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근(2014).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의 선교와 신학. 장신논단, 46(2), 137-163.
I.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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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의 한국선교는 1892년 “7인의 개척자”의 내한으로부터 시작한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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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이 1925년 9월에 생을 마감할때까지 잠간씩 평양신학교에서 교수사역(1907~1923년)을 한 일을 제외하고는 광주지부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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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선교신학과 방법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이었다. 이것은 북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장로교 한국선교의 원리와 신조로 채택된 이후에 한국 장로교의 성립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선교방법론이다... 평양에 마펫이 있었다면, 광주에는 유진 벨이 있었다는 평가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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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우스 선교방식에서 강조하는 자립, 자전, 자치가 유진 벨의 선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실현되었으며, 그의 선교의 핵심적인 방법과 목표로 자주 강조되었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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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우스 선교의 핵심은 현지인 그리스도인들을 선교의 객체로만 보지 않고 교회와 선교의 주체가 되게 하는 자립적이고 자생적인 토착교회 형성에 있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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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으며, 성공적인 선교를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선교사와 현지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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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초기에 북장로교의 지원과 협력은 선교의 개시와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또한 북부지역, 특히 평양에서 북장로교의 선교사역은 남장로교 선교의 모델과 귀감이 되었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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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장로교 선교부들이 한국에서 선교사공의회를 형성하여 긴밀하게 협력하였고, 상호 차이점을 넘어 일치를 추구하면서 하나의 신학교와 하나의 장로교 총회를 설립하며 연합한 것은 한국 선교의 특징이며 성공한 중요한 이유라고 보았다. 또한 선교부간 연합과 일치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보수적인 복음 이해와 복음주의적 확신에 있다고 보았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한국교회의 연합의 기초임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복음주의적 연대 위에서 장로교 선교부 간 연합뿐만 아니라 더 넓은 교파연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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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신학적 보수주의는 그의 엄격한 장로교 정통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장로교 신학과 교리에 관한 글들은 그의 엄격한 칼뱅주의 정통주의적 신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진 벨에게 있어서 이러한 장로교 정통주의가 배타적인 교파주의로 나타나지는 않았고, 그의 복음주의적 교파 연합주의와 조화하였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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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선교는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순회전도를 하며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복음전도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교육과 의료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이를 복음전도와 병행하여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나가는 복음-교육-의료 간의 통합적 선교를 지향하였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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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와 마찬가지로 감리교 역시 복음전도와 교육과 의료를 병행하는 통합적 선교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음과 교육과 의료의 병행에 있어서 감리교와 장로교 사이에, 그리고 장로교 안에서도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에 강조점과 균형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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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안에서도 특히 북장로교는 복음전도에 압도적인 우위를 두었고, 교육과 의료 기관의 성장이 복음사역을 위축시키는 것에 대하여 우려하고 비판하였다... 남장로교 역시 복음전도에 집중하였지만, 북장로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으로 교육과 의료 선교를 행하였다. (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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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선교 신학과 방법 분석... 1)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대한 강조와 적용, 2) 복음전도를 강조하면서 교육과 의료 선교를 병행하며 연결하는 통합적 선교, 3) 장로교 정통주의적 신념과 보수적 신학, 4) 보수적 복음주의에 기초한 교파연합주의.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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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복음 전도에 집중하면서 교육과 의료를 포괄하는 선교, 또한 장로교 정통주의에 기반한 보수적 신학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교파들과의 연합과 협력을 추구하는 선교를 지향하였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143)
