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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과 [鄭仁果, 1890~1972]
장로교 목사, 민족주의 운동가
【1890년】
- 1월 9일, 평북 순천(順川)에서 아버지 정민직, 어머니 박은감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02년】
-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4년】
- 5월, 고향에서 예수교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07년】
- 6월 6일, 평양 숭실중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1911년】
- 5월 24일, 제3회로 숭실대학을 졸업하였다.
- 졸업후 숭실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2년】
- 숭실중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중국을 여행하였다.
【1913년】
- 밀항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 10월 13일,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안창호와의 친밀한 관계가 시작되었는데, 후일 흥사단의 단기가를 작시하기도 하였고, 도산일기에는 마음속의 친구(심우)라고 표현되었다.
【1914년】
-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태평양대학 보습과를 수학한 후 로스앤젤리스 성경학원(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에 들어갔다.
【1917년】
- 6월, 로스앤젤리스 성경학원을 수료했다.
- 이어서 샌프란시스코 산안젤모신학교(San Anselmo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였다.
【1919년】
- 국내의 3ㆍ1운동 소식을 듣고 휴학했으며,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파송을 받아 황진남과 함께 안창호를 수행하고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 5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 7월, 제5회 임시의정원에서 미국령 교민대표로 의원에 선임되어 교통위원장을 맡았다.
- 8월, 임시의정원 부의장이되었다.
- 9월, 임시정부 통합 개편 때 외무부차장을 맡아 겸무하였다.
【1920년】
-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10월, 외무부 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교에 복학하였다.
【1921년】
- 4월 28일, 신안젤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9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만국 장로교대회에 임종순, 매큔, 블레어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 9월, 프린스턴대학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 7월, 프린스턴대학교 정치사회학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4년】
- 3월 24일,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 6월 16일,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미국을 떠나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서 개최된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남궁혁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 11월, 상해를 경유하여 한국에 귀국하였다.
【1925년】
- 2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았으며,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 3월 24일부터 4월 8일까지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국제선교협의회에 마포삼열ㆍ신흥우ㆍ양주삼ㆍ김활란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 9월, 장로교 총회 농촌부 부장을 맡았다.
- 9월 24일, 제5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9년】
-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농촌사업협동공의회 실행위원이 되었다.
【1930년】
- 1월, 함중노회 주최 주일학교대회에서의 강연에 대하여 성진경찰서에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
- 3월 31일, 경성지방 법원에 송치되었다.
- 4월 5일, 경성지법에서 성진경찰서에 재조사를 지시하였고, 얼마 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 9월, 장로교 총회에서 매년 10월 셋째주일을 농촌주일로 지키게 하였다.
【1932년】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상설 종교교육부를 신설하였고 총무를 맡았다.
-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 10월, 〈종교시보사〉 사장이 되었다.
【1933년】
- 7월, 전필순이 〈기독신보〉사의 사장이 되면서 정인과 주도의 서북교권에도전하는 비서북계 기관지로 전환시켰다.
【1934년】
- 정인과의 주도로 총회는 적극신앙단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 여력으로 YMCA 총무였던 신흥우를 사방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다른 이유와 겹쳐서 신흥우는 그해 총무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 정인과는 한 때 세계주일학교회의 한국대표로서의 신흥우의 참가를 부결시킨 일이 있고, 또 감리교와의 합동찬송가 편찬 간행 노력에서 지나치게 감리교의 입장을 봉쇄시켜, 그 성사를 보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1935년】
- 1월, 종교교육부에서 〈신편찬송가〉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 9월,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비서북계의 적극신앙단, 김영주의 창세기 저작문제, 김춘배의 여권문제, 〈아빙돈 단권주석〉 문제, 감리교회와의 교계예양조치 문제, 연합공의회에서의 탈퇴 문제 등을 다루었다.
- 당시에 예수교장로회는 농촌부와 종교교육부를 설치하였다. 그때 농촌부 총무는 흥사단계의 배민수 목사였고, 종교교육부에는 정인과가 역시 흥사단으로서 성직을 가진 인물로 그 총무직에 올랐다. 둘다 미국 배경의,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흥사단 출신 민족주의계 목사였다.
- 정인과는 서북 장로교회의 보수주의 신학과 그 권익의 옹호라는 사명을 떠맡았다. 그는 이승만의 국내 민족주의 단체인 동지회의 실질상의 총무인 신흥우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모인 서울지방의 장로교 신진 신학자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 교파 연합으로 서북 장로교회의 막강한 교권기능에 도전하는 에큐메니칼 장ㆍ감의 교회와 일대 대결을 하게 되었다.
- 그 대결의 한 결과가 적극신앙단의 장로교 총회에서의 정죄 그리고 거기 불복한 서울 장로교회들의 경중노회로의 분립에 대한 정죄이다.
- 12월, 〈신편찬송가〉, 종교교육부에서 장로교 전용으로 간행하였다.
【1936년】
- 12월, 장로교 총회에서 〈종교시보〉, 〈농촌통신〉, 〈면려회보〉 등을 통합하여 〈기독교보〉를 창간하고 그 편집인이 되었다.
【1937년】
-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그의 퇴진은 서북 장로교 교권의 해체, 그리고 민족적 영감의 교회운동의 종식 그리고 장ㆍ감 대립이나 남북 장로교 대립관계의 임시 종직을 의미하였다.
- 6월, 동우회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39년】
- 재판을 받는 동안 변절하여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상무이사 겸 총간사를 맡았다.
-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 언도를 받았다.
【1940년】
- 검사의 항소로 1940년 8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 12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총간사를 맡았다.
【1941년】
-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맡았다.
- 4월, 기구개편한 조선성서공회 총무로 피선되었다.
- 8월, 장로회 중앙상치위원회에서 전시체제 실천 성명서 발표에 참여했고,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발기위원장과 회장을 맡았다.
【1942년】
- 4월, 기독교신문협회 회장 겸 이사를 맡아 기독교계 언론을 통폐합한 『기독교신문』을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부일협력 활동을 하였다.
【1945년】
- 7월, 개신교 교파들이 통합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출범할 때 고문에 추대되었다.
- 해방이후 정인과는 한때 찬송가 판권이 그의 개인 명의로 되어 있어서 이를 여러 차례 간행하였다.
【1949년】
-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5월 특별재판부의 재판을 받았으나, 건강 때문에 보석되었다.
-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이라고 비판받았다.
【1953년】
- 7월, 서울 상도동에 방우린보육원(신희망보육원으로 개칭)을 설립 운영했다.
【1954년】
- 정인과 보육사업부지를 한경직, 배민수, 강신명 등의 참석하에 숭실대학교에 희사하는 협정서를 작성하였다.
【1960년】
- 1960년부터 3년간 경기도 문산 법원리장로교회를 담임한 후 은퇴하였다.
【1972년】
- 만년을 경기도 파주에서 보내다 1972년 별세하였다.
【기타】
- 정인과의 친일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ㆍ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 256∼28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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