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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2017). 초기 재일조선인 선교에 대한 재고찰. 한국기독교와 역사(47), 269-299.
I. 머리말
- 오윤태의 『재일대한기독교 동경교회칠십이년사』(1980년) (269)
- 1908년부터 1918년까지의 기간... 백남훈의 자서전, 장로회의 독노회 및 총회 회의록... 미국 선교단체들의 회의록... (270)
- 최초의 파견목사 한석진 목사의 파견에 미북장로회 조선 선교부가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 최초의 ‘전도인’ 박영일 장로의 파견과정과 그 시기 검토... 조선 장로회와 감리회의 도쿄 선교활동에 관한 협정... ‘재일조선인 활동위원회’... (271)
II. 최초 시기 전도사 파견에서의 미북장로회의 역할
1. 한석진 파견의 결정과정
- 1906년에 설립된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에서는 총무 김정식의 지도 아래 성경공부와 예배가 이루어짐... 1908년에 『國漢文玉篇』을 발행하기 위해 평양에서 도일하고 있던 정익로 장로와 김정식 및 학생들이 협의... 교회 설립이 결정되어 조선의 장로회에 목사 파견에 대한 요청이 이루어짐... (271)
- 1909년 9월에 개최된 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독노회)에서 한석진 목사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목회활동을 위해 1개월간 파견할 것을 결의... (272)
- 도쿄의 유학생들이 교회 설립을 결정한 1908년경 YMCA 관계자들이 기독교 잡지 지상에서 일본에서의 조선교회 설립이나 조선에서의 목사파견이 필요함을 호소... (272)
- 유일중화기독교청년회(留日中華YMCA)의 간사인 클린턴(J. M. Clinton)... 황성YMCA의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조선인 유학생을 보살필 목사의 필요성을 호소... (272-273)
- 미북장로회 조선선교부... 1909년 2월 ‘조선 밖에 사는 조선인 그리스도인’을 보살피는 방법에 대해 협의ㆍ고안하는 위원으로 마펫과 블레어를 임명... 1909년 7월 3일에 쿤스(Edwin W. Koons)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활동을 담당케 하기 위해서, 1909년 가을에 1개월간 다음해인 1910년 봄에 3개월간 파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집행위원회의 제안이 승인... 같은 해 8월부터 개최되는 동선교부의 연례회까지 기다리기로 함... (273-274)
- 1909년 8월 24일부터 9월 1일까지 개최된 연례회... ‘조선 밖에 사는 조선인 그리스도인’을 보살피는 방법 중의 하나로 조선인 목사 1명의 도쿄 방문이 제안됨... (274)
- 독노회(1909년 9월 3~7일)... 마펫과 길선주에게 그 목사 파견에 소요되는 경비를 감당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 마펫이 선출된 이유는 미북장로회 조선선교부가 도쿄에 조선인 목사를 파견하는 것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 한석진 목사의 도쿄 파견은 미북장로회 조선선교부이 결정이 실현된 것... (275)
2. 박영일 파견과 그 시기
- 클라크의 서술에 의하면... 한석진 목사가 파견된 다음 해 곧 1910년에 다른 인물이 파견되기로 되어 있었지만, YMCA로부터 항의가 있어서 실현되지 않았으며 이후 도쿄 유학생에 대한 활동은 일시 정지상태가 되었다. (275)
- 1910년 9월에 조선의 독노회에서 파견되기로 결정된 사람은 박영일 장로... 1910년 9월 12~14일에 개최된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의 제6회 연례회...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선교가 논의되게 된 경위...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활동 건에 관해서는 미국 남감리회에 위탁한다”는 동의가 제출... 감리회에서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선교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 (276-277)
