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규홍, 『장로교회와 신학』 3 (2006), 87-110.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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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은 교회의 세상에 대한 도덕적 패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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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분열의 사회학적 기원을 쓴 리차드 니버의 이 말은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매우 도전적이고 의미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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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하나 되게 할 교회가 오히려 분열함으로 세상을 나누고 있다는 것은 분명 세상에 대한 교회의 도덕적 실패이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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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정치적 원인을 교권 문제 중심으로 논구...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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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색, 경제적 이권, 주도적 인물 중심적인 계파주의 등이 신학사상의 차이보다 교회분열에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87)
1.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의 재건과 주도권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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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남한교회는 일제 말에 신사참배를 반대한 뚜렷한 세력이 없었으므로 교회재건의 주체는 1945년 8월 1일에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주요인사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들은 남부총회를 개최하고 조선신학교를 남한의 유일한 장로교 직영신학교를 결의하고 우선적 장차 통일을 대비한 남한만의 총회란 성격을 분명히 하고 교회재건을 위한 교역자 양성을 과제로 삼았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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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력이 새로운 변수로 등장... 1) 북한에서 장로교회 재건에 주체가 되었던 출옥성도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이 북한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배제되어 박해를 받게 됨으로 남한 사회로 월남... 2) 미국의 남한 점령은 그 이전 한국 파송 미국선교사들의 재입국을 허용하고 그들이 한국교회와 사회의 새로운 지도세력으로 부상하며 한국교회의 정치지형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89)
1) 신학교 운영권과 교권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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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갈등...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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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분열이 신학교육기관을 중심에 두고 일어나는 것은 이곳이 교회의 지도력을 양성하는 교권세력 구성의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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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이사회... ‘합동 7원칙’(1948년 6월 28일)... 1) 신학교육은 순복음주의에 기초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준수할 것... 2) 양신학교 직원은 총 퇴진할 것... 3) 이사회는 총회에서 승인한 양교 이사로 조직하고, 회의 결정은 3/4이 가결로 할 것... 4) 교장과 교수는 북장로 선교회에서 3인, 남장로 선교회에서 2인, 캐나다와 호주선교회에서 각 1인씩 선출하여 중요한 과목은 그들에게 맡기고, 기타과목은 한인목사 중에서 적재를 택하여 맡길 것... 5) 교명과 교칙은 이사회에서 결정할 것... 6) 양교의 학생은 교칙에 의하여 재편성할 것... 7) 양교의 재산과 비품은 무조건 제공할 것 (91) ☞ 해방 이후 종교판 신탁통치안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적어도 신탁통치안은 몇 년후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영구집권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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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학교 ‘합동 7원칙’에 조신 측은 “1) 양교 합동을 위한 기도이니 만큼 양교 현 직원은 무조건 합동할 것, 2) 신교수 채용에 관해서는 선교사나 한인을 막론하고 적재를 이사회에서 선정 채용할 것, 3) 회의의 결정은 출석한 반수 이상으로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반면 장신 측은 “1) 모세오경 저작문제에 대한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사람은 교수로 채용하지 말 것, 2)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은 당연히 교수진에서 제외할 것, 3) 회의의 결정은 2/3의 가결로 할 것”을 주장했다. (91-92)
2) 한국장로교 분열과 서북의 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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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노선... 한국장로교의 신학은 복음주의에 기초하고 대한예수교회 신조를 준수한다는 것이다. 조신 측의 답신은 이점에 대해 의의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장신 측은 ‘합동 7원칙’에 제시되지 않은 모세오경 저자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날 총회의 결의에 의해 치리 된 과거사를 언급하였다. 이것은 이미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주창자 본인이 이 주장을 취소함으로써 종결된 사항이다. 또한 신학적 검증을 거치지도 않고 ‘자유주의 신학자’로 김재준을 단정하고, 그를 지목하여 배제한다는 것은 ‘합동 7원칙’에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다.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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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문제... 합동 7원칙에 대하여 조신 측은 명백한 이견을 밝히고 있다... 지금 현 직원들은 일정한 학교의 인사규정을 따라 임명한 이들이다. 이들의 임명을 취소하려면 적합한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전원 퇴진한다는 것은 교권의 남용이다. 