림, 전순영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전순영의 외할아버지인 배창근 선생은 일제시대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전순영의 부모와 친척들은 충청북도 청주를 떠나 망명하듯 용정으로 갔다. 우유목장을 하며 화목했던 시절은 짧았고 전순영의 나이 다섯 살에 어머니가 아홉 살에 아버지가 생을 달리하면서 극심한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한편 전충림의 선친 전택문 목사는 문천에서 살다가 캐나다 선교사를 따라서 일가친척들을 이끌고 용정으로 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1947년 이들 가족은 목단강을 거쳐 국경지역인 도문으로 나와 잠깐 살게 되었고, 부모를 잃고 오빠를 따라 도문에 온 전순영과 만나게 되었다. 가족 간의 친분도 깊었고, 전일림이 용정시절 전순영의 스승이었던 까닭에 재회의 기쁨은 컸다. 이곳에서 전충림, 전순영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하던 때라 이들 가족은 만주 도문에서 나와 청진을 거쳐 서호진에 살았다. 이후 전충림, 전순영 부부가 먼저 남으로 내려왔고, 그의 부모는 1.4 후퇴 후에 교인들과 함께 내려왔다. 해방 후이고 아직 전쟁 전이었던 이때, 이들 가족은 북에 남은 전일림과 30여 년의 긴 이별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서울에 살던 전순영의 외삼촌 배민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금융조합연합회(현 농협) 회장으로 취임했다. 전충림은 그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이후에 조선일보 업무국장으로 일하다가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가 1962년이다.

 

미국과 달리 캐나다에는 아직 한인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다. 한국인이라곤 없는 곳에서 이들은, 용정시절 인연을 맺은 캐나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편의점 맥스 밀크(Max Milk)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65년 무렵부터 대규모 이민행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브라질에 이민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다시 캐나다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전충림은 토론토에서 한인연합교회를 제일 먼저 시작했는데, 이곳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캐나다에 사는 동포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되었다.

 

1973년부터 뉴코리아타임스’(The New Korea Times)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해외에 흩어진 동포들에게 조국의 소식을 전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 구속과 석방운동 등을 계기로 북미주, 일본 등 해외 동포들 사이에서 민주화운동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뉴코리아타임스의 창간도 당시의 분위기와 궤를 같이한다. 70년대부터 미주지역 동포들은 해외한민보’(고 서정균 발행), ‘신한민보’(김운하 발행), 그리고 뉴코리아타임스를 통해 조국의 소식들을 접했다고 한다.

 

전순영은 직장에서 일하며 짬짬이 돕다가 나중에는 신문제작에 전념하게 되어 부부가 함께 신문에 매달리게 되었다.

 

같이 일한 정학필 씨는 직장 일을 하면서,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신문제작을 도왔고 같이 밤을 새기도 했어요. 남편이 떠난 뒤에도 저를 도와 신문제작에 참여했으며 지금까지 가족찾기 운동에 헌신하고 있어요. 지난 세월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싶어요. 몬트리올 올림픽 때도 차로 5시간 거리를 가서 보고 와서 밤새 신문 만들고, 또 갔다 오고 그렇게 했어요. 그 때는 젊어서 힘든 가운데도 재미있게 했어요.”

 

# 32년 만에 만난 누나 전일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참가한 북측 대표들을 통해 전충림 누나 전일림의 편지와 사진을 받게 된다. 스톡홀름에서 전일림과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어수선한 시설인지라 전순영은 전충림에게 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까지 하면서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79, 전충림은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해외언론인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그는 캐나다 한인연합교회 장로였기 때문에 방북에 대해 교회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김재준 목사는 누군가가 먼저 가야 한다. 그래야 문이 열리지 않겠는가.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히 가라. 내 나라 내 고향이 아닌가!”라고 격려했다.