- 독노회... 평양 서문밖교회의 박영일 장로를 도쿄에 파견하는 것이 결정... 독노회의 전도국회에서 쿤스가 한 제안... 자신이 외국인 목사들에게 모금을 하는 책임을 지겠으니 도쿄에 전도인을 파견하자고 제안한 것이 게기가 되어, 박영일 장로를 파견하자는 움직임이 생겼다. (277)
- 박영일 장로가 1911년 2월 12일에 서울 연동교회에서 도쿄 유학생교회의 현상에 대해 말했던 것... 조선에 되돌아온 박영일 장로는 1911년 3월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지만, 그 후 다시 도쿄에 파견되게 되었다. 1911년 5월 22~23일에 열린 독노회에서 전도인으로 선출된 사람이 박영일 장로... 6월 22일에 평양을 떠났고... 도쿄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했지만 병을 얻어 부득이 조선에 돌아오고 같은 해 10월 17일에 사망... (277-278)
III. 장ㆍ감 공동선교와 각 선교부의 움직임
1. 교파문제의 발생부터 공동선교 시작까지의 경위
- 1910년대 초에 장로회와 감리회라는 소속 교파의 차이에 따라서 양쪽 교파의 유학생들이 각각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되는 형태로 교파문제에 직면... (278-279)
- 백남훈... 1968년 자서전 『나의 일생』에서의 회상... (279)
- 김영섭은 1911년에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하고 배운 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배웠다. 또한 조선에 돌아와서 감리회의 목사가 된 김영섭은 그 이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하에 있어서 재일조선인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위원회의 위원 등도 역임했다. (279)
- 임종순 장로의 파견... 1912년 6월... 감리회와 장로회 두 교회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던 상황에 대한 중요한 증언... 1913년 5월 클라크의 글... (280 )
- 박영일 장로가 조선에 돌아온 후부터 임종순 장로가 부임되기 전까지의 전도자 공백기간, 즉 1911년 8월 말 내지는 9월 초 이후부터 1912년 6월까지의 기간에 미국 남감리회의 크램(Willard G. Cram)과 저다인(Joseph L. Gerdine)이 도쿄에 체류하고 조선인 유학생들의 목회를 담당했다는 것... 이 시기에는 미남감리회 뿐만 아니라 미북감리회 측의 조선예수교감리회연회의 목사들도 도쿄에서 유학생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281)
- 조선에서 도쿄를 방문한 감리회 관계자들이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감리회 독자적인 예배를 가지자는 분위기가 높아져서 교파문제가 생겼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도쿄의 학생교회가 이 문제에 직면한 시기에 대해서는 1911년의 여름이었다고 본다... 1911년 9월 17~22일 일정으로 개최된 장로회의 제5회 독노회에서는 브루엔의 지도로 장로회식 예배를 그만두도록 한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권을 가진 길선주, 언더우드, 브루엔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해서 감리회 측과 교섭을 하도록 한 것... (282-283)
- 감리회 관계자들이 도쿄를 방문해서 유학생들에게 세례를 준 것과 교파문제가 발생한 것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 (283)
2. 감리회와의 교섭위원회 조직에 있어서 미북장로회의 역할
- 브루엔을 유학생에게 보낸 단체는 전도국이 아니라 미북장로회 조선선교부... 브루엔의 보고를 받은 집행위원회(위원장 언더우드)는 1911년 9월 3~13일의 일정으로 조선선교부의 연례회에서 제안을 함... 연례회가 끝나고 개회된 독노회에서는 길선주ㆍ언더우드ㆍ브루엔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하고 감리회와 교섭할 것이 전도국에 의해 보고된 것... 미북장로회 조선선교부의 결정을 받아 독노회 전도국과 협의 속에서 감리회와의 교섭을 위한 위원회가 조직됨... (284-285)
- 미북장로회 소속의 언더우드... 서울에 기독대학을 설립하는 일을 추진중... 대학설립을 향한 운동은 조선의 감리회와의 협력 속에서 추진하는 ‘연합대학’ 구상으로 진행... 남북의 감리회는 양쪽 모두 서울에 대학을 세우는 것을 강하게 지지... 감리회와의 교섭 창구 역할을 맡은 인물로는 언더우드가 최적의 사람... (285-286)
