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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전남 선교의 선구자 배유지 목사” - 차종순

by [수호천사] 2021.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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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선교의 선구자 배유지 목사 - 차종순

 

  • 189211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의 7인의 선발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한 이래로 18931월에 7명이 모두 다 도착하였다. (16)

  • 1893128일 선교사 공의회가 결성되고, 충청도 남부지역과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를 남장로교 선교회에 할당하였으며, 이눌서 목사는 1893년 전주에 조사를 보내어 서문밖에 집 한 채를 사두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고, 전주의 양반 텃세가 심하고, 또한 외국인의 내지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여 본격적인 선교를 자제하고 있었다... 18943월에서 5월까지 남장로교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이눌서 목사, 유대모 의사, 그리고 한국인 어학선생 서(Saw) 선생과 함께 장거리여행... 선교부 설치 후보지... 군산, 전주, 목포... (16)

  • 배유지 목사... 1) 그가 세운 선교부는 나주 선교부(18973월에서 9월까지), 목포선교부(18983월에서 190412월까지) 그리고 광주 선교부(19041225) 등이다. 2) 그가 세운 학교는 목포의 남학교와 여학교 그리고 광주의 남학교와 여학교이다. 3) 그의 활동과 관계있는 한국인으로는 어학선생 변창연 조사(장로)와 김윤수 장로, 그리고 최흥종 장로/목사가 있다. (16)

  • 평양의 선구자는 마포삼열, 광주의 선구자는 배유지... 마포삼열 목사는 Yankee인 방면에 배유지 목사는 Dixie로서, 이분들의 활동에서도 어느 정도 출신지방적인 기질이 있다고 할까(?) (16)

 

I

 

1. 배유지 목사의 선교활동

 

  • 1868년 미국 켄터키주 스코트 스테이션(Scott Station, Kentucky)에서 태어난 배유지 목사는 중앙대학교(Center College)와 루이빌 신학교(Louisville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루이빌 신학교 교장의 딸 로티(Lottie Withespoon Bell)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16-17)

  • 1895212일 오세아닉(Oceanic)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하여 49(화요일) 서울에 도착하여, 동료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Dixie에 여장을 풀었다. 1895년 서울에 머물면서 크게 활동하지 못하고 어학을 배우는 데 주력하였으며, 610일 개최된 연례선교사 회의에서, ‘전위렴과 유대모는 군산으로, 최의덕 남매는 전주로, 이눌서와 배유지 그리고 장차 도착할 의사는 목포로결정하였다. (17)

  • 조선의 정치적 회오리 속에서 복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소신을 더욱 굳혔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임금과 정치인들은 참으로 한심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자연히 배유지 목사의 신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17)

  • 왕은 지금도 러시아 공사관에 계시므로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백성들은 임금이 그곳에 가 계신대 대하여 몹시 불만스러워한다. 한국은 스스로를 다스릴 힘이 없는 덧 하다... 내가 전해들은 정보가 틀리지 않는다면 한국의 관직을 맡은 관리들에게는 정해진 급료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상당히 많은 관리들에게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럼에도 관리들은 자신과, 가족과, 친척들까지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살이 비대해지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쥐어짜지면’, 오로지 오랫동안 견디어온 한국인만이 이 쥐어짜기를 견딜 수 있다.” (17)

  • 관료들의 부패... “이 백성들에게는 복음 이외에 결코 다른 희망은 없다. 그들은 상당한 기간 정치적인 독립을 얻지 못할 것 같다. 관리들은 너무나도 부패해 있으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17)

  • 한국의 임금은 버린 자식과 같다. 임금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지려 한다.” (17)

  • 1895년 여름 콜레라 퇴치 활동에 참여해썬 공로를 표창하는 의미에서 고종은 배유지 목사에게 강화도 화문석을 연말에 보내왔다. 그리고 단발령과 평상복의 색깔을 하얀색에서 검정색으로 변경토록 명하였다가, 명성황후의 국상발표후 다시 하얀색으로 바꿔입으라고 어명을 내린 것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움을 주는가를 피부로 느꼈다. (18)

 

2. 목포선교부 부지 매입여행

 