 

423. 평양공항에 내린 전충림은 누나가 공항 휴게실에 와 있다는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그곳으로 달려가 한 노파를 발견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누나임을 느낀 그는 달려가 얼싸안고 오열한다. 이때 낯선 청년이 옆에서 자신을 붙들고 통곡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전일림의 아들 김창근이었다.

 

젊은 시절 동경에서 유학을 할 정도로 엘리트 신여성이던 누나를 기억하는 전충림은, 시골 할머니가 된 누나의 손가락에 감자알만한 매듭이 진 것을 본다. 월남자 가족이라 고생시켰다고 막 따져 묻자 안내원이, 역시 거칠게 매듭이 진 자기 손을 보여주며 누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전쟁 후 결사적으로 일했습니다. 40세 이상인 세대는 모두들 이런 역사의 흔적은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처럼 자신을 키우고 가르쳤던 누나를 32년 만에 만난 전충림. 그는 백산리 협동농장 누나의 집까지 함께 가서 하룻밤을 보낸다. 전일림의 남편은 아내와의 재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서울에서 새장가를 들었으나, 전충림은 차마 그가 결혼해서 살아있다는 말을 누나에게 전할 수 없었다.

 

이 때 어머니의 임종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누나가 전충림에게 전한 것이 바로 그 옷감, 흰색 황나 치마저고리이다.

 

전충림은 처음 평양을 갈 때만 해도 이산가족찾기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많은 월남자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피란길은 강을 건너고 폭격을 피해 가는 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남편이 혈혈단신 남하했다. 내려온 남편들은 대체로 재혼해서 살고 있는 반면, 북의 아내들은 남겨진 자식을 키우며 혼자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이를 본 전충림은 차마 가슴이 아파서 남편들은 새장가 들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때 내가 지금 젊은데, 빨갱이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이산가족찾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캐나다에 돌아온 그는 선우학원 박사, 김재준 목사, 이승만 목사 등과 상의해서 해외이산가족찾기회를 꾸린다. 19801, 5명의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해 3명이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북한을 방문하면서 첫 번째 상봉사업이 이뤄졌다.

 

전충림은 1995417일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15년간 이 일을 했고, 그가 떠난 후 아내인 전순영이 뒤를 이어 27년째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 방문 후 토론토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가까운 교회 지인들이 공산당원이나 된 듯 취급하고 이들 부부를 외면했다. 반면 가깝지 않았던 교회 신자들과 동포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받기도 했다.

 

# 40년을 건너온 명함 한 장

 

1951년 부산, 피란민 행렬 속에서 한 식당에 30대 전후의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충림, 전순영 부부가 사연을 묻자 “5살 난 아들 하나를 원산 부두에 놓고 혼자 배 타고 왔다. 지옥과 같은 혼란 속에서 사람들에 밀려 그 애 손을 놓쳤다. 부두 쪽에서 아이가 엄마, 엄마하고 부르는 데 물에 뛰어내리려 했지만 사람들이 붙들어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 부부는 이 여인에게 고향을 찾아갈 정도의 여비와 함께 명함을 건넸다.

 

40여년이 흐른 1989년의 어느 날, 60대의 노부인이 전충림, 전순영을 방문했다. 바로 그때 부산의 식당에서 만난 윤성녀다. 부산에서 식모살이부터 시작해 갖은 고생을 하다 결혼을 했다. 남편이 퇴직한 후 캐나다나 미국 교민들은 평양 방문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밴쿠버로 이민을 왔다.

 

이들 부부를 다시 찾은 노인이 그때 그 명함을 내놓았다. 할머니는 호텔 청소부로 일하며 아끼고 아껴 평양 갈 여비를 마련했고, 40년 전 손을 놓쳤던 아들을 다시 만났다. 이 노인이 돌아올 때 평양 공항에서 주저앉아 통곡하며 내년에 또 올게, 내년에 또 올게하는 바람에 출발이 10분이나 지체되고, 결국 직원들이 할머니를 들어서 차에 태웠다고 한다.

