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미주 통일운동의 선각자 선우학원 박사] 구순 맞은 미주통일운동의 선각자 선우학원 박사

by [수호천사] 2023. 11. 12.
728x90

[미주 통일운동의 선각자 선우학원 박사] 구순 맞은 미주통일운동의 선각자 선우학원 박사

- 민주ㆍ통일을 향한 반세기, 북미대화에도 큰 기여

 

출처 : 민족21, 2008.3, 102-107

김현정 - 통일맞이나성포럼 전 대표ㆍ〈민족21〉 미주 지사장

 

선우학원 박사는 청년시절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후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반독재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으로 이어지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특히 그는 냉전시대에 재미동포와 북녘 기독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민간통일운동의 물꼬를 튼 통일운동의 기수였다. 올해 구순을 맞아 통일운동 후배들의 축하상을 받은 선우학원 박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개한다. (102)

 

선우학원 박사와 함께 수십 년 동안 통일운동의 길을 걸어논 고 전충림 선생의 부인 전순영 여사... (102)

 

# 약관에 미국 유학, 25세에 워싱턴 주립대 교수

 

선우학원 박사는 191822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한 이듬해인 1919,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선우 박사의 아버지는 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희생되고 만다. 어린 선우학원은 이후 10대에 어머니를 통해 접한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며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기독교 정신은 선우 박사의 일생을 지배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후 선우학원은 18세에 일본을 거쳐 20세가 되던 1938년 미국으로 유학을 건너오게 된다.

 

청년 시절 선우 박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심, 김재준 목사를 통한 기독교 신앙, 일본 유학 당시 군국주의를 반대하며 인민운동을 펼치던 기독교 사회주의자 카타와 도요이코 목사, 세 사람을 꼽는다.

 

미국으로 유학을 온 약관의 선우학원은 로스앤젤레스 근교 파사디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4년 후인 1941년부터 캘리포니아 버클리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강사로 일을 한다. 이후 시애틀 소재 워싱턴 주립대학으로 옮겨 이 대학에 최초로 코리아학과(Department of Korea Studies)를 설치(1943)하고 1949년까지 교수로 재직한다. 이후 1949년 가을 체코 프라하의 국립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그 대학 최초의 코리안 박사학위 취득자가 된다.

 

일제말 대동아전쟁, 해방, 그리고 625 전쟁을 거치는 조선 역사의 격랑은 머나먼 미국 땅에 있는 선우학원을 비켜가지 않는다.

 

1945년 일제가 항복하기 전, 선우학원은 미군에 와서 근무하라는 강제성 통보를 받는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시 미군은 일본과의 전쟁에 필요한 정보와 한반도의 진군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미국에 살던 교민이나 유학생들을 선정하여 한반도 정보나 일본군 동태 등을 파악하는 일을 맡겼다. 20명의 동ㅍ들이 동원되어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OSS의 보조원으로 근무했다. 이 근무경력 덕택에 당시 동양인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선우학원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주립대학 시절 한인교회에서 만난 한인 2세 신헬렌 소니아와 1943년 결혼한다.

 

체코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19506월 초, 당시 코리아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동구권 체코에서의 유학 때문인지, 선우학원은 돌아오자마자 이북과 연결된 인물이 아닌가라는 의심 속에 미연방 수사관의 집중조사를 받기도 했다.

 