  • 1895년 서재필과 윤치호가 귀국하여, 한국정부의 속사정을 영어로 시원스럽게 들을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한 정보를 얻곤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목포의 개항소식이었다. (18)

  • 1896211일 아관파천이 있던 바로 그날 배유지, 이눌서 목사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의 선교부 부지를 구입하기 위하여 항해하였는데, 그 배에는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귀향가는 면식있는 조선인이 있었으며, 그 죄인이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목포에 도착하여 토지 구입을 서둘렀으나, 개항 예정지는 일본인들과 천주교회에서 사버렸기 때문에 도시 외곽 일본 영사관 건너편 땅 2에이커를 $51/은화(51)에 구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개항이 미뤄졌기 때문에 목포 선교부 개설도 또한 연기되었다. (18)

 

3. 나주선교부 개설과 좌절

 

  • 군산에 자리잡은 전위렴 목사와 유대모 의사는 전라북도에 전주와 군산이라는 두 개의 선교부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로 위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하였다. 선교부의 기본 입장은 전라남도 목포를 염두에 두었으나 개항이 미뤄짐에 따라 나주를 고집하였다. 이렇게 하여 189611월 선교회 소속 선교사 전원이 광주의 관찰사 윤웅렬과 교분도 나눌 겸 나주를 방문하고 전원이 개설의 뜻을 밝혔다. (18)

  • 18973월부터 배유지 목사는 어학선생겸 조사 변창연 씨 가족을 이끌고 나주에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선교에 임하였다. 본래는 나주의 구 관찰사 건물을 구입하기 위하여 서재필을 통하여 교섭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8)

  • 그렇지만, 나주는 단발령 이래로 고조되어 온 반-외국인 정서가 강한 곳으로서, 배유지 목사를 협박하고 선교를 방해하는 등 전남 선교의 거점으로 기대하였던 원래의 희망을 무너뜨리고말았다. 9월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주선교를 포기하려 할 즈음에 목포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18)

 

4. 목포 선교

 

  • 목포의 개항은 진남포와 함께 1897101일에 실시되었다. 배유지 목사는 곧바로 목포로 달려갔으며 12월경에 흥정과 예비계약을 마치고, 18983월에 목포에 도착하여 대금을 지불하여 곧바로 사택건축에 착수하였다. (18)

  • 목포에 자리잡은 배유지 목사는 축호전도, 도로변에 텐트를 설치하여 행인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장막전도, 그리고 집구경을 통한 전도 등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1월에 오기원( Clement C. Owen) 의사가 도착하고 1212일은 사택이 완공(Miss Maria Barry 기념관)되고, 1899년에는 여성과 아동선교를 전담할 스트레퍼(Miss Fredirica Straeffer)양이 도착하였다. (19)

  • 배유지 목사는 18999월에 ‘4명이 세례받겠다고 신청하였으며, 지금까지의 죄를 끊고 예수를 믿겠노라고 작정하는 회중이 20여명에 이른다라고 편지하였다. 190035일 목포 대리당회가 조직되어 30명을 문답하였으며, 6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8명은 학습교인으로 받아들이고, 3명의 유아세례를 베풀고 나머지 16명은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헌금 총액도 $10에 이르렀다. 514일 제2차 대리당회를 개최하여 김윤수씨를 문답하였다. (19)

  • 1901년에는 목포교회의 교인수가 50명에서 75명 정도로 늘어났으며, 설교를 두 번씩이나 할 정도였다. 배유지 목사는 190149일 화요일 밤에 전주지방으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411일 목요일 저녁에 부인의 병환소식을 전주에서 전보로 접하고, 곧바로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려고 하였는데, 군산에 도착해 보니 부인이 운명했다는 전보가 도착해 있었다. 부인을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서울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고, 두 자녀를 데리고 5월 미국으로 갔다가 1년 반 뒤인 190212월에 목포에 다시 부임하였다. 그후 목포교회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으며, 제자리걸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에 이눌서 목사가 잠시 맡았다가 성서번역 위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로 감으로써 목포교회는 김윤수 집사가 이끌었다. (19)

