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강(2010). 레이놀즈의 목회 사역. 한국기독교와 역사(33), 35-56.
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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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1892년 내한... 1897년 호남 최초의 교회인 전주교회(현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신봉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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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번역을 위해 1902년부터 5년간 서울... 남장로교 선교사로는 이례적으로 북장로교 서울 스테이션의 승동교회와 연동교회를 번갈아 시무...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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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번역자회’에 가담... 1937년 은퇴할 때까지 한글 성경 번역 사업에 종사... 한국 장로회의 단계별 치리회 조직 및 운영 과정에 깊숙이 참여...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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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교... 북장로교 마펫이 행정... 클라크가 저술... 레이놀즈는 신학적인 면에서 두드러짐...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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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는 기본적으로 ‘목회자’였다... 전북 지역 기독교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침... (37)
2. 선교 준비 활동(1892-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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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11월 4일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서울에 도착... 서대문 전 독일공사의 저택을 1,500불에 매입하여 거주...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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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 회장... 1893년 1월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장로교선교부공의회’ 구성에 참여한 후 초대 의장에 취임... 1892년 12월 북장로교 선교사 마펫과 함께 공주와 전주를 방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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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부터 5월까지 전라도 전체를 둘러봄... 군산ㆍ전주ㆍ목포ㆍ순천 등이 나중에 스테이션의 입지가 되었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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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봄, 테이트와 함께 전주에 머물면서 완산 언덕의 토지와 가옥 두 채를 매입... 유진벨과 함께 1896년 2월 목포를 방문하여 언덕 위의 좋은 땅을 사들임... 그 사이 전킨은 드루와의 두 차례에 걸친 군산 답사를 통해 초가집 두 채를 구입하는 데 성공...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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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하반기 부인 펫시가 몸져누우면서 테이트와의 전주 이주는 유보되었고, 한글 성서 번역에 가담하면서 서울 체류가 2년 더 연장... (전주 초기 선교는 1895년 12월 그곳에 정착한 테이트가 주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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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재 채플’... (39-40)
3. 전주교회 목회 사역(1897-1900 / 1908-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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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6월 15일 전주에 도착... 전주교회 사역을 시작... 그해 여름 전주교회 최초의 성례전... 김내윤, 임씨 부인, 김성희, 김창국과 그의 어머니 등 6명이 세례받음... 9월에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예배당 공간 일부 확장...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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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에 의해 비롯된 전주교회의 회중은 레이놀즈 부임 이후 조직화의 단계를 밟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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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군산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남장로교선교부는 레이놀즈가 성경번역사업에 계속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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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를 분주하게 했던 다른 일은 선교 기지 문제를 둘러싼 지방정부와의 대립... 1898년 전북 관찰사로 붕미한 이완용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완산 성역화를 내세우며 스테이션 이전을 요구... 레이놀즈는 주한미국공사관을 통해 정부와 협상을 벌여, 전주스테이션을 완산에서 화산으로 옮기되, 조선 정부가 그 보상금을 지급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금의 전주서문교회 터와 예수병원 일대의 전주스테이션의 구내 조성...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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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회의 본격적인 성장은 1900년부터 시작... 레이놀즈는 자신이 도미(안식년 휴가)d 후의 목회 공백을 고려해 교인 두 명을 각각 예배와 재정 담당자로 선출하여 그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게끔 만들었다.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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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 후... 1902년 목포를 거쳐 6년간 서울에서 살면서 성경 번역 작업과 평양신학교 강의 그리고 북장로교 서울스테이션 소속의 교회에서 목회함...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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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월 2일, 전킨 선교사가 전주에서 폐렴으로 급사... 전주로 복귀하여 두 명의 한국인(김정삼, 이승두)와 함께 성경 번역을 계속하면서 전킨이 맡고 있었던 전주교회 목회와 전주북서지방 순회사역을 이어받았다.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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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회 후기 목회(1909-1913)는 교회 조직과 신자 교육에 초점... 1908년 2월에 북장로교 선교사 쿤스와 함께 전주에서 선교부 차원의 ‘성경반’을 열고 400명의 사람들을 교육시켰다... 레이놀즈 전주 복귀 1년 만인 1909년 2월 21일 전주교회에는 모두 56명이 등록하였고, 그날 51명이 세례를 받았다.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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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전주교회는 제직회를 구성... 제직회장은 레이놀즈, 서기는 김권준, 회계는 최국현 집사... 교회 운영에 교인들의 참여를 적절히 유도... ‘직분자 모임’의 조직... 