1951년 미국 학위 취득을 위해 스탠포드에서 박사 후 프로그램 연구활동 중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신문기자로 3년간 활동하기도 하고,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함께 식품점을 운영하기도 하던 중 1960419가 터지고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선우학원은 귀국을 결심한다. 서울의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코리아헤럴드에서 언론활동을 하다가 196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963년 미국 미주리주 센트럴 감리교대학교에 정치학 교수로 취임하여 1989년 은퇴하고 명예교수로 남게 될 때까지 26년간 정교수로 재직한다. 그 외에도 뉴욕 시립대학 객원교수, 은퇴후 어바인 주립대학에서 한국역사를 강의하다가 현재는 LA에서 부인 소니아 여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어떤 계기로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겨우 돌을 넘겼을 무렵 31운동 당시 일제에게 아버지를 잃은 어린 선우학원은 철없는 친구들의 놀림을 받고서 어머니께 장에 가서 아버지를 사달라고 조른다. 어머니는 너도 이제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지금부터 하는 말을 새겨듣고 절대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시며, 31운동 당시 민중들이 흔들었던 태극기를 장롱 깊은 곳에서 꺼내 보여 주신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바로 우리 조선 민족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라며 너도 그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신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1938년 일본에서 헤어진 어머니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그 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가 아들 소식을 듣기 위해 서울과 평양을 가시며 친지들을 찾아다니셨다고 한다. 그후 분단 초기 서울에 왔다가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38선을 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훗날 알게 되었고 선우학원 박사는 어머니와 헤어진 지 42년만인 1980년 평양에 있던 아버지 묘소에 합장된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민족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선우학원 박사는 자신이 통일운동에 몸담게 된 계기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계기는 김대중 납치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인권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바뀌었고, 그게 결국 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중에, 왜 민주화운동이 잘 되지 않는가?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북의 분단문제, 즉 통일이 없이는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세운다. 그때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반미운동의 깃발이 처음 오르게됐다. 광주항쟁과 함께 일어난 미국에 대한 자각은 선우학원과 그의 동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미국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통일운동을 앞으로 반미운동과 함께 전개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러한 선우학원의 주장은 당시 미주 지역 민주화운동 진영 안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어떤 이는 통일운동을 주장하면 민주화에 방해가 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선우학원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이 함께 가야 된다는 주장을 펴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 “통일을 위해서는 북과 대화부터 해야 한다”

 

1973, 선우학원은 뉴욕 유엔 플라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미국 땅에서 사상 처음으로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한다. 큰 며느리인 브렌다가 만든 인공기가 태극기와 함께 휘날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동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친북, 빨갱이로 몰리니 아무도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LA에서는 민주화 우선을 주장하는 계열이 심하게 반대를 했다.

 

1981년 워싱턴 DC에서 처음으로 통일을 위한 심포지엄이 열린다. 그러나 여전히 골은 깊었다. 민주화를 앞세우는 운동가들은 반대하며 불참하였고, 생각을 같이 하는 이들 10여 명만 모여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논의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싹튼 통일운동체의 단초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그런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었다. 선우 박사의 주장은 개별적인 주장이었을 뿐 아무런 조직도 후원도 없다가 1981년부터 조직적인 통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의 토론은 통일은 북과 하는 것니 북과 대화를 하자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또 이를 위해 북측과 접촉을 시도해 대화를 시작하자고 했다. 북과의 연락을 맡은 이가 선우 박사였다. 그가 북에 연락했더니, 북에서는 오케이, 대화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해외 기독교인과 북의 기독교인의 대화를 하자고 제의했더니 북으로부터 너무나도 흔쾌히 하겠다는 반응이 와서 깜짝 놀랐다. 곧 준비를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19811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1회 북과 해외 기독자 간의 대화가 열렸다. 북에서는 많은 인원이 참석했고 독일과 미국에서도 기독자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북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누가 선뜻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기독자간의 대화이기 때문에 목사가 가야 하는데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날까 무서워서 참가를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인 강위조 목사에게 연락을 했고 다행히 그가 가겠다고 나섰다.

 

당시 비엔나에 갔던 사람들은 강위조 목사를 포함한 총 17명이었다. 모두들 통일운동에는 문외한이었으나 북과 대화한다는 호기심으로 용기를 내서 참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북에서는 고위급 인사들이 나왔고 약 70명이 모여 성공적인 대화를 해냈다. 참가자들은 이를 계기로 해마다 대화를 하기로 결정했다. 선우 박사는 대회 준비를 위해 매년 비엔나에 가서 북과 만남을 갖는다.

 

미국에 돌아오니 대회 참가자들이 북에 말려 들어갔다는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특히 남쪽의 기독교 단체의 반대가 심했는데 아무리 개인적 의지로 독립적으로 참가한 것이라 주장해도 믿어주지 않아 많은 논쟁이 있었다.