  • 배유지 목사는 190212월 목포로 다시 돌아왔으며, 1903628일에는 배유지 목사의 첫 번째 부인을 기념하는 200석 규모의 교회당(Lottie Witherspoon Bell Memorial Church)을 헌당하였다. (19)

  • 목포의 선교의 한계성... 1) 목포의 인구가 인근 지역까지 포함하여 5,000여명인데, 그 가운데 일본인이 1,000여명이었다. 2) 개항지로서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3) 처음부터 염려하던 식수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4) 배유지 목사의 잦은 공무여행이었다. 5월에 2주간 서울에서 열리는 성서공의회 회의참석, 여름 동안의 장마로 인한 선교업무의 중단 9월 한달동안 선교회 연례 선교대회 등이었다. 5) 부인의 문화적 충격과 고립과 18965월에 큰아이 헨리를 출산하고 18991월 둘째 아이 샬롯트(Charlotte)가 태어나는 등 가정사에 매달리는 일이 많았다. 또한 부인의 죽음은 목포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하였다. 6) 1898년을 기점으로 외국인의 내륙거주가 허용되었다. (19)

 

5. 광주 선교

 

  • 목포선교부... 신자들을 초창기 조사로 활용... 배유지 목사가 19015월에서 190212월까지, 오기원 의사가 1901년 병가로 그리고 이눌서 목사는 서울 성서번역 위원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김윤수, 지원근, 마서규, 임성옥 등은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19)

  • 1902년 초에 오기원 의사가 돌아오고, 12월에 배유지 목사가 돌아오고, 190311월 프레스톤(John F. Preston : 변요한) 목사가 옴으로써 교회당을 건축하고, 광주 인근 지역으로 선교하였다. 그 결과 하나말교회, 잉계교회, 영신교회, 바다등교회, 도둠교회, 배치교회 등이 세워졌으며 지원근(전도사)이 상주하면서 이들 교회를 돌보았다... 그러나 이들 교회가 세워진 곳은 대부분, 하층민들의 지역이었으므로(영신교회는 역촌이었다) 지역 유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선교지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19-20)

  • 남장로교 선교회는 19042월 목포에서 개최된 -선교회 성경협의회에서 광주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할 것으로 합의하였으며, 배유지 목사와 오기원 의사에게 사전 답사를 의뢰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에는 김윤수 집사를 광주선교부 부지 매입 대리인으로 선정하여 56,000여 평의 땅을 $2,100에 매입하여 배유지 목사와 오기원 의사의 사택건축에 착수하였다. (20)

  • 배유지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의 부위렴 선교사의 여동생인 불(Miss Margaret Wiaker Bull)5월 미국의 노포크(Norfolk, Virginia)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새색시와 함께 9월 목포로 돌아왔다. (20)

  • 10월부터 배유지 목사는 광주 인근 지역의 전도와 사택건축에 박차를 가하여, 1215일 건축이 완료되었다. 배유지 목사, 오기원 의사, 조사 변창연 그리고 김윤수 집사 가족이 1219일 목포를 떠나 1221일 광주의 새로운 일터에 도착하였다... 1225일 크리스마스 예배에 인근 주민들을 초청하는 안내문을 보내고, 직접 찾아다니면서 구두로 초청하였다. (20)

  • 이렇게 시작한 광주군 양림리교회는 배유지 목사의 지도에 따라 크게 성장하였다. 19052월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집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가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라고 하였으며, 19059월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배유지 목사는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은 작게는 한손으로 셀 수 있는 숫자로부터 150명에 이르도록 왔다 갔다 한다라고 보고하였다. 1906년 봄에는 교인들의 헌금과 선교사들의 헌금을 합하여, 시내 중심부에 예배당을 짓고 이전하였다. (20-21)

  • 1907년에는 평균 60여명이 꾸준히 예배를 드린다고 하였으나, 연말에 이르러 몰려드는 교인들을 수용하고, 또한 광주에서 주기적으로 개최하던 성경학교의 인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교회를 확장하여야 했다. 그러나 1907년에는 정확하게 시기를 밝힐 수 없으나, 첫 번째 세례문답과 세례식이 거행되었으며 동시에 유년주일학교가 시작되었다. (21)

