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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제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 삼위일체 교리 확정...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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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기독교인들도 신학적 논쟁에 참여함... (204)
#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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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가 없이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사역은 불가능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 없이는 역시 아타나시우스의 사역도 그 최후의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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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위대한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사역은 “삼위일체 교리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옹호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을 체계화시키고 그것을 가능한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하는 일이었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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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미우스주의로 알려진 악의적이고 공격적인 형태의 아리우스주의... 완벽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단일성과 불가변성을 부인하며 결국 그것은 이교도의 위장된 형태라고 주장했다(이것은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주장과 같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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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은 아들의 온전한 신성과 아버지로부터 그의 영원한 구분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데 중심 용어인 ‘호모우시오스’를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207)
#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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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우스는 330년경 카파도키아의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아테네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 친구로 지냈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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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년 카파도키아에 있는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가 죽자 바실리우스가 그의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 중심지였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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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년경 『성령에 관하여』...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에 관해 보다 많은 설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니케아 신조의 최종판을 작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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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우스는 ‘성령’에 주목... 성령은 “진실로 하나님”이시며,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한 하나님으로서 삼위 가운데 세 번째 위격 혹은 본체임을 주장했다. “성령의 신학자” (208-209)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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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우스와 같은 나이... 절친한 친구였다... 수도원주의는 거절...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주재... (209-210)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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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실리우스와 그들의 누나 마크리나를 통해 가정교육을 받았다... 어떤 학자들은 초대교회사에 등장한 모든 학자들 가운데 그레고리우스의 천재성과 견줄 만한 사람은 오직 오리게네스뿐이라고 주장했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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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일성과 영성, 그리고 초월성, 그리고 초월성에 관한 교부들의 담론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들이나 삼위일체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교부들의 가장 훌륭한 사상과 결합시키려 하였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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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우스가 379년에 사망하자 그레고리우스는 반(反) 아리우스파 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황제는 그레고리우스의 신학적인 성향뿐만 아니라 그의 신비적인 능력을 높이 존경하고 있었다... 공의회 개회연설... 공의회가 니케아 삼위일체 교리의 정통성을 재차 확인하고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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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본질”은 플라톤 철학의 “형상”(IDEA)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성 또는 본질은 인간 본성의 형태와 같다. 많은 개별적인 인간들은 독특한 특성들을 소유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보편적인 본질이나 본성을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우시아”(본질)를 공동으로 공유하면서도 독특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위격들로 남아 있다. 이단들에 대항하여 이 점을 설명하는 그레고리우스의 설명방식의 배경에는 우주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플라톤 철학이 놓여 있다. (212)
# 바실리우스의 위대한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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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플라톤, 오리게네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이들 모두가 지향했던 전반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삼위성의 위대한 신비를 기독교 정통 교리로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었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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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격퇴하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며 이해할 수 없는 본질은 세 개의 독특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 위격들에 의해 동등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신앙을 정통교리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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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의 주요 적대자들은 유노미우스파와 성령종속론자들(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유노미우스파는 급진적인 아리우스파였다... 삼위일체론에 대항하여 유노미우스파가 주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은 비출생이라는 점이며 성자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자는 태어났기 때문이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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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했다고 하는 유노미우스의 주장을 비웃었다... 바실리우스는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그리스 철학은 신 자체를 파악하기엔 인간의 정신은 무능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존재와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무한하며 영원한 본질은 우리의 유한한 이해를 넘어선다... 2) 신의 출생(산출)과 인간 출생 사이의 종속론주의자들의 유비를 반대했다... 3) 출생되었다는 것은 시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고 영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비출생”은 항상 “영원”과 함께 병행한다는 유노미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태양의 광선은 태양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태양이 광선(광채) 없이 존재한 때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태양은 지금도 여전히 그 광채를 발생시킨다(낳는다). 그처럼 성부는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을 발생시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출생된 자이다... 4) 바실리우스는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유노미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단순한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여전히 진정한 신의 계시가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언자에 가깝다. (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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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분은 성령이다... 성부는 모든 신성의 영원한 원천... 그로부터 성자가 출생되었고 성령이 발출되었다... 아들과 성령은 위치상 종속되어 있지 존재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다.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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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론? “우리를 삼신론자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대답한다. 