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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근대사 산책 1] 제6장 :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2)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by [수호천사]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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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6장 :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2)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일본의 국민적 영웅

  • 후쿠자와... 오사카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난학과 영학을 배웠고 에도에 진출하여 막부 관료가 되었으며 세 차례의 구미견문을 통해 근대문명을 체득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게이오 의숙을 창설하는 등 계몽활동을 벌였고 시사신보를 통해 일본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도 적극 발언했다. (213)

  • 일본의 최고액 지폐인 만 엔권에 등장... 최고의 찬사는 조선인에게서 나옴...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리셨다고 했다. (213)

  • 1883년 김옥균의 주선으로 약 60명의 유학생, 1894년에는 조선 정부 위탁 유학생으로 약 200명이 게이오의숙에서 교육을 받았다... 후쿠자와의 저술을 조선 개화파들이 필독서로 삼았다... (213-214)

  • 후쿠자와 1860, 1862, 1867년 유럽과 미국 등을 다녀와서 1866~1869년에 서양사정을 발간... 일본인들에게 서양에 대한 지식을 심어주는 데에 크게 기여... (214)

  • 문명론의 개략(1875)... 양이론자나 부분적 개방론자의 비난을 무릅쓰고 단연코 서양의 문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 “일본에는 정부만 있고 아직 국민은 없다국민의 창출에 전력을 쏟았다. (215)

 

『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의 개략』

  • 1872~1876년까지 17권의 소책자로 간행된 학문의 권장... 한승동은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던 그가 그토록 학문을 권장한 것은 학문, 곧 지식을 신분상승의 강력하고도 유일한 무기로 인식한 개인적 동기와 함께 결국 근대 지식의 체현자였던 서양(유럽)을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모방함으로써 근대의 지진아 일본을 단번에 기린아로 바꾸겠다는 욕망과 결합돼 있었다. 후쿠자와에게 학문(서양 지식)은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인식지평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서양 모방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 정당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학문의 권장, 서양 근대에 대한 저항이나 대적ㆍ극복과는 애초부터 길을 달리했으며 진정한 자아나 주체 확립과도 인연이 없었다. 철저한 서양 굴종과 숭배와 수용이 아시아에 대한 굴종과 숭배, 일방적 수용 강요로 이어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후쿠자와 후예들은 서양 숭배자의 숭배자였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굴절된 식민지 군상이었다.” (215-216)

  • 정명환... 문명론의 개략... “문명론의 제국주의적 편향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 것이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였다. 후쿠자와는 그 승전보에 접하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 크게 기뻐했고 그후 한일합방으로 향해 가는 일본의 더 노골적인 책동에도 매우 동조적이었다... 만 엔권의 후쿠자와의 초상... 문명의 본뜻을 밝힌 지성인의 모습으로보다는, 제국주의의 과거를 정당화하기까지 하려는 끈질긴 국가주의적 발상이 배후에 깔려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다...” (216)

 

일본의 문명화=서양화=반(反)유교

  • 후쿠자와는 조선의 문명에 대해 완고하고 고루함’, ‘고루하고 편협함’, ‘의심 많음’, ‘구태의연함’, ‘겁 많고 게으름’, ‘잔혹하고 염치를 모름’, ‘비굴함’, ‘잔인함등으로 묘사했다. (217)

  • 박홍규... “후쿠자와는 당시 대두된 아시아 연대론을 공상이라고 일축하고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보았으며 문명화를 위해 타국의 실권을 장악하는 것은 내정간섭이 아니라고 하고 특히 조선에 대한 무력행사는 조선인이 연약 무염치하기 때문이라는 등 갖은 멸시의 말을 퍼붓고 그 책임을 조선인에게 돌렸다. 심지어 조선은 나라도 아니고 조선인은 소ㆍ말ㆍ돼지ㆍ개와 다름이 없으며 사지가 마비되어 자동능력이 없는 병신이고 부패한 유학자의 소굴이며 국민은 노예라고 하는 등 갖은 악담을 퍼부었다. 그는 김옥균 등 개화파를 가르쳐 친일파로 만들어 일본의 침략을 쉽게 했고 청일전쟁 때는 수구파인 대원군과도 결탁하는 등 조선을 패망시키는 데 그 어느 파벌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한국에서는 조선 근대화를 지원한 은인으로 모신다니 기가 차다.” (217)

  • 일본인들은 후쿠자와가 봉건적 문벌제도를 철폐 대상 제1순위로 삼아 투쟁을 벌인 걸 높이 평가한다... 그는 유교가 아시아 특히 중국과 조선을 발전 없는 사회로 전락시킨 원흉으로 인식하고 일본의 문명화=서양화=()유교의 등식을 역설했다. 정일성은 후쿠자와가 유교비판에 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했다. (218)

 

후쿠자와의 조선관

  • 1875년엔 정한론을 반대... “아시아 국가 중에 하나의 소야만국이고 그 문명은 우리 일본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이 나라와 무역을 해도 이익이 없고 이 나라와 통신해도 이익이 없으며 그 학문은 취할 것이 없으며 나아가 자청하여 우리의 속국이 되겠다고 하여도 그것은 크게 기뻐할 일이 아니다.” (218)

  • 1881년부터 이른바 유도론을 펴게 된다... 조선 개화파를 이용해 조선을 근대화시킴으로써 일본이 이용해먹을 수 있는 가치를 높이자... (218)

  • 양현혜... “조선을 멸시하면서 일본의 방파제로 간주하기 위해 유도’, ‘탈아’, ‘협박을 정당화하는 후쿠자와의 논리는 근대 일본인의 사상 내지 의식의 중요한 일면을 대표하는 것이었다고 평가...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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