  • 1908년에 모인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배유지 목사는 지역교회의 회중은 약간 증가세를 보였다. 이제는 125명에 일이르렀다. 이 가운데에서 25명은 금년에 문답하였으며, 18명은 요리문답 교인으로, 그리고 4명은 세례교인으로 받아들였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1908년은 광주 인근에 의병활동이 전개되고, 특히 의병이 광주에 쳐들어온다는 소식 등으로 인하여 선교에 적잖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21)

  • 의병의 활동은 자연히 선교의 원활한 활동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광주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은 의병에 대해서 하나같이 달갑지 않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병이라는 표현보다는 반도(reble), 산적(bandit), 불법자(outlaw) 등등의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21)

  • 나이도 많고 신실한 조사였던 김문삼(장성군 보생리 교회) 씨는 의병에 참여했다는 풍문만으로 한국 국인들에게 붙들려 정신을 잃도록 두들겨 맞았으며, 6주 이상이나 걸을 수 없었다이로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잠시 쉬었으며, 심지어는 교회를 끝까지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 (22)

  • 우리는 폭동이 빨리 끝나기를 참으로 바란다. 일부 무식한 자들과 그릇되게 인도된 사람들이 산적들과 불법자들과 합류하지만, 이 운동은 동포들과 국가에게 슬픔과 괴로움만 가져다 줄 뿐이다’ (22)

  • 광주의 지역교회는 1909년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교회의 회중은 250명에서 3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 1910년 선교사 연례대회에서는 4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한 다음에, 시내교회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로 또다시 확장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1년 선교사 연례대회에서는 5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 (22)

  • 배유지 목사는 1912-1913년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나왔으며, 1916년에는 광주의 지역교회(북문안교회)의 당회원을 이기풍 목사에게 넘겨주고 순회구역 선교에만 전념하였다. (22)

 

6. 두 번째 부인의 사망과 귀국

 

  • “326인 배유지 박사 부부, 노라복 목사, 목포의 크레인 등은 배유지 목사가 새롭게 구입한 차로 서울을 떠나서 광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배유지 목사가 운전하고 노라복 목사는 운전석 옆좌석에 그리고 배유지 목사의 부인과 크레인 목사는 뒷좌석에 앉았다. 차가 수원을 지나 병점에 도착하여 기차 건널목에 이르렀으며, 기차의 진입을 확인한 다음에 차의 앞부분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기차가 들이닥쳐서 차의 뒷부분을 받쳤다. 배유지 목사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왔으며, 노라복 목사는 눈을 다쳤으며, 뒷자리에 앉았던 배유지 목사으 ㅣ부인과 크레인 목사는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22-23)

  • 이 사고로 인하여 배유지 목사는 부인과 동료를 죽인죄목으로 재판정에까지 섰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이렇게 하여 배유지 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아내의 재산을 정리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마무리하였다. 그동안 모교인 켄터키주 중앙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23)

  • 다시 한국으로 나온 배유지 목사는 1921년에 세 번째 부인인 동료 여자선교사 디샤트(Julia Dysart)와 결혼하였다. 1922년에는 큰딸 샬롯트가 교육선교사 린톤(William A. Linton)과 결혼하는 것을 보는 기쁨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수로 두 번째 아내가 죽어ᅟᅡᆻ다는 자책감을 늘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는 활발한 선교활동보다는 조용한 정책입안, 자문 등으로 지도자적 위치를 지키다가, 1925928일 갑작스럽게 죽었다. (23)

  • 광주선교부는 'Resolution of the Korean Mission on the Death of Rev. Dr. Eugene Bell'이라는 애도사를 발표하였다. 광주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에 자리한 그의 묘와 그가 1908년에 시작한 수피아여학교 교정에 위치한 배유지 목사를 기념하는 예배당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23)

 

II.