 

이처럼 이산가족 하나하나의 가슴에는 아프게 파묻어 놓은 사연들이 있다. 함흥 출신인 김재선은 흥남부두에서 피란길에 오르다 아내와 손을 놓쳤다. ‘성종 어머니하고 외치자 아내는 성종 아버지하며 금가락지를 옷고름에 묶어 던졌다. 급하면 쓰라고 남편에게 챙겨준 금가락지인 것이다. 김재선은 아내의 그 마음을 잊지 못해 40년간 홀로 생을 보냈고, 북에 둔 자녀를 대신해 고아 두 명을 입적해 키웠다고 한다.

 

전충림은 한겨레신문사가 펴낸 세월의 언덕 위에서라는 저서에 내가 지금까지 겪은 이산가족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회의 기쁨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남과 북의 하늘을 막막한 가슴으로 쳐다보며 절망의 한숨 쉬는 이들이 훨씬 많으며, 이들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하루하루를 늙어가고 있다고 적었다.

 

세월을 무색케 하는 사연은 셀 수 없이 많다. 밥상에 앉아 있다가 친구가 나오라는 말에 밥 먹다 말고 뛰어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수십 년 동안 아들의 책상과 밥상, 밥그릇, 수저를 치우지 않은 노부부.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려고 떠놓은 스웨터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전해진 사연. 신혼생활을 딱 23일 해보고 헤어진 부부, 그러나 평생 남편을 기다린 아내.

 

젊은 시절 헤어진 부부가 상봉 때나 편지 왕래 때 꽃다운 시절의 심정에 젖어드는 모습을 자주 지켜본 전순영은 마음은 나이가 먹지 못한 거에요라고 말한다.

 

북에 가족이 있음을 쉬쉬하고 찾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핏줄이 아닌 사람을 찾는 경우도 있다.

 

서울 출신의 김태식. 사회주의자인 어머니가 끌려가고 아버지가 도피한 후 거지신세가 되었다. 금시계를 훔치려던 그를 그 시계 주인이었던 박연호가 거두어 아들로 키웠다. 박연호는 늙은 어머니, 아내, 자식을 두고 남으로 피란 온 사람이다. 북에 남긴 아들의 이름을 붙여 김태식을 박창인으로 호적에 올렸다. 박연호 별세 이후 공개된 유언장에는 너에게 전재산을 남긴다. 너는 이제 김태식이 되어야 한다.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 북의 창인이와 형제가 되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태식은 은인을 위해 북의 가족들을 찾기 시작한다. 핏줄이 아닌 그가 박연호 가족을 찾는다는 것이 납득이 안돼서 여러 차례 탄원서를 낸 끝에야 간신히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박창인은 그를 붙들고 눈물만 흘리며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고아인 내가 북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만남에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 북의 소식을 들고 서울로 찾아가면, 간첩을 몰아내듯 호통 치며 쫓아내는 경우도 많았다. 40년 수절한 북의 아내를 만나고 돌아조자, 미국의 재혼한 아내와 결별하게 된 경우도 있다. 전충림은 가끔 전순영에게 우리가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이산가족을 만드는 것 아닌가하고 말하기도 했다. 한 가족의 만남이 다른 한 가족의 헤어짐을 의미하는 분단의 비극을 의미한 것이다.

 

아예 북에 눌러앉은 사람도 2명이나 된다. 1987년 유영식은 파라과이 의사였다. 그는 전충림을 찾아와 북에 영주할 결심을 밝혔다. 비행기표도 편도로만 사겠다고 우겼다. 전충림은 북에서 강제 억류했다는 소문이 돌 거다부터 시작해서 왜 그렇게 뻔뻔하냐? 북이 재건하는데 당신이 벽돌 한 장이라도 날랐냐?”는 심한 말까지 하며 말렸고, 비행기표도 왕복으로 끊게 했다. 북의 해외동포위원회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쓰지 않았다.

