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정성한 (2008). 한석진 목사의 목회 지도력에 관한 연구. 신학과 목회, 30. 79-102.
I. 서론
-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진단... 위기의 원인이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력에 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한국교회 장로교의 첫 7인 목사들의 지도력을 검토하여 교훈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기획... (79-80)
- 채필근 목사가 1971년에 편집한 『한국기독교개척자 한석진 목사와 그 시대』(대한기독교서회)... 백낙준, 한경직, 김우현 목사의 증언... (80)
- 한국교회사가 이덕주... <나라의 독립 교회의 독립>... 채필근의 책의 내용이 핵심뼈대... (80)
II. 한석진 목사의 초기 생애
- 1868년 9월 6일 평안북도 의주읍 동부동에서 한사운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한석진은 어떻게 보면 서양종교인 기독교에 가장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는 시기를 살았다. (81-82)
- 한석진이 1876년부터 한문을 수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는 그의 고향 의주의 청년 상인들이 만주를 오고가며 장사를 하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목사를 만나 그들의 어학선생 노릇을 하며 성서 번역을 돕기 시작하던 해였고, 이후 1879년에는 그 의주 청년들 중 만주에서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백홍준과 이응찬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국인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82)
- 한석진은 1884년 철산 출신 이일심과 결혼하였고, 그해 말에 장남이 출생... (82)
- 1887년 들어 한석진은 당시 의주의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장사를 목적으로 중국과 만주를 오고가기 시작... 초기 자생적 신앙공동체들과의 교제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알아가기 시작... 1891년 한석진은 의주를 방문한 마펫과 게일 목사 일행을 압록 강변에 있는 통군정에서 만나게 된다.... 같은 해 9월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1892년 11월에는 다시 의주를 방문한 마펫 목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자생적 신앙공동체 지도자들을 위해 선교사 공동체가 운영하는 신학반에 들어가 기초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의 길을 걷기 시작... (83)
- 1893년... 서울의 장로교선교회에서는 평양에 새로운 선교지부를 개설하기로 결정... 마펫, 스왈렌, 리 세 선교사를 파송... 한석진은 평양 선교지부 개설에 조사로 동행하였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 초기 토착지도자로서의 헌신적인 길을 걷기 시작... (83-84)
-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황해도 지역으로 피난을 가게 된 한석진 조사는 이때부터 선교사들과 독립적으로 교회개척을 시작... 1907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짐... 1898년 3월에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것을 계기로 평양지역에 독립협회 지회를 설립하는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84)
- 1901년 한국교회에 대한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창설... 1903년부터는 한석진 조사도 조선인 지도자 자격으로 참석하기 시작... 1904년 평양신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학하였고, 1907년 6월에 첫 졸업생이 됨과 동시에 9월 한국장로교 독노회에서 첫 한국인 장로교 목사 7명 중 한명으로 안수를 받음... 독노회 서기가 되어 한국교회의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한석진 목사의 행보가 시작... (84)
III. 한석진 목사의 목회 지도력
1. 구도자(求道者)적 지도력
- 만주에서 형성된 의주청년들 중심의 ‘신앙공동체’의 구도적 삶... 한석진 목사의 삶도 앞선 의주 청년 ‘신앙공동체’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84-85)
- 채필근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유교나 불교에서는 안심입명의 길을 차지 못하고 마음의 고통을 느끼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나이 19세가 되던 해 어떤 날 전부터 백두산에 유명한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 도인을 찾아가려다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추구하는 도는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가르침이다. 결국 기독교에 귀의하여 세례를 받게 되자, 본격적으로 성경을 배우려고 1892년 11월 서울로 향하게 되는데, 서울 선교부에서 마펫 선교사가 운영하는 ‘신학반’에 들어가 참된 구도의 길을 걷기 위한 것이었다. (85)
- 선교사 마펫은 1907년 2월 14일자 <한국에 있어 교육받은 교역자들>이라는 논문에서 최초의 7인 평양신학교 졸업대상자들에 대한 인물평... “한석진 그는 1891년 나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신앙경험이 가장 오래였다. 그는 본래 의주사람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만주등지에 여행한 경험도 가졌다. 내가 그를 의주 통군정 위에서 만났을 때 그는 빛나는 눈으로 나를 지켜보았고 나의 전도하는 말을 듣고는 더욱 호기심이 나서 여러 시간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의 복음에 대한 태도와 열심은 대단한 것이어서 마침내 신약성서를 받아 읽어 보고 진리임을 깨닫고 나에게서 전도지를 얻어 매일 자기 상점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의 신앙은 불길처럼 일어나서 마침내 장사를 중단하고 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성경을 더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도 그 열심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그를 평양에 새 선교부를 설치하는데 보조자로 채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저 유명한 그의 평양에서 겪은 박해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10여년 전에 발간한 <조선 북부지역에 있어서 교회의 발전>이란 적은 책에 자세히 기록되었거니와 그는 실로 사형장에서 그의 신앙의 견고함을 확증하였다.” (86)
- 한석진의 복음과 성서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초기 의주청년들의 구도적 삶과 공통된 양상이었고, 이것이 초기 한국교회의 전통형성에 중요한 요인으로 발전하였다. (86)
2. 희생과 헌신의 지도력
- ‘자생적 신앙공동체’와 ‘선교사 공동체’가 서로 만나게 되는 계기는, 쪽복음을 통해 형성된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일원들에 대한 세례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87)