우리는 숫자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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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는 비출생이며, 성자는 출생이고, 성령은 성부로부터 유래한다. 바실리우스는 이 셋 사이의 차이는 신적 본질 안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동등한 본질의 차이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18)
#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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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 공동생활 비유... 아담과 하와, 그리고 셋은 한 가족이며 정확히 같은 본성을 나누고 있지만 세 사람은 각기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듯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동일한 영광과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신적인 가족을 구성하고 있으나, 구별된 위격들이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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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사상에 대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실질적인 공헌은 영어로 “위격들”로 번역되는 “히포스타시스”를 관계 개념으로 설명한 데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내에는 “세 개의 존재들”이 아닌 “세 관계들”이 존재하며 그 관계들은 본질들(존재들)도 아니고 단순한 행동들(행동 양식들)도 아니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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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미우스파와 다른 이단자들은 삼위일체론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즉 하나의 실재는 본질(존재)이거나 아니면 행동(사건, 행동, 양식)이다. 만일 하나님 안에 셋이라는 개념이 전자를 의미한다면 삼신론으로 흐를 것이며, 후자를 의미한다면 사벨리우스주의가 맞다... “히포스타시스”(위격, 본체)는 본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행동도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히포스타시스”는 하나의 관계를 표시한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그런 관계들에 존재론적인 신분을 부여했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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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의 위대한 공헌은 기독교사상의 흐름에 존재론적인 관계실재 개념을 소개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개별적인 “자아들” 혹은 의식과 의지의 독자적인 실체들이 아닌 존재와 본질의 한 공동체 내에서의 실질적인 상호의존적인 관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부(출생한 존재가 아니다)... 성자(태어난 존재)... 성령(발출된 것)...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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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나리우스주의... 그의 기독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성적인 영혼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주했던 하나님의 아들을 영원한 하나님으로 믿느냐 아니면 창조된 반신반인으로 믿느냐 하는 문제를 “유발시킬” 수 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아폴리나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기를 원했고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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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기독교에서 구원을 “신화”로 보는 사상은 인간들이 신과 피조물의 경계를 실제로 넘을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그레고리우스는 로고스(혹은 하나님의 아들)가 하나님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과 성육신의 이유는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같은 신분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고 믿은 것 같다. (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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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는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완전한 인성이 아니라면, 우리의 인간본성은 그를 통하여 전적으로 구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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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과 혼을 포함하여 인간 존재의 모든 본질적인 요소들을 소유한 참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소유한 참 신이어야만 했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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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신학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에 관한 극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다른 두 카파도키아 교부들보다 그레고리우스는 신적 본질의 타자성과 장엄함에 의해 매혹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절대적인 단일성과 영원한 신적인 근원의 무한한 초월성과 모든 만물의 기원을 강조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로부터 기원한 고도의 추상적인 철학이요 대중적인 학문이었다.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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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의 영향... 하나님의 본질은 매우 초월적이며 불가해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정적인 방법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본성이나 본질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적당한 피조물들의 특성들을 벗겨냄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최소한으로나마 기술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무한하며(제한되지 않으며), 무감각하며(고통당할 수 없으며), 파악할 수 없다(정의를 내릴 수 없다).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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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신학”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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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에 관한 그의 설명..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은 하나님(신플라톤주의에서는 “일자”)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들로 전환시키는 인간 자유의지의 오용이다. 그러나 악은 하나의 실체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 그것은 선의 부재 혹은 결핍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충만이며 때문에 완전한 선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선이며 그러므로 존재의 충만이다. 존재와 선은 불가분리이다. 그레고리우스에게 악은 문자적으로 “무”(존재와 선의 공허)이다. (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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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론의 극복... 황금주화에 관한 이미지...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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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선하고 선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작용과 활동의 연합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이고 세 하나님이 아니라면, 세 위격들은 항상 만물 가운데 틀림없이 함께 행동할 것이다. 거기에 그레고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의 핵심이 들어있다... 세 사람들은 같은 본성 혹은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세 존재들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동이나 역할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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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든 행동이나 역할이 세 위격 모두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신적이며 감독하는 능력”을 세 하나님으로 부를 수 없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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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 규칙...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의 역할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원인이며, 바탕이요 근원이다. 성자는 성부의 영원한 탄생이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로부터의 영원한 발현이다. (228)
#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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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기아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무엇들’과 하나의 ‘누구’가 존재한다. 하나님 안에는 세 개의 ‘누구들’과 하나의 ‘무엇’이 존재한다.”... 세 개의 “누구들”은 그들이 서로 분할되지 않고 함께 기능을 하는 한 하나의 “무엇”이 될 수 있다. 두 개의 “무엇들”은 그들이 친밀하게 연합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누구”(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229-230)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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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태의 종속론과 사벨리우스주의(양태론)을 정죄하였으며... 니케아 신조의 최종 형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결정하였다.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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