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치준(광주대 교수ㆍ종교사회학)
『기독교사상 39(6)』, 1995.6, 10-18.
I.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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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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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체험은 이데올로기 교육을 통하여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면서 남북한 민족 사이의 불신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10)
II. 한국전쟁과 사회 구조 및 사회 심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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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 남북한 모두에서 냉전 체제에 가장 적합한 국가 체제가 형성되었다... 나함의 경우 해방 정국에 나타났던 좌파나 중도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우파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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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험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새로이 형성된 구조적 조건은 기독교인을 포함한 한국인의 마음 속에 흑백 논리에 근거한 이분법적이고 경직된 사회 심리적 태도를 심어 주었다. (11)
III. 북한 정권의 반기독교적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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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회는 민중의 아편이고 자본가의 앞잡이에 불과하였다. 반대로 기독교인은 공산주의를 유물론에 젖은 무신론적 악마의 세력으로 보았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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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도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은 공산당에 대항하는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고, 신의주 반공 학생 운동이나 주일 선거 반대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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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적인 기독교인들에 대해 북한 정권의 태도... “반동적 장로와 목사들은 땅을 안 가진 자가 없고, 놀고 먹지 않은 자가 없는 부르주와 계급”이라 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종교인과 그 가족들을 반혁명 계급으로 분류하였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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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평양 봉수교회가 세워지고, 1989년 이대경 목사가 공식적으로 북한을 방문... 냉전 체제의 와해라는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를 적대시한 북한 정권의 태도가 변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13)
IV. 남한 교회의 반공적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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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점령하의 남한 기독교인들은 공산 정권이 얼마나 반기독교적이었는가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가진 채 서북청년당과 같은 조직 활동을 펴면서 반공의 기수가 되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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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기독교가 감당해야할 가장 큰 사명은 “滅共求族 民主建國”이며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기독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기독공보」 1952.2.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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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와 교회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기독공보」 1952.2.1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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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직후 사설... 공산주의자들은 “무신적 유물론자들이요, 그들의 광적 행동은 종교와는 영원히 융화될 수 없는 사단의 집단”이라고 하였다(「기독공보」 1953.7.2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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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반대’와 ‘북진 통일’의 표어를 내걸고 대규모의 구국기독신도대회 개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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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근본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반공의 이념이 남북한을 분열시키고 평화가 아닌 갈등과 불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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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50년 동안 우리 민족사에는 불행과 과오도 많았지만 남한은 자본주의와 경제 성장이라는 경험을 축적하였고, 북한은 사회주의와 평등 그리고 대외적 주체성이라는 경험을 축적하였다. (15)
V. 한국교회의 정권과의 밀착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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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분위기는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순수한 종교 생활만을 강조한 지도자나 신도들에게서 비민족적인 성격을 볼 수 있지만, 일제와 결탁하여 반민족적인 성격을 띤 것은 일제 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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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반공의 기수’ 이승만을 더욱 강력히 지지하였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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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종군 목사 제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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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과의 밀착과 그에 따른 기독교회의 혜택... 교회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태도는 기독교의 예언자적인 사명과 도덕적 위상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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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대한 영적, 도덕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는 국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그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17)
VI. 교단의 분립과 분열 의식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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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통해 강화된 흑백 논리와 사고의 경직성은 한국교회의 내부적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였다. 한국교회 분열의 싹은 선교사들의 선교 구역 분할에 따른 지역적 요인, 신학적 보수주의와 교권의 결합, 선교사 및 해외 기독교 세력과의 관계, 신사 참배 및 친일적 행위와 관련된 반응의 차이, 교권 다툼 등의 요인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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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불교의 분열...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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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파와 기독교장로회의 분열... 남은 장로회 주류는 1959년 WCC 가입 문제를 핵힘적인 사안으로 하여 예수교장로회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되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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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분규 속에 나타나는 사회 심리적인 성격을 살펴보면 전쟁 후유증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흑백 논리에 근거한 경직된 태도가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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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이며, 그 속에는 세계관의 변화에 대한 불안과 공포 의식이 있고, 또한 안정된 세계관에 대한 갈망이 포함되어 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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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난 후 나타났던 세 개의 중요한 장로교 교단 분열은 사회적인 위기 상황에서 정통 신앙을 지킴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강력한 심리적 동기가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내려온 교회 지도자들의 위기 의식 또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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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가진 이러한 분열적 성격은 리차드 니버가 말한 “교회의 윤리적 패배”에 불과한 것이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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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국교회에 북한 정권과의 갈등, 반공 이데올로기에 몰입, 국가 권력과의 밀착, 내부적 분열 등과 같은 부정적인 성격들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성격들은 극복해야 할 과거의 유산이며,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명에 장애 요인이 된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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