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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근대사 산책 1] 제5장 : 개화파의 등장 (3) 급진개화파ㆍ온건개화파ㆍ위정척사파

by [수호천사]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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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5장 : 개화파의 등장

(3) 급진개화파ㆍ온건개화파ㆍ위정척사파

 

중인계급의 진취성

  • 1877년 박규수 사망 뒤에 역관(통역사)으로 중국을 왕래했던 오경석이 지도했다... 1871년 미국이 수호통상조약과 개항을 요청해 왔을 때 대원군을 만나 그걸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는 건의를 한 적이 있었다. (192)

  • 신용하... “(오경석이) 안으로는 박제가의 실학을 계승ㆍ발전시키고 밖으로는 자신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가지고 온 신서들을 연구하여 1853-1859년의 기간에 처음으로 한국의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92)

  • 오경석은 중인계급의 한계를 넘어서 진취적인 양반 자제들로 개화세력을 육성하고자 했다... “... 동지를 북촌의 양반 자제 중에서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한다...”(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의 회고) (193)

 

유홍기는 누구인가?

  • 1897년 오경석이 사망하자 동갑내기 한의사 유홍기(유대치)가 뒤를 이었다... 백의정승... 박규슈에 비해 과격... (194)

  • 이광린의 유홍기=유대치추정은 학계의 정설이 됐다. (194)

  • 2006년 박은숙은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된 강릉 유씨 유홍규(1814-1884)의 묘비명에 유홍규가 백의정승으로 불린 유대치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 점에 주목... 유대치 양반설... (194)

 

개화파의 만국공법 공부

  • 개화승 이동인... 18753월 처음 오쿠무라의 포교소를 방문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국정과 불교 상황 등을 질문하면서 조선 불교 중흥의 의지를 천명한 바 있었다. (195)

  • 김옥균ㆍ박영효 등이 학자금과 여비 등을 지원해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킨 첫째 목적은 열강의 공법, 즉 만국공법을 익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195)

  • 개화당 성립... 1879년설... 이 무렵에 소개된 만국공법 관련 서적... 만국공법, 공법회통, 공법편람...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Martin, 1827-1916)이 번역한 것... 미국의 법학자 헬리 위튼의 만국공법1864년에, 미국 법학자 울시의 공법편람1877년에, 독일 법학자 블룬출리의 공법회통1880년에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195-196)

  • 손세일... “만국공법 이론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화이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질서의 원리를 이해하거나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의 공법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유럽의 세계 팽창을 합리화하는 법적 도구였다...” (196)

 

개화파 대 위정척사파

  • 온건개화파(또는 시무개화파)... 급진개화파(또는 변법개화파)... (196)

  • 온건파는 우리의 도덕이나 사상은 그대로 지키되 오늘날 우리가 부족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사상을 받아들였다. ‘동도서기라는 명칭은 1880년대 초 신기선과 윤선학의 글에서 연원... 동도서기사상은 서양의 기술을 가지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면서 중국의 가치와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중체서용, 서양의 기술에 일본의 정신을 합치는 식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다는 화혼양재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6-197)

  • 급진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1897년 결집)...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와 사상까지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중국에서 훗날 청일전쟁 뒤에 나타난 변법사상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비되는 중국의 양무(자강)사상은 온건파의 입장이었다. (197-198)

  •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19세기 중반 서구의 침략이 촉발시킨 일종의 유교적 근본주의운동이다. 척사파는 정학인 유학을 지키고 기타의 종교와 사상을 이단ㆍ사학(邪學)으로 배척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개화파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 나름대로 국내외의 위기를 경고하고 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적잖은 호응을 업고 개화에 저항했다. (198)

  • 강재언... “당시의 위정자나 여론 주도층으로서 유자들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은 구태의연하게 ’()에 대한 ()’의 우위, ‘에 대한 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조선이 소중화인 까닭이라고 자부했다. 조선의 유교의 전통적인 상문천무(尙文賤武)’ 사상이다... 위정척사사상은 ’()가 빠진 붓만의 양이사상이었다... 서양의 충격에 대한 조선의 대응책에서 청이나 일본과 크게 다른 점은 두 차례의 양요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의 근대화 문제가 국가적인 최우선 과제로 제기된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198)

 