 

1. 변창연 조사(장로)

 

  • 배유지가 처음으로 만났던 조선인에 대한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런데 1995년 가을부터 1896년 봄까지 여성 선교사 데이비스양의 어학선생으로 있던 변창연을 18964월에 소개받았다. 변창연에 대한 배유지 목사의 찬사는 진심어린 것이었다. “그는 그녀로부터 복음을 듣기 전까지 일찍이 복음을 접해 본 일이 없었다. 그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다음에 그는 개종하였으며 최근에 세례를 받았다. 개종자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찾는다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가 발견한 구세주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곤 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이 사람과 같은 경우는 우리가 주변에서 드물게 발견하는 단 하나의 사례이다.” (23-24)

  • 변창연 조사는 배유지 목사를 동행하여 18973월에 가족과 함께 나주로 이주하였다... 9월에 배유지 목사가 나주를 떠나 목포에 토지를 구입할 때에도 나주를 더나지 않고 지키다가 1899년 가을에서야 목포로 거처를 옮겼다. 배유지 목사의 조사로 활동... (24)

  • 1904년 광주 선교부를 개설할 당시에 배유지 목사 가족과 함께 광주로 이사했으며, 배유지 목사의 순회구역 조사로 활약하였다. 1914년에는 광주영신교회의 장로로 목회에 임하였으며, 191876일 제2회 전남노회에서 교회 사기 수집위원으로 배유지, 변창연, 이기풍, 변요한으로 지명되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전남노회편 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24)

 

2. 김윤수 장로

 

  • 본 직업은 총순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그를 김대장(Captain Kim)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8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원산의 총순직을 맡았다. 본인의 간증에 따르면,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한껏 마귀를 섬겼으며, 술을 만들어 팔았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박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술집여자를 사고 팔기도 하였으며, 한때는 첩을 3명이나 거느리고 살았다... 원산에서 총순으로 근무할 때, 노름꾼을 두들겨 죽임으로써 목포로 이전되었다.’ 목포의 총순을 맡았던 그는 여전히 주조장을 경영하면서 기와집을 가진 실력자였다. (24)

  • “1900년 제2차 당회에서 김윤수라는 흥미있는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어머니의 손에 난 종기를 오기원 의사가 진료소에서 치료하였다. 그는 주조장을 경영하였으며, 이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으므로 학습교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세 번째 문답에서 그는 세례를 받았으며... 부인과 어머니와 장모를 교회로 인도하였다.” (24)

  • 그는 1902년에 집사로 임명되어 1903년 목포교회당 건축공사를 총감독하였으며, 건축비 2,500냥 가운데 200냥을 헌금하였다. 변요한 선교사가 도착한 이래로 그의 어학선생을 맡았으며, 윤치호에 대하여는 소금이 맛을 잃은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래서 남장로교 선교회는 목포에서 다른 업적이 없고 다만 이 사람의 개종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라고 평가하였다. (24)

  • 김윤수 집사는 1904년 광주의 선교부 개설 당시 강력하게 긍정적으로 주장하였으며, 광주 선교부 부지 매입 대리인으로 활약하고 광주 선교부 건설공사를 총감독하였다. 그는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광주 선교부의 총무일과 전도인으로서의 일까지 맡았었다. (24)

  • 광주에서의 그의 직업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방림리에 큰 집을 지니고 살았으며, 광주 양림리교회에 찾아오는 외국 손님들의 접대를 언제나 도맡았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순회구역을 순방할 때에는 광주교회의 수요일 밤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으며, 주일학교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24)

  • 특히 김윤수 집사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설립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초대 교장이었던 엄안라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19년전 선교사들의 집뜰을 배회하는 소녀들을 보았다. 이는 야심만만한 진실한 기독교인의 딸들로서 자신의 딸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갈망하였다. 일이 얼마지 않아 이 소녀들의 아버지인 김선생은 자신들을 길잃은 양이라고 호소하면서 즉시 학교를 시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본인이 책임을 맡아 학교를 시작하였다.” (24-25)

  • 김윤수 장로는 19128월 최흥종 씨와 나란히 장로임직을 받음으로써 광주에서의 최초의 장로가 탄생하였다. 그는 양림교회 당회원으로서 이기풍 목사님을 광주 양림교회로 모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즉 이기풍 목사님이 1915년 성음부족증으로 광주에서 휴양할 때,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며, 1916년에는 이기풍 목사를 양림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모시는 데 성공하였다. (25)

