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일(한신대 교수 / 선교신학)
『신학사상 129집』(2005), 191-229.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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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순교자의 피 위에 건설되었다고는 하지만, 박해시대에 기독교 선교는 역설적으로 박해로부터 도망친 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91)
1. 서론
2. 성서에 나타난 박해시대의 선교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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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특히 신약성서는) 교회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각기 다른 환경과 선교상황 속에서 저술되었다는 관점으로부터 선교문서로 볼 수 있다.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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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대에 나타나는 선교유형 : 1) 박해가 닥쳤을 때 취하는 적극적인 행위는 항거다. 2) 순교. 터툴리아누스의 경우, 순교는 당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며, 신의 말씀으로서 구약과 성령의 계명은 순교의 영예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3) 순례(박해로부터의 도피의 성격을 지니는 불가피한 순례). 사도행전의 증언에 따르면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시작되는 박해로부터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의 도피는 선교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4) 은둔(요한계시록 공동체) 5) 순응(주어진 환경에 순응). 6) 변절과 배교 (19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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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항거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204)
3. 장공 김재준과 신사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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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한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1936년 4월, 장공 김재준은 3년간 몸담았던 평양의 숭인상업학교를 사임했다.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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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초대교회 때 로마 황제 예배 강요와 유(類)를 같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 예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초대신자들의 모습을 사모했다.” 그래서 [순교자열전]을 쓰기 시작했고 만주 용정으로 이주했다.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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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때문에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2년이 지난 일제 말기에 장공은 조선신학교의 설립 사무를 맡게 되면서,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당시까지의 한국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실험, 즉 일종의 자격시험”과 같은 신사참배 강요에 휘말린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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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은 1968년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의견수렴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술회를 한다. “우리는 일제시대에 일본 정부가 자기들이 만든 소위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봉독하게 했다. ‘신의 말’ 같이 우리에게까지 강요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황국신민서사’를 날마다 외우고 의식 때마다 ‘동방요배’를 시키고 학교에서는 ‘교육칙어’를 봉독하게 했다.” (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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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자신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생활의 터전인 학교를 사임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학교의 운영을 위해서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206)
4. 김재준의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비판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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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입장은 『한국교회와 친일과 전통』이라는 책에서 고려신학대학원의 최덕성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장공과 조선신학교는 “신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종교국가 일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 역사 왜곡과 “배교, 우상숭배, 민족배신”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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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도 조선신학교의 설립 목적에 기록된 “복음적 신앙에 기해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忠良有爲)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문구와 일본인 이사장의 선임을 이유로 장공과 조선신학교를 친일파였다고 은연중에 주장한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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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 역시 조선신학원의 동일한 교육 목적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채필근 목사에 의해 1941년 다시 개교한 평양신학교와 함께 조선신학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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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북 장로교 총회 교권층에서 보수주의계가 투옥과 은둔으로 제거된 때였다면, 평양신학교나 조선신학교의 이러한 (충성과 정통의 문제로 인한) 갈등과 대립은 전향과 체제협력군의 피차의 이해관계 상반이란 차원 이외 다른 고상한 동기가 없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선교사의 사문(死文) 교육이라든가, 보수 일변도의 편협성, 민족적 신학 정립의 폐쇄 때문에 선교사의 보수주의 주도 시대를 한국교회사의 부재로 단정하고, 새 역사의 출발을 다짐했다 할지라도, 그 역사 자체의 몰민족성, 몰기독교성을 차치하고 신학을 운위할 수는 없었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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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는 당시의 평양신학교를 전향한 집단으로, 조선신학교를 체제협력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보이며, 문맥상 조선신학교를 몰민족적이고 몰기독교적인 신학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조선신학교의 후신인 한신대학과 모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까지도 태생적으로 “회개와 개혁”의 대상이라는 주장이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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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의 김영재는 주기철 목사 기념 강좌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장공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서울의 조선신학교를 창설하고 오랫동안 교장으로서 학사(學事) 면에서와 신학적으로 학교를 성장시켜 온 김재준은 이 학교의 설립 의의를 “서양 선교사들의 지배와 보수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하였다. 