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재용(한신대 교수 / 교회사학)
[신학사상 제50집](1985), 461-485.
I.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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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시대의 아들”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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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 신학이 없어질 수 없는 궁극의 과제를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시대적인 조건에 의하여 인간의 요청에 적응하는 대답을 줄 의무가 있는 것이라면 신학의 지금의 상태를 재검토하여 이제부터의 갈 방향을 작정하는 것은 당연한 조처라 아니할 수 없다.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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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은 지적하기를...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대종파인 장로교와 감리교 중에서 감리교는 시학의 변천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자유주의가 뿌리를 박으되 탈 없이 지났다. 장로교는 정통신학의 보수에 상당히 골몰하였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침투가 비교적 더디었고, 또 소리를 내며 교회분열을 초래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 동안 정통신학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潛行的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하는 자유신학운동에 발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 안에 생겼던 것이다. 그들은 외국에 유학하면서 자유신학을 배워가지고 본국교회의 정통신학 보수에 대한 불평을 품고 돌아온 인사들이었다.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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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에게 있어서 김재준의 신학은 기왕에 한국장로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파괴적 도전의 신학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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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신학을 수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학체계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이요 한국교회가 창립되던 때 받은 신학을 “영구한 소유로 확보”하는 것이다. (462-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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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한국교회를 지배한 신학은 선교사들이 교리제일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이라 보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도전을 했던 것이다. (463)
II. 전래된 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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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를 우리나라에 전한 선교사들의 신학에 대해서 박형룡은 “성경적 개혁주의적 실천적인 신학”이라 했다.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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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하배 교수는 한국교회의 신학을 보수주의 신학이라 규정하면서 그 신학을 형성한 요소를 말하기를... “...대부분이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일본이나 인도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은 이 땅에 처음 찾아 온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보수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면에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 년 간 북장로교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미국교회는 영국이나 유럽에 있는 교회들보다 언제나 더욱 보수주의적이었다... 미국교회는 무디를 위시한 여러 부흥사들을 설교를 통하여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사실은 한국에 나왔던 초대 선교사들 중 많은 분들이 이 부흥운동 기간에 회심의 경험을 하였던 분들이었다.”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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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장로회 외지 선교부 총무... 브라운(A. J. Brown)... “퓨리탄 형의 선교사... 술, 담배, 카드놀이는 죄... 그리스도 재림에 관한 전천년의 견해는 없어서는 안될 진리...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되었다...”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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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려진 신학사상의 종자... 청교도적 율법주의적 보수주의 신학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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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래어(H. E. Blair) - 평양신학교의 신학... “... 모든 목사들에게 그 신학적인 인상을 끼쳐 준 그 신학교는 역시 대부분 선교사 교수들의 손에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과 정치에 관한 장로교 형태를 수락하는 역사적 칼빈주의적 배경으로 장로교인들은 옛날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의심없이 확실하게 받아들였었다. 이러한 기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된 복음의 이야기는 솔직한 바울의 초자연적인 해석으로 선교사들은 가르치고 한국교회는 무조건으로 받아들였다.”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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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독노회를 조직한 한국장로교회는 신앙고백을 채택함에 있어서 “...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성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 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 문답을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나니라”고 했다.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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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馬布三悅 목사는 한국교회 희년 기념예배에서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있는 새 신학사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비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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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에 신신학이니 신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한다든지, 혹은 설교사업을 최소한도로 축소한다든지 할지라도 조선교회 형제여, 40년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나와 한석진 목사가 13도에 두루 다니면서 전파하던 그 복음,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 전하던 그 복음, 양순백 목사가 선천에 전하던 그 복음은 저들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것이었으니 앞으로도 그것을 조금도 변경치 말고 받은 그대로 전하라.”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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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의 신학은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교수회의 평이 “지나친 보수주의 신학사상”이라고 평을 들을 만큼 극단적으로 보수주의적이었는데, 이 신학이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지배적인 신학이 되고 있었다. (466)
III. 한국신학사와 시대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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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1) 1885~1935년 : 선교사라는 보모 밑에서 얌전하게 보호 육성된 유소년기... (2) 1936~1945년 : 갑자기 부모를 잃은 고아와 같은 상태에서 온전히 이질적인 일본사상과 일본제국주의자에게 시련과 수난을 겪은 시기... (3) 1945~1960년 : 자유의 선풍 아래서 분렬과 혼란에 휩싸여 돌아간 혼란기... (4) 1961년~ : 자기비판, 재정돈, 재연합과 혁신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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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신학’의 역사는 1961년 이후에서 시작된다.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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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은 신학지를 중심으로 하고 한국신학사의 시대구분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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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신학의 태동기(1900~1915) - <<신학월보>>시대... (2) 한국신학의 발아기(1916~1927) - <<新生命>>시대... (3) 한국신학의 정초기(1928-1939) - <<신학세계>>와 <<신학지남>>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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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신학의 혼란기(1940~1956) - <<십자군>>시대... (5) 한국신학의 개화기(1957~1972) - <<기독교사상>>시대... (6) 한국신학의 전개기(1973~1982) - <<신학사상>>시대...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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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용의 한국신학사 시대구분... (1) 선교사의 신학에 의해 지배받던 신학식민지 시대(1885~1933)... (2) 보수와 진보주의 신학의 갈등과 투쟁의 시대(1933~1960)... (3) 한국의 문화, 역사 현실에서 주체적 한국신학을 형성하려는 産苦期(1960~1973)... (4) 한국의 문화, 역사현실에서 한국신학을 전개하려는 시기(1973~)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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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까지는 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된 신학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 청교도적 보수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므로 한국에서 비로서 신학논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신학발전의 틀을 놓았다고 할 것이다.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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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사에 있어서 김재준의 등장은 1933년부터였다. (469)