  • 김윤수 장로는 22세 연하의 부인 정금계 권사 사이에 김명은, 김홍은, 김일생 그리고 김정은 등 13녀를 두었으며, 1919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광주 제중원에 입원하였으며, 광주에서도 만세를 불렀다(310)는 소식을 듣고 병사에서 일어나 대한민국만세를 외치기도 하였으며, 그로부터 며칠 지나서 하늘나라로 갔다. 배유지 목사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광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다시금 채울 수 없는 빈자리를 남겼다라고 말하였다. (25)

 

3. 최흥종 목사

 

  • 광주 양림교회 출신으로서 광주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최흥종 목사일 것이다. 그의 애국적인 열정과 순교자적인 정신과 영웅적인 신앙생활은 그의 개종만큼이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교회의 목회자로, 선교사로, 사회봉사자로, 청년지도자로 활동하다가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광주시민장이라는 예우를 받았다. (25)

  • 그는 광주의 토호 최학신과 어머니 담양 국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광주 주먹세계의 대부였다. 그러하던 그가 19041225일 최초의 예배에 참석한 이래로 배유지 목사와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부터는 순검으로 취직하여 의병을 뒤쫓는 일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 광주에도 국채보상운동 지회가 설립되고 활발하게 모금운동이 전개될 즈음에 국체보상운동 지회의 간판을 떼어오라는 명령을 받고 순검직을 사임하였다. 그후 1908년에는 논공은행에 취직하여 잠시 근무하다가 그만두었다. (25)

  • 19094월 오기원 의사의 와병과 그를 치료하기 위하여 목포에서 광주로 올라오던 보(W. H. Forsyhe) 의사가 나환자 여인을 남평부근(13mile)에서 말에 태우고 광주로 도착하여 품에 안아 말에서 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감화를 받아서 결신하였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을 앓다가, 김윤수 집사를 찾아갔다. 곧바로 배유지 목사에게 인도되어 아시다시피 저는 깡패입니다. 지금까지 남을 위해 좋은 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선교사님의 말씀만 들으면 모든 고민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마태복음 11:28-30을 읽어주었으며, 최흥종은 곧바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25)

  • 그후 광주 제중원의 우월순(R. M. Wilson) 의사의 조수로 발탁되어, 자신의 문중땅(광주시 봉선동)에 나환자 임시숙소를 마련하여 몰려드는 나환자 진료와 보호에 앞장섰다. 그는 이때로부터 선교사들로부터 장차 쓰임받을 재목으로 인정받았다. (26)

  • 1911년에 양림교회 집사로 임명되고, 1912년에는 김윤수 선배와 함께 장로로 임직하였다. 1913년 제3차 전라노회 석상에서 시베리아 선교사를 자청하였으나, 노회의 권면에 따라 자제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1914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이에 우월순 의사의 조수로서 나환자촌 업무와 광주 인근의 확장주일학교 운영에 크게 관여하였다. 이 가운데 하나인 광주 누문동 종루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주일학교를 이끌다가, 이 모임이 점점 확대되어 현재의 광주 금남로 중앙교회 자리에 있는 한옥을 구입하여 1917년부터 교회로 전환하였다. 이것이 북문밖교회이며, 오늘날의 광주 중앙교회(합동, 개혁측)의 시작이다. (26)

  • 191931운동이 한창 진행될 즈음에 김필수 목사가 광주에 내려와 김철 선생(숭일학교의 교사이며, 광주 양림교회 집사)과 최흥종 장로에게 광주 거사의 책임을 맡겼다. 최흥종 장로는 서울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서울로 갔다가 파고다 공원앞에서 만세부르는 물결에 휩싸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롭터 14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206월에 광주로 내려와서 북문밖교회를 시무하였다. (26)

  • 1921128일 목사 임직을 받고 북문밖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721일에는 지금까지 사용하던 한옥을 개조하여 새로운 교회당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설립된 광주 YMCA 2대 회장직을 맡으면서 청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목회하던 중, 1921년 총회로부터 시베리아 선교사로 지명받았다. (26)

