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호 (2014.05).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그들이 조선에 가야 하는 이유. 기독교사상, 232-238.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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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월 28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빈톤(C. C. Vinton)의 서울 집에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선교정책으로 공식 채택했습니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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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우스는 1890년부터 중국 지푸에서 선교활동을 한 사람이었는데, 이때 서울에 와서 선교방법과 원칙에 대한 내한 선교사들에게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강의한 선교 방법 가운데는 다른 교파 혹은 단체들과 상호 협력과 일치의 노력은 하되 선교지역을 분할하여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단 5,000명 이상 되는 도시나 개항장은 공동으로 선교할 수 있지만 그 이하 되는 지역은 한 선교부가 맡아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방침도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일부 지역은 미 남장로회가, 평안도, 경상북도, 황해도, 충청북도, 그리고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은 미국 북장로회가,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회가, 경상남도는 호주 장로회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부 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은 미 남감리회가, 충청남도와 서울과 경기 일부, 강원도 남부지역은 미 북감리회가 맡아 선교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보다 빠른 시일 내에 한반도의 복음화의 선교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자... 그러나 이런 선교정책은 오늘날 특정지역에 편중된 교파의 분포와 교파와 지역적 차별성으로 인한 갈등과 분쟁,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232-233)
질병의 페러다임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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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6월에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하였습니다. 서울에서만 하루에 60여 명씩 죽어갔고, 전국적으로는 5,000명 이상이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을 괴질(怪疾)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어로는 ‘코레라’라고 발음하는 것을 한자로 호열랄(虎列剌)이라고 써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고, 호랑이가 살점을 뜯는 듯 심한 고통을 준다고 하여 흔히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이 방역위원장으로 제중원 의사였던 에비슨을 임명하였습니다. 에비슨은 우선 전국에 콜레라를 예방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방을 써서 붙였습니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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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원치 않는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음식은 반드시 끓이고, 끓인 음식은 다시 변질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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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콜레라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체계적인 방역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이처럼 온 나라가 급박하던 때에 가장 헌신적으로 활동한 의사가 드류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였습니다. 이 두 선교사는 서대문 밖에 임시진료소를 설치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며 예방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드류와 전킨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이 조정까지 알려졌고, 고종은 이를 매우 고맙게 여겨 그들에게 은제 스탠드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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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즈의 첫 아기(1893년 8월 4일) 열흘만에 세상을 떠남... 전킨 선교사의 아기 ‘조지’도 18개월만에 사망... (235)
미국의 남부에서 한반도의 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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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류 선교사가 호남 선교의 교두보로 군산을 적극 추천... 남장로교 선교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드류 선교사를 전킨 선교사와 함께 군산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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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로교회는 1861년부터 일어난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조직... 남장로교의 외지 선교사업회가 이탈리아, 중국, 일본, 브라질, 멕시코, 쿠바, 그리스 등의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 남장로교의 해외선교사들은 주로 시카고의 멕코믹신학교와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배출...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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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받은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하여서 그해 9월 멕코믹신학교에서 조선선교 보고회를 가짐... 이때 이 학교 졸업생인 루이스 테이트가 그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음... 다시 10월에 테네시 주의 네쉬빌에서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연합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곳에는 언더우드와 벤더빌트대학교에 유학하여 와 있던 윤치호가 초청되어 선교강연을 하게 됨... 이때 강연을 들은 7명의 남ㆍ여 학생들의 가슴에 조선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타오름... 루이스 테이트 외에 유니온 신학교의 전킨, 레이놀즈, 존슨 그리고 테이트의 동생 메티 테이트(최마태), 버지니아 아빙돈 출신 린니 데이비스, 버지니아 렉싱톤 출신 메리 레이번, 그리고 역시 버지니아 출신인 펫시 볼링 이렇게 8명의 청년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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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레이놀즈는 중국 선교를, 볼링은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선교의 뜻을 모으고 부부가 됨... 레이번은 전킨을 만나 “당신이 가는 것이면 나도 가겠다”고 하며 부부 선교사가 된 것...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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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은 존슨은 아저씨 댁에서 조선에 대한 희귀본 역사책을 발견하여 친구들에게 보여줌... 이 책을 돌려 읽은 이 젊은이들은 매우 흥분... 당장 조선으로 달려가고픈 열망에 사로잡힘..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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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는 남장로교 회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 선교 신청서를 제출... 그러나 당시 조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의 나라였기에 현재로선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이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됨... 당시 선교회는 그리스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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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언더우드 목사를 모시고 버지니아, 노스케롤라니아, 테네시 등 미국 각 주의 여러 도시의 교회를 순방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도움을 요청함... 여러 기독교 잡지에 원고를 투고하여 기독교 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게재... 레이놀즈는 1892년 2월에 「선교」(The Missionary)라는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했다. “지금 조선 왕실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입니다. 현재 조선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강하게 반대할 만한조직화된 종교도 없습니다. 현지의 선교사들만으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선교역량을 모두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조선 선교는 우리와 쉽게 협동할 수 있는 북장로교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237-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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