- 서울의 장로교선교부에서 평양으로 파송 받은 마펫, 스왈렌, 리 세 선교사는 1893년 3월 평양을 방문하여 한석진 조사를 통해 가옥을 한 채 구입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평양주민들과 관가에 알려지면서 큰 저항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에는 샀던 집을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인 1893년 5월, 한석진은 평양 사람들이 외지인에게는 집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한석진은, 부모가 있고, 오랫동안 자신과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의주에서 자신들의 가족을 평양으로 이주시킨 후 자신의 명의로 집을 샀다. 그리고 이 집은 얼마후 평양의 첫 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한석진의 이 작은 집은 널다리골 교회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 널다리골 교회를 뿌리로 평양의 장대현 교회를 비롯하여 남문밖교회, 산정현교회, 서문밖교회, 창동교회 등이 분립해 나갔다. (87-88)
- 1894년 5월 경, 한석진은 평양사람들에게 돌팔매지를 당했고, 관가에 붙들려가 죽도록 매를 맞고 다음날 아침 풀려나기도 했다. (88)
3. 개혁적 지도력
- 개방성은 서구의 문화에 한국사회가 급속히 노출되어 가는 시점에서 그를 두드러진 지도자가 되게 한 요인... 평양신학교 첫 졸업식 사진의 모습... 한경직 목사... “한(석진) 목사님은 벌써 그때에 머리를 깎고 안경을 쓰고 단장을 가지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89)
- 제자이기도 했던 김우현 목사는 한석진 목사가 믿음이란 참된 생명 하나 얻자는 것이므로 제도니 의식이니 계율에 매여서 그 생명이 위축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고 회상한다. (90)
- 양반교회로 유명한 안동교회는 한국에서 남녀 자리 사이의 휘장을 철폐한 첫 교회가 되었다... 신축된 안동교회는 그 출입문도 남녀 구별 없이 하나로 하였다... 이 휘장철폐 문제는 1913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회 총회에 헌의되었으나 조심스럽게 개교회 형편에 따라 하도록 결의될 정도로 당시 한국교회로서는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90)
- 1932년 제1차 총회 헌법개정시 여집사제도 신설을 주장하여 마침내 관철시켰다. (91)
- 한 목사와 당시 지체 높은 양반이었던 박승봉 장로가 어느 가난한 교인 집의 모든 장례절차를 직접 처리한 일... 계층간의 차별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 (91)
4.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는 지도력
- 개혁성과 함께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지도력은 그가 한국사회의 전통적 미풍양속과 서양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전통적인 예배 양식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히 존중... 모든 예배가 칼빈주의 장로교 전통대로 조용하고 엄숙하게 진행... (91)
- 교회를 위해 여러 가지 많은 경비를 쓰면서도 강단에서는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고, 자진하여 교인들이 하나님께 헌금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92)
5. 자주적 지도력
- 한국교회를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교회로 만들려는 자주적 지도력... 한국교회가 서양교회의 축소판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과 선교사들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펫은 한석진을 평양에 새 선교부를 설치하는 일에 자신의 보조자로 채용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한석진은 마펫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라고 표현했다... 그 자신이 스스로 구도의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였기 때문이었던 것... (92-93)
- 믿음의 자주성과 기독교의 토착화를 날카롭게 내세우고 주장... (93)
- ‘국제선교협의회’ 회장 모트가 내한하여 1925년 12월 28일과 29일 양일에 걸쳐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 사이의 연석회의를 개최... “나는 우리나라에 와 있는 선교사들이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의 과거의 공적을 결코 무시하는 바 아니나 지금 그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방법이나 생각하고 있는 바는 도저히 교회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함은 물론 도리어 해독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선교비를 가지고 와서 일하는 것이니 왈가왈부할 필요나 권리가 없다고 할는지 모르나 진심으로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한다면 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새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새로운 선교정책으로 일하게 되는 날에 비로소 우리나라 교회의 발전을 볼 수 있게 되겠다.” 지금의 선교사들은 한국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업신여길 뿐 아니라 이미 성장한 한국교회의 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일갈... (93-94)
- 1900년대 초에 선교사들 사이에 한석진을 가리켜 ‘저 사람은 선교사를 배척하는 사람이니 주의하라’는 말이 빈번하게 오고갔다고 한다. (93)
- 1900년 1월 25일자 마펫의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그가 1899년 선교사 연례회의차 서울에 있을 때, 서울의 몇몇 기독교인(한국인)들이 선교사들과 상관없이 독립총회를 조직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모든 지방 교회들에게 발송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일이 한석진과 관련된 것인지 확인되지 않으나, 이미 이때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선교사들로부터의 독립은 중요한 잇슈였던 것으로 보인다. (93)
- “선교 사업을 성공시키며 가장 효과적으로 하려면 선교사가 한 나라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고 교회가 기초가 서게 되면 그 사업을 원주민에게 맡기고 다른 곳에 가서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 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면 자기가 세운 교회며 학교라는 생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영도권을 행사하려고 하게 되니 이것은 참된 복음 정신에 위반되며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될 뿐이요 조금도 도움이 안된다... 저 선교사들이(장로교 원로급 선교사들을 지칭-필자주) 우리나라에 와서 수고를 많이 하면서 머리들이 희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분들이 우리나라에서 할 일은 다 하셨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셔도 좋을 줄 압니다. 이것이 참으로 한국을 위한 것입니다.”
