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이야기] 순교자, 애국자, 신학자, 석학 – 조희렴(曺喜炎) 목사
출처 : 새가정, 2009.4, 64-67
김종희 – 경신중고등학교 명예교목, 예장(통합) 교목전국연합회명예회장, 예장총회 제7차교육과정시정대책위원장, 예장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 소속목사
조희렴은 1885년 2월 20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는 여느 조선의 어린이들처럼 그도 서당에 나가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20세 때 캐나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조희렴은 특별히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마침내 그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당시 종로 5가 1번지)를 1911년 제6회로 졸업하자마자 여선교사 맥클린의 도움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1914년). 조희렴은 캐나다 낙스 칼리지에서 문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이어 토론토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조희렴은 내친 김에 박사학위까지 하고자 시카고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그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한국유학생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아직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았을 무렵, 그의 유학을 지원해주었던 캐나다 선교부로부터 “한국으로 귀국해서 귀하의 힘을 한국신학교육에 보태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요청이 왔다. 그는 바로 박사학위과정을 중퇴하고 1924년 귀국했다.
당시 원산에는 마르다 윌슨 신학교(혹은 ‘마르다 월슨’이라고다 함. 캐나다 출신 독신여선교사 Lousie Hoard MacCully의 어머니이름을 딴 신학교)가 있었는데, 조 목사는 그 학교 신학부장을 역임하며 함흥 YMCA 총무직도 겸하였다. 그는, 농촌계몽운동과 사회계몽운동에 집중하는 한편 기독교 강연을 위해서라면 북한 전지역은 물론 멀리 만주 북간도지방까지 순방했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러한 그의 애국심은 일경들의 미움을 샀고, 결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게 되었다.
1930년 8월 5일 제8차 세계CE(기독청장년면려회)총회가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렸을 때 조 목사는 한국측 대표로 파송되었다. 그는 고난받는 한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순서에서, 당시 조선의 사정을 말하고 조선의 해방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치하의 힘 없는 목사의 요청은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묵살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 일 때문에 귀국 즉시 함흥경찰서에 연행된 조 목사는 갖은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한 조 목사는, 유럽과 러시아를 순방한 여행기를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의 안정적인 발전과 부흥의 원인이 신의 은총에 있음을 실례를 들어가며 강조했다. 이는 천황을 신으로 모시며 예배하는 일제의 천황숭배신앙을 비판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또 러시아의 문제점도 열거했다. 정의와 진리를 짓밟는 강제적 폭력이 계속해서 폭력을 불러오는 것에 대해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자 일경이 당장 집필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목이 꺾일지언정 붓을 꺽지는 못한다”고 버텼다. 나라 잃은 슬픔과 일본제국주의의 부당성을 지면에서라도 발산하겠다는, 국가는 잃었으나 자존감은 잃지 않은 지식인의 정당한 저항이었다.
한편, 일제가 평양장로교신학교를 폐쇄하자 조 목사는 서울의 김재준 등과 뜻을 같이해 조선신학교 설립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한국신학의 자유스러운 전개를 그렇게 염원하고 학교설립에 힘을 보탠 조 목사였으나, 불행하게도 해방직후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리는 바람에 조선신학교에서 강의 한 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무렵, 그는 원산 부시장에 추대되었다. 평양에 조만식이 있었다면 원산에는 조희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을 만큼 그는 원산 시민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할 수 없었던 조 목사는 부시장직을 사임하고 원산 남부교회를 설립해 목회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때 평양의 조만식 장로가 그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조선민주당을 도와 민주조국건설에 힘을 보태달라는 것이었다. 조 목사는 조 장로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조선민주당 원산시 당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밀사와 만나게 되었다. 밀사는 그에게 이승만 정부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며 월남을 종용했다. 조 목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목사로서의 사명 때문이었다. 정치적 입장이나 사상 그리고 자신의 목숨도 귀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귀한 것이 주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이었던 것이다.
공산당은 항상 조 목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조 목사는 공산당에게 협조를 안할 뿐 아니라 공산당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0월 들어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 쪽 패색이 짙어지자 공산군은 자기네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교회지도자들과 지식인을 일거에 숙청해버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원산 남부교회의 조 목사는 1950년 7월 6일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끌려갔다. 투옥된 조 목사는 혹독한 고문을 받던 끝에 국군의 선발부대가 원산에 입성하던 1950년 10월 9일 그날 새벽, 원산형무소 뒷산에서 총살되었다(향년 65세).
올해로 개교 124주년이 되는 경신중고등학교는 조희렴 목사 외에도 여러 걸출한 신앙인을 배출하였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PCUSA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만 목사의 선친 이태석 목사와 최초로 복음성가를 작사ㆍ보급하고 개신교수도원(삼각산 임마누엘수도원)을 창설한 류재헌 목사, 3ㆍ1독립운동 민족대표 중 한 명인 이갑성, 파고다에서 3ㆍ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쟁재용, 도산 안창호, 대한 예수교장로회 제35대 총회장이면서 계명대학을 설립한 독립운동가 최재화 목사 등 수많은 애국애족의 신앙인들을 배출한 학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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