보수적인 신앙인들과 신학자들이 감옥에 갇혔거나 망명의 길에 있었으며,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을 당하다시피 된 그러한 시기에, 그리고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한 신도(神道)와의 혼합정책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제의 호의를 입어 신학교를 설립하면서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을 생각하면 ‘신학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함을 금할 수 없다. 말하자면 ‘신앙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로 ‘신학의 자유’를 구가한 것이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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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신학을 언급할 수 없다는 식의 이러한 비판들은 모두 신사참배 문제를 우상숭배라는 신앙적인 차원이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행한 친일 혹은 부일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특정인의 신사참배 행위 자체에만 국한시켜 몰민족적이고 몰기독교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평가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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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 행위에 속하는 신사참배 의식에 단순히 참여했다는 것이 몰기독교적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고려 없이 자신의 신앙적 관점에서 다른 이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성서적일 수 없다(*이건 학문하는 자의 태도도 아니다). (210)
5.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행동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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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한국교회가 총회의 공식적인 결의를 통해 굴복했지만, 교회의 저변에는 강력한 저항운동이 있었으며, 그것을 1) 행동적 저항, 2) 현존적 저항(주기철), 3) 인퇴적 저항(학교 폐홰, 낙향, 교회 사임)의 유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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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저항 유형들의 공통점은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써, 민족 독립이나 애국과는 거리가 먼 신앙운동이었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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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은 신사참배에 대해 많은 글들 속에서 일관되게 당시 기독교인들의 반응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1) 주기철 목사를 필두로 한 극소수의 교회 인사들은 끝까지 이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투옥되었으며 주 목사와 그밖의 몇 사람은 순교했고 생존자는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이른바 ‘출옥성자’가 되었다. 2) 역시 소수이긴 하나 스스로 교회 및 사회생활에서 떠나 은신함으로써 신사참배를 피한 인사들이 있었고, 3) 신사참배는 강요된 행위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허식이므로 이것을 과대한 양심문제로 다루는 것은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태도에서 마치 전시에 흔히 있는 포로나 징발자에 대한 유사한 심경으로 이에 굴탁(屈託) 없이 참가한 신자가 있다. 이 부류에 교인의 대다수를 점했을 것이다. 4) 진정한 의미에서 본의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시세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관헌의 합리화 설명인 ‘국가의식’론을 받아들여 적극 협력의 태도를 보인 사람들도 없지 않으나 이 역시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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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가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한 유형을 분류했다면, 장공은 신사참배와 관련한 당시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행동유형에 대해 분석을 했다. 본의 아니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순종했던 신자들은, 민족주의 관점에서든, 혹은 신앙적인 관점에서든, 부역자나 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은 지나친 견해이다... 살아 남은 것 조차 친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일제에 세금을 납부해야만 했던 당시의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친일파였다고 할 수도 없다. (212)
6.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선교신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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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에 적극적인 행동으로 저항했던 일부 교회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성서에 나타난 박해시대의 선교유형들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이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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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을 사용했던 베드로의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목표로 했던 열심당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히틀러 암살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의 일원으로 처형된 본회퍼의 행동에 비교할 수 있지만, 이 유형들은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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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공생에는 물론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려고 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최고의 행위이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순교를 향한 광신적인 선동에는 반대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성서적이며 선교적인 목적이 있었다(마 10:23 ; 24:16 ; 24:9 ; 10:22 ; 24:13; 10:22)... 예수께서도 (또는 복음서 기자들도) 순교를 최선의 행동유형으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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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이 이해하는 순교는 다음과 같은 선교적인 목적이 있어야 한다... “순교하거나 피신하거나 그것이 그리스도 사랑, 그리스도 봉사를 위한 동기에서 된 것이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 삶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던져버린 삶이라 할 때, 그가 사는 시간은 십년, 이십 년 또는 반세기를 더 산다 하더라도 그것은 순교의 생활인 것이다.그가 이 성에서 저 성으로 피해가며 산다 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다니며 사는 삶입니다. 지금 살아있으나 그리스도 때문에 이미 죽은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죽으면서 살고, 죽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장공이 언급하는 순교는 일제치하가 아니라 공산치하에서의 순교인데, 그는 순교하지 못한 자신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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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스스로의 오염을 탄식하며 자신을 경멸한다고 했던 장공에게 분명한 것은 자신의 신사참배 문제를 결코 합리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동을 영웅적인 것으로 표현하며, 순교하지 못하고 신사참배에 굴복한(자신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교인들은 “신앙고백을 생활로 증거하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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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신사참배... 장공은 이것을 “포로로 잡혀간 병사들의 심경이나 처지와 유사한” 것으로 표현한다.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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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를 피해 은신하거나 도피한 신자들은 소수였고... 