 

두 번째 대회는 더 큰 규모로 치러졌다. 북에서도 더 많은 사람이 나오고 미국에서도 홍동근 목사를 비롯해 김성락, 노인순, 강위조 목사 등 약 25명이 참가했다. 북에서도 약 4~5명의 목사가 왔다.

 

# 북 기독교의 진위 확인을 위해 평양 방문

 

목사라는 사람들이 왔는데, , 이 사람들이 진짜 목사인지 가짜 목사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웃음). 그래서 알아봤지. 그랬더니 김덕령 목사는, 전충림 목사가 목사였던 지가 아버지 친구분이셨다며 목사가 맞다고 했고, 강대홍 목사는 이승만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다닌 목사였고, 기독교 주요 인사들이 모두 확인 가능한 인물이었어. 그때 고기준 목사가 연설을 하는데 평양에 가정예배소가 수백 개다. 기독교 신자가 5000명이다라는 거야. 그러니 우리는 깜짝 놀랐지. 그래서 내가 회의 끝나고 기자회견 할 때 얘기해라. 내가 통역하겠다. 그래서 기자회견장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세계적인 빅 뉴스가 됐지. 이남에서는 안 믿어. 그래서 우리가 평양 가서 확인하겠다. 가자그랬더니 오라그래서 그 다음해에는 평양에 갔지. 가정예배에도 참가하고, 10여 명씩 기도하고 찬송하는데 진짜 기독교인이야. 찬송가책도 옛날 어렸을 때 쓰던 낡은 찬송가책 그대로 쓰고 있고, 기도도 잘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성경도 쭉 꿰고 있더라고.”

 

이후 평양행이 시작된다. 회담도 매년 유럽에서 진행된다. 북측에서는 중립국이어야 올 수 있기 때문에 비엔나, 헬싱키, 벨지움 등의 도시에서 해마다 10년간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래서 얻은 성과는 무엇이었을까?

 

성과? 많지. 우선 피차에 신뢰가 생겼다는 것,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이 대화할 수 있다. 공통점이 있다는 것. 회의할 때 매일 7시에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공산주의자들이 호기심이 나서 참가하더라고. 우리가 뭐하나 궁금해서.”

 

이렇게 목사들이 가고, 북에서도 오고, 그러나 보니 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째, 북에 교회가 섰다. 신교가 2, 성당이 1, 또한 평양에서 성경도 편찬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가니까 필요한 건 우리가 출판한다고 하면서, 성경도 편찬하고 찬송가도 편찬하고. 더 중요한 건 그들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거지. 백과사전에 종교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어. 과거에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주의 정의를 그대로 썼는데 이제는 종교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로 바뀌었어. 그 사실을 북측 기독교인들이 와서 기쁜 소식이 있다며 알려주더라고.”

 

1985년 북과 해외 기독자와의 대화가 시작된 지 4년만의 일이다. 기독교신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서로 대화가 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김일성 대학 안에 종교학과가 신설되고, 기독교를 강의하게 되었다. 홍동근 목사가 선교사로 파견되어 별세할 때까지 10년간 신구약 등 기독교 강의를 했다. 또 평양에 신학원이 생겨서 목사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 모든 변화들이 대화를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또 평양에서는 미국의 NCC 대표, 장로교, 감리교 대표를 초청해서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했다. 가장 보수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초청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지난 수재 때는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이 전세기에 구호품을 싣고 평양에 가기도 했다. 처음으로 미국 비행기가 평양에 온 것이다.

 

# 김일성 주석과 카터 전 대통령 만남에 가교 역할

 

통일운동을 하면서 북에 대한 생각에는 어떤 변화가 왔을까. 선우 박사는 북은 미국을 적대시하므로 절대 대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김일성 주석을 만났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미국에서 통일운동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친선, 평화를 주선하는 거라고 해서 깜짝 놀랐지... 그후부터는 우리가 미국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더 노력을 했지. 우리가 37명의 목사, 감독, 학자 등을 모아 커미티(American Committee on Korea)를 만들었는데, 그 커미티에서 지미 카터를 설득해서 평양에 보냈지. 그렇게 김일성 주석을 만나 대화한 뒤 카터 전 대통령은 북이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됐지. 평양에서 돌아와 카터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했어. ‘내가 믿는다. 북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그때 클린던은 전쟁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거든. 그 정책을 바꿔서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지. 나중에 부시가 들어와서 모든 게 바뀌었지만 지금 다시 평화로 나가는 중이니 퍽 다행이야.”

