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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논문 정리]

“한말 일제침략기 일제와 선교사의 관계에 대한 연구(1894~1910)” - 김승태(1997)

by [수호천사] 2021.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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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와역사 6(1997.2), 65-103.

 

1. 머리말

 

  • 일반사에서는 선교사가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라는 인식에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같은 제국주의 국가인 일제와 친화관계를 유지하고 한국교회가 항일운동 내지는 민족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지도함으로써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협력하였다는 부정적 견해... (65)

  • 기독교계 내부에서 주장되는 것으로 비기독교 국가인 일제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침략과 식민지배를 받았으므로 이 과정에서 기독교 내지 선교사는 복음전도와 교육을 통하여 한국인들의 의식을 깨우쳐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와 민족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에 기여하였다는 긍정적 견해... (65-66)

  • 선교사는 우리 민족의 일원이 아니라 외국 국적을 가지고 그 나라의 지시와 보호를 받는 외국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인도적인 목적 이외에는 그 나라의 지시에 거슬러 우리 민족이나 정부에 충성하거나 지원하도록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66)

  •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복음전도와 교회의 설립이다. (66)

  • 일제와 선교사이 관계 시기구분(1894-1945)... (67)

 

2. 제1기 : 견제기(1894-1905)

 

1) 미국과 선교부의 ‘정치불간섭’ 정책

 

  • 선교사들은 조선의 황실과 상당히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억압과 비인도적인 만행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으며, 일부 선교사들과 미국 공사관은 조선 국왕을 보호하고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69)

  • 미국 정부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로 돌아가자 조선문제에 깊이 개입하였다가는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염려하여 미국 공사관은 물론 선교사를 포함한 주한 미국 국민들이 조선의 정치문제에 일체 개입하지 말도록 강력히 지시하였다. 미국이 이러한 지시를 하게된 데는 미국의 고립주의적 외교정책과 미국 국내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미국은 하와이 영토편입 문제와 쿠바를 둘러싼 스페인과의 전쟁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조선과의 관계보다는 일본과의 우호관계가 더욱 중요하였던 것이다. (69)

  • 주한미국공사관과 주한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와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인도적인 관점에서도 한국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 황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미국 국문성 국무장관 올니(Olney)18951111일자로 주한미국공사 실(Sill)에게 다음과 같은 암호 전문을 보내 엄격히 한국의 내정간섭을 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한국의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며, 외교 지시 64에의하여 금지되어 있다.” (70)

  • 1897511일자 주한미국영사관 발표... (71)

  • 한편 미국 선교본부의 방침도 미국 정부와 다른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정교분리내정불간섭을 표방하고 선교사들에게 그와 같이 권고하였다. (72)

  •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방문보고서... (72)

  • 1901년 선교지 한국을 방문한 선교본부 브라운 총무... (72)

  • 19019월 장로회공의회에서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이라는 권계편지... (72-73)

 

2) 일제의 선교사 견제와 미국의 외교정책

 

  • 일제는 미국정부와 직접 교섭하여 주한미국공사관과 선교사들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며, 심지어는 주한미국공사의 선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73)

  • 미국 정부는 실 공사의 후임으로 일제가 꺼려하던 알렌을 주한미국공사로 선임하였다... (한국 공사의 격을 낮춘 것...)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 과정에서 알렌 공사의 미국 국익을 확보하기 위한 반일적 건의나 보고가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음... 알렌을 비롯한 주한미국공사관은 미국 정부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74)

  • 19057월 미ㆍ일간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밀약... (74)

  • 일제는 미일의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일본 외무성에서 미ㆍ일 외교 통로를 통해 주한미국공사관과 주한선교사들을 견제하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 (75)

  • 미 국무성은 190551일 새로 임명된 주한미국공사 모간에게 그 전쟁의 결과 중의 하나로 한국은 실제로 독립국이되거나 부속국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엄격하게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지시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주한미국공사관을 철수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헐버트의 비판... (75)

 

3. 제2기 : 회유ㆍ이용기(1906-1910)

 

1) 미ㆍ일 외교협력관계의 약화

 

  • 미국은 일본이 지나치게 팽창하여 만주나 청나라에서 미국의 국익을 제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만주에서 문호개방을 준수하며 만주는 청에 반환한다는 확실한 보장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내고 나서야 러시아와의 평화협상을 중재하였다. (77)

  • 미일관계의 악화... 미국에서 일본인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사건... 사태의 심각성은 로지 상원의원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일전쟁에 대비하여 미해군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건의를 함... (77)

  •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의 무력 촉구... (78)

  • 양국 지도부는 19081130일 신사협정으로 알려진 루트ㆍ다카히라 협정을 맺어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고 두 나라의 관계를 미봉적으로 회복하였다. (78)

 

2) 일제의 선교사에 대한 회유ㆍ이용과 선교사 대책

 

  • 31운동 직후 총독부에서 일본어와 영어로 발간한 조선통치와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토 통감의 종교 방침에 대해 기록... (78-79)

  • 이토는 선교사들을 회유 이용하여 한국 국권침탈에 대한 세계 여론의 비판을 무마하고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분열ㆍ저지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선교의 자유를 공인하고,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강화하여 외국 선교사들과 협동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79-80)

  • 190811월 게일이 회장으로 있던 황성기독교청년회관 개관식 만찬회 기사... “후에 통감부에서 또 그 손님들을 청하야 대접하는데 이등 공작이 연설하기를 내가 청년회와 예수교회를 많이 사랑하여 또 어느 나라든지 문명하려면 먼저 예수를 믿어서 마음에 터를 세우는 것이 좋은 지라. 우리 일본에 불교와 신도와 공맹의 도가 있는데 처음 개혁 때에 내가 예수교를 행하자 한즉 사람이 다 불가한 줄로 알기로 내가 말하기를 범위를 너무 좁게 하지 말고 종교는 마음대로 하게 하자 하였더니 지금은 내가 이기었노라 하고 말이 매우 간절하게 하더라.” (81)

