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만(국제신대원, 역사신학)
『한국개혁신학』 38 (2013) : 81-116.
I.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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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평가는 김재준과 논쟁했던 박형룡에 의해서 신신학설(新神學說)을 추구하는 자로 인식되어 왔고, “해방후 십년사”를 집필하였던 김양선에 의해서 자유주의자라고 불리었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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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은 김재준의 성서에 대한 태도와 함게 신학을 ‘진보주의 신학’이라고 하였다.... 김재준이 신학적 특징을 설명하기 보다는 그의 시대적 역할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 김재준의 신학을 예언자적인 것으로 평가하였고 그것을 진보적 신학이라고 부른 것이다.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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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규는 김재준의 신학을 역사참여 신학이라고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재준은 그리스도가 인간 역사 안에서 성육신하셨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역사 속에서 그 소명이 있는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역사참여신학이라고 말하였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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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과 황성규는 김재준의 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역사 속에서 특히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 초점을 두었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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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하 : 김재준의 신학이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라는 구체적인 평가를 함... 1950년 당시 “십자군”에 게재되었던 글들이 신정통주의를 따른 것이었으며, 바르트와 브룬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한철하는 김재준의 신학이 신정통주의인 근거로서 그가 성경을 비평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 현대과학을 수용하고, 그리스도의 만남의 사건을 중시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한철하는 김재준의 자유주의에 대해 수용적 태도를 비판하고, 축자영감설에 대해서 곡해하였다고 비판하였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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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찬은 김재준의 신학이 신정통주의라고 평가하였다. 이우찬은 김재준의 신학이 바르트의 신학을 따라갔으며, 마리아의 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인간주의를 강조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김재준의 신학 여정을 진보적인 신학과 사회참여 신학으로 보고, 세계적인 신학흐름 속에서 한국신학 사상에 큰 발전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회 분열의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우찬은 김재준의 신학을 진보주의적 개혁주의라고 하였다. (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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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민은 김재준이 신정통주의를 따라갔는데, 그것은 바르트 신학을 배워서가 아니라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이 바르트 신학과 유사한 것을 알게 되고 이것에 자신의 신학을 바르트 신학에 일치시켰다고 하였다. “바르트 신학 속에서 자신의 신학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어서 자기 식으로 바르트를 이해하고 이를 변호하고 있는 것.” (84)
II.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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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산학원에서 20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다... 김재준은 자유주의자 신학은 인간 이성의 경험에 의하여 궁극의 진리를 규정하려는 사유양식이라고 하였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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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자유주의 신학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1) 인간성은 근본에 있어서 선한 것이므로 사회제도며 경제기구를 잘 개혁 개량해가면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는 것... 2) 자연은 자동적으로 진화한다는 것... 3)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이 아니고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 4) 개인적 자유를 절대 보장하려는 것.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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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이러한 자유주의는 결국 인간성의 선함을 믿기 때문에 심오한 회개가 없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 중심이며, 이성에서의 진리를 찾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지극히 천박하다고 평가하였다. (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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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자유주의 신학이 교리를 필요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인본주의이며, 불신앙이라고 하였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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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자유주의의 신학적 태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았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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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 장로교의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의 공적을 치하 하였다. (87)
III. 정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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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정통적인 ‘성경절대무오설’을 고집하는 것을 보수주의, 근본주의 혹은 정통주의라고 부르고, 성경의 비판을 허락하는 것을 자유주의, 현대주의, 혹은 신신학이라고 불렀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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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에게 있어서 정통주의의 ‘성경문자무오설’은 성경책과 계시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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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에 의하면 근본주의는 1910년부터 득세하기 시작하여 1920년에서 1925년 사이가 전성기이었으나 1929년 이래로 급속도로 퇴지하였다고 말하였다. 김재준은 근본주의 역사와 그 흐름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근본주의가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말하였다. “근본주의란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믿으려면 무엇보다도 교리, 신조를 정통적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교리제일주의를 강조하고, 그 교리들 가운데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2)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3) 피로서의 속죄, 4) 성경의 절대무오이다.” (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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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근본주의에 대해서 역사적 평가를 하였다. 즉 현대 역사 속에서 정통주의는 대세가 아니라고 하였다. 구라파와 영국에서는 정통주의가 완전히 물러갔고, 미국에서도 메첸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면서 프린스톤을 떠난 그 시점이 미국북장로교회 내에서 정통주의가 공식으로 물러간 것으로 보았으며, 정통주의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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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다만 신학 형태로서의 정통주의신학을 반대한 것이다.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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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역사적으로 볼 때, 20세기의 근본주의를 반대한 것이다. 그는 특별히 근본주의의 경색화된 것을 비판하였다... 김재준은 근본주의자들의 분리적인 태도로 인하여 부정적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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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재준은 근본주의와 이것에 반동하여 일어난 신복음주의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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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판단한다면, 반틸은 개혁신학자이고, 옥켕가와 칼 헨리는 신복음주의자들이다. 그는 특별히 근본주의에 반발하여 대두된 신학의 신복음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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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헨리는 근본주의를 비판하고,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던 신복음주의자이었으나, 김재준의 시각에서는 근본주의로 보았던 것이다. (91)