 

하지만 통일운동 하면서 힘들었던 것도 적지 않았을 터.

 

운동권 내에서 맘이 맞지 않아서 자꾸 트집이 나고, 분란이 생기고, 분열되고 하는 것이 속상했지. 그것이 제일 안타까워. 같이 통일운동 하자면서 왜 못하는가. 그럼 북이 공산주의인데 공산주의하고 대화를 안하면 누구와 할 것인가, 그건 통일 안하겠다는 것 아닌가. 북의 공산주의는 소련이나 중국과 달라서 민족이 바탕이지. 실제로 공산주의보다 민족주의가 밑바닥에 깔려있지. 그래서 북에서는 평화와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런 안타까움에서일까. 선우 박사는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젊은 후배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처음 가진 초지, 그 결심을 변치 말고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야. 괴로움이 있지만 괴로움을 물리치고, 옳다고 한번 생각했으면 밀고 나가는 의기자 강해야 해. 그리고, 동지가 필요해요, 함께 일할 수 있는.

 

송석준 교수라고 있어. 어려운 시절에 나한테 편지했는데, 그 때문에 안기부에 끌려가서 24시간 고문을 당했다고. 그 사람 진짜 몸이 약한 사람인데 밤잠 안 재우고 고문을 하더라는 거야. 결국 송 교수가 그 사람들한테 나는 몸이 약한 사람인데, 잘못하면 내가 죽는다. 책임져야 된따그랬더니 24시간 안에 풀어주더라는 거야. 그러면서 마지막 말이 당신 뭘 해도 좋다. , 미국에서 선우학원이하고만 일하지 말라.’ 그 하나를 부탁했다더구만. 송 교수가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나한테 얘기하기를 저는 선우 박사를 믿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러면서 죽는 날까지 나와 같이 믿고 살았다고.

 

김동수 교수라고 역시 안기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했는데 똑같이 하는 말이 선우학원하고 일하지 말라야. 김동수 교수도 돌아와서 그런 말을 해. ‘그러나 나는 선우학원 선생 믿습니다.’ 그 믿는다는 것이 아주 필요해요. 서로 믿지 못하면 함께 일할 수가 없어요. 일해도 오래 가지 않는다고. 의견은 다 같고, 사상도 같고, 그렇지만 믿지 않으면 그건 떨어져요. 제일 중요한 것이 서로 신뢰하는 것이에요.”

 

# 사재 털어 통일 위한 재단 설립

 

덧붙여 그는 미국에서 살면서 통일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 속으로 파고도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 정치권 내에 만연한 반북정서를 바로잡고, 북미관계 정상화에 적극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내 여론을 움직이는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미국에 사니까 미국 사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야. 미국 사람들, 미국 조직체와 연락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가 고립돼 영향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 상원, 하원의원들 하고도 사귀어서 연락하고, 주류 언론에 우리 생각을 알리는 그러한 활동은 많은 사람들과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영향이 아주 크다고. 특히 젊은 조직체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라티노, 흑인 그룹들과 관계 맺고, 우리가 활동할 때 그들을 초청하고, 그들이 뭘 할 때도 우리가 함께 해야 해요.”

 

선우학원 박사가 두루 존경을 받는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30여 년간 미국에서 민주화, 통일운동을 해오는 동안 개인의 공명심을 위해 분열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통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과정을 거쳐 이루어낸 자신의 업적이 가리고 묻히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으며, 어느 단체의 대표 자리를 놓고 다툰 적도 없었다.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알기 때문에 지난 2006년에는 사재 25만 달러를 털어 조국의 평화통일과 북미간의 친선, 관계정상화에 기여하는 단체들을 지원하기 위한 선우평화재단을 설립했다. 이처럼 선우학원 박사는 구순 고령에도 매일 조국반도에 대한 뉴스를 체크하면서 정세를 꿰뚫는 동시에 통일운동을 하는 후진들을 지원하는 삶을 살고 계신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