인사문제를 이사회의 3/4의 찬성으로 표결처리한다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자칫 다수의 힘으로 사한을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장신 측이 2/3의 가결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내면동기에 수적 우월과 권력을 전제한 답신인 것이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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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관여... ‘합동 7원칙은’ 선교사들이 신학교육의 주도권을 갖고 한국교회의 변수로서 교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으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신 측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조신의 중심구성원인 김재준 목사를 비롯한 과거 모세 오경 저작부인과 관련된 함경도와 기창 지방 출신들을 배제하여 조신의 중심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를 강력하게 드러낸 것이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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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위원회 안은 처음부터 신학교육의 문제보다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 재건과 그 주도권 장악을 지향하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수에 의한 힘의 대결밖에 없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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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월 21일... 제36회 총회... 대구제일교회... 경찰의 출동으로 사태를 수습한 합동위원회는 이듬해 피난지 부산에모여 두 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새 신학교를 세우는 안건을 상정... 53대 3이란 다수결로 결정하였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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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측의 반대... 이 안건이 제36회 총회 결의대로 노회 수의를 거치지 않았고, 아무리 전쟁상황이란 비상사태라 하더라도 전회의 결의를 번안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총회에서 직결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특히 특별위원회의 두 신학교 취소와 더불어 새 신학교 설립 안은 광고보고로 받은 것 뿐이라 정식 토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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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제37회 총회는 소속 노회를 시켜 김재준 교수를 재명 처분하고 캐나다 선교사 윌리암 스코트를 처단하며, 조신 출신 졸업생들에게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결의하였다.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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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9일... 38총회... (95)
2. 서북교권의 주체형성과 교회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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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지역의 장로교회는 선교초기부터 교세의 급격한 성장으로 한국교회의 중심교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해방전 이미 한국교회의 정치지형을 좌우할 만큼 커다란 위상을 갖고 있었다. (96)
1) 서북지역교회 성장과 선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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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지역은 중국과의 무역통로... 조선조 500년 간 차별과 소외를 받은 곳으로 유교적인 전통문화가 깊지 않고 외래 종교인 기독교 수용에 개방적이었다... 일찍이 중앙관직으로 진출하지 못한 이들은 주로 농업보다 상업을 본업으로 하여 근대적 자본축적을 이루었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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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지역은 1893년 장로교 공의회가 지역분할정책에 의해 미국 북장로회가 할당받게 되면서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청교도적 지도력이 집중...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의한 자립적 구조가 맞물려 교회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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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지방의 장로교회 성장은 교세를 바탕으로 1919년 3ㆍ1운동 이후 변화된 한국사회 구조와 함께 종교 권력으로서 교권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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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남한교회는 기청 세력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교회 교역자들이 월남하여 남한교회에 편입하고 있지도 않은 망명노회 또는 무지역 노회의 명목을 총대자격을 가졌다는 것은 명백히 정치적 교권의 오용이이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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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교회에 북한교회 교역자들이 편입하는 과정... 1) 1947년 4월에 열린 제2회 남부총회에서 월남한 교역자들을 해당노회에 목사 3인의 추천으로 노회에 가입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2) 1952년 4월 제37회 장로회 총회는 비상 조치법을 제정하여 38이북 노회가 이남으로 월남한 것을 인정하고 1950년 9월 28일 이후 월남한 “수만 여의 평신도와 400여의 교역자”를 남한교회제도 안으로 흡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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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선 목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인 조신 측과 기청 세력의 배제를 위한 강력보수진영의 구성을 위한 준비 공작의 일환이었다. 문제는 38 이북노회 총회대표 숫자와 자격이었다... 해방 이전 북한지역 노회들 중 함경도 지역의 3개 노회가 1개 노회로 줄고, 만주 지역의 4개 노회가 폐지됨(이 두 지역은 기청세력과 연대하는 조신파의 기반이었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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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교권세력의 해방 후 교회재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교권의 남용은 이미 그 이전인 1932년 경중노회 분열이라는 적극신앙단 사건에서 전초전을 겪으면서 그 대립구도가 확고히 틀 잡은 것이다. (100)
