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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한국근대사 산책 1] 제6장 :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4) 일본 시찰단 파견과 아시아주의

by [수호천사]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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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제6장 :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4) 일본 시찰단 파견과 아시아주의

 

위정척사파 몰래 떠난 시찰단

  • 조선책략... 중국의 의도... 조선 정부는 그 의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화정책을 추진... 1881년 초 통리기무아문(오늘날 외무부)을 설치하고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고 일본에 조사(관원) 시찰단을 파견... (228)

  • 통리기무아문의 설치와 더불어 김보현ㆍ민겸호ㆍ조영하ㆍ김홍집 등과 함께 21세의 민영익이 당상(堂上)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민영익은 개화정책 추진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228)

  • 조사 시찰단이 일본으로 파견... 조준영(1833-1886)ㆍ홍영식(1855-1884)ㆍ박정양(1841-1904)ㆍ어윤중(1848-1896) 등 열두 명의 조사가 각각 다섯 명 내외의 수원을 대동하는 등 총 61명으로 구성... 비밀리에 민정시찰 암행어사라는 명목으로 부산에 집결... 극비리에 부산을 떠나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 (229)

  • 시찰단 파견은 이동인의 노력이 크게 작용... 이동인은 군함 구입 임무를 띠고 시찰단과 동행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 출발 직전에 왕궁에 들어가다가 행방불명되었다. (229)

  • 이동인... 양이론자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 김홍집ㆍ이조연 등의 작용으로 암살되었을 가능성 제시(이현희)... 229)

  • 임해봉... “이동인을 개화사상의 선두주자로서 선각자라고 추켜세우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경향... 그러나 필자로서는 그를 일본의 조선침략 세력이 부하뇌동한 전형적인 친일인물로 평가한다” (230)

  • 18819월 영선사가 청에 파견... 김윤식을 단장으로 함... 임오군란 발생, 재정 빈곤 등의 이유로 1년 만에 돌아오고 말았지만 18833월 한국 최초의 근대 병기공장인 기기창을 설립하는 데에 기여... (230-231)

 

개화파와 후쿠자와의 만남

  • 일본 시찰단... ‘신사유람단’... 일본 징병제(1872년부터 실시)에 깊은 인상을 받음... 어윤중은 귀국 후 고종에게 국민개병제 건의... 신문에 눈을 뜨게 됨...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 유길준... 게의오의숙에 입학... 유길준 이외에 유정수(게의오의숙), 윤치호(동인사), 김양한(조선소)도 일본에 남아 유학생이 됨... (231)

  • 유길준은 게의오의숙의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후쿠자와가 시사신보(18823우월 1~ 19361225)를 창간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232)

  • 시사신보(지지신보)... 창간 이후 조선과 교제를 논함(1882311)이라는 사설을 필두로 하여 10개월간 약 25편에 달하는 조선관계 사설을 발표하면서 조선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32)

 

흥아회의 아시아주의

  • 시찰단... 1881622일 신문사 견학하고 정치단체인 흥아회(興亞會) 주최 환영회에 참석... 18831월에 아세아회로 이름을 바꾼 흥아회는 1880310일 일본의 학자, 군인, 정치인들이 일본 천황의 지원을 받아 만든 어용단체였다. 이들이 내세운 아시아주의는 일본을 맹주로 한 아시아라는 구도였다. (233)

  • 188112월 김옥균이 은밀한 왕명을 받고 서광범, 강위, 변수, 정병하 등 10여 명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도 김옥균은 이동인의 주선으로 후쿠자와를 만나 의기투합했으며 흥아회의 토론모임에도 참석했다. 흥아회는 김옥균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 토론회에서 김옥균은 자신의 평생 신조가 된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발표했다. 조선ㆍ일본ㆍ청 세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면서 연합해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233)

  • 삼화주의... 아시아주의...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친일 논리의 지주가 되었다. (233)

  • 개화기 시절 아시아주의엔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가 미친 영향이 컸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김홍집은 고종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유럽인에 대항하는 동아시아 삼국연합을 위한 흥아회의 노력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1882년 김옥균도 일본 여행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아시아주의 의견을 제출했다. 김옥균은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되고 나면 조선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훗날 한성순보26(18846_엔 일본인 흥아회 멤버가 쓴 글이 실렸다. 유럽 침략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한 글이었다. (234)

  • 아시아주의의 망령... 개화기를 넘어 일제강점시기에도 내내 출몰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친일세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최대 논리도 바로 이것이었다. 중요한 건 그 어떤 주의이건 그걸 주도하거나 적어도 능동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 없을 때엔 현실도피의 명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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