동료 선교사 해리슨은 전주교회의 조직적인 운영을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하나인 자치와 관련시켜 평가.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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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윤리와 관련하여 엄격한 측면... 1912년 9월 28일 이승두 장로와 치리당회를 열었다. 교인 정대성이 다른 유부녀와 정당한 혼인 절차 없이 잠통하여 살고 있는데다가 당회가 그 사실을 알고 권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응하지 않았기 때문... 출교... 11월 23일 한복룡의 부인을 수찬정지시킴... 도적질로 권면을 받아 자복한 점은 인정하지만 회개의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 책벌하기로 한 것...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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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월 두 번째 안식년... 1912년 7월 제직회에서 한국인 목사를 후임으로 세운다는 원칙을 교인들에게 천명... 김병룡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 1912년 11월 부임...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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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의 연봉... 선교사들의 연봉... 당시 레이놀즈를 비롯한 미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 (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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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 4명의 자녀... 1893년 여름 장남 레이놀즈 3세는 열흘 만에 사망... 894년 8월 출새안 차남 존(이보린)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18년 다시 내한하여 순천(매산학교), 광주(숭일학교), 전주(신흥학교) 등지에서 남장로교 교육선교사로 활동... 1930년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시립대학 교수로 봉직... 부인이 안익태 선생과 줄리어드 음대에서 함께 공부... 1970년 3월 그의 사망 후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된 다음 우체국 소포로 돌아와 서울 양화진 그의 형 옆(제1묘역 마-20)에 묻혔다. 레이놀즈의 두 딸 중 한 명인 엘라는 1900년 평양 출생으로 1920년부터 6년 간 순천에서 보조선교사로 사역한 바 있다. (45)
4. 전북지역 목회사역(190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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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전킨의 사망 이후 전주교회 목회와 아울러 김제ㆍ금구ㆍ고부ㆍ흥덕의 교회들을 담당하는 지방사역자로도 활동... 1908년 전북대리회 회장으로 지역교회 행정을 주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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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통계... 레이놀즈 담당... ‘이눌서 지방’(전주교회 포함)에는 모두 16개의 신앙공동체에, 세례교인 309명 등 총 1,200여 명의 교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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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월 전북대리회 회의 과정에서 발생한 이른바 ‘최중진 목사 사건’... 최중진 목사는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 남장로교선교부가 배출한 최초의 한국인 목사(평양신학교 2회 졸업)... 이자익보다 먼저 장로와 목사가 됨... 미국 선교사들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서 목회하면서 불만을 품기 시작... 자신의 처우 개선 등 모두 5개항으로 된 요청서를 전북대리회에 보내면서 저항... 레이놀즈는 최중진 목사의 요구 조건을 모두 거절하고 2월에 열린 대리회에서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여 최중진 목사를 제명 처분... 최중진 목사는 자신의 영향 아래 있던 10여 개 교회를 이끌고 교단을 탈퇴하여 ‘자유교회’라 이름하였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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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급 인상을 요구하는 두 명의 조사를 사직시킴... 지역교회들을 대상으로 자립의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함...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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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까지 전라노회(1917년 이후 전북노회)와 긴밀한 관계 유지...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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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제주도의 윤식명 목사를 후임자로 결정... 1년에 석달 만 개강하던 평양신학교가 1년 3학기제로 학제를 전환하면서 연중 8-9개월 동안 수업이 진행되자 전주를 떠나 평양에 정착... (49)
5. 서울ㆍ평야 목회 사역(1903-1907 / 1921-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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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동교회(1903-1906)와 연동교회(1906-1907) 목사로 시무...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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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인근의 와산교회와 고정교회... (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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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평양신학교에서 은퇴 귀국한 후 1951년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어트에서 사망... (51)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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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재에서 시작된 그의 목회 활동은 전주와 전북지역 그리고 서울과 평양에서도 계속...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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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소통 능력... 소통을 중시하는 목회자 (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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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이눌서 지방’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14년 ‘재정적 자립’을 달성한 교회...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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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 이전 미국에서 축적된 그의 교회법적 지식과 치리회 경험은 신생 전라노회의 진행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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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는 언더우드와 마펫 등 북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지역 선교와 관련된 고급의 정보를 얻는 한편 선교부 내의 지도력을 기반으로 남장로교의 항구적인 호남 선교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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