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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왕 [腆支王, AD. ?~420] 백제의 제18대 국왕(AD. 405~420)

by [*수호천사*] 2025.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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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왕 [腆支王, AD. ?~420] 백제의 제18대 국왕(AD. 405~420)


【개인 정보】

  • 이름 : 영(映), 전(腆) 또는 여영(餘映, 余映)
    별칭 : 《일본서기》에서는 직지왕(直支王),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진지왕(眞支王), 또 《한원》에 인용되는 《송서》, 《통전》에서는 부여전(夫餘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별칭은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이다.
  • 출생 : 미상 –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는 390년에 태어났다.
    사망 : 기원후 420년
    재위 : 기원후 405년 9월 ~ 기원후 420년
  • 전임 : 아신왕
    후임 : 구이신왕

【가계 정보】

  • 부왕 : 아신왕(阿莘王 ?~405) – 백제의 제17대 국왕(392~405)
  • 형 : 신제도원(新齊都媛)
    동생 : 부여신(扶餘信, ?~429)
    의붓동생 : 부여홍(扶餘洪, ?~407)
  • 국왕 : 전지왕(賟支王, ?~420) – 백제의 제18대 국왕(405~420)
  • 왕비 : 팔수부인(八須夫人)
    아들 : 구이신왕(久尒辛王, ?~427) – 백제의 제19대 국왕(420~427)
  • 후궁 : 미상
    아들 : 비유왕(毗有王, ?~455) – 백제의 제20대 국왕(427~455) – 이설이 있음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 혹은 전지왕의 서장자로 알려졌으나 정확하지 않다. 《삼국사기》는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일본 측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구이신왕의 아들 부여주의 아들이라 한다.


【전지왕 연보】

 

【기원후 394년】

  • 《삼국사기》의 아신왕, 전지왕 본기에 의하면 394년(아신왕 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고 한다.

【기원후 405년】

  • 아신왕이 죽고 그의 첫째 동생 부여훈해가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났다고 한다. 왜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전지왕은 신하 해충(解忠)에게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알고 섬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뒤 해씨 세력은 부여훈해를 시해하고 후임 섭정을 사칭하여 내분을 일으킨 부여설례를 죽이면서 전지왕을 즉위시키고, 그 이후에 전지왕이 백제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아신왕 재위 중 일본에 보내졌다 한다. 일본서기 제10권 오진 천황조에 의하면, “405년 9월 아화왕(아신왕)이 서거하다. 일왕이 직지(전지) 왕자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백제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라.’고 하였다.” 한다. 그는 오오진 일왕이 내준 왜의 군사들을 대동하고 귀국, 설례 일파를 제거하고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 전지왕은 즉위하고 나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해충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기원후 406년】

  • 전지왕 2년, 해충을 달솔로 임명했으며, 벼 1천 석을 하사하였다.

【기원후 407년】

  • 이복동생인 부여신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하는 한편, 해씨 가문의 해수와 해구를 각각 내법좌평(內法佐平),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하였다.

【기원후 408년】

  • 친정 체제를 시작하였다. 부여신에게 새로운 관직인 상좌평을 겸하게 하여 해씨 세력을 견제하도록 했다.

【기원후 417년】

  • 전지왕 13년, 7월에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좌평인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기원후 420년】

  • 전지왕 16년, 3월에 향년 31세로 죽었고, 아들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전지왕은 420년 3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사서인 송서에는 전지왕이 425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송서의 기록에 따르면 전지왕은 아들 구이신왕에게 양위하고 5년을 더 살다 사망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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