3. 장ㆍ감 사이의 협정 체결
- 도쿄의 유학생에 대한 선교활동을 공동으로 하게 됨에 있어서 그 단서가 된 것이 감리회 선교부들의 제안... “두 개의 감리회 선교부가 [도쿄에서의] 활동을 연합으로 하고 그 계획 단계와 비용분담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1912년 8월)... (286)
- 미북장로회 조선선교부 집행위원회의 제안... “본 선교부에 의한 감독 아래”... 장로회 측은 도쿄의 유학생에 대한 선교활동이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지도와 통괄 아래에서 진행해 간다는 목표를 가지고 감리회와 교섭을 시작했지만, 감리회 측은 그렇지 않고 재정적 부담의 공유와 계획단계에서부터의 참여를 요청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이, 도쿄 선교활동에서 동등한 참여를 요구한 것... (287)
- 장로회와 감리회는 도쿄의 선교활동을 시작하는 것에 즈음하여 7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진 협정을 맺음... 도쿄에서의 선교활동을 짊어지는 특별위원회의 명칭은 “재일조선인 활동위원회”로 결정... 1912년이 되어 다시 ‘연합교회’로서 재출발... (287-288)
VI. 활동위원회 아래에서의 재일조선인 선교
1.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에 대한 선교활동의 위임안
- 장로회 측 3명과 감리회 측 3명으로 구성...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에 위임하는 것을 감리회 측이 1916년에 인정하지 않음... 총대 인원수에서 장로회가 압도적으로 다수를 구성... 도쿄 선교활동에 대한 대등한 참여에서 장로회 중심으로 되어가는 것을 우려한 것이 반대 이유... (289-290)
2. 임종순의 소환과 주공삼의 파견
- 협정이 체결된 후에 임종순은 소환... 감리회 측이 목사를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 1912년 10월 경 임종순 장로는 조선에 돌아옴... (291)
- 임종순 뒤를 이어 도쿄에 파견된 사람은 장로회의 주공삼 목사... 주공삼은 1911년 8월에 ‘내지’(內地) 그리스도인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경성YMCA가 주최한 ‘조선목사시찰단’의 한명으로서 오사카와 도쿄 등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이외에 이 시찰단에 한석진 목사나 후에 도쿄에 파견된 오기선 목사와 이여한 목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291)
- 주공삼 이후... 오기선(1914년 8월~1916년 9월), 이여한(1916년 9월~1917년 6월), 임종순(1917년 11월~1921년 7월)... 292)
3. 도쿄 이외 지역에서의 선교활동
- 1917년경 이여한 목사가 요코하마에서 선교활동을 하여 약 20명의 그리스도인 그룹이 존재... 자료적으로는 1912년에 이미 요코하마에 그리스도인 그룹이 존재... 임종순 장로가 재임중이던 여름에 요코하마 및 기타 지역에서 그리스도인 그룹을 발견했다고 서술... 1914년 6월의 「예수교회보」 기사... (292-293)
- 주공삼 목사의 후임으로 감리회의 오기선 목사... 300명이나 되는 공장노동자들이 있는 오사카와 교토에 자신과 다른 또 한 명의 목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 활동위원회는 클라크를 파견... (293-294)
4. 클라크의 계속적인 참여
- 계속적으로 재일조선인 선교에 관련한 사람은 C. A. 클라크... (294)
V. 맺음말
- 최초 시기의 전도자(한석진과 박영일) 파견과정에서 미국 선교단체, 특히 미북장로회 조선선교부 및 그 소속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상징적 인물이 C. A. 클라크... (295)
- 감리회의 유학생들이 별개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조선에서 이미 감리회의 회원이었던 유학생들... (295)
- 요코하마에서의 조선인 그리스도인 그룹이 1912년에는 존재... 1914년에는 20명 정도 존재... 학생이 아니라 상인이 중심... (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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