IV. 김재준의 예언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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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매우 보수적인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을 그 가정분위기에서 지낸 사람이다.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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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자연의 사람”으로 자연을 즐기고... 자연의 조화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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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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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는 비판하지만 ‘자유’는 버리지 않음... “목욕물(자유주의 신학자)과 함께 애기(자유)까지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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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예언자들의 연구를 발표... 김재준의 관심은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활동하심, 즉 역사에 있었다. 그의 역사의식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 것이 예언자 연구였다.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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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이스라엘 민족사 속에서 예언자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느님이 오늘 한국의 역사현실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선포하려고 했던 것이다.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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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아모스 연구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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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예레미야 연구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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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예언자의 연구를 통해 혼돈과 부패, 무기력해 가는 당시 우리의 어두운 시대에 들려지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 했고 그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려고 하였다. 이 일념에서 그는 성서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을 했던 것이다. (474)
V. 김재준의 성서를 보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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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의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과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그리고 아빙돈 단권주석의 출판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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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성서관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은 1947년 4월 장로회 총회에 김 교수의 교수 내용을명시한 진정서와 1949년 11월에 있었던 제1회 장로교 청년 전국대회에서 김재준의 강연(제목 “대전전후신학사조의 변천”)에 이어 있는 질의 응답에서였다.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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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한국교회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성서축자영감설을 극복하기 위해 1950년에 “성서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이라는 논문을 <십자군>지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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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비판의 견해가 그리스도교 신조나 신앙에 충돌되는 일은 없다. 그것은 계시의 ‘사실’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계시의 ‘양식’(form)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게 한 것 뿐이다.”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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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비판의 필요성... “성서가 비판됨으로 말미암아 그 진가가 상실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이 더욱 뚜렷이 들어났다고 할 수 있다. 종래에는 사이비적 신학자들이 자기가 추상해 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에게 편한대로 성경을 왜곡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문학적-역사적 비판의 결과 그런 불경건을 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소위 우의적 해석이니 교리적 해석이니 하는 것 때문에 성경기자의 본의가 무시당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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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통주의자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고등비판’은 사실에 있어서는 성경계시의 가장 유력한 답변자라는 것이다.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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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축자영감설을 반대하면서 “우리는 영감설에 의하여 성서의 성격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성서의 사실에 의하여 영감의 성질을 결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1) 하느님은 결코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 (2) 성서기자는 성서를 기록할 때 이미 전해지고 있는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그것을 비판ㆍ정리ㆍ취사선택하는 저술의 定則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 (3) 하느님이 사람에게 ‘말씀’을 주실 때 기성품처럼 주신 것이 아니며, 사람을 그 말씀을 외치는 축음기판이 되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 (4) 영감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의 중요 내용은 하느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 사람에 대한 그의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5) 하느님의 관심은 지적 호기심의 만족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서에는 역사나 과학이나 연대표 등에 절대무오를 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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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한다. 그것은 성서로 하여금 성서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무오설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성서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478)
VI. 김재준의 주체적 역사참여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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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구약성서를 “하느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역사”라고 보았으며, 신약을 “성자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성취”로 보았고 성령의 역사로 “속량사회가 누룩같이 퍼져 나간다”고 보았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의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그의 역사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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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 조선신학교 건학정신 (478-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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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십자군>을 1937년부터 1957년까지 간행하고 있었는데 이 잡지를 통해 그는 한국의 몰역사적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매섭게 비판하면서 주체적 역사 참여 신학을 강조하였다.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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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해방과 함께 찾아진 자유를 확보하고 나라의 건설에 교회의 책임적 참여를 주장했으며, 이것이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제물로서 교회의 응답이라고 확신하였다. (48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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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김재준... <제3일> 창간...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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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명은 인간존엄성의 회복인 ‘인간화’와 사랑으로의 인간관계, 즉 참된 민주화인 ‘사회화’의 두 가지로 집약된다.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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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에 의하면 인간의 인간화는 사랑에 의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민주화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화과 없는 민주화도, 민주화가 없는 인간화도 불가능한 것이다.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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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역사참여신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다. (483)
VII.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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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이 지적했듯이 그는 “예언자를 연구한 구약학자로서 역사참여 의식이 강한 신학교육자”였으며 그의 “신학과 저작은 서재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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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십자군>에서 십자가에서 부활을, 그러나 <제3일>에서는 부활에서 십자가를 본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런 이 둘은 연결선상에 있는 것이다.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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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후 한국 신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세속화 신학’, ‘하느님의 선교신학’, ‘사건의 신학’, ‘민중신학’은 김재준의 신학의 가지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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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히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점을 인식했었으며 동시에 보수 정통주의 신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에서의 신학논쟁이 “정통주의 대 자유주의가 아니라 정통주의 대 신정통주의”였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신정통주의신학과 대결하면서도 자기들의 상대방이 ‘자유주의 신학’인 줄로 잘못 알고 “돈키호테식의 용기”를 부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484-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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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신학은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거의 신정통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금의 신학적 귀향은 점차 신정통주의의 입장을 전적으로 바라지 않으면서도 제3세계에서 창출된 해방과 정치신학적 입장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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