  • 송병준의 선교사 비난 사건’... 이토는 송병준을 사임하게 하였음... (82-83)

  • 이토는 선교사들에게는 나는 일본인들의 부정행위 억제에 힘쓰려니와 여러분은 한인들의 선생이요 지도자로서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하여 한인들의 부정행위를 억제하는 데 협력하여 주리라고 믿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인들에 대한 단속을 하도록 부탁하였다. (83)

  • 소네 부통감도 한국을 방문한 한 선교사에게 멀리 일본에서 와서 한국의 선교사들을 방문하고 다니시니, 부디 그들에게 결코 정치에 간여하지 않도록 권고하시기를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84)

  • 일제가 선교의 자유와 함께 선교사 회유에 이용한 또 하나의 수단은 기독교 교육이었다. ‘선교의 자유는 먼저 허용해주고 그 대가를 요구한 반면에 기독교 교육의 자유는 타협을 거쳐 요구조건을 미리 내걸고 허용해 주었다. (84)

  • <회견각서>... 190839... 소네 부통감과 고마쓰 서기관... 마펙, 게일, 해리슨, 벙커, 휘트모어 하운셀... (84)

  • 일제는 이와 같이 선교사들을 회유ㆍ이용하면서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헌병 경찰들을 이용하여 선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을 철저히 감시하였고 조금이라도 배일적인 태도가 발견되면 트집을 잡고 압력을 가하였다. (85)

  • 학부 차관이었던 다이라 마고이치가 1910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선교사에 대한 의견서’... 점진적으로 선교사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일본 종교가의 그것을 증대하여 종교 분야에서도 일본인이 한국 교계를 지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에 실시한 선교사 회유ㆍ이용도 잠정적인 정책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86-88)

 

3) 선교사의 정세 관망과 점진적 순응ㆍ협력

 

  • 반일적인 맥켄지 기자... ‘새 지배자에게 복종하고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시오...’ (89)

  • <코리아리뷰>지를 발간하던 헐버트... (89)

  • 1908년 공주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케이블의 연례보고서... “박해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일제의 학살 만행을 보고... (91)

  • 선교사들은 일제의 만행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제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초기에는 관망하는 자세를 가지고, 한국인의 배일적 행동에 대해서도 제재하였다... YMCA정비와 감리교 엡윗청년회의 해산... (92)

  • 1905년 당시 서울 감리교 선교부의 감독을 맡고 있던 스크랜톤이 엡윗청년회를 해산시켰다... ‘청년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교회의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 조직으로 변질한 때문이었습니다...’ (93)

  • 평양 숭실학교 학생들이 항일 시위에 가담하려 하자 선교사가 이들을 정학시킨 사건... (94)

  • 언더우드 부인의 회고... “선교사들은 일본의 지배에 찬성해서 그러거나 또는 헛되이 피흘리는 것을 막으려고 그러거나 아무튼 모두 하나같이 있는 힘을 다해서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독교인들을 진정시켜서 달래고 있다. 황제가 퇴위한 뒤에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함께 참고 견디자는 얘기를 나누었다.” (94)

  • 일제가 선교사들의 태도를 반일적이며 정치에 간섭하고 있다고 비난... 선교사들은 극구 그렇지 않다고 변명... 선교사들이 배일적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선교사들이 일본에 순응하는 과정이었다. (96)

  • 세계선교휘보의 기사...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는 나라에서 정치적 분규에 가담하거나 내정 논쟁에 어느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개신교 선교회의 주요 원칙 중의 하나이다. 거의 예외없이 외국 선교사들은 그들의 현지인 친구들이나 개종자들의 큰 오해를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이 원칙을 고수한다...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한국에서 열 배나 더 어려운 일을 당했을 것이라고 해도 좋다.” (98)

  • 선교사들은 일제이 불법적 침략과 만행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적으로는 일제의 회유와 선교부의 선교정책 및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내적으로는 유아기의 한국교회와 신도들을 보호하고 선교활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점차 일제에 순응ㆍ협력하였던 것이다. (98)

 

4. 맺음말 : 소결(小結)

 

  • 일제와 선교사들은... 서로 의구심을 가지고 견제하면서도... 일제로서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고 한국인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선교사들로서는 최대한의 선교의 자유와 기독교 교육의 자유를 확보하고 유아기의 교회를 보호 육성하려는 목적에서 상호 협력하고 이용하는 관계였다. (99)

  • 선교사들은 피해자인 약자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가해자인 강자의 편에서 강자의 논리를 약자에게 순응하도록 설득ㆍ강요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정교분리내지는 불편중립정책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이 점은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 선교부의 선교정책, 일제의 선교사에 대한 회유 공작 가운데서 당시 선교사들이 가졌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100)

 

논찬 : 선교사가 조선이라는 현지의 상황에서 조선과 조선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즉 조선을 한 지역으로 생각했는가, 또는 조선의 주인은 누구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는가, 조선의 토착민은 한국인이지만 그들은 통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보았는가 등등의 선교사의 대 조선인식을 한 팩터로 볼 수는 없을까... 분쟁지역에서 선교사가 만나야 했던 조선과 일본 그 자체에 대해 선교사는 어떻게 인식 평가했으며 그것과 미국인인 자기와 어떤 차별성을 두었는지 하는 점이 일제와 선교사의 관계규정 요인으로서 고려되었더라면, 일제와 선교사의 관계 구조가 좀더 다이나믹하게 보여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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