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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한국 장로교사에 남겨진 우정시(友情詩) - 그들의 추억과 회한(悔恨)”

by [수호천사]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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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사에 남겨진 우정시(友情詩) - 그들의 추억과 회한(悔恨)”

 

출처 : 기독교사상, 2013.7, 209-223

서정민 일본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 객원교수

 

萬里長空 片雲浮動 晩雨一過後 秋陽加愛

만리 장공에 한 조각 구름이 떠도는가 싶더니 늦은 비 한 차례 지난 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더욱 정겹도다

 

김재준의 호 장공은 찬송가 중 바람과 태양과 구름과 말리의 장공이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최초의 한국인 비교종교학자로 불리기도 하는 채필근의 호 편운은 열왕기상 1844절에서 유래된 것이며 송창근의 호 만우는 가을날 햇볕 아래 곡식과 열매가 익어가기를 기다리던 중 한 모금의 해갈처럼 스쳐 지나가는 늦은 비와 같다는 뜻이고, 한경직의 호 추양은 가을 햇살처럼 단아(端雅)하고 온화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당시 장공 김재준으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한시, 곧 이들 네 사람의 호를 넣어 지은 시의 문학적 수준이나 의미를 평론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장로교 역사에서 중요한 시대적 전개, 굴곡, 갈등과 새로운 미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자들이 남긴 우정시로서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이들의 연배는 채필근의 1885년 출생에서, 한경직의 1902년까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같은 시대 한국장로교의 시대적 흐름에 함께했고, 특히 해외 유학파, 지성파 지도자들로서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즉 보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로서의 출발도 다르고, 출신 연고도 다르지만 그 시대의 운명공동체처럼 진보적 인맥으로서의 대표성도 지녔다. 더구나 이들의 말년 또한 우정시가 따로 찢어져 흩어질 만큼 서로 다른 생애의 결과를 보이고 있어 더욱 역사적이다. 한국 장로교 역사에서 진보적 인맥으로 동류한 자취, 한 때는 함께 주류 보수신학 그룹으로부터의 고독과 따돌림, 친일문제, 분단과 전쟁의 상처, 그리고 한국장로교 분열 역사에서의 상호 결별 등등 우정과 부침이 가득한 이들 네 사람의 생애와 우정, 회한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듯 싶다. (210-211)

 

장공 김재준, 편운 채필근, 만우 송창근, 추양 한경직 약사 (211-215)

 

# 한국장로교 신학적 파동의 중심에 서다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자올교의 신학교육 정책은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교육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여 보수적 신앙 흐름이나, 이른바 정통주의에 입각한 장로교 신학을 보존해 가려는 의도였음은 당연하다. 조금 더 비판적으로 보면, 선교사들의 신학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의도도 물론 있었다고 보인다. 즉 적어도 1930년대 이전의 한국장로교의 신학적 분위기는 신학 자체가 보수적이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한국인 목회자들이 새로운 신학의 흐름 자체에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장로교가 지성적 측면에서 시대적 사조에서 상당히 뒤지고 있었던 것은 여러 진술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1917년 한국 기독교에 대한 뼈아픈 지적을 했던 춘원 이광수의 문서를 살펴보면, 당시 교회 바깥에서의 눈으로 보는 한국 신학계의 지성적 수준에 대한 비평을 잘 파악할 수 있다(이광수,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결점, 청춘, 11, 1917.11.) (215-216)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인 신학도들에게 되도록 외국 유학을 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금지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앞의 지도자 네 사람도 대부분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권고를 받지 못했고, 거의 개인적 차원의 결심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이유는 새로운 신학적 사조, 이른바 신신학에 한국인들이 노출될 것을 선교사들은 크게 염려하였고, 그럴 경우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적 신앙, 신학 기조의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고 본 것이다. 더욱이 보수적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한국에서의 주도권, 교권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을 염려한 측면도 크다. 이에 반해 감리교의 경우는 그래도 해외유학이나 새로운 사조, 사상의 유입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216-217)

 