2) 적극 신앙단 사건과 지역대립 구도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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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 신앙단은 1933년 당시 YMCA 총무였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되었던 초교파 신앙운동단체였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으며 이 운동에 참여한 주요인물들이 비서북계 교회 출신들... 민족운동 측면에서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에 대항하는 이승만의 ‘동지회’적인 성격을, 교회의 측면에서는 선교사 및 보수전통주의 신학을 내세우는 서북계 중심의 교회에 대항하는 자유, 진보주의적 신학을 표방한 기청 중심의 교회성격을 보여주었다.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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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교회는 마펫, 리, 훌드크로포트 같은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이들의 영향 아래서 한국기독교의 대세를 차지하고 있던 서북계의 장로교가 지배하였다. 신흥우는 비서북계인 서울을 중심한 감리교나 장로교 일부의 목사, 평신도들과 함께 1932년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였다... 한국적 교회수립을 목표... 함태영, 최석주,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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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총회는 경성노회를 경유해 제출된 재경 기독교 유지회의 건의문을 접수하고 ‘적극신앙단의 신앙선언을 검토한 결과 이는 우리 장로교의 신경에 위반된 것이므로 그 적극신앙단은 우리 장로교에서 용납지 않기로 함이 가(可)하다’고 결의하였다... 1936년 제25회 총회의 헌의한 교역자들의 사상단체 가입 문제에 대하여 수양동우회나 흥사단 등 서북계열의 단체의 참여는 성경도리나 정치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모순적인 답변을 하였다.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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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과 기호지역의 대립... (103)
3) 미군정체제와 선교사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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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강인철이 지적하듯이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사 이전에 관료로서 입국하여 미군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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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미국의 재정적 원조를 주선하여 한국교회로 하여금 미국선교사들이 위상과 영향력에 순응해 가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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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계급의 보수적 신앙인인 이들 서북교계 지도자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당시 남한 사회의 주도력을 형성하는 보수적 반공친미의 교권적 기독교 세력이 되었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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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북한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이 남한 이주, 6ㆍ25전쟁을 통한 교세의 격감은 남한 교회의 재정을 매우 어렵게 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을 통한 미국교회의 막대한 구호물품은 이를 배분하는 총회의 권한을 강화시키며 그 배후에 교권갈등이 야기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누구를 응원하느냐가 해방 후 교권갈등에 큰 변수가 되었던 것이다.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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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제37회 총회의 마지막 표결에서 총대표차는 겨우 6표였다는 사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자주성과 자치권을 인정하여 이 표결에 총대원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면 교회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만큼 선교사들의 세력과 영향력이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의 주도권과 그 세력구성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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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분열이 없었다면, 이후 조선신학교(한신대학)가 신학적으로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었을까?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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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교회가 일치성에 그 특성이 있다면, 개신교는 그 다양성에 그 특성이 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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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이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개신교가 복음의 자유, 신앙ㆍ양심의 자유를 위해 거짓된 교회를 거부하고 참된 교회를 세울 만큼 그렇게 필연적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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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이 분열이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바른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신학적 요인보다 해방후 종교 권력으로서 남한교회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교권세력이란 정치적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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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Everything is Politics but Politics is not Everything)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장로교회 분열에서 수와 힘이란 정치적 요인으로 승리한 것이 곧 진리의 승리는 아닌 것이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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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는 진리에 의해서가 아닌 정치적 요인으로 분열된 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하나의 교회를 사분오열한 죄악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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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사항의 개선... 1) 총회를 중심한 오늘날 수직적 권력 집중 현상을 분산하여야 한다. 장로교회는 노회 중심의 정치조직이다... 2) 신학교육은 개별신학교중심의 특성화를 이루되 학점교류, 교수교류 등 공동 커리큘럼과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협력운영체제로 전환하여야 한다... 3) 교인 수와 교회재정을 기준으로 한 오늘날의 임원선출이나 총대선정 구조를 봉사직으로 개편하고, 교단 내 소수자인 주변부 목회자나 여성, 청년들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수렴하는 의사소통 구조를 개발하여야 한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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