- 한석진 목사는 마펫에게 말했다. “마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는 유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마목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로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94-95)
- 그가 처음 부임하는 교회는 주로 개척교회이거나 분란중인 교회인 경우가 대부분... 교회가 장전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사임하곤 했다... (95)
- 한국교회가 자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국교회 첫 독립노회나 첫 총회에서 서기를 도맡았는데, 그때마다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밝히고 신경이나 신앙표준 또는 정치제도를 수립하는 일에 적극 개입하였다. (95)
- 백낙준은 그를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터전을 다지고 기초를 쌓아 올린 개척자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 (96)
6. 에큐메니칼 지도력
- 1905년 장ㆍ감 선교부가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결성... 교리적 측면 보다는 정치적 차원에서 1910년에 이르러 사실상 와해... (96)
- 한석진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경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첫 ‘하나의 개신교회’ 설립을 주도하여 성공시키고 돌아왔다. 그가 장로교 독노회에서 짧은 3개월간의 첫 일본선교사로서 파송 받아 있는 동안(1909.10-12) 장로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이 섞여 있는 동경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동경 한인 YMCA 뿐만 아니라, 첫 동경한인교회를 세우고 돌아온 것... (96)
- 에큐메니칼 지도력... 안동교회 재임시 1915년 9월의 경충노회에 “조선장로교회 명칭을 조선기독교회라 변경”하자고 헌의... ‘하나 된 개신교회’의 꿈... (97)
- 제6대 총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1917년, 1905년에 장감 선교사들 사이에 시도되었던 ‘하나 된 개신교회’ 설립 운동이 이제는 한국인 목사와 평신도들을 포함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창설로 바뀌게 되어 그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 1918년 3월 26일 협의회 창설되었을 때 한석진은 ‘교회세력의 연합문제’라는 주제로 강연... 장감연합회는 1924년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확대 개편... 1925년에 부회장, 1926년에 회장으로 피선...(97)
- 한국교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 ‘금강산 기독교수양관’ 건축... (97)
7. 민족의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는 지도력
- 평양 선교부 소속 조사로서 소우물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 전도에 전념하던 시절(1898년), 1896년부터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세력들에 의해 주도되던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 독립협회 관서지부의 회원으로서 평양지회 조직에 책임자였고, 1898년 9월에 독립협회 관서지회 회관을 평양에 설립하는 일을 추진하고,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평양선교부의 마펫은 이 당시의 상황을 미국 북장로교총회에 보고하는데, 그 내용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입해 있는 독립협회와 관련된 정치적 소요로 인해 평양 신자들 중 일부가 얼마간 박해를 받게 되었고, 게다가 정부에서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여 수구파들의 시대로 환원할 기미가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펫의 선교보고서 1899.1.18일자”, 김인수 역,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편지)1890-1904)』, 515... (98)
- 1919년 3ㆍ1운동 당시 한석진 목사는 마산교회를 담임하던 중... 3월 3일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산교회 장로이며 교인들이었다... 당시 1917년 10월에 사별한 부인에 대한 슬픔과 건강악화... 4월에 마산교회를 사임하고 신앙의 후계자인 박정찬 목사(서울 남대문교회 시무중)를 마산교회에 부임토록 하여 그가 미처 끝맺음 하지 못한 일들(예배당 건축)을 마무리하도록 한다. (98)
IV. 결론
- 한석진 목사는 이 민족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를 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었다... 민족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으로 풀어가려 했다면, 교회의 문제는 민족의식으로 풀어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99)
- 교회가 특정인의 사유물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1925년 12월, 모트 초청 간담회에서 행한 선교사 비판 발언... (99)
- 만약 선쇼사들의 조선의 교회를 조선인의 교회로 인식하고 조선인을 위해 섬기는 자세를 끝까지 보였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그런 비판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99)
728x90
반응형
'[기타 자료실] > [논문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기 재일조선인 선교에 대한 재고찰 - 미국 선교단체의 역할을 중심으로” - 이상훈(2017) (0) | 2021.04.16 |
---|---|
“한석진 목사와 일본 선교” - 정성한 (2007) (0) | 2021.04.13 |
“개화기 조선의 간도인식과 정책의 변화” - 하원호(2006) (0) | 2021.04.12 |
“해석된 ‘만주’ - 동양사에서 본 만주의 의미” - 박선영(2019) (0) | 2021.04.12 |
“레온하르트 라가츠와 칼 바르트의 대결” 정권모 (0) | 2021.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