 

전순영은 이산가족찾기회가 활동한 30여년 세월의 켜켜이 새겨진 사연들에 대해 이런 일들이,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만이 가진 비극입니다. 눈물 없이는 얘기할 수가 없어요. 정말 그 울음소리가 슬퍼서 우는 건지 너무나 기가 막혀서 우는 건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만나면 또 헤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헤어지는 아픔이 더 큽니다. 그나마 해외에 있는 사람들은 북과 편지왕래, 소포왕래도 되고 그런 혜택을 받는 거지요라고 얘기한다.

 

# “지금 때를 놓치면 큰 한을 품게 된다”

 

남편이 떠난 지 12, 전순영은 홀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남편이 남겨 준 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 찾을 사람은 다 찾았기 때문에 요즘은, 엄혹했던 시절엔 북에 가족이 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로 찾아온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의 흔적, 부모가 남긴 자녀라도 찾아보겠다는 때늦은 발걸음이다. 미국에서 전화로 신청해도 되는데 굳이 토론토까지 직접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에는, 쉽게 찾아 나설 수 없었던 시절의 그림자가 아직도 드리워져 있다.

 

전순영은 우리 같은 사람이 고향이 없다. 용정 같기도 하고, 도문 같기도 하고, 북에도 있었고 서울에도 있었다고 말한다. 한편 북도 내 조국이요, 남도 내 조국이요, 나는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이산가족을 위하여 양쪽을 다 생각한다. 해외에서 찾은 거니까 가능했다. 북에서 수십 년간 이산가족 찾기회 일에 많은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부부를 보면 누구나 특별한 부부라고 했다. 평생 같은 일을 하면서도 불화 한 번 겪지 않고 사이가 다정했기 때문이다. 전충림은 평양에 가도 자기 할 말을 다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전순영이 중간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 그래서 북의 인사가 다음부터는 혼자 보내시지 말고, 꼭 두분 같이 오시라고 했을 정도다. 이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전순영은 전충림이, 전충림은 전순영이 되었다. 남편이 떠나고 이제 80줄에 들어선 전순영은 삶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딸과 사위가 두 사람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전순영은 20058.15 행사를 맞아 서울을 방문했다. 이산가족찾기회를 하면서 서울 입국이 금지된 해외인사명단에 들었던 그가, 2005년 대규모 해외대표단을 꾸린 역사적인 계기로 서울땅을 밟은 것이다. 감격한 그는 먼저 떠난 남편의 빈자리를 그리워했다. 40년만에 찾아간 서울 필동 옛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서울방문에 대해 그는 꿈과 같이 가서 꿈과 같이 헤어지고 왔습니다라고 돌이켰다.

 

과거에 이들 부부는 주변의 냉대와 외면을 감수해야 했다.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캐나다로 이들을 찾아온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전충림을 만나면 한국에 못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그냥 돌아서는 일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산가족찾기회를 통해 가족을 만난 1만 여명의 이산가족들은 이들을 아버지, 어머니로 여긴다. 첫 평양 방문이후 교회에 폐를 끼칠까봐 장로직을 내놓았던 전충림이지만, 아직까지 장로님이라고 불린다.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그를 노벨평화상감이라고 말한다. 이런 변화의 기점이 20006.15 남북공동선언이었다.

 

우리는 6.15 공동선언의 힘을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지만, 전순영은 2000년 이후 폭발적인 변화를 하루하루 몸소 느끼고 있다. 그는 이 일을 죽는 날까지 하다 생을 마치리라는 결심으로 오늘을 산다.

 

과거에 전충림은 때가 오면 만나겠지요라고 말하는 이산가족들에게 지금 때를 놓치면 큰 한을 품게 된다고 말하곤 했다. 이들 부부의 삶은 통일도 때가 되면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때를 놓치면 큰 한으로 남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헤어진 가족 누군가는 고향을, 가족을 그리며 생의 마지막 숨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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