IV. 신정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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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신정통주의가 역사적 당위성을 가지게 된 것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물리치고, 역사적 상황 안에서 보수와 자유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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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신정통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성경문자 무오설을 부인하며 2) 정통주의 신학자의 주장하는 교리가 영원한 진리와 사건을 객관적으로 적절하게 전달하는 불변의 기술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종교에 있어서의 인간 이성 지상주의를 배격하고 생명적인 성경 계시에 의지할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4) 자유주의자들의 인간성선설을 부인하고 인간 경험이 그리스도교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이라는 태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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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정통주의자들이 성경비평학을 전적으로 시인하는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에 추호도 요동 없이 인정하되, 그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중심으로 신앙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라고 하였다.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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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박형룡 박사의 빨트 신학평론에 대한 독후감의 글에서 자신이 빨트를 비롯해서 브룬너의 주장들을 수용하고 따라감을 분명히 하였다... 김재준은 신정통주의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의 수준은 아니며, 그것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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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김재준은 신정통주의가 세계적인 신학의 주류라고 파악하고 있었는데... 세계교회가 거의 전부 그들의 공적을 찬탄하고 높이고 있다고 하였다... 1965년 8월에 김재준은 “전후 한국 교회 20년사 비판”이라는 글에서 신정통주의가 전 세계 교회의 대세인 것과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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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신정통주의를 개혁신학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95)
V. 에큐메니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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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1월 “대전전후 신학사조의 변천” - 1948년 암스텔담에서 조직된 ‘세계교회대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운동에 대한 소개...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의 교회’를 구현하는 운동이라고 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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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세계교회대회’(WCC)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교회 정신을 고취하여 그것의 산파역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 정도의 합동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의 교회’ 운동은 획일성에 의한 통합은 안되며, 다양성의 합동적 연합이어야 한다고 했다. 더욱이 김재준은 1956년 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세계교회의 본류임을 말하였다.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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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세계교회대회의 신학적 동향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었는데, 칼 바르트의 신학이 ‘세계교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세계교회운동이 신학계의 주류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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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김재준은 ‘신학과 직제 제4차 세계대회 보고’라는 제하에서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요약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연합이 그 과제임을 말하였고, 이러한 연합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새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한국 교회에 이러한 ‘하나의 교회’ 운동에 응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특징으로서, WCC가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새로 규명하는 것을 말하였다. “교회의 목적은 교회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방향이다”(WCC 전도분과 총무를 지냈던 요하네스 호켄다이크가 1952년 International Mission Conference 윌링겐 대회에서 강조하였던 내용).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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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김재준은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것이 선교라는 말을 계속하였다. 1965년 8월에 “전후 한국교회 20년사 비판”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한국 교회는 이제부터 세상을 향한 봉사에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다. (98)
VI. 역사참여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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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들어서면서 김재준은 해방이라는 단어와 교회의 역사 참여라는 용어들을 자주 사용한다... 김재준은 신학이 반드시 역사 속에 참여해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며, 그때 하나님의 선물은 자유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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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자유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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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인간은 잘못된 정치 권력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경제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무지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말하였다. 김재준이 이러한 말들은 1973년 WCC 방콕 대회에서의 선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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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역사참여 신학의 강조와 함께 그는 한국교회가 사회문제와 정치적 억압 등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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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참여에 대한 신학적 근거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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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해방’이라는 단어에 이어서 ‘인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간화가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선교라는 것을 말한다. 1971년 동아일보에 “신학과 교회개혁으로 새 인간상 부활”이라는 제하에서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 방향을 따라가야 함을 우선 언급하고, 그 다음으로 교회 구조 개혁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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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선교의 사명에 사는 종교이기 때문에 인간에 근거한 사회정의를 그들 생활에 구현시켜야 하며, 따라서 기독교는 역사에 참여하여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후(1974년) “기독교는 근로대중의 기독교로 재개혁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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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인간화’라는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한국교회의 역사참여에 대해서 김재준은 호소하는데, 그것에 대한 신학적 근저로서, “선교는 세상에서 교회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세상으로 가는 시스템이다”라는 말을 한다. 즉 WCC의 mission Dei 개념을 말하고 있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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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이들을(노무자들) 대변하고 이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혁교회는 이들 편이라기 보다도 기업주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기업주를 모두 타도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기업주와 노무자가 동등의 입장에서 동등의 자격으로 상의하여 공생운동을 전개하자는 말입니다”(1984년 10월 28일 천호동교회, 종교개혁 기념주일 설교).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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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건학이념에 대해서 회고의 말을 할 때, “신학은 교회의 봉사자요 교회는 인간, 특히 피압박계층의 봉사자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WCC의 선교 사상과 구원의 개념을 1950년대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게 따라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02)