앞서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일본을 거쳐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신학이나 종교학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은 보수적 장로교회, 장로회신학교의 상황 속에서 위험시되었던 것은 자명하다. 사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장로교에서 목사안수를 받거나 신학논문을 기고하는 일, 더구나 새로운 학설을 강의해 나가는 데 있어 심각한 차별과 경계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때 이들이 모두 함께 신학적 문제로 곤혹을 치른 대표적인 첫 사건은, 그 유명한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이다. (217)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송창근과 김재준의 경우는 미국 유학 직전 미북감리회에서 세운 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이 학교는 당시 구미의 신신학을 가장 먼저 도입해 아시아에 소개한 곳으로 유명했다. 아빙돈 단권성서주석의 류형기 목사도 이 학교 신학부 출신이었고, 김창준, 전영택, 서태원 목사 등 감리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이곳을 거쳤다. 김동명 시인도 신학부 출신이다. 송창근과 김재준의 진로가 한경직과 달라진 중요한 경험적 차이 가운데 하나가 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의 영향일 것이다. (217)

 

아빙돈단권주석... 장로교에서 관계한 집필자를 보면, 송창근(데살로니가 전후서 부분), 채필근(요한복음 부분), 한경직(고린도전후서 부분), 김관식(아모스서 부분), 김재준(미가서 기타 부분), 조희렴(바울의 일생과 사업), 윤인구(요한서신 묵시 부분) 등이 참여하였다. 보수적 장로교회는 당장 이 문제를 총회에서 논의하였다. 물론 감리교회의 경우에는 특별한 소동이 없었다. 장로교 중에서도, 노회별로 그 반응이 좀 달랐는데, 앞서의 네 사람, 즉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한경직이 소속되어 있던 평양노회에서 가장 보수적 교권주의가 작동하였고, 소속 노회원들로 인해 이들 네 사람에 대한 문책조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물론 장로교 총회는 아빙돈단권주석의 구독금지, 폐기 등을 결정하였다. 평양노회는 선교사 클라크를 위원장으로 심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심사하였으며, 각자 각서를 제출할 것을 결정했다. 각서를 제출한 채필근 이외의 나머지 3인은 신학지남에 해명과 유감을 표하는 석명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이들 대표적인 진보적 장로교 신학자들이 그나마 이어오던 신학저작 집필기회, 특히 장로회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에 기고하는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이들의 진보적 성향의 신학활동은 더욱 제한되었다. 또 이 과정에서 이들 네 사람은 보수적 한국장로교계에서 해외 신진 유학파, 진보파, 신신학파라는 따돌림을 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수난 과정이 그들 간의 돈독한 동류감, 동지애를 발휘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17-218)

 

# 친일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자유롭지 못한 네 사람

 

... 장공 김재준은 당시 조선신학원을 책임지고 있을 때인데, 학교 운영을 위해서는 필시 조선신궁에 동원되어야 했다고 운을 떼었다. 그리고 한 동료와 자신이 대화한 내용을 소개했다. 그 동료가 자신에게 묻기를, ‘신궁에 가서 참배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질문이었다고 한다. 장공은 그에게 선선히 대답하기를 신궁에 가서 함께 조용히 기도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어떻게 신궁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느냐는 동료의 반응에, 원래 하느님은 무소부재하시니 신궁에도 왜 아니 계시겠냐고 했다는 대답이다. 당시 젊은 연구자였던 필자는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러면 장공 선생께서는 신궁에 가셔서 속으로는 기도를 하셨군요. 그러나 우리 역사가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신궁참배를 하신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때 장공은 쓸쓸한 웃음으로 긍정을 표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장공 김재준의 경우, 친일의 행적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신사참배에 가담하고 일제의 인허 하에 조선신학원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부일협력 정도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218-219)

 

(친일) 문제에 있어 채필근과 송창근의 경우는 굵직굵직한 행적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우선 채필근은 한국장로교를 완전히 일본화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할 당시 초대 통리에 취임함으로써, 당시 정인과 등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장로교 친일인사가 되었다. 더구나 생애에서 살핀 바 있지만, 일제의 정책에 철저히 입각한 새 신학교, 곧 이른바 후 평양신학교의 교장을 맡아 철저히 현실에 순응하는 신학교 운영을 책임진 일은 큰 불명예로 기록되고 있다. 거기에 일제 말기의 종교보국이나 전쟁동원의 과정에서도 앞장서서 기독교계의 적극적 친일에 확고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결국 해방 후 대표적 친일파로 지목되어 개인적 고난도 감내해야 하는 지경에 빠졌다. 이 문제는 편운 채필근의 말년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로 작용했고, 남한으로 월남한 이후의 목회활동 등에도 큰 멍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219-220)