  • 1922년 봄부터 1924년 봄까지 시베리아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러시아 당국에게 조선인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금할 것을 요구하다가 강제추방당하였다. 광주에 돌아온 최흥종 목사는 또다시 북문밖교회 담임목사직을 맡았다. 그러다가 북문 안에 있던 교회나 남문밖으로 옮겨서 예배드리다가, 대다수 교인들이 거주하는 양림동으로 교회를 옮기기로 가결하였다. 그렇지만 옮기기를 싫어하는 소수의 교인들이 남문밖에 남기로 완강하게 고집함으로, 이들도 별도의 회중으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최흥종 목사와 이득주 장로를 다시 모셔옴으로써 기존의 황상호 장로와 더불어 당회를 조직함으로써 교회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남문밖(혹은 금정)교회롸 양림교회로 양분하였다. (26)

  • 최흥종 목사는 192410월부터 남문밖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다가, 192511월 또다시 시베리아선교사로 자청하여 교회를 떠났다. 그는 조선의 동포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다가, 러시아 군인들에게 붙들려 해삼위 감옥에 수감되었다. 총살형을 언도받고 집행장에 끌려가 집행직전에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26)

  • 이때로부터 최흥종 목사는 사회봉사자로, 나환자 부랑아의 아버지로 전환한다. 서서평 선교사와 함께 부동교 다리밑에서 거지들의 보호소를 만들고 돌보았으며, 경양방축에 천막촌을 만들어 돌보았다. 그는 1927년 신간회 전남 지부장을 맡고, 광주 YMCA 농촌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26)

  • 또한 1932년에는 조선나환자 근절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윤치호 총무에 최흥종 목사 자신이 맡았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에서 나환자 150여명을 이끌고 우가키 총독을 찾아 도보-데모를 감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할 즈음에는 400여 명의 나환자가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얻어낸 장소가 소록도이다. (26)

  • 1933년에는 계유구락부를 조직하여 영세민 보호에 앞장섰다. 1935년에는 또다시 북문밖교회 담임목사를 맡았으나 일년만에 사임하고,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은거하였다. 1936년 서울 세브란스 병원의 오긍선 원장을 찾아가 정관절제수술을 받고, ‘최흥종 사망통지서를 친지들에게 발송하였다. 여기서는 자신은 다섯가지 욕심(색욕, 식욕, 물욕, 명예욕, 생명욕)을 끊었다고 말하고, 이제부터 자신의 호는 오방(五放)이라고 하였다. (26-27)

  • 1945년 해방과 함께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재건 광주 YMCA 회장, 미군정 전라남도 자문위원, 조선 나환자 근절대책위원회 설립 및 회장, 여수 애양원 임시단장, 소록도 갱생원 지원 등의 사업에 전념하였다. 1948년 호남신문사 사장직을 잠시 역임하였으며, 1949년 화가 허백련 선생과 함께 농민지도자 양성을 위한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다. 1956년에는 음성나환자를 위한 호혜원을 나주군 남평면에 설립하여 자활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1958년에는 기독병원 원장 고허번(Herbert A. Codington) 장로와 손을 잡고 결핵환자 생활터전인 송등원을 설립하였다. (27)

  • 이렇듯 가정을 돌보지 않고 사회사업에만 전념하면서 가산을 소비함으로써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1966514, 34일간의 금식 끝에 사망하자, 광주시는 서서평 선교사 이래로 두 번째의 사회장으로 예우하였다. 장례식 사회를 맡은 오동옥 목사에게 최흥종 목사의 아들로 인정받은 이영생씨가 말하여 식순에도 없는 호혜원 총무 최일담씨에게 추도사를 부탁하였다. (27)

  • 최흥종 목사의 동생 최영욱 의사는 전라남도 초대 도지사를 역임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북쪽 인민군에게 피살되었으며, 그의 부인 김필례 여사는 광주 수피아여고 교장 및 정신여고 교장을 역임하였다. (27)

 

III.

 

  • 가장 많은 착취와 학대를 받았던 전라도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그의 활동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7)

  • 배유지 목사의 큰딸 샬롯트는 린톤 선교사에게 결혼하였다. 사위인 린톤은 대전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자녀인 인도아(Dwight Linton), 인휴(Hugn M. Linton)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에 임하였으며, 그의 외손자인 요한(John Linton)은 지금도 연세대 의대 부속병원 외국인 진료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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