VII. 신학의 여정에서 나타난 신학적 특징들
1) 역사적 상대주의(historical relativ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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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정통신학은 어떤 신조나 교리를 역사 속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상대적이라는 주장을 한다... 정통 신학은 시대에 따라서 가변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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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1월 “대전전후 신학사조의 변천” 강연 : “신학은 시대를 따라 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신학이 변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신학이니 어느 시대의 신학이니 하는 말조차 없을 것입니다. 브룬너는 말하기를 ‘복음은 불변이나 신학은 변한다’고 말하였습니다.” (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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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역사적 상대주의에 근거하여 이렇게 신학 사조의 변천과 그 신학들 가운데 어떠한 신학이 주류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작업들을 그 시대의 신학의 역사적 사명을 보았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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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절대적인 신학은 없다고 보았다. 그 시대마다 교회에 우세한 신학이 있다면 그것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신학이며, 그것이 정통신학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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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나 미래를 늘 의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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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역사적 상대주의는 세계 신학의 동향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인 것 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의 동향에도 해박하게 하였다... 기독교장로회가 주류를 따라가고 있다고 보았다.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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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역사적 상대주의는 시대의 신학을 찾아내고, 주류의 신학과 교회를 따라가는 것이 곧 정통신학이며, 이것을 통해서 그는 주류에 있고자 하였다... 김재준의 역사적 상대주의는 바르트와 불트만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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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역사적 상대주의는 그것 자체로 약점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교회사속에서 신학과 교리를 논할 때, 그 시대의 사회적 혹은 정치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상대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 속에서 통일성이 있는데, 이것들을 놓치게 된다. (106-107)
2) 상대적 개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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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에 있어서 종교개혁과 개혁 신학에 대한 이해는 그의 역사적 상대주의 관점에서 나온다. 김재준은 종교개혁의 당위성인 교회의 부패의 원인을 찾는 것에 있어서 신학적인 것에 찾기 보다는 단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과거 종교 개혁에서 개혁자들이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둔 것은 “진지한 성경 연구라기보다도 시대적 요청에 적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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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은 종교개혁을 교리 혹은 신학의 논쟁 보다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김재준은 개혁신학의 교리적, 신학적 특징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으며, 그것이 그에게 중요한 관점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상대적 역사주의 관점에 의한 것이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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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이 성서에 대해서 최고의 권위를 삼는 것으로 말미암아 개혁교회는 성서의 우상화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복음의 율법화가 개혁교회의 정신을 마비시켰다고 말하였다. 즉 개혁신학의 성경에 대한 권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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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이 개혁신학을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는 신정통주의가 중요하며,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신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것들은 그 시대의 신학적 주류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재준의 개혁신학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이기 보다는 그 시대의 교회의 신학의 주류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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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문맥과 사회적 정황이 시대마다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개혁신학은 신학과 그 가르침에 있어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준은 사실 이것에 대해서 주의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 시대의 우세한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역사적 문맥에서 신학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109)
3) 신정통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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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목적은 교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있으며,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김재준의 강조는 WCC와 호켄다이크의 신학이 그 배경에 있다... 바르트가 1932년에 “Die Theologie und die Mission in der Gegenwart”(현재 상황에서의 신학과 선교)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선교와 삼위일체 교리의 연결을 시도하였는데, 내용은 삼위하나님과 그의 선교 속에서 선교의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1991년 데이빗 보쉬가 mission Dei 신학이 바르트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혀냈던 것이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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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1970-80년대의 역사참여 신학의 강조는 WCC를 중심으로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1960년 이후의 방향이었다. (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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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신학의 여정에서 파라다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더욱이 세계 신학의 동향과 발맞추면서 그것을 강조해 왔던 것이다. (111)
VIII.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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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신학은 신정통주의로 말할 수 있으며, 그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역사 참여 신학도 신정통주의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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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한계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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