II. 선교 준비와 초기정착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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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1868년 4월 11일, 켄터키주 스콧스테이션(Scott's Station, Kentucky)에서 아버지 윌리엄 헨리 벨(William Henry Bell)과 어머니 프란시스 베너블 스콧(Francis Venable Scott)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9년에 켄터키주 리치몬드의 장로교 학교인 센트럴대학교(Central University)에 입학하여 1891년에 학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곧바로 이 대학의 임시신학과정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버지니아주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93년에 개교한 루이빌신학교로 옮겨와 졸업하고 1894년에 신학사(B.D.)를 취득하였다. 1893년 5월 16일에는 루이빌노회에서 목사안수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1893년 11월 13일에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았고, 1894년 4월 18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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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 26일에는 센트럴대학교와 루이빌신학교 은사인 토마스 드와이프 위더스푼(Thomas Dwight Witherspoon)의 딸, 로티 위더스푼(Charlotte Ingram Witherespoon, 애칭으로 Lottie)과 켄터키 리치몬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로티는 버지니아에 있는 어거스타여자신학교(Augusta Female Seminary)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로티도 유진 벨과 함께 1893년 11월 13일에 남장로교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이미 결혼 전에 한국선교를 약속하고 함께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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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연구에서는 로티의 아버지가 루이빌신학교 교장이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그는 버지니아 대학교 교목(1871~1873)을 거쳐, 버지니아 피터스버그의 탭 스트리트 장로교회 목사(1873~1882)와 켄터키 루이빌 제일장로교회 목사(1882~1891)를 역임하였고, 그 후 센트럴대학교에서 성경 및 기독교 변증학 교수로 봉직하였으며(1891~1892), 1892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리치몬드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1892~1894)로 일하였다. 1894년부터 1898년에 사망할 때까지 루이빌 신학교에서 설교학 및 목회신학 교수로 일하였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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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청일전쟁의 여파로 인해 유진 벨 선교사를 한국대신 중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가 한국선교부의 강력한 반발로 결정을 번복하고 원래대로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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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월 1일, 선교지 한국으로 출발하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4월 9일... 서울의 남장로교 선교사촉 딕시(Dixie)에 도착하였을 때, 마펫과 언더우드를 비롯한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동료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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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공부...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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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남장로교 선교부는 장로교 선교사공의회에서 충남과 전라도 지역의 선교를 할당받음... 1894년 제3회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테이트 남매를 전주에 파송하고 이후에 전주에 남장로교 선교부의 첫 번째 상설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의...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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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5월에 레이놀즈와 드루가 남장로교 선교지역이 전주, 군산, 목포, 순천을 답사... 군산이 제2의 선교지부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발발과 청일전쟁의 여파로 남장로교 선교부의 남부지역 개척과 선교는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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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선교 준비를 하던 유진 벨은 1896년 2월에 레이놀즈와 함께 목포로 내려가서 머지않아 개항장으로 열리게 될 이곳에 선교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러나 개항이 미루어지면서 목포지부 개설은 연기되었다.... 나주에 선교지부를 개척할 것을 결의하였다. 나주가 목포에서도 가깝고 이 지역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선교지부로서 더욱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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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3월에 어학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전초기지로 사용할 주택을 마련하고자 했던 유진 벨은 시련에 봉착하였다. 조사 부부의 명의로 25불을 주고 주택을 구입하였는데, 처음에는 우호적이던 주민들이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태도가 공격적으로 급변하였다. 주민들의 반대 이유는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 외래의 새로운 교리나 사상이 유입되는 것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었다. (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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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로교 한국선교 5주년을 회고하는 유진 벨의 보고서... 네비우스 선교방법에서 강조하는 적극적인 복음전도와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순회하며 내지에 침투해 들어가는 선교전략, 이를 위한 철저한 언어훈련, 복음전도의 길을 개척하고 기독교의 터전을 확고히 마련하기 위해 전도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하는 통합적 선교방법이 유진 벨이 요약한 남장로교 선교방법이라 할 수 있다.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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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1897년 9월에 있었던 방문에서 유진 벨은 살해의 위협마저 당하였다... 목포가 1897년 10월 1일에 개항되어... 나주는 잠정 보류하고, 목포에 선교지부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을 유진 벨이 맡게 되었다. (147)
III. 네비우스 선교방법과 통합적 선교
1. 목포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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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1898년 3월에 목포로 내려가 정착준비를 하였다. 5월에는 목포에 임시거처가 마련되었고, 한국선교부에 새롭게 부임하는 의료선교사 오웬(오기원)이 배정되어 함께 목포 개척을 하였다. 1898년 9월 초순에 유진 벨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가족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왔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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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여름 유진 벨은 목포에서 약 30명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교회가 목포 양동교회였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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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유진 벨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충실히 따랐다... 유진 벨이 선교초기 목포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던 선교는 오웬이 시작한 의료선교였다... 유진 벨은 의료사역이 선교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 있으며 자신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역이라고 보았다. 