 

송창근의 경우 사실 그의 청년시절은 독립운동가로서 시작된다. 송창근은 민족주의자 김약연이 설립한 간도 명동학교 출신으로 김약연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와의 관계, 도산 안창호와의 관계 등이 초기 생애에 자주 등장하고, 그 스스로도 민족운동에 깊은 사명감을 지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937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39년 봄에 가석방된 후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즉 경북 김천에서의 목회시절부터 기독교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앞장섰다. 신사참배는 물론, 장로교 노회 해산과 기독교의 일본화 정책, 해방직전 어용교단인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총무로서 실질적인 책임을 맡은 일, 전쟁지원 조직의 책임자로서의 행적 등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220)

 

추양 한경직은 템플턴상을 받을 때 자신의 신사참배 사실을 고백하였다. 대개 그 동안 한경직의 일제 말 행적은 신사참배와 황국신민화정책 절정기의 박해 상황에서 시골에 은거하면서, 과수원 운영과 고아사업 등을 하면 은둔한 것으로 전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사참배 고백으로 일정한 친일 협력을 시인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물론 그 고백 당시 대표적인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비중과 상징성으로 볼 때, 신사참배 행적을 고백한 것에 대한 아쉬움, 반대로 그의 용기있는 고백의 미담 등이 서로 상반된 평가로 회자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음은 분명하다.

 

특히 이들 지도자들 중 채필근은 제외하면, 세 사람이 나란히 일제가 보유했던 이른바 적산 종교시설을 그대로 불하받아 해방 후 목회를 시작하는 것도 특별한 공통점이다. 즉 한경직은 미군정으로부터 영락정 부근의 일제 천리교 터를 불하받아 베다니전도교회, 곧 영락교회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북한에서 월남한 그리스도인들의 중심터전이 되었다. 김재준 역시 일제 재산을 불하밭아 장충동의 경동교회를 시작했고, 송창근 역시 같은 형식으로 동자동의 성남교회를 시작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장로교 진보인맥이 지닌, 친일문제에서 부자유함을 이들 네 지도자들도 예외없이 보여준다고 아니할 수 없다. (221-222)

 

가장 활발하게 자신의 존재 비중을 드러내며, 우정과 결별, 그리고 한국장로교 내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인물이 장공 김재준과 추양 한경직이다. 해방 후 신학적 수난의 제일 순위에 오른 이는 장공 김재준이었다. 그의 신학이 조선신학교에서, 특히 한국장로교 내의 파동으로 전개되었고, 진보신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되어 결국 기장’, ‘예장분열의 핵심적 존재가 되었다. 이에 비해 추양 한경직의 경우는 유학 후 초기 활동시기에 붙여진 진보적 이미지는 오히려 해방 후 완전히 해소될 정도였다. 그가 선택한 신학적 방향은 중도보수의 보금주의였다. 그는 한때 북한에서 기독교계 정치운동도 전개하고, 조선신학교에서도 가르치는 등 진보적인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도 보였으나, 월남과 목회활동의 시작을 통해 점차 온건보수의 길을 택하였다. 결국 기장’, ‘예장의 분열기에는 동지 김재준을 반대하는 예장의 중심으로 남게 되었다. 이는 그들 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상반되는 첫 단추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에서 남은 두 사람을 비교하여 언급해야 할 부분은 사회참여, 민주화운동, 정치적 입장 등이다. 장공 김재준은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더욱 구체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정권 연장 기도인 삼선개헌의 조짐으로부터 한국 기독교계 민주화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그 후 오랜 망명생활을 거치기는 했으나, 해방 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상징적 역할을 고난 중에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추양 한경직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의 길을 갔다. 그의 다른 부분의 역할이나 한국 기독교의 예언자적 역할에 있어서는 상당히 아쉬운 행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말년 생애에서 부당한 정치권력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그들의 부당성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약자와 핍박받는 자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은 행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이렇듯 신학적 노선이나 장로교 분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참여 입장의 부분에서도 장공과 추양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다. (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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