개인적인 수절은 될 수 있지만,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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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개교한 조선신학교나 1941년 다시 개교한 평양신학교가 “황민화”를 위한 일제의 교화기관이었다는 비판은 개교의 진정한 목적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국교회에 대해 우월권과 주권을 유지하면서(저급의) 신학교육을 독점해 온 선교사들이 모두 떠난 상황 속에서 온전한 신학교육을 위해 조선사람에 의한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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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교회의 문을 닫든지, 신사참배를 하면서 교회이 문을 열든지의 기로에서 장공과 조선신학교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전자가 신앙의 수호를 위한 결단이라면, 후자는 교회를 위한 선교적 결단이었다.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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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서고도는 신사참배의 강요에 직면하여 선교부 운영 학교들의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서 계속 학교를 운영하기로 결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증언을 위한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배와 성서공부는 이전과 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교사들은 여전히 그들의 영향력이 느껴질 수 있게 행동합니다. 학생회의 종교사역 위원회는 기독교인의 봉사를 위한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한 선교사의 존재는 기독교 교회의 폭넓은 유대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암시입니다. 혹자는 선교부 계층 간의 분열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닫힌 문의 증언도 계속되는 봉사의 증언도 축복하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위한 양 정책들을 모두 사용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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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섬기는 봉사를 계속하기 위해 학교를 운영한다는 서고도의 생각과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지키려고 했던 장공의 생각은 모두 선교적인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굴종이 아닌 선교적 순응의 행동이었을지라도, 장공은 자신의 신사참배 문제를 결코 선교적인 것으로 합리화시키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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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는 “기독교인으로서 신사참배에 응한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는 하느님께 배반하는 행위요, 둘째는 조선 민족으로서 일제에 협조를 약속함으로써 민족적 배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역설한다. 그는 신사참배를 계기로 친일로 변절한 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의 행태가 자기의 교단 내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변절이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민족에 대한 배반으로 본 것이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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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를 우상숭배의 관점에서 배교 행위로 간주해야 한다면, 신사참배자들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신사참배 이후의 자발적 혹은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간과한 채 신사참배자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태도이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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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실제적인 배교는 신사참배에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것에서 찾아야 한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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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과 조선신학교가 부일 행위(전투기 헌납 등)에 가담했다면, 배교자들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조선신학교를 비난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학생들이 군수공장에 동원되어 일제에 근로봉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학교도 지켜야 하지만 학생들이 징용되어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군수공장에서의 근로봉사를 단순히 반역과 부일 행위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221)
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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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한국 기독교의 오욕의 역사를 통해 더욱 숭고한 순교로 기억된다. 그러나 순교하지 못하고 질곡의 역사를 살아야 했던 자들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섭리를 읽어야 한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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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증언(막 13:9-13)은 순교가 선교를 위한 최선의 유형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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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투옥되어 있는 상황에서 시기하고 경쟁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보고도, 그리스도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던 바울(빌 1:12-30)의 고백은 박해시대를 살아가는 선교적 지혜를 제공한다. 순교를 통해서든, 살아 남아서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223)
부록 : 신사참배와 관련한 김재준의 대표적인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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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광야 30년』(김재준 전집 11권, 178,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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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된 민족 국가로서의 한국과 기독교』(김재준 전집 11권, 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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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칼럼」(김재준 전집 11권,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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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김재준 전집 13권, 147,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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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종교로서의 한국기독교」(김재준 전집 17권,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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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일세기」(김재준 전집 17권,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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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기독학생의 사명」(김재준 전집 17권,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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