이로 보건대, 의료사역은 개척지에서 복음이 뿌리내리는 데 유용하였으며 유진 벨의 선교에서 복음전도와 함께 선교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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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선교의 결정적인 위기... 유진 벨의 부인 로티의 갑작스런 사망... 유진 벨은 선교를 중단하고 두 자녀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고, 곧이어 오웬과 그의 아내도 심각한 건강문제로 인해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나게 되어, 목포 선교지부는 당분간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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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머물던 유진 벨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입장에서 한국선교를 정리하는 글, “The Situation in Korea”를 선교잡지에 기도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남장로교 선교부가 선교를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그 결과가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헌신적인 현지 그리스도인들의 질적 수준과 남장로교 선교가 추구하는 자립과 자전의 선교원리로 인한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또한 치리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이것이 한국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높은 수준을 세워나가는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고 보았다. (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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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더스푼 기념예배당... 1903년 봄에 건립... 건축비(2500냥) 가운데 4/5를 현지인이 부담... 25명의 수세교인 대부분이 한 달에 5불미만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이 이러한 건축을 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헌신이며 자기부정의 삶이라고 극찬... 이들을 이끌어 교회건축을 지도해 나간 김윤수 집사를 가리켜 “지금까지 보아온 중에 가장 열정적인 한국 그리스도인”이라고 평하면서 그의 신앙과 지도력을 칭찬하였다.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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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 1903년 선교보고에서, 유진 벨은 목포에 남자학교와 여자학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청하였고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의료사역도 매우 절실히 요청된다고 보고하였다. (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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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는 복음전도보다 오히려 교육과 기관선교에 집중하였고, 북장로교는 의료를 부수적이고 예비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면서 복음에 종속시키려 했다는 측면이 강하다. (150)
2. 광주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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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광주의 선교전망이 매우 높다고 보아... 조사(지원근)을 파견하여 교회의 토대를 닦음... 1904년 연례회의에서 남장로교 선교부는 광주에 네 번째 선교지부 개설을 결정하고 유진 벨과 오웬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그 사이에 유진 벨은 1904년 5월 10일에 미국 버지니아 노폭에서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불(William Ford Bull, 부위렴)의 여동생인 마가렛 휘태커 불(Margaret Whitaker Bull)과 재혼하고 1904년 9월에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복귀 후에 그는 오웬과 함께 광주의 선교지부 개척에 전념하였고, 유진 벨과 오웬 가족은 12월에 광주로 옮겨왔고, 성탄절 주일에 첫 주일 예배를 드렸다. (15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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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선교 역시 네비우스 선교방식이 철저히 적용되었다. 광주를 거점으로 9개의 선교지소(outstation)가 있었고, 교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배처소를 세우고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여러 마을에서 쇄도하는 복음에 대한 요구에 다 부응할 수 없을 만큼 광주지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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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과 자전을 넘어 자치로... 한국인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스스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 1905년 2월과 3월에 선교지소를 돌면서 유진 벨은 각 그룹의 리더들을 광주로 모이게 하여 따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능력있는 현지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또 지도력을 개발하였다.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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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랫동안 확신해 오는 바는 우리 선교지에서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지인들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현지인 지도자들과 조력자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계발(啓發)하는 데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왔다.”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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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성공은 복음 전도에 대한 집중과 효율적인 선교방법의 철저한 실행도 중요하였지만,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의 헌신과 지도력이 결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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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보고서에서도 유진 벨은 한국인 지도자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선교와 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선교사들과 현지 지도자들 간의 신뢰관계와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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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선교는 유진 벨이 교육과 의료사역을 복음전도와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 하는 통합적 선교의 한 면을 보여준다... 유진 벨은 1908년의 괄목할만한 성과로 교육사업을 들고 있다... 유진 벨은 광주 선교지부의 모든 교회가 하나의 소학교(교회학교)를 가지는 것과 남학교와 여학교를 충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나 전문학교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의료 선교 역시 윌슨(Robert Manton Wilson, 우월순)의 합류로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라 전망하면서, 복음과 의료의 상호연결과 그 필요성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152)