위정척사파의 중화주의ㆍ사대주의

  • 송준호... “사대주의는 의미가 다릅니다. 지식인들은 뭐도 모르면서 사대(事大)를 나쁜 뜻으로만 해석을 하는데 사대란 국경이나 민족을 초월한 원리원칙이었습니다. 유교 관념 속에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박했어요. 다시 말하면 성현지도(聖賢之道)에는 국경이 없으며 성현지도가 통하는 곳까지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봤던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199)

  • 조흥윤... “전체적으로 보아 조공은 슬기로운 대외관계인 것으로 드러난다...” (199)

  • 김대중... “세계역사를 객관적으로 전경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미국의 학자는 한국의 사대주의를 대륙의 압력 아래서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슬기로운 지혜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사대를 했지만 내부적으로 특히 국민 대중은 자기의 주체성을 튼튼히 유지했습니다... 중국문명의 월등한 영향 속에서도 문화 전반의 뚜렷한 자기 특색을 보존해왔습니다... 경제면에서는 저 유명한 화교의 침투와 지배를 완전히 봉쇄하였습니다...” (199-200)

  • 이상익은 중화주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볼 걸 제안... ‘패도적 중화주의’, ‘왕도적 중화주의’... 위정척사파가 추구한 중화주의는 왕도적 중화주의였다... 위정척사파가 추구한 사대는 존청사대가 아닌 존명사대였다... ‘유학(주자학)의 보편적 도덕의 논리에 입각하여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에 저항했던 것... (200)

  • 이상익... “왕도적 중화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 도덕원리를 각국이 공유하자는 것일 뿐... 세계 각국이 보편적 도덕원리를 공유하면서도 자신의 고유문화를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 ‘유학ㆍ주자학은 각국의 자주독립과 세계평화를 양립시킬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

 

위정척사파의 시대착오성

  • 김영환... “조선과 청의 경우 1636년에 힘의 우열을 확인한 후 정치적 사대가 성립하였다가 북학파에 이르러 문화적 우월 관계마저 현실적으로 인정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오늘날에도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미국의 패권 관철을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더 많다. 만국공법으로 포장하든 예나 의리의 질서로 포장하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치의 현실은 큰 차이가 없다. 위정척사파가 중화주의적 세계상의 보편성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한 만국공법체제가 중화체제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위정척사파는 지역적 인종적인 중화사상의 편협성은 물론이고 이를 기반으로 서구 문물을 단순히 오랑캐 문물이라 본 것이다. 시대착오라는 지적도 새삼스러운 것이다... 만국공법을 내세우나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체제와, 사대를 예로 미화했던 중화주의의 천자체제는 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유학은 존왕양이란 정치적 과제에 이념적 문화적 색채를 덧칠해놓은 것이다.” (201-202)

 

문명개화론 대 동도서기론

  • 주진오... 민씨 정권은 흥선대원군이나 척사론자들과 달리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개화당이었으며 친청수구파라는 기존의 해석은 지나친 평가라고 주장... 1884년 정변은 문명개화론자와 동도서기론자의 갈등이었다며 동도서기론은 개화사상의 범주에 넣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 둘은 중국에 대한 이해와 관계에 대한 관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 (202-203)

  • 동도서기론자들은 중국의 중체서용론과 양무운동을 조선 근대화의 지표로 삼았고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 또는 확대시키는 것이 열강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문명개화론을 근대화의 지표로 삼으려고 하였다.” (203)

 

2000년대의 위정척사파 논쟁

  • 이상익... “위정척사론의 기본 논리는 한말 외세에 대한 다양한 대응방식의 하나라고 하지만 그 수에 있어서는 압도적 다수이며 전국적 규모였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500년간 키워온 사기(士氣)의 집합체이며 민족정기의 확산현상이기 때문이다.” (203-204)

  • 강만길... “(위정척사론은) 본질적으로 중세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근대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했던 사상... 국가체제의 근대적인 개혁문제에 관해서는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근대 초기의 민족주의는 어디까지나 부르주아적 개념이며 척사위정론은 부르주아 이전의 사상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204)

  • 위정척사동도서기라는 말만 쓰지 않는다 뿐이지 그 개념의 기본 갈등구조는 오늘날에도 대외관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쟁점이다. 우리가 개화기에 나타난 그런 갈등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각 진영의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기보다는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해 고민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 진영의 내부적 이해관계를 감추거나 외면하지 말고 그걸 논의의 주제로 삼아 승자 독식주의를 견제하는 장치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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