IV. 교파연합주의와 장로교 정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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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1907년부터 1923년까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성서학 강의를 하였다. 평양장신은 북장로교 선교부 지역에 있었지만 네 개의 서로 다른 장로교 선교부가 교수를 파송하여 신학교육을 하는 장로교 연합신학교였다. 유진 벨은 네 개의 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고 일치하여 하나의 장로교회를 이룬 것은 한국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전통이라고 강조하였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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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공의회... “권고적 권한”... 선교부들이 상호 협력하면서 공의회의 결정과 권고를 무시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장로교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다. (15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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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장로교공의회]에서는 선교부에 따라 표가 갈린 적이 없었다... 한 선교부와 다른 선교부 간에 분쟁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현지인과 외국인 형제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우리는 장로교와 개혁교회 신앙의 근본적이며 역사적인 교리들의 근간 위에 조직되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연합을 믿는다. 온 나라를 통틀어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운 것 외에 다른 일을 했다면 그것은 범죄행위였을 것이다.”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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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한국교회가 미국교회가 그러는 것처럼 근본적인 신앙을 저버리게 될 때, ‘곧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을 의문시하는 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자고 고집하는 때가 온다면 분열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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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간 연합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들과의 연합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연합과 협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만을 바라보면서, 바르지 못한 기초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복음에 대한 바른 신학이 없는 연합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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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이 말하는 교파간 연합과 협력은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서 성경의 완전영감과 무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몸의 부활을 믿는 근본주의적 신념을 공유하는 연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러한 보수적 복음주의를 공유하며 교파간 연합과 협력이 가능하였지만, 이미 그의 말속에 한국교회에 드리우고 있었던 분열과 신학적 갈등의 징후가 보였다.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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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보수적 신학의 뿌리는 장로교 정통주의였다.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신학의 주 내용이 칼뱅주의와 관련된 계약사상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예정론, 이신칭의와 성화의 구원론이었고,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의 사상이 그의 신학 안에 흐르고 있었다. (155-156)
V.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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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1914년 외국인으로는 마지막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얻었다. 또한 1918년 5월 31일에는 모교인 센트럴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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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6일 제암리교회 학살현장을 조사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로 아내 마가렛과 동료 크레인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유진 벨은 선교를 접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1922년 3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1925년 9월 28일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광주 북문안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평양신학교 강의와 전도사역, 저술작업을 하였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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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그는 나지 않은 길을 가고 닫힌 문을 여는 개척자였다. 목포와 광주를 개척하여 전남지역 선교와 기독교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선교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밑바탕에 있었다... 그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헌신과 수준 높은 영적 자질이 그의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라고 보면서, 진실하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을 양육하여 이들을 교회와 선교의 주체가 되게 하는데 힘을 모았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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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로교는 복음전도와 교육과 의료가 비교적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기독교의 기초가 닦여지지 않은 내지에서 의료와 교육이 전도와 병행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유진 벨은 목포와 광주에서, 복음전도의 진전이 교육과 의료 선교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기고, 이들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였다.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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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장로교 정통주의 신학에 근거한 보수적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장로교 선교부간 연합과 협력을 강조하고 이것이 한국 선교의 특징과 성공의 주요 원인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의 근본주의 신학은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연합과 협력의 끈이었고 그가 지향하는 교파연합주의의 출발점이었으나, 타협을 불허하는 그의 단호한 보수주의는 신학적 다양성을 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갈등과 분열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균형잡힌 선교...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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